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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살인(9)

운영자 2011.09.29 17:56:29
조회 267 추천 0 댓글 0

  그는 지독하게 운이 없는 사람이었다.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행운은 좋은 판사였다. 그는 최악의 판사들만 만났다. 일심을 담당했던 김 변호사는 담당판사가 현장검증신청도 묵살하더라고 했다. 아예 볼 것도 없이 살인범으로 단정한 것이다. 일심판사는 그대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항소심 판사도 교만으로 유명했다. 변호사들이 모두 싫어했다. 한 법정에서 그의 오만을 직접 목격한 일이 있다. 나이든 변호사가 항소이유서를 써서 제출했다. 재판장인 그가 법대 위에서 위압적인 눈빛으로 방청석을 휘둘러보면서 그 변호사의 의뢰인 가족을 불러 일으켰다. 영문을 모르는 가족이 벌떡 일어나 겁먹은 얼굴로 섰다. 재판장이 이렇게 내뱉었다.
 

  “여기 이 변호사가 항소이유서를 쓴 걸 보니까 차라리 피고인 본인이나 가족이 쓰는 게 훨씬 나았겠어, 이런 실력없는 변호사를 왜 선임한 거요?”
 

  자리에 앉아있던 늙은 변호사가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재판장인 그의 혀는 여지없는 도끼날이었다. 재판장의 한마디로 그 변호사는 법정을 나가는 동시에 의뢰인으로부터 해임될 게 틀림없었다. 담당변호사는 수첩에 몇 자 메모를 하고 있었다. 재판장인 또 그 변호사에게 시비를 걸었다.
 

  “뭘 메모하시는 겁니까?”

  변호사들은 흔히 다음 재판 일짜도 적고 메모들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재판장의 노골적인 시비였다.
 

  “저----”

  늙은 변호사는 주저하면서 말을 하지 못했다.
 

  “저희 재판부의 녹취나 서기를 믿지 못한다 이 말입니까?”
 

  재판장이 눈알을 부라렸다. 변호사석에 앉아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속이 끓어올랐다. 정 마음에 안들면 판결문에서 재판장의 의견을 나타내면 되는 것이다. 그는 판사가 아니라 자신이 왕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자기 밑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그런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불만을 가지지 않은 변호사들이 없었다. 그는 동료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것 같았다. 그와 방을 나란히 쓰던 판사가 퇴직을 하고 변호사가 됐다. 하루는 법정에서 나오는 전직 판사동료가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어쩔 줄 몰랐다. 법정에 들어갔다가 문서 작성을 이 정도 밖에 못하느냐고 호되게 수모를 당한 것이다. 그는 기자들에게도 판사는 변호사와 다르다고 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법관의 신분보장이라는 명분은 나쁜 판사가 절대 목이 잘리는 일이 없게 하는 제도였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을 고소하는 판사도 직책이 보장됐다. 혼자서만 흑을 백으로 판단해 세상의 분노를 산 판사도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성벽 뒤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강철윤이 그런 종류의 재판장에게 걸려든 것이다. 그는 더럽게 운이 없었다. 항소심 내내 재판 한 번 열리지 않았다. 재판조차 필요 없다는 오만한 재판장의 결론이었다. 마지못해 한번 열고 몇 분 만에 끝낼 게 틀림없었다. 그런 재판장에게 걸리면 대한민국은 법치국가가 아니라 전제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변론요지서도 증거도 그 재판장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휴지조각만도 못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갑자기 법관의 인사이동으로 재판장이 바뀐 것이다. 새로 온 재판장은 여성판사였다. 나도 조금은 아는 사이였다. 여성재판장은 내가 사법연수원에서 실무수습을 나갔던 법원의 판사였다. 이따금씩 복도에서 그녀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한번은 내게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나이 먹은 사법연수생에게 인정을 베푼 것이다. 성남의 외곽에 있는 작은 음식점으로 갔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그 판사가 이런 얘기를 했다.
 

  영국에서의 일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돼지 같은 새끼”라고 욕을 했다고 한다. 욕한 사람이 고소를 당해 판사에게 앞에 끌려나왔다. 판사는 그 사람을 이틀 간 돼지우리 속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돼지와 인간의 차이를 명확히 알고 가라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판사로서 여유와 인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주변의 평가도 좋았다. 지금까지의 오만한 재판장과는 달리 적어도 사정을 들어 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사건기록이 아니라 법대 밑에 있는 인간을 보려고 애쓰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간이 촉박했다. 재판장이라도 그걸 처리해야 할 법적인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재판장에게 그동안 있었던 상황들 그리고 내가 듣고 보고 이면에서 발견했던 사실들을 글로 자세히 써서 제출했다. 수십 개의 사건 중에 강철윤 사건을 섞어 몇 분 만에 그냥 끝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법원에서 기일소환장이 날아들었다. 재판장은 강철윤 사건만을 위해 아예 특별기일을 잡도록 결정했다는 것이다. 극에서 극으로 바뀐 재판장의 태도였다. 역시 마음이 열린 재판장의 반응은 달랐다. 고등법원 302호 법정에서 재판이 열렸다. 새로운 여성 재판장이 나에게 말했다.
 

  “심리기일에 너무 매이지 말고 여유 있게 하시죠. 제가 다른 범죄사실을 기준으로 만들어 재판기간을 다시 4개월 연장했으니까요.”
 

  재판장의 성의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꺼져가는 재 같던 강철윤사건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재판이 열리던 날 나는 새로운 재판장 앞에서 강철윤에게 물었다.
 

  “항상 머리를 빡빡 깍았죠?”

  재판장에게 핵심쟁점을 부각시키려는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피고인의 머리는 어떤 형태였나요?”
 

  “그날도 빡빡 이었습니다.”
 

  내가 만난 전날 밤 함께 지낸 군대후배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유일한 목격자인 주부는 범인이 스포츠 머리였다고 진술했다. 다른 사람의 범죄 가능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죽은 여자의 주변 남자 중 스포츠 머리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이 있다면 말씀해 보시죠”
 

  “그 여자의 남동생이 스포츠 머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와 가까이 지내던 남편 친구 중에 스포츠머리를 한 사람이 더 있었어요.”

  나는 남편의 친구라는 사람을 한편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남편 친구가 스포츠머리라는 걸 어떻게 알았죠?”

  내가 그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물었다.
 

  “한번은 그 여자를 집근처까지 데려다 주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문 앞에서 어떤 남자가 치근덕거리는 걸 봤습니다. 그 사람이 남편의 친구였습니다. 죽은 그 사람은 남편 친구가 자기를 찝적 거렸다고 함께 살 때 말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죽은 여자는 노래방도우미로도 나갔었다. 남자관계도 단순치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그 남자의 사건당일 알리바이조차도 조사하지 않았다.

 

  “삭발을 하고 다닐 때 평소 모자를 썼나요?”
 

  “썼습니다.”
 

  그가 검거될 때도 모자를 쓰고 있었다. 머리를 빡빡 깍은 형태는 남의 시선을 끌기 때문이었다. 그가 범행을 했다면 평소 습관대로 모자를 쓰는 쪽이 더 가능성이 많았다. 유일한 목격자인 주부는 모자를 쓰지 않았었다고 했다. 목격자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었다. 내가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경찰에서는 사건 당일 닭을 처분한 것을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아시죠? 그렇게 하루 만에 닭이 처분될 수 있나요?”
 

  형사들은 닭집 주인의 진술조서를 받았다. 닭을 급히 팔아 도피자금을 마련한 듯 기록하고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전부터 닭 집 주인과 팔기위해 여러 차례 의논하거나 통화를 한 사실이 있나요?”
 

  “여러 번 전화를 했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볼 필요가 있는 중요한 점이었다. 검찰은 사건 다음날 그가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간 것도 도피하기 위한 정황증거로 삼았다. 그걸 깨기 위해 물었다.
 

  “사건 다음날 오후 2시경 피고인은 은행에 가서 410만원을 인출했던데 맞죠?”
 

  “그렇습니다.”
 

  “이거 보세요 잔고가 300만원가량 남아있던데 맞습니까?”

  잔고증명서에는 그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잔고가 남아 있었습니다.”

  도피자금이라면 다 빼가야 맞았다. 아니었다.
 

  “그 날 은행에서 찾은 돈은 바로 피고인이 누구에겐가 송금을 했던데 어떤가요?”

  내가 자료를 보면서 말했다.
 

  “제가 고스톱을 좋아하는데 거기서 빚진 돈을 송금했습니다.”
 

  도피자금이 아니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재판장이 “변호사님 말이죠”하면서 내 신문을 중단시켰다. 내가 재판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진실의 윤곽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강철윤 피고인이 공식적으로 이발소에서 머리를 빡빡 깍은 후 범행일까지 얼마정도의 시간이 흘렀죠?”

  재판장이 물었다.
 

  “수시로 면도기로 자신의 머리를 민다고 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게 아니고 이발소에서 공식적으로 깍은 지는 얼마나 됩니까? 여기 수사기록을 보면 사건당일 머리를 빡빡 깍았다는 부분이 있어서 그럽니다.”
 

  경찰은 변장을 하기 위해 그날 머리를 밀었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그 말에 피고인석에 있는 강철윤이 대답했다.
 

  “한 달 가량 될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재판장이 나에게 명령했다.
 

  “그러면 좋습니다. 내일 교도소로 가셔서 교도관들이 입회한 가운데 저 강철윤 피고인의 머리를 빡빡 깍고 사진촬영을 하세요.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에 이 자리에서 재판을 다시 하겠습니다. 그 날 목격자인 여자를 불러 피고인의 머리를 보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날 죽은 송양숙의 언니도 증인으로 불러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은 예리했다. 누구의 말도 믿지 않고 목격자의 진술을 확인해 보기 위한 조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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