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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의 추억

운영자 2022.04.18 1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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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의 작은 책방에서 에세이집 한 권을 샀다. 아무 연고도 없는 동해 바닷가로 내려와 삶을 개척해 가는 젊은 부부의 삶을 쓴 글이었다. 아파트에만 살던 그들은 단독주택이 로망이었다. 작은 텃밭을 가꾸고 옥상에서 햇볕을 받으며 빨래를 널고 동네 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고 집안 구석구석을 취향대로 마음껏 꾸미며 사는 삶이었다. 그러나 연탄이 복병이었다. 매일 밤과 새벽마다 불이 꺼지지 않게 연기를 뒤집어쓰며 새 연탄을 갈고 다 쓴 연탄은 봉투에 넣어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까지 끙끙대며 옮겨야 했다고 한다. 그들이 원룸으로 집을 옮기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연탄이었다. 그들에게 연탄은 불편하고 낡은 연료였지만 내게 연탄은 세월 저편에 있는 아련한 추억의 상징이다. 뇌리에 남아있는 어린시절의 잔영이 있다. 날이 선 칼바람이 부는 겨울 어느날 하루의 노동을 마친 아버지가 새끼줄 매듭에 얹힌 연탄 한 장과 동태 한 마리를 들고 미로같은 산동네길을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한방에서 오골거리며 자는 그 가족에게 연탄 한 장은 따뜻함이었다. 대여섯살 무렵 동네 주점 낡은 유리창문을 열고 술을 마시던 아버지를 찾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만든 화덕 에서 까만 연탄이 구멍마다 파란불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 위에 놓인 석쇠판에서 돼지고기가 기름을 떨어뜨리며 지글지글 노랗게 구어지고 있었다. 연탄불이 주점의 냉냉한 공기를 데우고 그 속에서 말들이 허공에 솟아 들끓고 부딪치곤 했다. 김장철이 지나면 집집마다 겨울을 날 연탄을 들이곤 했다. 가난했던 그 시절 한겨울에 김치 한독과 쌀 한가니 그리고 연탄 이 백장은 풍요한 겨울을 상징했다.

그 시절 연탄은 가루 한줌도 귀했다. 더러 연탄이 부서지기도 하고 물에 적셔져 뭉개지기도 했다. 연탄을 다시 만들어 주는 직업도 있었다. 등에 무쇠로 만든 연탄형틀을 지고 연탄 고치라고 골목길을 소리치며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는 그 사람을 불렀다. 나는 대문 앞에 앉아 그 사람이 연탄을 고치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 사람은 골목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광에서 부서진 연탄들과 가루들을 가져다 물에 개어 연탄의 무쇠 형틀에 그 가루들을 부어넣었다. 그리고 커다란 나무 함마로 형틀의 숫덮개를 내려쳐서 압력을 가하면 잠시 후 형틀 안에서 단단해진 까만 연탄이 새로 탄생했었다. 연탄의 부활이 신기하기만 했었다.

연탄은 사명을 다한 마지막에 하얗게 색이 바랜 채 집집마다 대문 옆에 포개져 있었다. 타고난 연탄재는 얼어붙은 겨울 산동네 언덕길 빙판 위에 뿌려져 사람들을 안전하게 걷게 했다. 골목에 똥이 있을 때 연탄재를 뿌린 후 삽으로 치우기도 했다. 연탄재는 이따금씩 화가 난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 시인은 그걸 보고 시를 만들었다. 연탄재 차지 마라. 네가 한 번이라도 따뜻한 적이 있었느냐고. 연탄에 얽힌 추억이 참 많다. 데모로 휴교가 계속되던 대학시절 겨울이면 얼어붙은 북한강가 철지난 방가로에서 살았다. 그 마을 철물점에서 작은 무쇠 난로와 함석연통을 사다가 조립을 했었다. 이음새 부분으로 가스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연통에 청테이프 붙였다. 한겨울을 연탄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끓는 물에 다시다 한 봉지를 까넣는 간이 떡국을 만들어 먹기도 했었다. 새까만 연탄의 열아홉개 구멍에서 솟아오르는 파란 불은 얼어붙은 북한 강가의 날카롭고 모난 추위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결혼 초 아내는 연탄이 아홉장 들어가는 보일러에 도저히 연탄을 갈아 넣지 못하겠다고 했다. 연탄가스가 코로 들어오면 숨을 쉬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연탄을 가는 데는 프로선수급이었다. 쇠젓가락 집게로 하얗게 다 탄 연탄을 들어내고 새 연탄을 집어넣는데 그 아래 불이 남아있는 연탄과 열 아홉개의 구멍을 번개같이 정확히 맞추는게 요령이었다. 숨을 한번 들이쉬고 그걸 참는 사이에 여러 장의 연탄을 다 가는 게 실력이었다. 연탄은 내게 따뜻함의 아련한 추억이다. 칠십 노인인 내세대의 머리에 각인 된 낭만적인 연탄과 지금 세대의 연탄에 대한 인식은 많이 다른 것 같다. 연탄이라는 구시대의 물건을 통해 신세대와 정서의 차이를 한 번 떠올려 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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