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지만 한때 미국 최고의 맥주 하면 서부의 플라이니 동부의 헤디토퍼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 중 동부의 헤디토퍼를 양조하는 곳인 알케미스트 양조장은 위치가 버몬트 깊은 산속에 있는 것도 있어서,

한동안 힐팜스테드와 함께 동부 맥주 컬트를 선도하는 양조장이자,

뉴잉글랜드 IPA의 창시자격 존재로 어떤 의미로는 현재의 트리하우스/트릴리움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힐팜이나 메인비어 등 당시부터 최고의 맥주를 만들어내던 동부 양조장은 많으니 논란의 여지는 있다)

이 알케미스트 양조장은 헤디토퍼가 공전절후의 히트를 치면서 생산량이 주문량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 것과,

브루마스터의 장인정신? 이 겹치면서 오랫동안 다른 모든 맥주 양조를 중단하고 헤디토퍼만 생산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후 높은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2차 양조장 설립을 추진했고 작년 6월에 드디어 새 양조장을 오픈했다.

이에 맞춰서 (사실 그전부터 기간한정으로 가끔 풀었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헤디토퍼 이외의 맥주들을 양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스트 헤디토퍼 시대의 첫 테이프를 끊은 맥주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소개할 Focal Banger 이다.

요전에 어떤 횽이 넌 맨날 트리하우스밖에 안마시냐고 갈궈서 그런건 아니고 이걸 구하게 된건 꽤 운이 좋았는데,

최근에 나무집에 맥주 사러 갔는데 주차장에 어떤 양키형이 트렁크 열어놓고 아까 버몬트에서 왔다면서 맥주교환을 하고 있길래,

(나무집 양조장 밖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긴 하다)

평소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쌓아놓은 아이템이 마침 기억에 있는 알케미스트 맥주들이기도 해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도플갱어 한캔이랑 포컬뱅어 한캔을 교환받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도플갱어 한캔 더 내주고 헤디토퍼도 받아올걸 하고 후회한건 안비밀)

포컬뱅어는 양조장의 설명에 따르면 모자이크와 시트라 홉, 브리티시 몰트를 주 재료로 만든 IPA인데...

별 의미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신경쓰이는건 알케미스트는 임페리얼IPA로 분류되는 헤디토퍼를 달랑 ALE 이라고만 표기했었다는 것이다.

(임페리얼/더블IPA로 분류되는 헤디토퍼가 8%, IPA로 분류/표기된 포컬뱅어는 7%이다)

브루마스터가 뭔가 생각이 있어서 굳이 얘는 IPA로 표기한건지 아니면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건지 진실은 저너머에.

아무튼 요새 IPA용 홉의 정석이라 불리는 모자이크와 시트라 홉을 사용한 것 답게 향이 훌륭하다.

반면 최근의 뉴잉글랜드식 IPA와는 조금 다르게 비교적 투명한 비쥬얼과 그걸 반영하는 듯한 깔끔 드라이한 피니시가 특징적이다.

...그렇다고 이걸로 포컬뱅어의 모든 모습이 다 드러나는 건 아닌데...

알케미스트 헤디토퍼 의 유명한 특징 중 하나는 브루마스터가 대놓고 '이 맥주는 캔으로 마시세요' 라고 광고한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술은 잔에 따라서 오감으로 즐기는게 대세인 마당에 눈으로 즐기지도 못하고 금속냄새나게 캔으로 마시라니 하고 다들 펄쩍 뛰었지만,

알케미스트는 고집스럽게 '우리 맥주는 캔입할때 효모랑 홉찌꺼기도 대놓고 같이 집어넣으니까 굳이 따라마실거면 얘네까지 따라버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라고 본인들의 철학을 굽히지 않았다.

(힐팜도 그렇고 버몬트 백인들의 똥고집이 뭔가 있나보다)

...이 특징은 포컬뱅어도 마찬가지로 밑에 침전되어 있던 부분을 잔에 따라낸 결과가 두번째 사진.

얼핏 거품 올라오는것처럼 보이는 저게 전부 효모 / 홉찌꺼기 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맥주 불량품이야 하고 기겁을 하고 집어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지만 난 알고 일부러 따른 거니까...

기분 탓일진 몰라도 맛이 좀더 진해지는 느낌과 함께 효모 때문에 좀 맛이 탁해지는 부작용도 있는것 같은데,

그걸 감안해도 기본이 탄탄한 맥주라 별로 불만을 가질 맛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이 찌꺼기가 뒤엉킨 액체에서 장점만 최대한 뽑아내고 비쥬얼적으로 그로테스크하지 않은 물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각종 마개조를 거듭한 결과가 현재의 뉴잉글랜드식 완전불투명 IPA (T씨 형제들이 유명한 그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담으로 얼마전에 소개한 Captain's Daughter 가 비슷하게 잔에 따라놓으면 침전물들이 둥둥 떠다니는데 얘네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전체적으로 헤디토퍼의 동생 격에 해당되는 맥주지만 형만한 아우가 있네 없네 하면서 멱살잡고 싸우는 듯한 인상이다.

(마침 캔에 그려진 홉가이 그림도 멱살잡고 싸우기 딱 좋게 생겼고)

헤디토퍼를 마신지가 좀 오래돼서 직접 비교를 하기가 그렇지만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포컬뱅어가 조금더 비터쪽으로 밸런스가 잡힌 인상이다.

(그런 밸런스 때문에 브루마스터가 헤디토퍼를 제치고 포컬뱅어를 IPA라고 라벨링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와는 다르게 얘네가 아니면 대체할 맥주가 없을 정도로 넘사벽의 위상을 자랑하던 시절은 이제 돌아오지 않겠지만,

(알케미스트는 여전히 최고 수준의 양조장이지만 다른 양조장들이 열심히 따라잡고 올라왔으니)

오랜만에 재회한 알케미스트의 포컬뱅어는 과거의 추억에 먹칠을 하지 않는 훌륭한 수작이었다.

다음에 또 나무집 등지에서 교환할 기회가 생긴다면 경험도 생겼겠다 좀더 이것저것 교환해서 시도해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