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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모바일에서 작성

man(115.139) 2015.04.01 17:32:01
조회 1164 추천 0 댓글 0

때는 바야흐로 중학교 3학년, 그것도 본인의 생일이었던 날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반 아이들은 나의 생일을 몰랐고, ‘그래 난 음력을 쇠니까 너희가 내 생신을 모르는 건 당연해. 멍청이들’ 하면서 눈물을 두어 방울 흘렸던 걸로 기억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마자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뚝뚝 떨어지는 콧물을 화장실에 가서 씻고 와야 했고, 덕분에 눈물도 씻어내릴 수 있었다. 됐어, 자연스러웠어.

늘 그랬던 것처럼 교실 뒤편은 3학년 5반의 지단과 호나우딩요가 드리블 대결을 펼치고 있었고 그 옆에서 피구와 베컴과 라울과 앙리와 셰브첸코가 응원을 하고 있었다. 난 그들 사이를 허재처럼 뚫고 들어가 왼손은 거들 뿐이라며 또 다시 콧물을 훔치고 있었고 늘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랬던 것과는 다르게 내 책상 위에 작은 쇼핑백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이건 뭐지. 안 받던 거 받으니까 상처 받을 것 같은 이 느낌 뭐지. 아니… 아니야, 그래 아직 죽지 않았어. 6학년 때를 기억해. 60권짜리 만화 삼국지 기부해서 반장을 따내고 인기를 돈으로 샀던 그때를 기억해! 그때 김 집사님… 아니 김진수 선생님 아래서 도원결의를 맺었던 중탑초의 동지들이 아직 날 잊지 않았구나!’

했던 것도 잠시 상탑초 출신 한 여자아이가 두고 간 것이라고 밝혀지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쇼핑백을 열어보니 두꺼운 책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상실의 시대》

아, 나 책 싫어하는데. 난 약간 한스헤어 볼륨매직 상품권 이런 거 좋아하는데. 그래도 누가 준 건진 알아야 되니까 책을 한번 뒤적여볼까 하는데 쪽지가 하나 있었다.

“ㅇㅇ아, 생일 축하해. 이 책 재밌어. 잘 한번 읽어봐. - 클라라(가명) -”

클라라라면… 안 돼. 넌 내 친구의 여자 친구잖아.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난 너의 친구를 사랑하고 있잖아. 그리고 1학년 때 니가 나보고 병신 같다고 했으면서 왜 3학년 땐 선물 줘? 그리고 1학년 때 나 니네 반에서 너한테 추근대다가 니네 반 짱한테 싸대기 맞고, 나 지금 걔랑 어색해. 응, 맞아. 일방적으로 어색해. 어쨌든 이 책이 뭐길래 잘 읽어보라는거야. 한번 읽어나 볼까?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어? 어어? 어어어? 몸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난 아직 야동도 본 적 없고, 애기도 어떻게 낳는 건지 모르는데? 어? 잠깐만 이거 막 남자랑 여자랑 막, 안 되는데 이거?

내 친구의 여자인 동시에 내 사랑의 친구인 그 여자는 내가 콧물을 닦으러 간 사이 그녀 역시 지단과 호나우딩요를 가볍게 제치고 내 자리로 와서 책상 위에다가 야설을 생일 선물이라며 두고 갔다. 아차, 작가가 일본인이다. 아차차, 일본인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방적이니까. 근데 왜 나보고 잘 읽어 보라고 한 거지? 이거 일종의 메시진가. 뭐 내가 수컷의 냄새가 난다는 말을 가끔 들어본 적은 있었다. 우리 반 여짱애랑 우리 반 얼짱애랑 나랑 셋이 방송실에 있는데 여짱애가 “우리 더콰이엇(가명)은 진짜 너무 잘생겼어.” 그러길래 내가 여짱애를 슬그머니 쳐다봤다.

그러니 그 여짱이는 내게 “뭐, ㅇㅇ이는 뭐, 그, 뭐, 그, 뭐, 어, 그, 어, 남자답게 생겼어”라고 했다.

뭐 어쨌든 《상실의 시대》는 그렇게 내 손으로 들어왔다. 젊은 날 슬프고 감미롭고 황홀한 사랑 이야기라는데, 잘 모르겠고, 황홀한 이야기 정도는 알아먹겠더랬다. ‘젊은 날’ ‘슬프고’ ‘감미로운’ ‘사랑’ 이 네 단어를 책에서 발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온 것 같고, 결국 아직까지도 내 책꽂이 1번은 《상실의 시대》다.

원제가 《상실의 시대》가 아니기에 요즘에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제 그대로 가는 추세이지만 늘 내겐 《상실의 시대》이며, 또 그 제목을 누가 지었는지 가서 개인적으로 상이라도 하나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난 그렇게 사랑에 있어 ‘상실’을 겪을 때마다 이 책을 집어든다. 책이 너덜너덜해진 걸 보면 보통 ‘상실’당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냥 내 인생이 ‘상실의 시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책을 보며 생각한다. 그래, 이런 게 사랑인 거야.

“정말 또 만나러 와줄 거지?”
“올 거야.”
“자기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데도?”

나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중략)

요양원에서 하루 이틀 하는 나오코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데도 주인공 와타나베는 찾아오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미도리라는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갈등하고, 결국엔 나오코를 돌보던 레이코와도 사랑을 나누는데… 뭐지, 이상한 놈이다. 어쨌든 책은 늘 상실하고 상심하는 이 젊은이처럼, 그리고 나처럼, 그리고 또 당신처럼 젊은 날의 사랑은 그렇게 슬프고 감미롭고 황홀한 것이다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다.

《상실의 시대》를 또 한 번 읽고 있다. 이번에도 뭔가 좀 다른 느낌이 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 중학생에겐 한 권의 야설이었고, 성인이 된 한 남자에겐 한 권의 지침서 같은 책이 되어준 《상실의 시대》와 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님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가을이라서 조금은 쓸쓸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는데 다시 읽어보니 쓸쓸한 책이 아니라 쓸쓸한 나에 대해서 써놓은 것 같아 쓸쓸하다. 그리고 그렇게 쓸쓸한 와중에 문득 클라라 생각이 난다. 찰나의 순간 내게 다가와 한 권의 꽃을 선물하고 간 당신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알고 보니까, 너 내가 아는 조감독 형 후배라며? 사진 봤어. 그땐 예뻤는데. 괜찮아. 우리 힘내자.

아무튼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갈수록 상실하는 것, 상실되는 것들이 하나씩 생기는 모양이다. 나에게는 어떤 감정의 알 수 없는 형태일 수도 있겠고, 클라라는 뭐, 외모를 상실한 것 같다. 뭐 괜찮다.

다 잘될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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