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 네버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28)
쿵!
진동이 멈췄다.
“젠장. 지진도 아닌데 위아래가 다 흔들리다니.”
스미는 수그린 몸을 바로 세웠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두어 번의 ‘진동’이 멈추자,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깍깍 울어대기만 하던 네버새들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땅이 아닌 하늘을 가를듯한 기괴한 진동이었다.
고개를 든 스미는 곧 암담한 현실과 마주했다. 그의 입에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연기가 저렇게나...”
손바닥만 하게 보이던 노란 연기는 기괴한 진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욱하게 피어올라, 어느새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제는 고개를 돌려도 노란 연기가 보일 지경이었다. 연기는 도와줘, 도와줘 하고 소리쳤다.
날개 부족을 구하러 간 해적들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누런 풀을 태우고, 한참이 지나버렸다. 스미는 선장 대리라는 직함에 걸맞게 덤덤히 입꼬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속은 초조함의 극에 달해있었다.
그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일전에 엘사 J. 후크에게서 시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돌려주려고 했으나 필요 없으니 가지라고 해서 여태껏 간직해두고 있었다. 노란 연기가 피어올라, 이를 막 발견했을 즈음엔 7을 가리키던 시곗바늘이었다. 이제 바늘은 6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계는 제멋대로 빠르게 혹은 느리게 빙글빙글 돌아서 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는 것이다.
“어쩔 거야?”
스미만 초조한 게 아니었다. 이곳에 남아 배를 지키는 해적들 또한 스미 못지않게 그들을 걱정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은 거칠어도 동고도락을 한 전우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멍청하긴. 가장 중요한 건 이 빌어먹을 섬에서 나갈 수 있는 배를 지키는 거다.”
“우리끼리만 탈출해도 의미가 없다.”
아까부터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던 해적 조니는 금방이라도 인디언 영역으로 뛰어갈 것 같았다.
“의미를 만들어주지.”
스미는 엘사의 삼각모를 바로 고쳐 쓴 후, 검을 빼어들어 조니에게 겨누었다.
“선장 대리로서 명령한다, 조니. 여기서 이탈하지 마라.”
“스미!”
“조니. 그들을 믿어라. 그들은 결코 약하지 않아. 너도 알잖아?”
“....”
“우리 동료들은 강하다. 너도 네 강함을 증명해라. 그들을 믿어 봐!”
조니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지만 정작 스미는 제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인어들을 데리러 간 해적들이나 아이들을 구하러 간 후크 해적단은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발이 날랜 해적들을 척후로 삼아 동태를 살피고는 있지만 수확은 없었다.
“대리 선장!”
“얀센 상단. 배는 어떻소?”
“중요한 부분이 부서져 고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버리고 가는 수밖에요.”
얀센 상단 소속 상인은 아깝다는 듯, 부서진 배를 흘긋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미의 마음이 더더욱 무거워졌다.
장정들은 부서진 배에 있던 물건들을 차례차례 옮겼다. 초조하게 동료들의 귀환을 기다리던 해적들이 발 벗고 짐 나르기를 도왔다. 속 썩느니 차라리 몸을 고되게 해서 시름을 잊을 생각이리라. 스미는 그들을 말리려다 그만 두었다. 척후에게 들은 바로는, 두어 번의 진동 이후로 눈에 띄게 늑대 부족의 움직임이 줄었다고 했다.
“그 미친놈들이 갑자기 쓰러지던걸.”
“그냥 고꾸라졌다고?”
“반은 고꾸라지고 반은 머리를 감싸 쥐더니, 스스로 나무나 바위에 머리를 찧고는 죽었다.”
“자살을?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인디언들의 공격이 앞으로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이상증세가 더 심해졌다. 적들이 그냥 죽거나 자살을 한다면 아군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지만 이곳은 네버랜드다. 겉으로는 좋은 일처럼 보여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스미는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어이! 어디가?”
“볼 일 보러 간다! 무슨 일 생기면 소리 질러!”
스미는 풀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락. 사락. 풀을 밟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볼일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지켜야 할 자리에서 이탈한 거나 다름없었다. 부서진 배, 여기저기 널린 인디언 사체들, 부상자들, 감정이 극에 달한 해적들, 소식 없는 동료들... 모든 게 스미를 압박하고 있었다. 배 끄트머리만 살짝 보일 정도로 외진 곳까지 오니, 어쩐지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주 잠깐 누리는 평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달고 썼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 스미를 타이르듯, 엘사의 삼각모가 헐겁게 흔들렸다. 스미는 놀라 삼각모를 바로 썼다.
‘아아-’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후크 선장님, 어디 계신 겁니까?’
엘사 J. 후크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네버랜드의 최후를 위해 몇 년간 준비했던-몇 십 년 일지도 모른다-것들을 차질 없이 진행시켰다. 준비를 다 마치고 네버랜드에 침입하기 바로 전날 밤, 엘사 J. 후크는 스미에게 자신의 대리를 맡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선장 대리!
스미는 기묘한 우월감이 들었다. 엘사가 가장 믿고 의지하던 부선장 제이크가 죽은 후, 후크 해적단의 부선장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었다. 선장 대리는 바로 그 부선장보다 더 믿음직스럽게 여기는 부하에게 맡기는 자리였다. 그녀에게 인정받는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스미는 그러겠노라고 재빨리 대답했던 것이다.
부담 가질 거 없다, 거절해도 된다는 그녀의 배려는 스미의 의욕을 고취시킬 뿐이었다.
“무거워. 너무 무겁다.”
엘사 J. 후크는 스미에게 작전을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연기 신호를-네버새는 쓸 수 없었다-보낼 것, 통에 든 피가 부족해지면 옅게 생체기를 내서 피를 모아 요정의 접근을 막을 것, 결코 냉정을 잃지 말 것, 목숨은 소중히 여길 것, 그리고,
- 작전이 성공해서 모두가 왔는데, 나만 돌아오지 못했을 경우엔 기다리지 말고 배를 출항시켜라. 조약서는 한스 왕자에게 있고, 그에 대한 공증은 얀센 상단에 맡겨두었다. 이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다면 상단 측에 물어봐
엘사 J. 호크는 여러 당부사항을 들려주었다. 그녀의 입이 닫히자 스미는 곧 자신이 느낀 기묘한 우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 우리가 가는 곳은 네버랜드다. 어떤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아
그의 선장은 부하의 동요를 알아챘다.
- 너와 네 동료들을, 해적들을 우선시해라. 너흰 내 소중한 부하들이다. 이를 명심하고, 상황에 맞게 중요도를 잘 저울질 해. 너무 걱정 마. 너 혼자가 아니니까
- 선장님은요? 선장님도 저희의...
- 필요 없어. 네놈들이나 잘 해라
혼자가 아니다. 지금 스미의 옆에는 후크 해적단 일원인 라이츠가 있었다. 그는 훌륭한 조타수이자 경험 많은 해적이었다. 든든한 동료다. 또, 후크 해적단은 아니지만 네버랜드를 항해하면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인연을 쌓은 해적들도 있었다. 심지어 후크 해적단의 최고참인 스미보다 더 나이 많고 노련한 해적들도 있었다. 혼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엘사 J. 후크가 될 수 없었다.
선장 대리의 직함은 이리도 무거운 것이었다. 가벼운 삼각모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쇳덩이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선장 대리가 이정도인데 진짜 선장은 대체 얼마나 무거운 걸까!”
엘사 J. 후크가 와주었으면 좋겠다. 쓸모없다든지 멍청하다는 욕을 들어도 좋고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나도 좋으니 후크 선장이 이곳으로 돌아왔으면 싶었다. 그녀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단숨에 일소할 것 같았다. 그럴게 틀림없다!
스미는 헉헉대는 숨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스미의 심장은 가라앉질 못했다. 냉정해져야 했다. 하지만 스미는 염불을 외듯 속으로 엘사를 되뇌었다.
‘선장님, 선장님, 오 제발...’
이러다 모두 죽게 되면 다 내 탓이다. 스미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자책했다. 엘사 J. 후크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미는 제 간절함이 헛것을 보여주는 거라고 믿었다. 풀숲 사이로 보이는 금빛 물체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그 금빛이 힘없이 비틀거리자, 헛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엘사 J. 후크였다.
“선장님! 후크 선장님! 돌아오신 겁니까?”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스미는 기쁜 미소를 지으며 엘사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엘사는 갈림길에 서있었다.
“....선장님?”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푸른색 선의는 꼭 30년은 묵은 것처럼 낡아진 채로, 녹색 액체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
스미를 발견한 엘사는 입을 떼었다.
칼날처럼 푸르게 빛나던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푸른빛을 띠고, 입술은 검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생기 따윈 다 고갈돼서 꼭 염을 끝낸 시체 같았다. 서있는 게 신기해보였다.
게다가 빈손이 아니었다. 선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겠다는 듯이, 사람 크기 만한 물체를 꼬옥 안고 있었다. 그 물체는 어린 아이의 형태를 한 얼음 덩어리였다. 그녀는 그 얼음 덩어리를 소중한 것 인양, 두 손 가득 들어 안고 있었다.
“어쩌면 좋아?”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는 비탄의 신음성을 내뱉었다.
“선장님...”
도움이 필요하다.
인어를 구하러 간 녀석들은 여태 연락이 없고, 아이들을 데리러 간 놈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숲은 타들어가고, 이곳을 노리고 공격을 감행한 인디언들이 기어코 배 한 척을 때려 부쉈고, 덕분에 배가 모자라 예상 인원을 다 태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됐고, 날개 부족 영역에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노란 연기를 피워대고 있고-
“가야하는데...”
어느쪽으로 가야 해? 엘사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스미는 엘사의 품에 있는 얼음덩어리야말로 이제껏 엘사를 살게 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네버랜드를 떠날 수 있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네버랜드에 머무르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저 얼음덩어리 때문이다. 저것이 없으면 엘사는 죽는다. 스미는 직감했다. 스미의 눈에는 고작 얼음덩어리지만 엘사에게 있어서는 보물보다, 그녀의 심장보다 더 값진 것이리라.
“선장님....”
엘사 J. 후크라면 스미를 보자마자 말할 것이다.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다니. 모두 내 뒤를 따라라! 너희는 물론이고 여태 못 온 멍청이들까지 몽땅 구해낸 다음 발로 엉덩이를 차버릴 테니까. 스미 너는 두 배로 두들겨 맞을 준비를 해라.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이렇게 욕을 하면서 위험에 빠진 부하들을 구하러 갈 것이다. 엘사 J. 후크라면.
엘사 J. 후크라면 부하들을 모두 구할 수 있다. 그래서.
‘가지마세요’
이를 드러낸 채 웃었다.
‘도와주세요’
뒷걸음질을 쳐서 엘사와의 간격을 벌렸다.
‘구해주세요’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슴을 쭉 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노란 하늘 아래서 스미는 활짝 웃었다.
“여긴 선장님이 없어도 됩니다.”
엘사는 갈림길에서 멈춰 섰다. 멈춰서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해야 한다. 스미는 엘사가 가야할 방향으로 등을 떠밀고는 그 반대쪽 길에 들어서서, 엘사 대신 걸었다. 선장 대리. 언제까지나 엘사의 뒤를 졸졸 쫓아다닐 수는 없었다.
“가십시오.”
스미가 먼저 발을 돌려 배가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갈림길은 외길이 되었다.
“돌아올게. 반드시.”
엘사는 얼음 덩어리를 안고 해변가로 뛰었다.
“반드시!”
엘사의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씩씩하게 배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스미는 발을 멈추고 실소했다.
“하하하하-”
방금 무슨 일을 벌인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했다. 금방
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스미는 엘사가 뒤도 보지 않고 뛰어가는 걸 보고 제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지만, 가장 든든한 구명줄을 제 손으로 놓아버린 셈이었다.
‘어쩌지?’
여기서 인원을 분산해서 지금이라도 지원을 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가. 괴로운 선택만이 남아있었다.
배는 반드시 지켜야했다. 그러나 배가 텅 비어서도 안 되었다. 본말전도. 무엇이 더 중요한가 따위를 가늠할 겨를도 없다. 둘 다 중요하다. 그렇다고 몇 안 되는 인원을 쪼개서 둘로 나눈다면, 둘 다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둘 다 실패한다면? 스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시간만이 야속하게 흘러갔다.
그때였다.
“으이구 이 비린내!”
구성진 욕설소리와 함께 여러 발소리가 들려왔다.
“인어 앞에서 생선 운운 하니까 그렇지 멍청아. 캡틴 훅이 잘 모셔가랬지 서로 욕하면서 정다웁게 가랬냐?”
“목소리는 끝내주는데 욕은 더 끝내주게 하네.”
“옷 다 젖었어!”
“여벌은 상선에 있을걸. 가자마자 갈아입던가. 비린내는 둘째 치고 끈적거리는 게 아주...”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풀숲을 헤치고 한 무리의 해적들이 나타났다. 인어 쪽을 맡은 해적들이었다. 스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아버렸다. 그를 맨 먼저 발견한 매이슨이 입을 열었다.
“스미! 맙소사. 그 낯짝도 반갑게 보일 때가 있네! 참, 그쪽에도 인디언들이 쳐들어갔을 텐데, 배를 잘 지켰겠지?”
매이슨 뒤로 다른 해적들도 얼굴을 보였다. 인어들을 옮긴 해적들은 모두 무사했다.
“왜 여기서 자빠져 있어? 볼일 보던 중이었냐?”
“이쪽은 생선 배달 아니 인어 운반 시키느라 쫄딱 젖었는데 너 혼자 노닥거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뭐? 스미가 혼자 놀고 있었다고?!”
인어와 말다툼을 벌여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젖은 해적이 분통을 내었다. 실제로, 그의 몸에선 역한 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야... 야이 자식들아!”
스미는 반쯤 우는 얼굴로 그들을 껴안았다. 스미의 멱살을 잡으려 가까이 다가갔던 해적이 먼저 포옹 봉변을 당해버렸다. 끈적끈적하고 비린내가 폴폴 났지만 스미는 괘의치 않아 했다. 그 다음 순서는 옆에 있던 매이슨이었다.
“뭐야, 뭔데 미친놈아!”
“징그러 저리 떨어져!”
“어허허헝!”
“울긴 왜 우는 건데?!”
해적들은 기겁하며 스미를 향해 욕을 하거나 주먹을 날렸다. 스미와 같은 소속인 후크 해적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끝내 스미는 그들의 바짓가랑이까지 당기며 질질 매달렸다. 그들은 재빨리 바지춤을 잡으며 스미에게 발길질을 했다.
“뭐냐고 이 새꺄!!”
곧이어 잠이든 아이들을 업고 나타난 후크 해적단은 이 추태를 못 본 척했다. 스미의 포옹을 당하고 있던 매이슨이 이 미친놈 좀 말려보라고 소리쳤지만, 후크 해적단은 무시했다. 같은 해적단 소속이라는 게 몹시도 창피했던 것이다.
“쟤, 우리 해적단 아니라고 해라.”
“쳐다도 보지 마.”
싸움 소리가 들려와 서둘러 풀숲으로 달려 온 라이츠도 말을 덧붙였다.
“배나 지키고 있을 것이지. 망신 다시키는군.”
이윽고 스미가 뒤로 나자빠졌다. 그의 몸에는 선명한 가죽신자국이 남아있었다.
스미는 해적들과 함께 배로 향했다. 말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보다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미를 욕했던 이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스미를 비롯한 다른 해적들 또한 처참한 사투를 벌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디언들의 사체나 요정들을 막기 위해 이 주변에 원 모양으로 뿌린 피가 섬뜩하게 보였다.
이 지경까지 됐으니 스미도 미쳤었던 모양이구나. 모두들 납득하고 말았다. 발길질을 한 해적이 미안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배 한 척을 지키지 못했다. 내 불찰이야.”
스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뭐, 없는 배를 찾아봐야... 그보다, 연기 봤다.”
“연기를 봤다니 더 이상 왈가왈부 안 해도 되겠군. 교대하자. 내가 이들을 이끌고 인디언 쪽으로 가겠다. 배를 잘 부탁한다.”
“얼른 다녀오기나 해.”
배를 지키던 스미는 함께 배를 지킨 해적들을 이끌고 인디언 영역으로 향했다. 남은 이들은 피해상황을 체크했다.
“괜찮으려나?”
“아마도. 아까 지진 이후로 인디언들이 눈에 띄게 줄었잖아. 공격도 안 하고 그냥 픽픽 쓰러졌으니,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거다.”
“우린 배를 정비하고, 출항 준비를 해두겠다.”
비린내 나는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해적들이 먼저 승선했다. 후크 해적단은 스미가 간 쪽을 쳐다보며 주변을 경계했다. 아이들을 업고 와서 피곤했지만 늘어져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졸리 로저 호에 눕혔다. 쿡슨과 멀린스는 잠이 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먼저 배에 들어갔다.
“배 한 척 없는 게 걱정이군.”
체코가 부서진 배를 쳐다보았다.
“글쎄. 배 한 척 없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스크가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왔군.”
흄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왜 이리 늦었냐며 욕을 된통 먹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시간을 지체한 터라, 스미는 흄을 비롯한 해적들과 날개 부족의 반응이 매우 의아스러웠다. 곧 이유를 알아챘다. 이들 사이에서도 몇 차례의 소요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너희가 여기에 있다는 건...”
“올 거라고 믿었다.”
흄은 스미에게 부상자와 사상자 수를 알려주었다. 사상자 수를 들은 스미는 부서진 배를 떠올렸다.
“그런가.”
스미는 애써 담담해지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있었다. 흄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하자, 그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이쪽은 괜찮아. 배도 있다. 많이 죽진 않았어. 그걸로 된 거야.”
그걸로 됐다. 스미의 말이 무겁게 떨어졌다. 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패를 나누긴 해야겠지. 우린 이대로 인디언들을 지키면서 배로 이동하겠다.”
“10명을 붙여놓겠어. 더 필요한가, 흄?”
“척후로 쓸 발 빠른 놈 하나 더.”
“알았다. 연기풀은 아직 가지고 있나?”
“있어. 하지만 또 쓰고 싶진 않아.” 흄 대신 퀵슬러가 대답했다. 인디언들을 버리고 가자고 끝까지 말다툼을 한 사람이 바로 퀵슬러였다. 어쩌면 지원이 안 올지도 모른다고, 우리끼리 살자고 주장했던 그였기에 스미를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스미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미안하다. 늦게 와서.”
“흥. 빨리 배로 오라고. 승선하자마자 술통을 열 테니까.”
흄은 코웃음을 쳤다.
패가 갈리고, 곧바로 늑대 부족 영역으로 향하려던 스미를 오리스 루트가 막아섰다. 그가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박박 우겼기 때문이었다. 다리를 절고 있는 주제에,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하는 오리스 루트는 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힘이 제일 센 해적 하나가 그를 업었다.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날개 부족 두 명이 길잡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또 한 명의 날개 부족은 오리스 루트를 업은 해적 옆에 서서 그를 도왔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알고 있겠지만-”
“압니다.”
오리스 루트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확인만 하면 됩니다. 그곳에 가서 확인만 하면.... 헛된 희망은 버리고 여러분 말에 따르겠습니다.”
행여 불타고 있는 네버랜드 곳곳을 샅샅이 뒤져 다른 인디언 형제들이 있는지 찾아달라는 어리석은 요구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사라졌다.
이내 그들은 늑대 부족의 부락으로 떠났다.
“형제들이여, 제발. 대지의 어머니, 부디 형제들에게 용기와 힘을!”
오리스 루트가 간곡히 빌었다. 이 기도문이 썩 좋게 들려서, 스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들에게 용기와 힘을. 선장님. 부디 살아 돌아오십쇼.’
스미는 엘사 J. 후크를 떠올리며 간원했다.
엘사 J. 후크. 네버랜드의 잔악무도한 해적 선장.
베리온 요새에 쳐들어 갈 때도,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 싸였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그녀는,
“잠, 잠깐만!”
말까지 더듬을 만큼 극한의 스릴을 겪고 있었다.
“크라켄!”
주변을 둥근 공처럼 얼음으로 감싼 채로 바다에 들어갔던 엘사가 본 건 네버랜드 따윈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괴수의 ‘발’들 이었다. 괴수의 발은 엘사와 안나가 든 얼음을 깨부술 듯이 휘어 감았다. 투명한 얼음 위에 크고 작은 빨판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엘사는 이를 악 물고, 안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엘사의 굳은 의지가 작용해서, 얼음의 강도가 단단해졌다.
괴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크라켄!”
주변이 요동쳤다. 이내 엘사는 괴수, 크라켄이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내, 내던지면 안-”
엘사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곧 엄청난 충격에 정신을 놓고 말았다. 자기 자신이 깨진 방울 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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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세 네편 정도 남았다. 진짜 끝이야 끝 ㅠㅠㅠㅠㅠ!!! 그리고 쓸게 아직 남았지. 아 돌겠 ㅜㅜ
psps. 많이 쓴건가 짧게 쓴건가 모르겠네. 원래 이보다 분량이 더 많았는데 필요 없어 보이는 게 너무 많아서 자르거나 다음 편 조각으로 남겨두거나 해서 글 올리는 게 늦었어. 미얀ㅠ 어색하게 보여ㅜ 지우지말까 그냥 끝까지 고칠까 하다가 영영 이번편을 못올릴것 같아서 손을 뗌. 으아 진짜
pspsps. 해적들이랑 에리얼이랑 욕배틀 장면은 정서상 생략합니다. 갱스터랩처럼 살벌했다고 합니다. 뱃사람들 기본적으로 말이 쎈데 이에 맞서는 인어 클래스 ㅎㄷㄷ
네버랜드에서 시계는 거꾸로 간다. 멋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여기서는 주로 엄청 큰 모래시계-상인들이 씀-를 쓴다.
스미는 현재 후크 해적단 최고참이고 갑판장이자 거의 부선장급. 엘사가 스미한테 원하면 부선장 자리 준다 ㅇㅇ. 했는데 스미가 거절함. 스미는 부선장에 어울리는 건 제이크밖에 없다고 생각함. 제이크처럼 멋진 해적이 되는 게 꿈.
엘사는 스미를 제이크처럼 든든하게 여겨서 대리 선장을 맡길 정도. 다만 가끔 꼴통짓해서 뒷목잡게 함.
pspspsps.
음. 역시 짧은 것 같아서 원작 피터팬의 일부를 발췌합니다. 나쥬미가 가지고있는 책보다 더 두꺼운 책 있길래 봐봄. 그리고...
'슬라이틀리 골짜기'의 인디언 전투를 예로 들까? 그것은 피로 얼룩진 싸움이었다. 이 싸움이 우리에게 흥미로운 이유는 피터의 독특한 버릇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피터는 싸움이 한창일 때, 갑자기 편을 바꾸곤 했다.
골짜기에서 전제가 막상막하였을 때, 피터는 갑자기 외쳤다.
"오늘 나는 인디언이다. 너는 무엇이냐, 투틀즈?"
그러면 투틀즈가 대답했다.
"나도 인디언이다. 너는 무엇이냐, 닙스?"
그러면 닙스가 말했다.
"나도 인디언이다. 너는 무엇이냐, 쌍둥이?"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인디언이 되었다. 만약 진짜 인디언들이 피터의 방법이 정말 재미있어 보여 이번에는 자기들이 소년이 되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싸움은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입장을 바꾸어 다시 싸움을 시작했고,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싸웠다.
이렇듯 인디언들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네버랜드는 사실 미친놈들의 섬이 아닐까 싶다. 에라 짜장면 먹다가 반쯤 남은거를 짬뽕으로 바꿔달라고 할 놈들이네
와 내가 가지고 있던 책만 봐도 피터팬 싸이코라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주는데 저게 순하게 표현된 책이었구나.... 그냥 네버랜드는 다 돌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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