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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가 일본에 먹혔다면, 역사가 바뀌었다!

아카모리 시노부(211.61) 2016.09.05 11: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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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인도양 : 제국의 흥망성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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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폐허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영국은 승전국이었다. 그러나 무색했다. 대영제국은 해체되었다. 인도부터 떨어져나갔다. 인도는 대영제국의 기틀이었다. 최대 식민지 인도 없이는 대영제국이 성립할 수 없었다. 인도를 정복했기에, 인도양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해가 뜨는 대일본제국만 파산했던 것이 아니다. 해가 지지 않는다 했던 대영제국 또한 저물어갔다.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결이었다는 기왕의 지배 서사로는 포착되지 않는 지점이다. 비중으로 따지자면 대영제국의 몰락이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인도는 승자 편에 서 있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에 환호했다. 6년 전쟁을 마감한 것이다. 애초 원해서 참전한 것이 아니다. 인도 총독부의 일방적 발표에 따른 것이었다. 1939년 9월 3일이었다. 일요일 하고도 저녁 8시 30분. 라디오를 통해 긴급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콜카타도 델리도 아니었다. 총독이 여름 휴가를 나던 산골 별장에서 별안간 발표한 것이다.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간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유럽의 정황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인도는 대영제국의 일부, 아니 중추였다. 단 한 명의 인도인과 단 한 차례의 상의도 없이 인도 역시 전쟁의 화마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것이다. 

1939년 당시 인도군은 20만이었다. 1945년에는 250만이 되었다. 유명무실했던 공군도 300명의 장교와 9개 비행부대를 보유한 대군으로 성장했다. 해군 또한 2000명에서 3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전투함과 잠수함도 보급되었다. 총력전 체제에 총동원되었다.

이들이 인도만 보위한 것도 아니다. 해외 파병이 더 많았다. 서쪽으로는 아리비아 해와 홍해, 지중해를 건넜다. 동쪽으로는 벵골 만과 남중국해를 지났다. 그래서 종전 소식을 접한 인도 군인들은 북아프리카와 남유라시아 도처에 깔려 있었다. 홍콩, 싱가포르, 말라야, 미얀마, 이라크, 이란, 시리아, 이집트, 튀니지, 시실리, 로마에서 독일과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했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지중해 일대는 '인도군의 호수'라고 빗대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남유럽, 중동에 이르기까지 인도군이 파병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대영제국의 깃발 아래 전투를 수행한 이의 8할이 인도군이었다. 그래서 무슬림 출신들은 승전 포상을 겸하여 인도로의 귀환 길에 메카 성지 순례를 갈 수 있는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인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 전선과 아시아 전선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인도양의 동과 서는 긴밀하게 연동하고 있었다. 양대 전선을 분주하게 오고갔던 인도인 장교들도 적지 않았다. 북방의 몽골만큼이나 남방의 인도에 착목함으로써 '유라시아 전쟁'의 면모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제국의 건설 

실은 대영제국의 건설에서부터 인도군의 공로는 혁혁했다. 세포이 항쟁(혹은 제1차 인도 독립 전쟁) 진압 이후 동인도회사를 대신하여 영국이 직접 인도를 통치했다. 그 영국령 인도는 무굴제국에 가탁한 지배 체제를 만들었다. 무굴제국은 무슬림 지배층(관료+군인)에 힌두 기층 사회가 병존하는 구조였다. 

대영제국은 군사력과 경찰력을 무슬림에 의존하여 인도를 분리 통치했다. 특히 전사의 심장을 가진 '몽골화된 무슬림', 혹은 '이슬람화된 몽골'의 후예였던 펀자브와 카슈미르 등 서북 변경지대에서 군인들을 징집했다. 소수파였던 무슬림과 시크교도들이 군대에서만은 다수파였다. 그들이 총독부의 안위를 보위하는 파수꾼이 된 것이다.

이들은 대영제국의 확산과 팽창에도 첨병 노릇을 했다. 제국의 전위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이미 자바, 말라카, 페낭, 싱가포르, 홍콩과 상하이, 티베트,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처음에는 군인으로 전쟁을 수행했고, 정복이 완료되면 경찰과 헌병 역할을 했다. 동아프리카의 수단에서는 농민 봉기를 진압했고, 동아시아의 중국에서는 의화단 운동을 분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인도군은 대거 파병되었다. 170만의 대군이 아대륙을 떠나 프랑스와 벨기에, 갈리폴리, 팔레스타인, 이집트, 수단, 메소포타미아, 아덴만, 홍해, 동아프리카, 페르시아에서 맹활약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제국이 붕괴하자 인도군은 재차 투입되었다. 해양 제국 영국과 대륙 제국 러시아가 오스만 이후의 지배권을 두고 경합하는 '그레이트 게임'에 차출된 것이다. 70만 인도군은 이라크를 점령하여 영국에 헌사했다. 1920년 이라크에서 대규모 무장 항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재차 인도군을 소환하여 이들을 진압시켰다.

이웃한 이란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관건적인 장소였다. 영국은 대륙형 적색 제국이 오스만제국을 대체할 것을 염려했다. 이란의 북부는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소련이 남하하면 영국령 이란의 석유 지대마저 위험해진다. 나아가 페르시아 만 국가들과 이집트까지 파급 효과를 미칠 수 있다. 즉, 소련의 남하가 초래할 구 오스만제국 영토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굴제국의 후예들을 활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중동에 상시 주둔하던 인도군의 숫자는 1만을 훌쩍 넘었다. 

유전 지대를 확보하기 위하여, 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인도군을 활용하는 대영제국의 전략은 인도의 전통적인 외교 안보 정책과도 합치하는 것이었다. 인도사의 변동은 대개 서북 발(發)이었다. 유라시아의 유목민들이 아대륙과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정치적 변동을 촉발했다. 

이란과 국경을 맞대었던 영국령 인도의 안정을 위해서도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 친영 정권을 세우는 것이 유리한 일이었다. 이곳에 적대적인 정권(=친소 정권)이 들어서면 인도와 아랍 간 육로와 해로도 막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란의 남부를 지배한 것도 인도군이었으며,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친영 정권을 막후 지원한 것도 인도 총독부였다.

따라서 대국적 견지에서 보자면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에 그쳤다고만 말하기가 힘들다. 제국의 협력자이자 공모자였으며, 나아가 스스로 '하위 제국'이기도 했다. 인도양이 '영국의 호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제국 혹은 준제국으로서 인도가 풀가동되었기 때문이다. 무굴제국은 해체되었다기보다는 대영제국 아래서 존속했으며,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대영제국의 군사망과 경찰망의 호위를 받으며 인도인 자본가들도 무굴제국 시대보다 더 널리, 더 멀리 진출할 수 있었다. 제국망의 중간 기착지이자 상업망의 중심지였던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 랭군, 나이로비, 카이로, 바그다드, 테헤란 등등 각지의 지역 경제에서 인교(印僑)들은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국의 보위 없이 혈연과 지연으로 살 길을 개척했던 화교(華僑)들과는 처지가 딴판이었다. 동아프리카부터 동남아시아의 각종 인프라 건설 또한 인교들이 담당했다. 곳곳에 세워진 고무와 커피 농장 등에서도 남인도 출신 타밀 인들이 생산대의 핵심이었다, 대영제국이 흥망성쇠 하던 100여 년 동안 인도양의 동과 서로 진출한 인도인들의 숫자는 자그만 치 3000만 명에 달한다. 그 중에 영국에서 공부하고 남아공에서 변호사로 일했던 간디도 있었던 것이다.

'아제국'의 위상은 영국령 인도가 베르사유 조약의 당사자였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나아가 국제연맹의 창립 국가 자격까지 얻었다. 실제로 인도 총독부는 20세기 초반부터 수에즈 운하를 비롯한 중동 일대의 재정 정책까지 관여했다. 런던의 하수인이 아니라 영국과 더불어 '제국의 사명'에 적극 동참했던 것이다. 

영국에 협력했던 인도인들에게도 전혀 낯선 업무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인도양을 자신들의 관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태평양도 대서양도 특정 국가의 이름을 따지는 않는다. 오로지 인도양만이 '인도의 바다'라고 불린다. 대영제국 산하 영국과 인도를 제국과 식민지로만 갈음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섣불리 일본과 조선/대만에 견주어서 '비교 연구'를 해서는 몹시 곤란하다. 대국이 소국을 삼킨 것과 소국이 대국을 거느린 것 사이에서 빚어지는 역동성이 판이했기 때문이다. 혹시 일본 열도보다 더 광활했던 만주국이 조락하지 않고 강건하고 강성해졌다면 '동경'과 '신경'(현재 장춘)의 관계가 런던-콜카타/뉴델리와 흡사하게 전개되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영제국의 전성기, 콜카타와 델리는 런던을 잇는 제국의 제2도시, 제3도시로 영화를 구가했다. 델리의 영향력은 중동까지, 콜카타의 입김은 동남아까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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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영제국의 전쟁 포스터. ⓒ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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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인도군. 인도 군부에서 2012년에 펴낸 [India and 2nd World War]에 수록된 것이다.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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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로마의 인도군. 인도 군부에서 2012년에 펴낸 [India and 2nd World War]에 수록된 것이다.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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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인도군. 인도 군부에서 2012년에 펴낸 [India and 2nd World War]에 수록된 것이다. ⓒ이병한


제국의 수호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의미 또한 인도의 입장에서는 남달랐다. 대영제국을 수호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첫 번째 임무는 북아프리카였다. 인도군 1대대와 4대대가 파병되어 이탈리아와 대적했다. 유럽 전선은 비관적이었다. 개전 6주 만에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가 줄줄이 무너졌다. 연합국과 대영제국의 반등 또한 유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서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사막 전투에서 인도군이 이탈리아군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대역전이었다. 초반에는 에티오피아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이탈리아가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수단까지 치고 내려왔다. 나아가 소말리아까지 진출했다. 동아프리카마저 이탈리아의 수중에 넘어가고 있었다. 

동아프리카는 인도양의 서쪽이다. 지중해와 홍해가 이어지는 곳이다. 대영제국에도 사활적이었다. 이곳이 추축국에 넘어가면 대영제국의 숨통이 끊어진다. 영국과 인도, 상위 제국과 하위 제국의 연결망도 차단된다. 충격과 공포에 빠진 윈스턴 처칠이 긴급 타전을 한 것도 인도였다. 즉각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형식적으로는 명령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애원복걸에 가까웠다. 

인도군은 뭄바이(당시 봄베이)에 집결했다.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대거 징집되었다. 난생 처음 바다를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터번을 벗고 철모를 쓰라는 영국 장교들에 저항하는 시크교도들의 소란도 일었다. 그들이 전투함을 타고 아라비아 해와 홍해를 건너 이집트의 중동 사령부에 합류했다. 망망대해의 절경에 탄성하던 기쁨은 하루 이틀 사이에 사라졌다. 3주가 걸린 바닷길 여정은 지겨운 노릇이었다. 배 멀미도 지독했다. 워낙 짧은 시간에 대규모 인원을 파견했기에 화장실을 비롯한 위생 시설도 형편없었다. 상당수의 병사들은 탈진 상태로 아프리카에 도착했다. 

다행히 독일의 유보트가 출격하여 이들 전함을 격침시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마침내 이집트와 수단에 당도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적군의 잠수함이 아니라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전투기였다. 당장 폭탄이 투하되지는 않았다. 배 위로 떨어진 것은 삐라였다. 펀자브어와 힌디어와 영어가 빼곡했다.

2시간 후부터 폭격이 시작될 것이니, 대영제국을 위해 헛되이 목숨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도망가거나 투항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십중팔구는 대영제국을 위하여 싸웠다. 그리고 끝내 승리를 거두었다. 희생이 막대했다. 사막에서 전개되는 탱크 전이 낯설었다. 이탈리아 공군에 대적할 포격 부대도 없었다. 엎치락뒤치락 대혈투 속에서 인해전술로 맞섰다.

이탈리아 다음은 독일이었다. 전장은 홍해 건너 중동이었다. 독일군이 동남진하는 것에 보조를 맞추어 인도군 역시 이라크와 이란으로 더 멀리, 더 깊이 진출했다. 일단 이라크에서는 석유가 났다. 전쟁 수행을 위한 핵심 자원이다. 모술과 키르쿠크의 유전을 인도군이 관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뽑아 올린 석유가 팔레스타인의 하이파 항과 시리아의 트리폴리를 지나 운반되었다. 이라크의 바스라 항도 중요했다. 이란의 유전과 연결되는 항만이었다. 바그다드와 바스라 근방에 자리한 공군 기지 또한 영국과 인도를 잇는 하늘길이었다. 카라치(현재 파키스탄)에서 출항한 인도군이 바스라까지 닿는 데는 보름가량이 걸렸다.

중동 대전의 성격은 미묘한 것이었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범아랍주의와 민족주의를 고취하며 대아랍 선전에 나섰다. 독일 또한 이라크를 중시했다. 대영제국에 저항하는 아랍의 근거지로 삼고자 했다. 민족 해방 운동과 결합하여 중동에서 대영제국을 분쇄시키려 한 것이다.

독일의 진격에 호응하여 내부에서 봉기하는 민족주의자들도 있었다. 라시드 알리(Rachid Ali)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이 내외 합작을 발판으로 독일은 팔루자를 점령하고 모술의 유전까지 장악했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송유관을 차단하여 대영제국의 기동력도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독일과 아랍의 연합전선에 맞서 런던과 뉴델리 그리고 카이로의 합동 작전이 개시되었다. 주인공은 역시 인도군이었다. 바그다드를 재점령하고 바스라와의 연결망도 재건했다. 이라크 점령 사령관도 인도군이 맡았다. 인도군 10사단이 바그다드와 모술을, 8사단이 남이라크를 점거했다. 

그러나 전혀 환대받지 못했다. 독일의 우산 아래 잠시나마 '해방'을 맛보았던 이라크인들은 대영제국의 재진출에 불만이 팽배했다. 인도군 앞에서 침을 뱉으며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라크인의 눈에 인도 군인들은 대영제국의 주구로 보였으리라. '무슬림 형제'의 배반으로 여겼을 법도 하다. 그 차가운 경멸을 견디며 인도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날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라크 다음은 이란이었다. 한층 수월했다. 북쪽에서 소련이 합동 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영국-인도-소련의 협공으로 이란 역시 재탈환했다. 역시 이란인의 시각에서는 침공과 점령, 제국주의적 정복에 가까웠다. 그러나 인도 총독부로서는 이라크와 이란을 접수함으로써 서북 변경 지대를 안정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곧장 대영제국의 특별 훈장이 수여되었다. 인도군의 영웅적 모습이 대영제국의 미디어망을 타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송출되었다. 본토에서도 호응이 컸다. 특히 파병 군인들이 많았던 펀자브 일대에서는 학교와 대학, 정부 기관이 휴일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축하 행사를 열었다. 라호르(지금은 파키스탄)에 집결하여 환호하는 당시 군중들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네루 대학교 도서관에서 사진집과 더불어 살핀 인도의 제2차 세계 대전 자료 중에는 편지 모음집도 있었다. 제국의 공식 서사의 이면에서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은 편지들이 인도양의 동과 서를 오고가고 있던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연인 사이에 손 편지와 엽서가 폭증했다. 그 중 9할은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들로 기록되어 있었다.

애틋한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는 몇몇 영어 편지들을 통해서 추체험할 뿐이다. 바다로 격절된 거리감이 감정을 심화시켰다. 임의 부재가 사랑을 격화시켰다. 이 편지의 당사자 중 일부는 아름답게 뜨겁게 재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전장에서 숨을 거두었거나 실종자가 되었을 것이다. 또 돌아왔다 하더라도 부상병이 되어 평생 장애를 달고 살았을지 모른다. 대영제국을 수호하는 아제국 인도의 기회비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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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베이 항에 집결한 인도군. 인도 군부에서 2012년에 펴낸 [India and 2nd World War]에 수록된 것이다.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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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를 점령한 인도군. 인도 군부에서 2012년에 펴낸 [India and 2nd World War]에 수록된 것이다. ⓒ이병한


제국의 와해 

제국의 붕괴는 동쪽에서 시작되었다. 동풍이 불었다. 일본이 남하했다. 일본/만주가 소련/몽골에 패함으로써 대일본제국의 북진이 봉쇄되었다. 활로를 남쪽에서 찾았다. 명분도 있었다. 유럽의 제국주의를 타파한다고 했다. 사상과 철학도 보태었다. 세계사의 철학, 세계 최종 전쟁 등 전시 담론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동시다발 폭격이 시작된 것은 1941년 12월이다. 진주만과 홍콩과 싱가포르와 말라야가 화염에 휩싸였다. 대동아 공영권이 발진함으로써 대영제국의 하부 조직은 하나둘씩 붕괴되었다. 냉전기 중국 공산주의의 남하라는 '도미노 이론'의 공포는 명명백백 제2차 세계 대전기 일본의 파죽지세에 기원을 두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다케우치 요시미는 전율했다.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근대를 초극할 수 있는 계기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인도의 간디는 절망했다. 비폭력이 통용되지 않는 아수라장의 확산과 심화에 크게 낙담했다. 

영국의 조지 오웰은 냉철했다. 펜을 들어 대영제국의 와해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일본의 동남아 진출과 미국의 참전으로 대영제국의 해체는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고 여겼다. 나아가 인도의 운명이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전망했다. 일순간에 인도가 전쟁의 중심, 아니 세계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유럽 전선과 아시아 전선의 공동 운명을 인도의 향로에서 찾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타개책을 구하는 것은 사상가, 지식인들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네루가 앞장섰다. 그 또한 대영제국 몰락의 서막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영국은 이제 2등 제국이라고 했다. 그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중국이었다. 중화민국과 연합하여 항일 전쟁을 수행하고,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장제스를 인도에 초청하여 간디와의 회동을 주선했다. 1942년 2월, 간디와 장제스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 세계가 두 사람의 회동을 주목했다. 인류의 3분의 1을 대표하는 양대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5시간 동안 이어진 대화는 퍽이나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간디는 여전히 군자보다는 성자였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군인 장제스 앞에서 비폭력 사상을 설교했다. 장제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막막함을 느꼈다. 그 심정을 다음날 아침 일기에 써두었다. 간디는 오로지 인도만을 생각하고, 인도만을 사랑할 뿐이다. 다른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철학만을 고집할 뿐, 세계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고 기록했다. 장제스가 간디를 성토하는 일기를 쓰고 있을 때, 간디는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의 회심과 회개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중국-인도의 항일 연합 노선이 무산되면서 네루와 장제스는 새로운 방안을 강구했다. 태평양 건너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타진했다. 현실 정치인이었던 두 사람 모두 영국에서 미국으로 힘이 옮아가고 있음을 직관했다. 동남아에서 대영제국이 무너지는 힘의 공백을 대동아 공영권이 접수해가는 사태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미국을 꼽은 것이다.

네루와 루스벨트 간 가교 역할을 한 인물로는 에드가 스노우이다. <중국의 붉은 별>(홍수원, 신홍범, 안양노 옮김, 두레 펴냄)을 써서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을 세계에 알린 바로 그 사람이다. 

스노우는 1931년에 이미 인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간디의 불복종 시민 운동을 대서특필한 이도 그였다. 인도가 제2차 세계 대전의 핵심 장소가 되자 그는 재차 인도 특파원을 자청했다. 현장에서 승부를 거는 타고난 언론인이었다. 그가 인도에 도착한 것이 1942년 4월이다. 두 달 전 2월에는 루스벨트를 직접 만나 네루에게 전하는 구두 전갈까지 받았다.

스노우는 인도를 주유하며 간디와 네루는 물론 인도 총독부의 영국 고위 인사들까지 두루 만났다. 인도가 일본에 점령되면 중국과 중동 또한 일본과 독일에 넘어가게 된다며 미국의 적극 개입을 요청하는 기사도 연달아 송고했다. 

실제로 1942년부터 동인도 연안에 일본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스노우가 콜카타에 도착한 날, 일본 해군은 바다 건너 실론(현 스리랑카)의 콜롬보를 점령했다. 영국 전함을 격파하고 군항을 파괴했으며 해양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실론은 아라비아 해와 벵골 만이 만나는 곳일 뿐 아니라, 영국과 호주(오스트레일리아)가 연결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대일본제국이 대영제국의 동쪽 연결망 전체를 장악한 것이다. 

콜롬보를 접수한 후에는 인도 폭격도 본격화되었다. 마드라스(현 첸나이)와 콜카타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주요 도시와 해안가에 시체가 널리기 시작했다. 동부 연안 도시의 주요 기관들은 황급히 봄베이(현 뭄바이)등 서부 도시로 이동했고, 대도시의 주민들은 고향과 시골로 피난 갔다. 배와 기차와 버스는 피난민 행렬로 만석이었다. 은행마다 대규모 인출 사태로 아비규환을 이루었고, 부동산 가격은 폭락했으며, 식민지 도시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던 거지들마저 거리에서 말끔하게 사라졌다. 

홍콩과 싱가포르, 실론 점령보다 더 충격적인 사태는 미얀마였다. '버마'라는 이름으로 영국령 인도에 포함되어 있던 곳이다. 100만 명이 넘는 인도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절반은 버마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동인도와 미얀마는 한 몸이었다. 곧장 아삼과 벵골로 이어지는 접경지이기도 했다. 

일본 육군이 대영제국의 제2도시였던 콜카타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갔다. 불안과 공포가 인도인의 심리를 잠식해갔다. 총독부의 언론 통제와 검열도 속수무책이었다. 동남아와 동인도 사이의 인교 네트워크로 대영제국의 몰락 소식이 시시각각 가족과 친족과 마을로 전해졌다. 속속 밀려드는 전쟁 난민과 부상자들 또한 전황의 실상을 말해주었다. 점점 전쟁의 그림자가 인도 본토를 뒤덮어갔다. 흉흉한 민심에 소문과 괴담 또한 무럭무럭 자라났다. 

1942년, 대영제국에 대한 인도인의 심리적 이탈은 결정적이었다. 식민지에서도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일정하게 통하기 마련이다. 최소한의 지지와 동의가 있어야 지배 체제가 작동한다. 1942년을 기점으로 영국은 다시는 인도를 통치할 수 없게 되었다. 대영제국에 대한 신뢰가 상실됨으로써 인도인들의 마음이 인도 총독부에서 완전히 멀어져간 것이다.

국민회의 또한 더 이상 대영제국을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이른바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를 선언한다.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인도 총독부는 전시 협력을 거부하는 국민회의 지도부를 모조리 연행했다. 그럼으로써 더더욱 인도와 영국의 분리는 심화되었다. 

대영제국은 내파되어 갔다. 즉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일본의 충격'이 인도의 독립에도 기폭제 역할을 했음을 전연 부정하기가 힘들다. 대일본제국이 대영제국을 침몰시켰고, 그 대일본제국을 소련과 중국, 미국이 해체시켰다. 인도양에서는 대영제국이, 태평양에서는 대일본제국이 붕괴하면서 제국주의 시대도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제국의 유산 

1946년 9월, 국민회의가 주도하는 임시 정부 총리로 네루가 선출되었다. 취임 일성이 흥미롭다. 인도를 잠재적인 강대국이라 했다. 신생 조직인 유엔(UN)의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인도는 아시아와 인도양, 특히 중동과 동남아의 안보에 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도 했다. 인도가 아시아 안보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100년에 못 미쳤던 인도 총독부가 사라진 것은 1947년이다. 영국은 떠났지만 아제국, 하위 제국으로서의 인도는 여전했다. 대영제국의 아류였다는 뜻이 아니다. 인도는 인도만이 아니라 인도양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공헌해야 한다는 발상이 이어졌다는 말이다. 인도의 고유 브랜드인 비동맹 외교의 기저이다. 

인도의 비동맹이 가치가 있었던 것도 인도가 특정한 편을 들었을 때 세계사의 축이 바뀔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과 인도양을 접속하는 해양 동맹으로 인도를 유혹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대륙 동맹으로 인도를 끌어들이려 한다. 

유라시아와 인도양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인도의 선택이 20세기만큼이나 21세기의 향방을 좌우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인도의 선택이 동남아시아와 중동에까지 큰 파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 인도양은 변함없이 '인도의 바다'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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