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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밭에 떨어진 노래

운영자 2022.04.11 10:01:30
조회 92 추천 0 댓글 0

열여덟살의 어느 봄날 정오무렵이었다. 나는 까까머리에 빛바랜 검정교복을 입고 어둠침침한 독서실의 구석 칸막이 책상 앞에 있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양철 도시락 안의 굳어진 찬밥과 작은 병에 든 김치를 반찬으로 먹고 도시락 뚜껑에 담긴 물을 마셨다. 내게 그 시절은 춥고 어둡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독서실 구석의 벽 위 쪽으로 손바닥만한 작은 창이 있었다. 더께 앉은 창은 유리가 금이가고 쪽이 떨어져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구멍으로 서늘한 느낌의 노래가 물같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긴 밤 지새우고’

내 또래 가수 양희은의 젊은 기운이 담긴 가사였다. 절망의 깊은 밤에 기다리는 푸른 새벽이 느껴졌다. 멜로디가 동굴 같은 내 귀를 타고 들어와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주변의 어둠이 바래어지면서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나의 영혼속 광경은 검은 새벽과 이어지면서 서서히 헤어지는 붉은빛깔로 물드는 것 같았다. 그 노래는 당시 어둠침침하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독서실의 풍경과 함께 추억의 한 장면이 되어 평생 남아있다. 노래는 영혼의 소리다. 노랫말이 현상 너머의 어떤 의미라면 멜로디는 여러 색깔의 감정이 아닐까. 팝송도 좋아했었다. 멜로디에서 감성은 느껴지는데 언어의 벽이 있으니까 영혼속으로 침투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사만으로 노래가 되지 않듯이 멜로디만으로도 노래는 되지 않았다. 내가 군인이 되어 고된 훈련을 받을 때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군가를 부르게 했다. 그냥 따라 부르다가 이런 가사 한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부모 형제 우릴 믿고 단 잠을 이룬다’

내가 군인이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점령을 당하면 나뿐 아니라 주위의 가족들이 죽는다. 역사를 보면 전쟁은 인간도살이었다. 죽지 않으면 포로가 노예로 평생 짐승의 삶이다. 노래 한 소절에 담긴 진리는 철학보다 깊고 실감이 났다. 가족과 사회와 나라는 동맹을 맺은 강대국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이년째 되던 해에 아내와 다툰 일이 있었다. 서로 힘이 들었다. 아내가 두살박이 딸을 데리고 친정 오빠 집으로 갔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나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지하상가를 걷고 있는데 전파사 문앞에 놓여있는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통기타 가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린 노래였다. 성경속 사랑의 진리가 머쉬멜로 같이 부드럽고 달콤한 멜로디에 실려 파도같이 마음 기슭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아파트로 돌아와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거래. 미안해”

그렇게 화해가 됐다. 진리가 노래가 되고 그 노래는 영혼을 강하게 흔들었다. 노래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지진같이 뒤흔들었던 것 같다. 유럽의 속담 중에 “나에게 하나의 작은 노래를 만들게 하라 그러면 나는 온 국민을 움직이리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인들의 ‘라 마르세이유즈’같은 노래는 군대보다 강한 자유민주혁명의 추진력이었다. 노래는 어떤 이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국민의 이상을 나타내는 하나의 작은 노래가 그런 나라를 만든다. 철학자가 대저작으로 백년 걸려도 할 수 없는 일을 시인은 한편의 노래로 만들어서 한순간에 할 수 있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될 때 ‘손에 손잡고’라는 노래 가사를 들으면서 마음이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월드컵 축구 응원 때 ‘대한민국’이라고 하면서 박수를 치는 순간 애국심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가수 조용남씨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화합을 ‘화개장터’라는 노래로 하고 있다. 좋은 노래는 인간의 영혼에 향기가 나게 하는 것 같다. 절의 스님들은 매일 새벽 청정한 시간에 낭랑한 소리로 염불을 한다. 그건 진리를 담은 노래가 아닐까. 나도 수시로 찬송을 한다. 노래인 동시에 소리나는 기도이기도 하다. 대철학은 노래 한 소절에 있는 것 같다. 어릴 적 고향도 추억속 유행가의 한 토막안에 있는 것 같다. 오늘은 노래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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