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창작물은 위 조사표를 근거로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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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정묘년 8월 27일.”
어두운 조명 아래, 앞에 앉은 루스끼 장교 놈이 콧날을 찌푸렸다.
시작부터 이놈은 나와 우리 병사들을 마적떼 취급하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1867년이라는 뜻입니다.”
“좋아. 교육은?”
“국문을 조금 배운 것 외에는 없소.”
군모를 깊이 눌러쓴 장교놈의 눈에 경멸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배워먹지 못한 도적놈이라 이건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만주 벌판에서 아무 보급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 했으니까.
“직업은?”
“의병.”
“의병이 뭐야?”
“의로운 군대란 뜻입니다.”
“Блят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그런 비웃음을 들어도 중년의 장군은 할 말이 없었다.
얼마 전, 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떠난 후 자유시에서 벌어졌던 참변은 그에게 있어 트라우마로 남았다.
“사회적 지위는?”
“농사꾼이오.”
“하, 그럴 줄 알았지.”
“여타 발급받은 위임장이라도 있소?”
“없소. 내가 지휘하는 의병대가 곧 내 직업이자 위임장이오.”
루스끼 장교놈이 또다시 욕설을 씹어뱉었다.
젊은 시절, 홀몸의 장군이었으면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장군의 어깨를 살아남은 부하들의 목숨이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정당 또는 단체에 소속된 것은?”
“없소.”
“노동조합에 속한 것도?”
“없소.”
“도대체 네놈들은 그럼 뭘 믿고 마적질을 한 거냐?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미친놈 맞았지. 우리 부대원들에게 죄가 있다면 이런 모자란 우두머리를 믿고 따랐던 것일 뿐.
쏘고 또 쏘아 왜놈들을 모조리 넘어뜨리면 조국을 되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조선인의 독립 의지가 살아있음을 만방에 알리면 세계 어디선가는 도움의 손길을 뻗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른 판단이었던가…….’
정신적 피로에 눌린 장군은 눈을 감았다. 주름진 그의 눈가에 회한이 스쳐지나갔다.
미동도 없는 장군을 보고, 적군 장교와 통역은 코웃음을 치더니 남은 부분을 알아서 채워나갔다.
“국경을 넘은 일시와 장소는?”
“1921년, 이만(달레네첸스크)에서일 겁니다.”
“이 자와 이 자의 수하들이 프리모리예(연해주)에 얼마나 머물렀나?”
“까레야가 이포니아에 국권을 침탈당했을 때부터니…… 16년째군요.”
“보급도 없이? ……대단한 미친놈들 같으니.”
순간 장교의 눈빛이 호의적으로 바뀌었으나 눈을 감은 장군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말수를 잃었던 장교는 곧 자신의 임무를 자각하고 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마지막 질문이다. 러시아로 넘어온 목적은? 무엇을 원해서 남의 나라까지 넘어 왔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군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방금까지 생기를 잃고 후회가 가득하던 눈빛에는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마치 방금 질문이 장군에게 살아갈 의지를 불어넣어준 것 같았다.
“목적이라…….”
“여기서는 마적질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다. 얌전히 콜호스에 틀어박혀 당을 위한 식량 생산에나 몰두해야 하겠지.”
적군 장교가 킬킬거렸다. 장군도 방금까지는 그럴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 빈정거림은 장군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질문 하나가, 타들어가 재만 남아있던 장군의 가슴에 마지막 불길을 옮겨붙이고 말았다. 바짝 마르고 갈라진 장군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으로 넘어온 목적은…….”
“그래, 목적은?”
“대한 독립이오. 완전하고 자주적인 조국의 독립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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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웅은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얼마 전 강철의 서기장이 내린 결정 때문에, 프리모리예 지방에 사는 고려인 20만은 카자크 인들의 땅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 결정을 늙은 장군에게 전하는 장교는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그리 죄스러워 하지 마시오. 당에서 내린 결정에 당신이 무슨 책임이 있겠소.”
“이포니아 첩자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까례이치들을 전부 옮긴다니……. 이건 제 생각에도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쉿, 누가 듣겠소. 동무는 말을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소.”
늙은 장군은 따라놓은 보드카 잔을 단숨에 비워내더니, 도리어 장교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전해왔다. 그런 장군을 앞에 두고, 장교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가시면 언제 돌아오시게 될지 모릅니다. 이미 70세를 향해 가시는 노구가 아니십니까. 이번이 저와 보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 나는 살 만큼 살았소. 오히려 나만 보고 따라온 조선인들이 이역만리 낯선 땅에 놓이게 생겼으니, 나라도 가서 조금이나마 힘을 더 보태야지요.”
장군은 허리춤에 찬 권총집을 툭툭 두드리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그 권총, 장교도 알고 있다. 소비에트의 아버지 레닌이 직접 내려준 은장 권총이다.
“하지만…….”
“됐소. 동무는 동무의 위치에서 나를 도와주시오. 우리 조선인들이 이주할 곳에 소개장을 써 준다든지, 교통의 편의를 봐 준다든지, 그런 일은 해 줄 수 있지 않겠소?”
“물론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하지만 제 힘은 너무나 미약하고, 제가 챙길 수 있는 고려인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번 강제이주에는 분명 수많은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후. 깊은 한숨과 함께, 장군의 눈꺼풀이 닫혔다. 장교는 그런 장군에게 눈을 맞출 수 없었다. 그저 비어있는 보드카 잔을 채우는 수밖에.
“알고 있소. 이것이 나라 잃은 민족의 숙명 아니겠소.”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 이것 하나만은 알아두시오. 당신은 내가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했지만, 그렇지 않소.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오.”
“예?”
돌아온다니, 어떻게?
장군은 소비에트로 들어온 이후 총을 내려놓고 농사에만 전념했다. 게다가 상대는 그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군이 프리모리예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물론 내가 돌아갈 곳은 이곳 연해주가 아니오.”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언젠가 당당히 가슴을 펴고 고국으로 귀환할 것이오. 그리고 위대한 자주독립을 성취한 조국의 품에 안겨 잠들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그리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소.”
장교의 가슴을 가볍게 해 주려는 것이었을까, 장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마주잡아왔다. 그런 장군을 보는 장교의 눈시울은 붉어질 뿐이었다.
“내가 독립운동을 할 적에는 ‘하늘을 나는 호랑이’라 불렸소. 그깟 국경과 산맥과 바다 따위, 나를 막을 수 있을 리가.”
“…….”
“우리, 이별할 때만은 담담히히 이별의 축배를 듭시다. 그동안 나와 우리 조선 사람들을 지원해주어서 고맙소. 내 잊지 않으리다.”
장군은 비어있는 반대편 손으로 보드카 잔을 들었다. 장교 역시 홀린 듯 장군의 행동을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건배사는 무엇이 좋을까……. 그냥 늘 하던 걸로 합시다.”
“늘 하던 것이라 하시면…….”
장군은 들고 있던 보드카 잔을 높이 쳐들었다. 그의 눈길은 투명한 술잔 너머, 그리운 고국을 향해 있을까.
“대한 독립 만세! 까레야 우라(Корея ур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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