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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가

ㅇㅇ(123.141) 2015.02.28 09:08:38
조회 103 추천 2 댓글 1

저는 사실 문필가들을 경시하는 편입니다. 물론 재능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저에 비하면 특출난 사람들이지만, 직업적 전문성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진입장벽의 측면을 놓고 보면 문학만큼 허술하고 빈약한 분야가 없으니까요. 출판 시장에서의 경쟁은 있을지언정 작업 과정에서 누군가와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인지부하도 거의 받지 않고, 많은 정보와 지식들과 데이터를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게끔 빠릿빠릿하게 암기하고 있어야하는 것도 아니고, 숱한 오판에서 나오는 졸문들도 여유있게 수정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문필가들 스스로 PT를 받는 것처럼 글쓰기에 대한 전문적이고 체계화된 표준 트레이닝을 소화하는 것도 아니고...예컨대 0.001초 단위로 주어진 상황에서 최적합한 행동을 막힘없이 취해내지 않으면 그네들의 무대에서 생존할 수가 없는 프로 스포츠 선수들이라든가, 100수 200수를 미리 내다볼 수 있어서 발로 두어도 아마추어들에게 질래야 질 수가 없는 프로 바둑기사들, 한 음 한 음의 소리가 그 자체로 미적 대상이 되어야 하며 약간의 음이탈에도 명망이 곤두박질 치곤 하는 뮤지션들, 직업적 전문성의 밀도가 가혹할 정도라는 것이 잘 알려진 의사들이나 법관들, 혹은 이렇게 거창하지 않을지언정 간단한 작업 하나에도 의외로 창조적인 노하우와 유연한 판단을 요하며 경력에 따른 숙련도 차이가 명확한 육체 노동자들 등등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의 솜씨에 비하면 프로 문학인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야들은 아무리 해당 분야 내에서 말석에 위치하는 이라고 하더라도 문외한이 그가 가진 역량의 미미한 편린이나마 직접 접할 경우 경도될 수밖에 없는 경이적인 정교함을 보여주는 반면, 문학의 경우 명성이 드높은 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범인들의 문장 구성력으로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인지 의문스러울 따름인 시시한 작품을 써내는 경우가 흔하죠. 일전에 테리 이글턴이 '정치철학자가 쓴 소설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소설가가 쓴 정치철학서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정말 깊이 공감이 가더군요.

소설에서는 재기발랄하게 문재를 뽐내던 이가 논픽션이나 사설에서 격 떨어지는 태문을 쓰곤 하며, 인터뷰 같은 자리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눌변가로 전락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경우들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테고요. 물론 이에 대해 말과 글이 다르다고 둘러댈 수 있지만, 사실 구어와 문어가 다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지요. 구어는 대화 상대방을 반드시 납득시켜야 한다는 강한 제약이 있으며 문장을 구성하는 데에 지체가 없어야 하고 빠른 속도로 처리해야 반면, 문어는 모든 상대를 납득할 수 없는 한정적인 텍스트를 썼다고 하더라도 '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내 글을 읽어줄 불특정한 일부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쓴 것이다'라는 식으로 핑계를 댈 수 있으며, 문장을 구성하는 데에 한참 숙고해도 되까요. 즉, 구어는 상대방의 이해에 기대하고 의존할 수 없으며 자신이 스스로 자구적인 발화를 신속하게 해야하는 반면, 문어의 경우에는 나태함과 더불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오만함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구어와 문어가 다른 이유는 구어 쪽이 훨씬 난이도가 높기 때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교양 있는 지식인들의 언어 구사력은 상당 부분 거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발화는 대개 지식인 세계 특유의 언어관행을 습득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휘와 용법으로 구성되어 있곤하죠. 즉, 지식인 카르텔의 컨센서스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를 두고 땅 짚고 헤엄치기며 온실적인 발화라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상대의 이해 수준이 높아야만, 더불어 상대방이 의사소통에 쓰이는 약호를 알고 있어야만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자신의 언어를 남에게 전달하는 데에 있어 통역이 필요한 이는 결코 좋은 발화자라고 볼 수 없겠지요. 지식인 집단 내에서는 '현명한 이와 대화하는 것은 즐겁다'라는 식으로 정교한 논변을 해내는 이가 해당 집단 밖의 일상생활에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곤 하는 것 역시도 그래서일 테고..

그러나 이러한 경시적인 관점에서도 예외가 될 수 있는 문필가들이 드물게 있을 것이며, 만약 그런 문필가들의 명단을 작성한다고 할 때, 그 누가 작성한다고 하더라도 살만 루슈디는 최상단에 위치하는 이 중 하나겠지요. 이 정도면 그에게 보내는 경의로서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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