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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아레나 인터뷰 중모바일에서 작성

김코쿤(39.7) 2015.04.28 04:41:44
조회 447 추천 2 댓글 9

선생님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아름다움이 뭐예요? 어떤 시, 어떤 소설, 어떤 영화, 어떤 미술이 아름다운 거예요? 
일본 중세에 ‘노[能]’의 미학자로 제아미(世阿彌)라는 분이 있어요. 이 분이 아름다움을 아홉 단계로 나눴어요. 그 가운데 3등이 뭐냐면, 하얀 은그릇에 흰 눈이 소복이 담긴 상태예요[銀玩裏盛雪]. 얼마나 예쁘겠어요? 그런데 3등밖에 안 돼요. 

다음은 눈이 천개의 산을 덮었는데, 하나의 봉우리에만 안 덮여 있어요[雪覆千山 爲其?高峯不白]. 이것도 너무 아름답지요. 하지만 2등일 뿐이에요. 1등은 뭘까요? ‘신라의 밤중에 해가 빛난다[新羅夜半日頭明]’라고 했어요. 한밤에 해가 빛나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언어도단의 세계예요. 당시 중국에서 신라는 아주 먼 나라로 생각되었어요.저는 셋 다 일등이에요. 그런데 ‘신라의 밤중에 해가 빛난다’라는 말이 제일 멋진 거 같아요. 
3등은 왜 예쁠까요? 동일성이지요. 흰 눈에 흰 그릇이니 동일성이잖아요. 2등은 차별성이에요. 모든 봉우리가 하얀데 봉우리 하나만 까맣게 드러나니 말이에요. 어떻든 3등과 2등, 동일성과 차별성은 현세에 있는 것들이에요. 그렇지만 ‘신라의 밤중에 해가 빛난다’는 것은 현실 경계를 넘어간 거예요. 

다시 말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아름다움이지요. 지금 제가 쓰는 글은 몇 등 정도 되겠어요? 5, 60등 정도 되려나? 글은 한 편 쓰나 천 편 쓰나 차이가 없어요. 한 편, 한 편에 천 편의 수준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한 편이 수준미달이면 아무것도 안 쓴 거나 마찬가지예요.너무 무서운 말이에요. 정신의 절정에 이른다는 것, 그게 시이고, 예술인 거죠? 
인간정신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분야가 3가지 있다고 해요. 그게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글쎄요. 
시와 수학과 음악이 그렇다 해요. 사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세 가지 모두 패턴을 추구하는 것이거든요. 이 책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말들을 모아 편집한 거예요. 지금까지 해 온 공부의 귀결이라 할 수 있지요. <꽃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은 제아미의 ‘지화도(至花道)’를 제 나름대로 번역한 거예요. 거기 19쪽, 제일 밑에 있는 문장을 보세요.‘수학은 패턴의 과학이다. 수학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수학뿐만 아니라, 시도 음악도 패턴을 찾아내고, 그 패턴을 반복 변주하는 것이지요. 가령 색맹 검사할 때 자세히 보면 완두콩 쏟아 놓은 것 같은 데서, 숫자 하나가 탁 튀어나오잖아요. 시인이 하는 일도 일상생활 속에 숨겨진 패턴을 찾아내는 거라 할 수 있어요.‘수학자의 패턴은 화가나 시인의 패턴처럼 아름다워야 한다.’ 
이건 하디라는 영국 수학자의 말인데, 여기서는 음악 대신 회화(繪?)가 나오네요. 시, 수학, 음악, 회화 모두 패턴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는 거예요. 가령 어떤 수학자가 문제를 풀 때, 패턴은 아름다운데 답이 틀리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그래도 결국엔 아름다운 것이 맞는 답으로 밝혀진대요. 

수학하는 분들은 칠판에다 공식 같은 것을 써 놓고 넋을 잃고 감탄한다고 해요. 그런 공식 중의 하나가 오일러의 공식이라 해요. 여기에는 자연 상수 e, 허수 i, 무리수 π, 그리고 여러 수의 기본인 0과 1이 들어 있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뭘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 하지요.‘관념들은 색채나 단어들처럼 조화로운 방식으로 맞아 떨어져야 한다. 제일의 기초는 아름다움이다. 추한 수학에는 영원한 안식처가 없다.’ 
여기서 색채는 회화, 단어는 시의 기본 재료가 되는 것이지요. 어떻든 모든 것의 궁극적인 판단은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는 거예요. 제일의 기준은 진(眞)이나 선(善)이 아니라, 미(美)예요. 달리 말해 아름다운 것만이 진실하고 선할 수 있어요. 그러니 추한 수학, 추한, 음악, 추한 시에는 안식처가 있을 리 없지요.‘패턴 인지는 시와 음악과 수학을 막론하고 모든 미적 쾌감의 토대가 된다.’ 
어떨 때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느냐 하면,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것들 속에서 불현듯 패턴이 드러날 때예요. 패턴을 다른 말로 주제(主題), 테마, 혹은 모티프라 하지요. 이 패턴이 바로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거예요. 이 패턴을 파악하게 되면 미래의 대안(代案)을 예언할 수 있어요. 예언이란 본래부터 사물이 가진 질서이지, 점을 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패턴을 추구하는 여러 분야 가운데, 가장 무질서하고 일관성 없는 게 시가 아닐까 생각해요.왜요?
음악이나 수학, 회화에 이용되는 재료들, 소리나 숫자나 색채는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아요. 하지만 시에 쓰이는 언어는 더할 나위 없이 불순하고 부조리한 재료라 할 수 있어요. 예컨대 ‘오월’이라 하면 미국에선 ‘메이퀸’을 연상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선 ‘광주 항쟁’을 생각하게 되지요.

수학과 음악과 회화 같은 것들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재료를 사용하지만, 시의 재료인 언어는 국가와 민족, 역사와 환경의 제약을 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탁월한 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자체를 즉물적으로, 즉각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가령 음악이나 수학은 ‘똥’ 이야기는 못 하잖아요. 피나 정액, 살인, 강간, 질투, 증오 같은 것을 어떻게 음악이나 회화로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언어는 실제적인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도구예요. 달리 말하면 언어는 우리 삶의 최전선(最前線)이지요. 

만약 언어가 없다면, 우리 몸에서 모세혈관이 못 미치는 부위가 썩어버리듯이, 우리 삶도 그렇게 되고 말 거예요. 그처럼 언어는 대단하고 소중한 거예요. 그럼 이미 답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시가 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아요.그렇죠… 음, 그런가요? 
시 쓰는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엄마와 같아요. 여기서 아이는 독자지요. 아이가 어떻게 엄마의 보폭을 쫓아가겠어요. 그런데 요즘은 독자가 따라오나 안 오나 뒤돌아보지도 않고, 저 혼자 막 가 버리는 것 같아요. 시 쓰는 사람과 독자는 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것과 같아요. 글 쓰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독자는 못 본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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