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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지 못하는 소설가들

운영자 2020.12.21 09: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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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지 못하는 소설가들


여름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이십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아들의 변호를 맡긴 가난한 소설가가 사무실을 찾아왔었다.

“저는 ‘시민과 변호사’라는 잡지에 소설을 연재했습니다.”

그게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운 소개였다. 어렴풋이 읽은 기억이 났다. 당시 감옥에 있던 그의 아들을 종종 만났다. 아들은 돈을 벌어 언젠가는 아버지가 쓴 소설들을 출판해 드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소설을 써도 그게 책으로 되어 나오기는 정말 힘이 드는 것 같다. 십 이년 전쯤이었다. 광화문의 다방 ‘가을’에서 원로 소설가 정을병씨를 만났었다. 그는 소설가 최인훈, 이청준씨와 함께 문학계의 높은 봉우리였다. 병아리 소설지망생들은 감히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칠십 대에 쓴 작품원고를 내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인생 마지막에야 제대로 된 문학작품을 쓴 것 같아요. 여태까지 칠십 권이 넘게 쓴 소설이 국립도서관에 있지만 그것들은 다 쓰레기야. 이 작품이 나의 영혼이 담긴 진짜요.”

그의 표정에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성취감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잠시 나를 살피더니 이런 부탁을 했다.

“그래도 내가 문학계에서 이름이 약간 있는데 내가 출판사에 원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부탁하기엔 체면이 걸림돌이 되요. 엄변호사가 대리인이 되어 그 역할 좀 맡아주셨으면 고맙겠는데 말이요.”

“그러시죠”

나는 그의 부탁을 선뜻 받아들였다. 순진한 생각에 그의 유명도를 생각하면 일류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달려들 것 같았다. 그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내 작품이 대중성을 좀 벗어난 문학이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겁니다.”

다음날 나는 중앙일보 산하의 출판사 사장으로 있는 친한 친구에게 부탁했다. 그의 편집장을 통해 정중한 거절이 돌아왔다. 다음은 출판계에서 앞서가는 김영사 사장에게 원고를 보냈다. 그곳에서도 돌아온 대답은 깍듯한 예의를 취한 거절이었다. 유명출판사들은 하루에도 인터넷을 통해 수십 편의 소설 원고들이 들어오는 사실을 알았다. 출판사에서는 인터넷으로 접수된 소설 원고들이 공개경쟁을 치르게 한다는 것이다. 원고 백 편이 들어와도 그중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김영사의 사장은 자기회사에서는 문학작품을 취급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웅진출판사에 접수해 보라고 권유해 주었다. 사장을 안다거나 유명도가 있다고 꼭 소설책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민망한 마음으로 노작가인 정을병씨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출판사마다 보는 눈과 가치 기준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오십년 문학의 외길을 걸어온 소설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수 없는 거절과 다른 의견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 한 후원자에 의해 그의 원고는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금년 추석 무렵 이천에 있는 ‘부악문원’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소설가 이문열씨가 제자들을 키우는 사숙 비슷한 곳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그가 근래에 쓴 작품 얘기가 나왔다.

“작품을 완성했는데 발표할 문학지가 없는 거예요. 세상이 편가르기를 하니까 문학지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지성’에서 내 원고는 실어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몇 편의 칼럼 때문에 우익의 아이콘 유사하게 된 작가였다. 문학계도 좌우로 갈리어 반대하는 편의 작품은 실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돈이 되야 책을 만드는 상업성과 편 가르기 정치성에 걸려 좋은 작품들이 세상에 나오기가 힘든 것 같았다. 나는 이따금씩 서점에 간다. 금박 은박으로 화려하게 디자인 된 표지들이 날 좀 봐주세요하고 천박한 손짓을 한다. 몇 장 들추어 얼핏 내용을 보면 얼굴을 찡그리게 되고 뭔가 속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책 한 권 사지 못하고 빈손으로 서점을 나올 때면 공허한 마음이다. 훌륭한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어둠 저쪽으로 사라지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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