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인생 후반전에서

운영자 2020.02.17 10:37:30
조회 193 추천 4 댓글 0
헌책방에서 소설가 ‘최인호’의 ‘산중일기’라는 수필집을 사서 읽었다. 문득 그가 죽었다고 보도된 신문의 기사가 떠올랐다. 미소를 짓는 그의 사진이 있고 그의 작가로서의 삶을 소개한 내용들이었다. 수필집의 마지막 장에 있는 발간연도를 보았다. 이천팔년이었다. 인터넷으로 그가 죽은 해를 찾아보았다. 이천십삼년이었다. 그가 죽기 오년 전 건강할 때 쓴 수필이었다. 그는 몇 년 앞으로 닥쳐온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목욕탕 사우나실에서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를 만나 얘기하기도 하고 스님한테 ‘해인당’이라는 나무현판을 받아 집에 걸어놓고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작가인 그는 인생 후반에는 글을 보다 천천히 또박또박 써야겠다고 결심을 하기도 한다. 그가 몇 살에 죽었나 계산기를 두드려 봤다. 예순여덟 살에 그는 죽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나이에 죽는다면 나는 내년에 죽는다. 혼자 생각해 봤다. 내년에 죽는다면 나는 지금 뭘 해야지? 주변의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부장판사를 했던 제일 친한 친구는 즐겁게 인생의 노년을 보내고 있다. 오카리나를 배워 초등학교 교실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노인복지관에 가서 명상을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려 마작을 하고 이따금씩 골프를 치고 산다. 그는 뒤늦게 지루박 춤을 배워 콜라텍에 가 봤다고 자랑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주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던 동창은 퇴직 후 공항에서 주차대행을 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생활비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일 자체를 하고 싶어서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감기가 걸려 이틀 쉬었더니 더 이상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얼마 후 목공소에 취직을 했다. 요즈음은 나무를 다듬고 가구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반면 법조인 선배의 대부분은 젊어서 묶였던 습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양복을 입고 사무실에 나가 신문이라도 펼쳐야 마음이 안정된다고 했다. 하루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공허한 방에 혼자 앉아있다고 오더라도 그게 편안하다고 했다. 짐승들을 말뚝에 묶어 키우면 어느 날 그들을 매어둔 끈이 풀어져도 갈 줄 모르는 것과 흡사하다. 며칠 전 중앙일보를 보다가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함경을 비롯해서 방대한 초기불경을 십여년간 번역해서 책을 낸 인물을 소개한 것이다. 사진을 보니까 아는 얼굴이었다. 사십 이년 전 나와 그는 법무장교로 입대해서 광주의 상무대 벌판에서 군복을 입고 같이 훈련을 받았다. 내무반에서도 바로 옆자리에 누워서 자는 사이였다. 한번은 그가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내 전투화에 오줌을 누어 버린 바람에 곤혹을 겪은 적도 있었다. 그는 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변호사를 했다. 그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법원 앞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때 한 번 보고 그 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신문에서 불경을 번역하고 해석한 인물로 등장한 것이다. 벽지의 시골 판사로 가서 혼자 살면서 그 작업을 해 냈다는 내용이었다. 노년의 사는 모습들이 여러 가지다. 교수로 있다가 정년퇴직을 한 친구는 삼년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매일 집과 도서관을 오가면서 장자를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나도 인생의 후반전이다. 죽어도 자식부터 시작해서 모두들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할 나이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한다. 평생을 해 온 변호사업은 바꿀 필요가 없어서 좋은 것 같다. 건강이 받쳐주고 정신이 있을 때까지 할 수 있다. 삼십 년 넘는 경험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법정에서 젊은 변호사들을 볼 때 그 노하우를 전수해 주고 싶을 때도 많았다. 돈을 따라가면 일이 없지만 일 자체를 하려면 아직 얼마든지 할 게 널려있다. 손자손녀 에게 먹일 피자와 파스타 값은 충분히 나온다. 인생 후반전에서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나 자신의 삶을 정비하려고 한다.

추천 비추천

4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경제관념 부족해서 돈 막 쓸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5/13 - -
3351 좋은 사람의 기준을 깨달았다 운영자 24.05.13 11 1
3350 너도 도둑이지만 윗놈들이 더 도둑이야 운영자 24.05.13 9 0
3349 국무총리와 도둑 누가 거짓말을 했을까. 운영자 24.05.13 11 0
3348 도둑계의 전설 운영자 24.05.13 11 1
3347 바꿔 먹읍시다 운영자 24.05.13 10 0
3346 반갑지 않은 소명 운영자 24.05.13 9 0
3345 대도 사건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 운영자 24.05.13 7 0
3344 재판을 흥미성 보도자료로 만듭니다. 운영자 24.05.06 49 1
3343 부자들의 비밀금고 운영자 24.05.06 53 1
3342 죄 값 이상을 강요할 권리가 있나? 운영자 24.05.06 39 0
3341 입을 틀어막히는 분노 운영자 24.05.06 40 0
3340 변호사로 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운영자 24.05.06 43 0
3339 도둑 일기 운영자 24.05.06 44 1
3338 숯불 나르는 청년의 외침 운영자 24.05.06 41 1
3337 당신은 꽂히면 바로 내 지르는 사람이야 운영자 24.04.29 72 1
3336 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세요 운영자 24.04.29 55 1
3335 도대체 저의가 뭡니까? 운영자 24.04.29 60 1
3334 기억 사진첩 속 어떤 재판광경 운영자 24.04.29 52 1
3333 내가 체험한 언론의 색깔 운영자 24.04.29 58 1
3332 변호사란 직업의 숨은 고뇌 운영자 24.04.29 60 1
3331 저세상으로 가는 법 운영자 24.04.29 64 1
3330 인권변호사의 첫걸음 운영자 24.04.22 86 1
3329 깨어있는 시민의 의무 운영자 24.04.22 76 1
3328 죄수가 전하는 사회정의 운영자 24.04.22 85 1
3327 이민자의 슬픔 운영자 24.04.22 87 1
3326 강도에게 성질을 냈었다. 운영자 24.04.22 77 1
3325 외국의 감옥 운영자 24.04.22 80 1
3324 벗꽃 잎 같이 진 친구 운영자 24.04.15 110 1
3323 조용한 기적 운영자 24.04.15 114 2
3322 감옥은 좋은 독서실 운영자 24.04.15 91 1
3321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 운영자 24.04.15 89 1
3320 미녀 탈랜트의 숨겨진 사랑 운영자 24.04.15 112 1
3319 두 건달의 독백 운영자 24.04.15 95 1
3318 명품이 갑옷인가 운영자 24.04.15 83 1
3317 나는 될 것이라는 믿음 운영자 24.04.15 90 1
3316 오랜 꿈 운영자 24.04.08 108 2
3315 그들은 각자 소설이 됐다. 운영자 24.04.08 119 1
3314 나이 값 [1] 운영자 24.04.08 171 1
3313 검은 은혜 [1] 운영자 24.04.08 166 3
3312 실버타운은 반은 천국 반은 지옥 [1] 운영자 24.04.08 174 2
3311 늙어서 만난 친구 운영자 24.04.08 101 1
3310 그들을 이어주는 끈 [1] 운영자 24.04.01 292 2
3309 그가 노숙자가 됐다 [1] 운영자 24.04.01 190 3
3308 밥벌이를 졸업하려고 한다 [1] 운영자 24.04.01 194 2
3307 허망한 부자 [1] 운영자 24.04.01 211 2
3306 죽은 소설가가 말을 걸었다. [1] 운영자 24.04.01 193 2
3305 개인의 신비체험 [2] 운영자 24.04.01 197 2
3304 나는 책장을 정리하고 있다. [1] 운영자 24.04.01 185 2
3303 노인의 집짓기 [1] 운영자 24.04.01 184 1
3302 똑똑한 노인 [1] 운영자 24.03.25 221 2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