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1일 내가 탄 ‘코스타루미노스’크루즈 선 9층 공동 사우나에서 겪은 일이다. 그곳 안내 데스크의 백인여자한테서는 은근히 냉냉한 기운이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거의 유럽인들 승객 속에서 촌스럽게 생기고 어설픈 한국인인 나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그런 것인지 나의 왜곡된 감정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내가 데스크 뒤에 있던 얼굴이 거무스름한 흑인계통의 여직원에게 목욕가운을 달라고 할 때였다. 그 옆에 있던 책임자인 백인여자가 나를 보면서 날카롭고 빠른 어조로 직원에게 뭐라고 소리쳤다. 뭔가 나를 욕하는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백인여자의 속에 있던 불쾌한 감정이 파도처럼 내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나는 얼굴이 검은 담당 여직원에게 어눌한 영어로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습니까?”
나는 내가 왜 백인여자의 불쾌한 감정의 대상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할 수도 있었다. 먼저 그것부터 살펴야 할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하신 거 없습니다.”
피부가 까만 여자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뭔가 둘러대는 듯 했다. 나를 무시하는 감정 속에서 높은 톤의 말을 한 건 틀림없었다. 분명히 따져 두어야 할 것 같아 그 흑인여자에게 말했다.
“지금 저 백인 여자가 당신에게 했던 말을 정확하게 종이에 그대로 글로 써 주세요.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써 놓은 글은 내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목욕하고 나 올 동안 써 놓으세요. 강력한 요청입니다.”
내가 화를 내거나 급한 모습을 하면 지는 것이다. 침착하고 품위있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할 것 같았다. 한 시간 쯤 후에 다시 그 자리로 갔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다른 여직원이 안내 데스크 뒤에 서 있었다.
“여기 있던 책임자 어디 갔습니까?”
내가 물었다.
“식사하러 갔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뭔가 메시지의 교환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눈이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글을 써 놓은 페이퍼가 있을 텐데 찾아봐 주세요.”
나는 안내 데스크의 뒤쪽을 보았다. 볼펜으로 글을 쓴 종이쪽지가 하나 보였다. 그 종이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달라고 했다. 그 내용은 이랬다.
‘목욕가운을 쓰신 후에 안내데스크에 반납하는 걸 명심해 주세요’
뭔가 내가 잘못한 것도 같은데 그 실수를 알 수 없었다. 책임자가 목소리를 높이는 정도면 실수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용한 목욕가운을 수거함에 넣었다. 그런데 물에 젖은 입었던 가운을 들고 나와 안내데스크 담당직원에게 반납해야 한다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들이 나를 목욕가운 도둑놈으로 생각하는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아까 여기 담당 책임자인 백인여자가 화가 난 높은 어조이던데 왜 그러죠? 나 가운을 내 선실로 가지고 간 적도 없어. 할 말이 있으면 나에게 직접 하지 왜 다른 직원을 통해 내게 그런 방식으로 기분 나쁘게 메시지를 전달하죠?”
그 백인책임자는 나를 깔보고 의심하는 눈길이었다.
“아니 그게 절대 아닙니다.”
그 직원의 눈이 완연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도 모두 영어가 약합니다. 그래서 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직원에게 손님에게 메시지를 전하라고 시키는 겁니다.”
“그 백인여자 어디 사람이예요?”
“네덜란드입니다.”
“검은 여자는요?”
“포르투갈 출신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왜 내가 입었던 젖은 가운을 수거함이 아닌 안내데스크에 그대로 반납해야 하는 지 그 룰을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글로 써서 주세요. 그리고 그 글에는 내가 불쾌감을 느꼈던 백인책임자의 싸인을 첨부해 주세요.”
나는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으면 배의 선장이나 선사의 사장에게 진정을 할 생각이었다. 해외에 나가면 본능적으로 주눅이 들고 위축되는 수가 있다. 이제는 잘했으면 잘한대로 실수했으면 실수한 대로 당당한 태도를 지녀야 할 것 같았다. 오해를 받거나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는 침착하게 하나하나 따져 나가야 한다. 다음날 오전 나는 말없이 그 안내데스크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다른 백인 승객들 중에 입던 가운을 그 안내데스크에 가져다 주는 사람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우나로 들어가서 그곳에 있는 몇몇 백인들에게 입고 난 목욕가운을 수거함에 넣는지 아니면 입구 안내데스크에 가져다주는 지 확인해 보았다.
그 백인 책임자가 있길래 그에게 재차 확인해 보았다. 결론은 간단했다. 가운은 누구나 자기 선실까지 가지고 가서 여행기간동안 마음대로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때가 타면 그 안내데스크로 가지고 가서 세탁을 하라고 주고 다른 가운을 빌려 입는 시스템이었다. 분리수거해서 세탁하는 걸 모른 나의 실수였다. 그렇지만 백인책임자는 내게 그걸 사전에 설명을 했어야 했다.
“그러면 처음에 가운과 타올을 분리수거한다고 내게 알려줬어야 하죠?”
내가 백인여자에게 말했다.
“노 프라블럼”
그 책임자의 대답이었다.
“노 프라블럼이라니? 그건 예스 프라블럼이야 설명을 하지 않은 당신 책임이라구.”
그 책임자는 무슨 소린지 모르는 눈치다. 대충 그걸로 오해를 풀기로 마음먹었다.
“가운 내놔 가져가야겠어.”
백인 책임자는 벽장에서 깨끗한 가운 하나를 꺼내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들에게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 돈 버는 영어가 힘들지 돈 쓰는 영어는 쉬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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