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된 범사 8단 박영헌 선생은 학창시절 조선인이라는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학교 성적이 상위권에 있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부 특기생으로 중학교에 진학했고, 가라데2단, 유도초단 실력으로 항상 일본 학생들 위에서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당시 중,고 구분 無) 157cm, 45kg 단신의 한계와 삼촌(야쿠자)이 연루된 야쿠자들끼리의 결투를 목격하고(삼촌은 칼에 맞아 사망) 검도를 배울 것을 결심, 17세부터 검도에 입문(오오사카 무덕관 입관)하였다.
사범 시절, 일본은 어수선한 전쟁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징병도 검도사범이라는 자격 때문에 피할수 있었고, 야쿠자 세계에서 선생님을 영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거절하다. 하지만 일본인이 조선인을 얕잡아 보는 것을 알면 용서하지 않았고 정식으로 사과를 받아 내는 등 고집과 조선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선생의 검도 기술은 찌름과 손목, 편수왼머리 순인데 머리와 허리를 못치는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에게 한 곳에 치우치지 말고 골고루 잘 칠 수있는 검도인이 되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의 찌름은 당해 본 사람만이 그 귀신같은 위력을 알텐데, 한국에서는 간혹 선생님의 제자들만이 혀 끝으로 맛만 본 수준이라 안타깝다.
선생의 찌름 기술은 어떻게 습득한 것일까? 일본(오사카 주둔 해군사령부) 장교 검도구락부는 무덕관에서 합동 연무를 자주 했는데, 일본 해군(찌름 기술은 해상 육박전 전술로 많이 함) 중 한 명이 귀신같은 찌름을 날려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 고민 끝에 장교 집에 직접 찾아가 친구를 삼아 매일밤 술로 교분을 두텁게 한 후에야 그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생전에 전했다. 그의 찌름에 대한 지론은 “바늘로 바위를 완전 관통하는 기분으로 온 몸으로 찌르라”고 강조했다.
경찰의 날 행사때, 짚단베기를 하면 손수 일반 벼 짚단 3단을 추려(짚푸라기는 추려내고 중심 가지만 둠)냈는데 많이 베어야 3단 베기 정도였다(일본에서 만든 접쇠 일본도 사용)고 전한다. 그 이유에 대해 선생님은 “수련을 확인하는 것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또, 짚단의 강도가 일반인 몸의 강도와 비슷해야 짚단으로 간주하는 등 베기수련에 있어서도 상당히 논리적인 방법을 제시했다고 한다.
본 에 있어 진검의 사용에 대해서는 상대 피부에 하얀 회가 날정도(피부에서 칼을 멈추는 것을 자유자재로 하였음)로 해야 한다고 했다. 또, 칼은 살아 생전 항상 닦고 만지고 이불 옆에 두고 주무셨다.
선생은 1948年 귀국, 1949年부터 남해에 정착하였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본에서 배운 카메라 기술로 사진을 찍으며, 한편으로는 야산에서 산을 깎고 평탄 작업을 한 뒤 남해인에게 검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도복은 모두가 사복을 입었고, 죽도는 왕대를 깎고 또 깎아 만들었으며, 호구는 일제시대 경찰서에서 썼던 것을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그 후 1956年 대한검도회 창단과 동시에 4단을 받아, 1958年 12월 15일 경남경찰국령도사범으로 발령을 받고, 1958年 12월 20일 대한검도회 남해지회장 발령을 받았다(당시 경남과 부산이 분리되기 전).
그는 1962年 43회 전국체전부터 경남대표(남해군 선발) 총 16회 참가, 1963年 4회 경남 각 경찰서 대항검도대회(부산), 5회(마산), 7회(충무), 8회(울산)에서 4회 우승을 했다. 인천시검도회 원러범사 류기순 선생님도 7회 대회에서 선수로 출장, 우승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 후 1971年 남해중학교 순회코치로 임명되었고, 1972年 제1회 소년체전 경남대표(남해중)로 총 15회 참가해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1982年 신 군부(제5공화국)의 공무원 감원 조치에 따라 도순회코치를 그만두고, 1982年에서 1989年까지 야인 생활을 했다. 이 당시 생활 근거가 없어 강아지를 키워 팔고, 경상대 제자 호원을 키워 주고 자식에게 용돈을 받아 근근이 생활하였다고 한다(조일래 선생, 강호운 선생을 도와 남중검도부를 지도, 95年까지)
1989年 12月 서울에서 막내아들이 내려와 폐교(구. 남해여중)자리에 교실 한칸을 빌려 도장을 개관하였다. 이 검도장의 관장으로 제자들을 지도하던 중 1994年 8월 1일 전국체전(대전)에서 원로들의 추천으로 검도범사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1996年 10월 1일 검도8단 승단하였다.
그는 항상 이런 말을 했다.
검도라는 걸출한 무도 세계에 반해 한평생을 보냈지만, 결코 후회없이 살았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길은 갈 것이다. 많은 검도계의 후배와 제자들에게 감사드리면 돈과 명예와 권렬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정도(正道)의 길을 간다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만일 것이다.
특히 남해 제자들이여!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과 설움 속에 죽도로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꿋꿋이 성장하여 오늘도 수련생들보다 더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 너희들이 무척 자랑스럽구나. 잠깐을 살지말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법을 공부해라.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남긴 말이다. 1999년 9월 17일 노환과 지병으로 심장마비 증상이 일어나, 경상대 중환자싱에 입원 중 계속 혼수상태로 3개월 경과 후 남해로 와 12월 13일 부모님 제사를 보시고, 12월 14일 사랑하는 제자 김갑수와 김승호를 만나고 다음 날인 12월 15일 18시 깊은 잠에 빠지셨다.
박영헌 선생의 일대기(1919~1999)
1919년 2월 4일생
본적 : 경남 남해군 남해읍 북변동 56-1
주소: 경남 남해군 남해읍 차산리 중촌 101-1
1992年 4세 때 부모의 가산(家産) 몰락으로 도일(渡日)
1926年 3月 7日 오사카시 센이진죠 소학교 입학
1932年 졸업
1937年 3月 5日 오사카 이쿠노 중고등학교 입학
1937年 졸업
1937年 11月 10日 검도초단
1938年 4月 20日 하세카와 에이신류 거합도 초단(당시도 검도와 거합술을 따로 배웠다고 함)
1943年 11月 11日 검도3단
1943年 4月 15日 거합도 3단 승단과 동시 동무덕관 사범 생활을 함(당시 3단은 현 5단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조선인의 천재적인 탁월성이 아니면 지도자는 거의 될 수 없었음.)
정리: 소마연구소 임금열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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