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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기적

운영자 2024.04.15 10:28:21
조회 76 추천 2 댓글 0

식물인간이 된 노인의 병실로 문안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노인은 의사고 믿음이 깊은 분이었다. 진료하고 기도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게 생활의 전부였다. 침대 옆에 있던 그 노인의 늙은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이 양반이 진료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응급실로 갔는데 뇌촬영을 한 의사들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어요. 원인 모르게 소뇌에서 갑자기 피가 박카스병 하나 정도 나왔대요. 특히 소뇌 쪽은 수술이 어렵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바로 수술을 해서 생명은 건졌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십삼년간 식물인간으로 있으면서 나이 팔십을 맞이했네요.”

그는 그런 상태에서 육십대 칠십대를 지나 팔십대가 됐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속에서 그는 깊은 수면에 빠져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을까.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이 양반이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왔어도 정직하고 성실했어요. 같이 평생을 살았어도 일탈을 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이런 양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모르겠어요. 병원에 있어도 경제적으로 누구 신세를 지지 않았어요. 자기가 번 돈으로 자신이 쓰고 있어요. 저도 당뇨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데 걱정이예요. 이 양반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죽어야 할텐데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돌아가셨으면 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그래도 피가 돌고 살아서 숨쉬는 영감을 보고 혼자 이얘기 저얘기 하면서 넋두리하면 그래도 무덤에 대고 하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은 자신을 성실하게 믿는 사람을 심한 곤경에 빠뜨리는 걸 자주 봤다. 인간은 누구나 성경 속의 욥이 아닐까. 그의 생애는 욥의 그것일지도 모른다. 믿는다고 부귀영화가 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빼앗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내 또래의 변호사가 있었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특허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으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그가 어느 날 완전히 변한 모습으로 나타나 이런 얘기를 했다.

“차를 몰고 퇴근을 하는 데 핸들을 잡은 팔이 조금 무겁게 느껴졌어. 과로를 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지.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신문을 펼쳐 들었는데 이상하게 팔이 계속 묵지룩한 거야. 그때 싱크대에 있던 집사람이 환기를 해야겠다면서 나보고 창문을 열어달라고 했어. 창문을 열기 위해 손을 위로 올리다가 ‘어어’ 하면서 쓰러졌지. 응급실로 실려갔는데 의사들은 뇌졸증이라고 생각하고 뇌 단층촬영을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원인을 찾아내려고 검사란 검사는 다 했는데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고 몸은 점점 더 마비되어가는 거야. 나는 그냥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어. 그런데도 정신은 물로 씻은 듯 맑았어. 의사들이 내가 아무것도 의식 못하는 걸로 알고 내 옆에서 하는 소리를 다 들었어. 전신의 말초신경이 파괴되는 특수한 증상인데 신경세포가 그렇게 죽으면 영원히 식물인간이라는 거야. 의사가 아내한테 모든 걸 포기하라고 말하는 걸 나는 옆에서 들었어.”

나는 갑자기 끝없이 깊은 구덩이 속에 빠진 그의 공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나는 분노했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댓가가 이거냐고. 남들은 다 멀쩡한데 나만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느냐고 말이지. 그렇다고 몸을 움직일 수 있나 말을 할 수 있나 소금기둥같이 된 내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어. 나는 하나님한테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어. 중환자실 천정을 보면서 마음으로 소리치고 몸부림을 쳤지. 가래가 끓는데도 간호사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거야. 어느 날 밤 아내가 내 옆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걸 봤어. 차츰 체념이 들기 시작했어. 산다는 게 헛되고 부질없는 거야. 그러면서 하나님한테 간절하게 빌었지. 기적을 한 번만 베풀어 달라고. 나 같은 이기적인 옹졸한 인간이 믿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증인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지. 저런 인간도 믿으니까 하나님이 있긴 있는 모양이지라고 사람들이 말할 거라고.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났어. 갑자기 발가락이 간지러운 것 같았어. 그리고 원인 모르던 마비가 저절로 풀린 거야.”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전에 보던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식물인간이 되었던 의사와 변호사를 보면서 생각해 보았다.

생활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함이 조용한 기적이 아닐까. 어떤 사고가 발생해야 사람들은 평온함의 귀중함을 안다. 행운이란 뭘까. 병이 없는게 행운이 아닐까. 행복은? 사랑하는 가족과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건 아닐까. 아침에 자고 일어나 바다위의 작은 빨간등대와 찰랑이는 물결을 보면서 오늘 내가 부활한 걸 감사한다. 어제 밤 잠들면서 죽고 오늘 내가 다시 태어났다. 칠십부터는 하루하루를 특별히 받은 보너스로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을 인생의 첫날처럼 그리고 마지막날 처럼 즐기며 살아야겠다. 건강하게 살아서 숨을 쉬고 있음이 엄청난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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