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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꼭두각시의 칼 17~18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2.02 02:56:48
조회 361 추천 10 댓글 5

1~14


15~16



40.


"공주님, 불편하지 않으세요?"


마차는 겨우 두 사람이 마주 앉아야 할 만큼 좁고 비루했다. 이런 단점을 차치하고 시트가 좋냐고 묻는다면,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애써 웃어보이는 게르다는 엘사가 신경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차의 바퀴도 어디 한곳이 엇나간 탓인지, 마차 안은 심하게 덜그럭거렸고, 두꺼운 드레스에 꽁꽁 감춰진 공주의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엘사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게르다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속이 좋지 않아서 그래요. 잠깐 바람을 쐬면 괜찮을 거예요."


엘사는 덧창을 잠시 열어 쏟아지는 바람에 고개를 기대었다. 소복이 정돈한 머리가 바람을 맞아 모양이 흐트러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곧 그녀에게 찾아올 무관심 가득한 시선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덧창 밖으로 보이는 커보울 가는 한적했고, 저 멀리 비드랑 대로에 산개된 빛의 벽과 아크 방사탑이 지직거리며 고래기름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거대하지만 오래전 죽은 공룡, 혹은 거인의 시신처럼 늘어진 린든이 보였다.



그녀가 어린 시절, 지금은 몰리에서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가정교사는 엘사에게 말했었다. 린든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온갖 깡패와 사기꾼들이 공격해 시체조차 남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공주님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린든과 관련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하지만 인생은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의 어머닌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왕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듯 곧 성인이 될 그녀에게 어머니에 대한 정보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스의 어머니는 멀쩡히 살아서 남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엘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 쪽 짜리 공주, 반 쪽 짜리 왕가 혈통을 지닌 자신을 엘사는 동정했다. 엘사는 이따금 겉잡을 수 없이 찾아오는 우울함이 자신을 뒤집어 삼킬 때, 차라리 린든에서 태어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낭떠러지의 끝에서 추락하면 오를 수 없지만, 밑바닥에서 출발하면 오를 일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편으로 린든의 입장에서 보면 사치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우울을 비집고 들어오곤 했다. 이내 스쳐가는 건물들이 린든의 모습을 가려주었다. 엘사가 밑으로 시선을 떨구자, 전기차가 지나가는 철로가 눈에 들어왔다. 제국의 전반적인 산업들을 부흥기로 이끌어준 데에는 고래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고, 고래를 잡기위한 포경선을 대폭 개조시킨 사람은 현 황제의 주치의인 안톤 소콜로프였다. 여전히 전성기인 포경산업으로 인해 얻어낸 막대한 양의 고래기름은 여느 기름과 광물보다도 높은 연비를 보여주었고, 고래와 관련된 산업에 몸담았던 신흥 귀족들은 이내 온 제국에 걸쳐 철로를 깔아 운송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또한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자연 철학 학술원의 과학자들을 고용해 자신들만의 전기차를 만들어 다니곤 했다. 엘사는 아무리 낡아빠졌을지라도 귀족이 아닌 왕실 사람들은 모두 마차를 자가용으로 타고 다니는지 알 수 있었다. 귀족에도 급이 있었다. 전통적인 방법인 왕실 계통, 혹은 공을 세워 신분이 상승된 귀족, 혹은 사업들의 번창으로 귀족 직위를 돈으로 산 신흥 귀족이 있었다.  실리를 중시하는 신흥 귀족과 차별화하기 위해, 전통적인 귀족과 엘사를 포함한 왕실 사람들은 마차를 타고 다님으로써 아렌의 정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너무 비효율적이야.'


엘사는 이러한 방식이 너무 부조화스럽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정해진 철로만을 타고 다녀야 하는 전기차의 답답함, 그리고 정통성을 명분으로 유지비가 많이 드는 마차 같은 구식 이동수단의 존재 모두가 이상했다. 엘사는 만약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하는 망상을 했다. 일단 제국에 있는 모든 철로들을 뜯어내 새로운 전함을 만드는 데 보태거나, 빈민층의 비율이 높은 곳의 집들을 재보수하는데 쓰이게 할 것이었다. 그리고 마차의 비중을 확 줄이고, 말을 먹이는 데 드는 많은 곡물들을 빈민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는 데 쓰게 할 것이었다. 그리고 또-


[워, 워이! 잠깐!]


잠시나마 이룰 수 없는 행복에 젖어 눈을 감은 엘사의 상상을 부정하듯, 마부가 별안간 소리를 질렀고, 마차는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고꾸라지듯이 앞으로 넘어질 뻔한 엘사를 게르다가 부축했다.


"무슨 일이냐, 허버트!"


게르다가 마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설마 깡패들이 찾아온 것일까? 게르다의 표정이 굳어졌고, 이는 엘사도 마찬가지였다. 게르다가 덧창 너머로 앞을 확인해 보았지만, 깡패는 없었다. 대신 가방을 메고 엎어져 넘어진 소녀 한 명이 길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년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혹시 다치셨습니까?]


"네, 네. 전 괜찮아요!"


소녀의 밝은 목소리가 마차에 흘러들었다. 엘사는 더 이상 바깥을 볼 수 없었다. 게르다가 손을 잡고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엘사는 소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엘사와 비슷한 나잇대이고, 햇살, 그리고 어둠 속의 촛불처럼 그녀가 가지고 있는 어둠을 걷어낼 것 같이 명랑한 성격을 가졌을 것 같았다. 또한, 주근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엘사였다.


[너 말고! 길을 똑바로 다녀야지, 지금 여기에 누가 타고 계시는 줄 알아?]


"음... 마차가 엄청 낡은데, 돼지라도 태우고 다니는 거예요?"


"저저저.. 저것이 진짜..."


화를 내며 마차에서 내리려는 게르다를, 이번엔 엘사가 만류했다.


"진정해요, 게르다. 허버트? 그 아이에게 은화를 조금 주도록 해요. 시야 확보를 못한 우리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


[하, 하지만...]


"제 걱정은 그만하고, 어서요."


엘사는 최대한 부드럽게 얘기했다. 소녀라면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만큼 엘사의 마차는 세련되지 않았다. 엘사는 소녀가 수레라고 언급했다면 웃었을 거라 생각했다.


[네... 얘! 오늘 우리 주인님께서 기분이 좋으신 것 같다! 이거 먹고 떨어져! 다음 번에도 이러면 말발굽으로 받아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라고!]


조금 멀리서 쩔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길게 이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은화 주머니를 던진 모양이었다. 수는 적지만, 엘사의 시중을 받드는 시종들은 엘사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소한 행동들에 감사하면서, 엘사는 허버트에게 추가 급료를 지급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와, 엄청 많네. 아저씨! 고마워요! 잘 쓸게요! 주인님이라는 분!"


[아저씨가 아니다 멍청아!]


허버트의 호통을 듣는 둥 마는 둥, 빠른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다시금 마차는 움직였다. 엘사는 덧창의 틈새로 활기찬 소녀의 모습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몇 없는 인파와 건물 사이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41.



"와..."


안나는 어느 건물의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내쉬면서, 어느 마차의 마부에게서 받은 주머니 속을 들여다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지껏 보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크고 작은 은화들이 한 주먹 분량으로 들어있었다. 뜻하지 않은 보상으로 안나의 머릿속은 수 가지의 행복들로 복잡해졌다. 은화의 일부는 크리스토프가 쓸 약재 구입에 쓰고, 일부는 매티어스의 고아원 재정과 의원의 배급활동에 쓰일 물품들, 그리고 벨 아주머니의 생활을 유지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안나가 며칠 전 밤에 캐온 강조개들의 진주까지 팔아낸다면, 앞의 일들을 모두 이뤄낼 수 있을 노련한 밀수업자를 고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나는 자신에게 주머니를 주라고 시킨 마차 속 누군가에게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고마움을 느꼈다. 스쳐 지나간 터라 다시 만날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부터 검술 대회가 시작되는 만큼, 그 사람도 검술 대회를 보러 왔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모습조차 확인할 수 없었지만, 검술 대회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겠다고 안나는 다짐하면서, 은화 주머니를 가방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욱여넣었다. 그리고 다시 아름드리 광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방관자 때문에 무거워졌던 안나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42.



"저기요...?"


"아이고, 깜빡 잠이 들었네. 참가 신청하러 오셨수?"


시큰둥한 표정을 한 중년의 접수원은 자신의 몸보다 큰 배낭, 그리고 목검들을 매고 온 안나를 보며 당연한 것을 물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참가 접수처' 현수막이 그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켰다.


"네, 접수하러 왔는데요, 혹시 요구되는 게 있나요?"


"음, 이름과 출신, 그리고 대회에 쓸 무기의 종류에 대해서 작성해 주쇼."


접수원이 안나에게 신청서와 깃털 펜을 내밀었다. 안나는 이름부터 막히고 말았다. 린든에서 이름은 중요할지라도, 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안나는 그저 이름 뿐이었으며, 성은 없었던 것이었다. 유년기의 한 조각 속에서 매티어스가 안나에게 성을 지어주려고 했지만, 안나는 어머니도, 아버지의 성도 알지 못했기에 짓지 않았다. 안나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성을 쓰는 공란에 윈터라고 적어냈다. 



딱히 목적을 두고 쓴 것이 아닌, 안나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겨울을 뜻하는 단어였다. 출신은 서코노스의 사군토로 정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안나가 좋아한 음식 중 하나인 '사군토 납작빵'이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주로 쓰는 무기군 중에서 검에 체크를 하고 다시 접수원에게 제출했다. 접수원은 "안나....윈터."라고만 얘기할 뿐, 그 이상의 의심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안나의 겉모습을 보고 그저 군도 제국의 북부에 위치한 티비아와 연관이 있을 서코노스 출신 여행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접수원은 안나의 신청서를 대충 훑어 보더니, 이내 "글씨 좀 예쁘게 쓰쇼." 라는 간단한 한 마디를 건네고 확인 도장을 찍었다.



"저, 질문 좀 해도 될까요?"



안나가 교실의 고약한 선생의 앞자리에서 질문을 하듯 한 손을 조금 들며 물었다. 접수원은 못 미더워 했지만 어깨를 끄덕이는 것으로 안나의 요청을 수락했다.


"대회는 언제 끝나나요? 그리고 저를 포함해서 몇 명이나 신청하죠? 무기는 날붙이로 하나요, 아니면..."


"잠깐, 잠깐. 너무 빠르잖나. 천천히. 일단, 여기가 린든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겠지?"


안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원은 귀찮음을 한 층 덜었다는 듯, 꼿꼿이 세웠던 어깨를 조금 늘어놓았다.



"물론 빛의 벽과 방사탑, 감시탑을 설치해서 린든의 쓰레기들이 이곳으로 올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사람의 본능엔 잠재적인 위협에 대해 대처하는 능력이 존재하지."


마음이 뜨끔한 안나였지만, 뒤이어 들어온 철학적인 말에 흠흠, 안나는 고개를 다시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참가자가 예상보다 적은 모양이야. 어, 지금 딱 시간이 마감돼었어. 자네를 포함해서 8명의 참가자가 8강,  4강,  2강의 대련으로 순위를 가려낼 걸세. 그리고 날붙이는 절대 금물이야. 황제 폐하와 자녀 분들, 그리고 귀족들이 관람하는 중요한 자리인데 피를 볼 수는 없지 않나?"


안나는 무심코 목검의 손잡이 끝을 살살 문질렀다.


"검 말고 다른 무기를 택한 사람이 있나요?"


"그야 물론이지, 창에 체크한 자도 있고, 둔기에 체크한 사람도 있지."


안나는 그런 자들과 같이 맞붙지 않기를 바랬다. 행여나 맞붙게 된다면 8강이 아닌, 4강과 2강에서 이전의 참가자에게 체력을 소비된 채로 만나야 했다. 매티어스에게서 모든 무기에 대비해 훈련을 받았지만, 안나가 가장 무서워하는 무기군들이었다. 깊이 파고들지 않으면 창에 당할 것이고, 한 번 잘못 맞으면 부서진 뼈에 장기가 찔려질 둔기는 무시하기 힘들었다.


"이제 할 얘긴 다 끝났나? 없으면 저기 복도 끝에 있는 8번 대기실에 들어가 있게. 대진표는 30분 뒤에, 시합은 1시간 뒤에 이뤄질 테니까."


"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안나는 몸을 돌려 대기실에 돌아가려다, 길에서 만난 마차에서 받은 은화 주머니를 떠올렸다.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은화 두 닢을 꺼내 테이블 위애 잽싸게 올려놓은 안나는 속이 후련한 듯 대기실로 향했다. 무얼 바라고자 은화를 건넨 게 아니었다. 그저 죄여오는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고자 하는 사적인 욕망이었다.


"우승하길 비네!"



안나의 기분에 상관없이 뜻밖의 수입에 기분이 좋아진 접수원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등을 향해 우승을 기원하는 외침을 던졌다.








43.



"많이 늦었구나."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엘사는 겨우내 폈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군도 제국을 이끄는 황제인 아그나르는 금과 보석으로 수놓아진 견식을 한 검정 제복을 입고 있었다. 엘사는 자신이 입고 있는 두꺼운 드레스와 아그나르의 제복을 비교했다. 두 옷 모두 답답한 겉모습이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아그나르의 제복은 목깃이 있었고, 엘사의 드레스는 목깃이 없었다.


"오다가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엘사는 대답을 마치고 소리 없는 심호흡을 짧게 했다. 아그나르의 양 옆에 서 있는,  감청색 제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그녀를 노려보듯 시선을 떨구었다.


"사고? 너를 건들 사람이 나타나기라도 했느냐?"


아그나르가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힐난했다. 엘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차 앞에 끼어든 시민이 있었습니다. 그 시민과 약간의 실랑이를 하느라..."


엘사는 말을 줄였다. 무의식적으로, 엘사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사라진 이름 모를 소녀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아주 짧지만, 소녀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떨림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시민? 엘사, 정말로 시민이었나? 거지가 아니라?"


"거기까진 자세히 확인하지 못했으나..."


"엘사!"


별안간 아그나르가 화를 냈다. 잦아들던 떨림이 다시 고조되었다.


"네가 내 딸이란 것이 치욕스럽지만, 아렌의 피가 섞여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널 성 밖의 거지들과 차별을 두었다. 하지만 네 마음은 언제나 나약하고, 우유부단하지. 네 이복 오빠를 보거라. 너처럼 떨지 않고, 숨으려 들지 않지. 한 나라를 이끌 수반이 되려면 네 오빠처럼 행동해야 한단 말이다!"



또 다시 비교를 당한 엘사는 코끝이 찡해져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엘사는 생각했다. 자신의 손에서 피어나는 얼음을 사람들은 판디시아의 저주에 걸린 마녀라 여겼고,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어머니가 천민 출신임을 알았다. 더군다나 이복 오빠인 한스만큼의 대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거의 매일 밤 무작위로 튀어나오는 마법을 통제하려 했고, 혹시라도 주어질 외부 활동을 무리없이 소화해 내려 거울 앞에서 말하기 연습을 했다. 왕족부터 길거리의 거지들이 만들어낸 얼음 마녀 엘사 공주는, 사실 공주의 탈을 쓴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금 네 옆에는 누가 있느냐? 게르다? 시종 몇 명? 결국 게르다도 돈 때문에 네 시중을 드는 게 아니냐, 더 이상 이 아비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거라. 너 하나를 통해 왕실을 모욕한 귀족을 어제도 처형했다. 집행인의 손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화가 누그러졌지만, 비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엘사는 자신이 폭풍우 치는 바다에 돛 없이 떠다니는 조각배에 자신을 투영시켰다. 그나마 말을 들어줄 게르다는 지금 엘사 옆에 있지 않았다. 장갑을 끼고 있어 미지근했던 손끝에 다시금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나갈 거야. 귀담지 말자. 항상 그래왔잖아. 항상.'


"통제는 가능하더냐?"


엘사의 마법에 대해 묻는 말이었다. 엘사는 발작하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황제의 두 경호원의 입에 비릿한 비웃음이 어렸다.


"그래, 그거라도 가능해야지. 그래야 네가 마녀라는 오명을 벗어낼 수 있을 테니까. 이만 가보거라. 1시간 뒤에 있을 대회에 늦지 말고 참석해라. 이번에도 늦는다면... 사람들은 널 더욱 멀리할 것이다."


아그나르가 귀찮다는 듯 엘사에게 가라는 손짓을 했다. 엘사는 아그나르에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뒤로 쏟아지는 비웃음과 경멸 어린 시선이.









44.



"또 아버지한테 한 소리 들었지?"


방을 나온 엘사의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사는 돌아보지 않았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랑 전혀 달라진 게 없잖아."


"신경쓰지 마."


엘사는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면서, 자신의 이복 오빠이자 군도 제국의 왕자, 한스 아렌을 애써 무시했다.


"언제 신경썼다고..."


"그래도 동생이니까, 걱정해 주는게 당연한 거 아닌가?"


한스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엘사는 들려오는 웃음소리에서 가증을 느꼈다. 한스는 아그나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교활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멸시가 그리 심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한스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모두 엘사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을 일생의 즐거움으로 여겼다. 접시를 깨뜨린 것을 시작으로, 차토에서 보내온 관세 협의 문서에 낙서를 한 것까지. 엘사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글로 적어내라고 한다면 200여 페이지 분량까지도 쓸 수 있을 만큼, 한스는 엘사에게 있어 악마요, 공황을 터뜨리는 방아쇠였다.


"아, 엘사. 아직도 사람들이 너보고 마녀라고 하더라, 왜 있잖아. 내가 아는 갱단들이 말하는데..."


엘사는 나불대는 한스를 뒤로 하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두 귀를 막아도 이미 머릿속에선 사람들의 비난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녀, 그 한 마디만 맴돈다면 다행일 것이었다. 하지만 엘사의 의식 속에 자리를 튼 독나무에는 온갖 저주가 맺혀진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탐스러운 열매들이 하나 둘, 밑으로 떨어져 마음을 적셨다. 한스의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전부터 그래왔듯, 자신을 주제로 한 외설스런 말들이었으리라. 도망친 게 나은 현실이라고 엘사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엘사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 홀로 서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45.



대기실의 문이 두어 번 크게 두드러졌다. 그리고 문 밑으로 사라락, 종이 한 장이 미끄러졌다. 목검을 가지고 대기실 한쪽에 세워진 허수아비를 상대로 이미지 훈련을 하던 안나는 종이를 집어들었다. 시합 시작까지 30분이 남았음을 공지하는 동시에, 자신과 겨루게 될 상대를 알려주는 대진표였다. 앨런 다포. 수염과 머리카락의 구분이 가지 않는, 흡사 사자와 같은 인상을 가진 사내의 모습을 담은 스케치가 안나의 스케치 옆에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밑으로 참가자가 쓰게 될 무기군의 종류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안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앨런 다포의 무기군도 안나와 똑같은 검이었기 때문이었다. 접수원이 말한 창과 둔기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8강을 치룬다면, 안나의 다음 시합, 그리고 다다음 시합의 상대가 될 예정이었다. 안나는 그들의 상대가 최대한 오래 버텨주길 바랬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안나는 앨런 다포라는 사내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무기군이 검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휘두르는 검인지, 찌르는 세검인지 알 수 없었다. 안나는 사내의 우중충한 인상을 보면서 자신과 비슷하게 휘두르는 한손검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안나는 대진표를 접어 주머니에 넣은 다음, 다시 허수아비 앞에 섰다. 상대가 명확해진 만큼, 이젠 앨런 다포를 떠올리며 검을 휘둘러야 할 때였다.










46.




메가라 그레이스는 귀족들의 조용한 대화 속에서 아름드리 광장에 만들어진 검술 대회의 관람석에 앉아있었다. 관람석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시민, 부르주아, 전통귀족, 그리고 왕족. 메가라는 전통귀족의 특등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만든 가면에 미적 감각이 두드러진다고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던 단골 귀족이 돈을 써서 그녀에게 자리를 선물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린든의 매티어스 고아원에서 틈틈히 가면을 만들었고, 밀수를 통해 시장에 팔린 가면들은 귀족들이 사가면서 메가라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그녀는 역병이 창궐하기 1년 전에 린든을 탈출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들이 주로 거주하는 에버튼 가에 구매해 살고 있는 집 지하 금고에는 그녀의 출신이 조작된 서류가 고이 잠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몰리의 아란 태생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냈고, 사람들이 덧입혀낸 가면을 벗지 않기로 했다. 처음엔 익숙치 않았지만, 이젠 벗는게 더 어색했다. 메가라는 자신이 앉아있는 곳이 린든에서 가장 가까운 커보울이라는 곳을 다시금 자각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시민 석은 린든만큼은 아니어도 사람들은 소란스러웠으며, 곳곳에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둥글게 모여있음을 알 수 있었다. 메가라는 본능적으로 저 모임이 참가자들을 상대로 하는 도박임을 알아차렸다. 린든에서 몸에 배어진 습관을 모두 버렸지만, 시궁창처럼 죽은 도시에서 알아낸 지식들은 그녀의 머릿속에 뿌리내려 있었다.


그러자, 동시에 안나의 모습이 떠올려졌다. 역병이 창궐한 이후, 밀수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고, 안나의 소식 또한 끊기고 말았다. 제국의 무장 종교 단체인 만인의 수도원에서 주시자들이 린든을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는 근거 없는 소문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에버튼 가와 같은 부유한 거주 지구에는 역병을 몰고 다니는 쥐와 우는 자들을 태워 죽일 수 있는 빛의 장벽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린든은 그런 게 없었고, 안나에 대한 걱정은 점점 커져갔다. 지붕을 고아원의 침대처럼 방방 뛰어다니고, 싸움에 유난히 도가 튼 안나였지만,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싸움은 사람을 가릴 수 있지만,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잔뜩 구겨져 있나?"


그리스톨 탄산수가 든 잔을 내미는, 그녀를 이곳에 앉게 해준 '터너'라는 귀족이 물었다. 메가라는 잔을 조금 기울여 마셨다. 은은한 복숭아의 향이 탄산을 머금은 살얼음에 어우러졌다. 메가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그 귀족에게 털어놓지 않기로 했다. 털어놔 봐야 자신의 출신이 까발려지는 것밖에 더하겠는가.


"더러워서요."


"날 말하는 겐가? 그것 참 흥분되는 말이네 그려."


터너는 미적 감각이 뛰어날 지는 몰라도, 계급을 명예, 더 나아가 목숨처럼 여기는 작자였다. 메가라는 그의 호의에 맞춰주기 위해 그에게 매혹적인 웃음을 흘려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맞은편을 보세요. 저들의 행동에는 예절도, 교양도 없어요. 그저 술과 돈, 그리고 주먹뿐이죠."



과거엔 헤라클레스 만한 체력과 정력을 가졌다는 소문을 가진 터너였지만, 메가라의 눈에는 그저 젊은 여자의 엉덩이를 좇는 허약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오페라글라스를 꺼내 눈에 가져갔다. 잠시 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오페라글라스를 접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이렇게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가? 이 대회장을 두고 말일세. 이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은 나중에 이쪽에 앉을 확률이 커질 것이고."


터너가 손가락을 놀리려다 그만, 옆에 앉아있던 젋은 귀족 사내의 어깨를 툭 건들였다. 미안하네, 눈이 안 좋아서. 그가 유쾌하게 말했고, 그의 고충을 아는 듯이 갑작스러운 사과를 훈훈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터너의 존재보다 그 옆에 앉은 젊은 가면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대회가 끝나면 그녀에게 술을 사볼까 하는 생각을 품은 호의를 내비친 것이었다. 메가라는 그것을 모르는 듯, 대리석이 깔려진 텅 빈 대회장에 시선을 두면서 터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 진다면, 저 곳에 머물겠지."


말을 이어 끝낸 터너의 손가락은 건너편에 맞닿은 수백, 어쩌면 천에 가까울 시민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의 말은 극단적이었지만, 어느 정도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 메가라였다. 대회 참가자가 꼭 평민 신분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불명예스럽게 귀족 신분을 박탈당한 평민, 혹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용맹함을 보여주기 위해 참여한 귀족이 있을 수도 있었다. 빈민가인 린든에서 자라나 신흥 부자들이 거주하는 에버튼에 자리를 잡은 메가라는 모든 참가자에게 소리없는 응원을 보냈다. 밑바닥에서 올라온 그녀인 만큼, 노력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터너의 말이 끝나고 한껏 빼 입은 흰 연미복의 사회자가 대회장 한쪽에 위치한 천막에서 나와 외쳤다. 소곤대던 귀족들이 조용해졌고, 지껄이던 시민들의 고함이 잦아들었다.


[지금부터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열어주신 검술 대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작하기에 앞서, 아그나르 황제 폐하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사회자가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이내 너나 할 것 없다는 듯 박수 소리가 대회장을 가득 채웠다. 박수는 사회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자의 뒤로 나오는 아그나르 황제, 그리고 한스 왕자를 향한 것이었다.


'엘사 공주는 안 오셨나.'



메가라는 수고했다는 듯 사회자의 어깨를 두드리는 아그나르 황제의 옆모습을 보면서 좋든 나쁘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신비스럽고 차가운 공주의 부재에 의문을 표했다. 귀족들을 몇 사귀어본 그녀가 들었을 때, 엘사 공주는 사람들에게 모습을 내비치는 것을 극히 꺼려한다고 했다. 혹자는 사실 엘사 공주란 것이 제국의 어두운 면과 온갖 실책에 대한 비난으로 세워둔 허수아비 내지 가상의 존재일 거라고 추측했다. 메가라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메가라에겐 가면을 만들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오듯이, 공주에게는 공주다운 업무가 있을 것이었다.


[...순위에 든 3명의 참가자에겐, 왕실의 대외 활동에 필요한  직책을 맡게 될 기회를 주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대회를 자주 열고자 한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으니. 용감한 자, 실력이 우수한 자는 언제든지 지원하도록, 이상.]


아그나르의 딱딱한 연설이 끝나고, 다시 들어가는 두 사람에게 사람들은 다시 박수를 보냈다. 이번엔 피리 같은 희미한 휘파람 소리도 서너 번 울려퍼졌다.



[오늘 대회의 첫 번째 경기입니다. 모두들 기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티비아의 알렉신에서 온 앨런 다포, 그리고 서코노스 사군토의 안나 윈터입니다. 모두 큰 박수와 함께 두 참가자를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가 두 팔 벌려 관중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귀족들은 여전한 박수, 대중들은 비명과 고함 사이의 소리를 울부짖으며 환호했다.


'안나?'


메가라는 사회자가 소개한 참가자의 이름에 조금 놀랐지만, 동명이인이라고 결론지었다. 군도 제국에 걸쳐 안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수십 명이 될 것이고, 미지의 대륙인 판디시아에서도 수 명은 존재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안나가 린든에서 커보울에 올 수 있는 방법은 극히 한정되어 있으며, 메가라가 겪었던 밀수를 통한 탈출은 봉쇄 조치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붕을 날아다니는 안나일 지라도, 경비대와 온갖 보안 장치들을 헤치고 나오진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메가라의 사라진 의심은 분명한 확신으로 변질되었다.


왼쪽 천막에서 나오는, 사자를 연상케 하는 사내인 앨런 다포, 그리고 오른쪽 천막에서 나오는, 메가라가 알고 있는 낯익은 갈색 양갈래 머리의 여자가 걸어나왔다.



"안나?"


"아는 사람이오?"


"아는 동생이예요. 왜 쟤가 저기 있지...?"



"'왜 저기 있지'라니,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모양인가 보오."


터너의 빗나간 추측에, 메가라는 얕은 두통을 느꼈다. 잔에 남아있는 그리스톨 탄산수를 모두 입에 털어넣었다. 오해의 불씨가 생겨나지 않기 위해, 그녀는 터너에게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분명 사과주 담그는 법을 공부하기 위해 몰리로 떠났다고 들었거든요."






47.


안나는 사람들의 한 가운데에서 주목을 받는 데엔 익숙해졌다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다. 고아원에서 또래 아이들과 검을 교차하며 싸웠을 때, 린든의 지붕 사이를 오갔을 때, 그녀의 주변엔 사람들의 관심이 즐비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에도 긴장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좌우로 펼쳐지는 수백 수천의 관중들이 그녀와 상대인 앨런 다포를 향해 환호하고 있었다. 묻혀져야 할 관자놀이의 비명이 사람들의 함성 사이를 뚫고 고막을 후비었다.


'침착해,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안나는 늘어진 어깨를 최대한 피며 당당하게 걸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안나는 알고 있었다. 일부 관중은 안나의 기계같은 걸음걸이에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안나는 빙의 능력을 써서라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양 선수 자리로!]



안나는 자신과 시합을 겨루게 될 상대방의 상태를 인파의 소리에 신경쓰느라 확인하지 못했다. 앨런이라는 자도 떨고 있기를 내심 바라면서, 하얀 대리석의 한 귀퉁이, 백색 체스말에 포위된 검은 체스말처럼 검은 돌 위에 서서 목검을 쥐었다. 앨런은 마치 익숙하다는듯이 자신의 목검을 들었다. 안나의 것보다 두께가 얉은 목검이었다. 안나는 사내가 펜싱으로 자신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 손으로 검을 쥐는것을 포기했다. 두 손을 쓰면 되려 자세가 흐트려지는데다, 앨런의 세검에 찔릴 몸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컸다. 찌르는 법도 배웠지만 지금의 검으로써는 자세를 잡기가 애매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주어진 무기를 쓰되, 체술 또한 허용합니다! 상대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거나 포기 의사를 내비칠 때까지 싸워 주시기 바랍니다!]



투견장, 안나는 이 거대한 대회장이 린든의 밤구석에 자리잡은 투견장과 같음을 느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싸움에 진 투견은 불구가 되거나 주인에게 폐사를 당해 한두 푼의 동전으로 사먹을 수 있는 묽은 스튜 신세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준비하시고...]



사회자가 뒤로 물러나며 관중의 기대를 고조시켰다. 안나와 앨런이 검을 고쳐쥐고 자세를 잡았다. 안나는 순간, 앨런의 눈에서 찰나의 혼란을 읽어냈다. 안나는 그것을 기회로 포착했다. 안나가 휘두르는 외날검을 가지고 펜싱을 하는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어서였다.



[시작!]



사회자가 보이지 않는 실을 자르듯 손날을 허공에 내리쳤다. 먼저 선수를 친 사람은 앨런이었다. 시작 직후 그의 눈에서 혼란이 사라졌고, 몸을 굽히며 안나의 옆구리를 찌르려 했다. 안나는 몸을 돌려 뾰족하진 않지만 뭉툭한 칼끝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몸을 중심축 삼아 안나는 검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사내의 어깨를 향해 내리쳤지만, 그 또한 종이 몇 장의 차이로 몸을 숙여 안나의 검을 피했다.



[합을 주고받는 두 사람! 시작부터 이렇게 땀을 쥐게 하는 경기는 정말 오랜만인데요!]


사회자가 말을 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한 번 더 맞붙었다. 안나의 찌르듯이 휘둘러지는 검이 그의 세검에 마찰을 일으켰다. 앨런이 무릎으로 안나의 복부를 걷어차려 하자, 안나가 솟아오르는 그의 무릎을 딛고 뒤로 도약했다. 이내 앨런의 중심이 무너지며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앨런 선수, 허벅지가 탄탄하지 않은가 봅니다! 아니면 안나 선수가 무거워서일까요? 앨런 선수가 자세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선수를 가볍게 놀려 대중들의 웃음을 사회자는 이끌어냈지만, 안나가 어떻게 앨런을 공격했는지에 관해선 알아채지 못했다. 도약하면서, 남은 한쪽 발이 그의 턱을 스쳤고, 그것이 약한 뇌진탕을 일으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승리를 확신하는 건 불가능했다. 머리를 두어 번 손으로 털어낸 앨런이 다시 일어나 검을 쥐어 안나에게 돌격했다. 안나는 뒤로 물러나면서 그의 찌르기 공격을 검으로 쳐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내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정확히 세 번의 합이 이뤄진 뒤, 안나는 기습적으로 사내의 품으로 파고들어 어깨로 가슴팍을 밀어냈다. 사내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안나는 종아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나의 운이 통하지 않았다. 안나의 검이 사내의 종아리에 직격한 동시에, 그의 세검이 안나의 허벅지를 세게 찔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나는 순간 이 모든게 밤하늘의 별을 보며 그려낸 망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주먹을 피하지 못했다. 주먹에 직격당한 오른쪽 볼이 얼얼했다. 입안에 퍼지는 녹슨 쇠맛을 느끼면서, 안나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앨런은 그것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세검이 다시금 안나를 향해 집중적으로 쏘아붙여졌고,  검끝이 향하는 곳은 안나의 머리였다. 본능적으로 안나는 뒤로 눕다시피 고개를 뒤로 빼면서 사내의 세검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세검의 궤도가 크게 틀어졌고, 안나는 흐트러진 균형을 검의 반동으로 세움과 동시에 그의 옆구리를 발로 돌려 찼다. 뻑, 안나가 맞은 주먹과 비슷한 소리가 사내의 옆구리에서 터져나왔다. 안나는 앨런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세검을 쥔 그의 왼어깨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사내가 짧은 신음을 흘리며 세검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안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쓰러지지 않았고, 포기 의사도 전하지 않았다. 안나의 검이 그의 오른 허벅지를 가격하고 나서야 앨런의 무릎을 모두 꿇릴 수 있었다.



[앨런 선수, 포기하실 건가요? 보세요! 저 수많은 관중들이 당신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다고요?]


"맞아! 난 너한테 동전 200개나 걸었다고! 정제된 고래기름 10병이나 살수 있었는데!"


"안나! 난 너한테 소콜로프의 그림 한장이다! 동전 300개!"


두 사람에게 쏟아지는 도박은 대체로 시민들 쪽이었다. 귀족들은 휘파람에 박수가 주를 이루었다.


"안나!"


그때, 수많은 목소리 중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하나 들어왔다. 음원을 찾아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가면사 메가라 그레이스가 앉아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찰랑이는 살구색 액체가 들어있는 병이 안나를 향해 휙 던져졌고, 안나는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언니?"


"네가 왜 거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왕 싸우는 거 이기고 오렴. 지켜볼 테니까!"


안나는 손에 쥔, 마치 실험실에서 쓰일 법한 삼각 플라스크 모양의 병을 만지작거렸다. 막 얼음물에 적셔진 것처럼 차가웠다. 안나가 사회자에게 병을 들어보이자, 사회자가 다가와서 병의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았다.


[그리스톨 탄산수! 사군토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음료수죠! 문제 없습니다! 다만 그 맛에 중독되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사회자가 유쾌한 재담을 남기고 앨런에게 돌아가 상태를 살피는 사이, 안나는 뚜껑을 열고 탄산수를 마셨다. 사회자가 말한 것만큼은 아니어도 살구향 살얼음을 머금은 탄산수가 피가 새어나오는 입을 경직시켰다. 혼란스러운 마음도 진정되는 듯 했다.



[앨런 선수? 앨런 선수?]


말이 없는 앨런에게 사회자는 이제 질린다는 듯 그에게 다그쳤다. 그는 살아있었고, 안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뒤,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안나가 텅 빈 탄산수 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턱을 발로 걷어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일대는 침묵했다. 뒤로 쓰러진 앨런은 일어나지 못했고, 사회자는 연미복 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유리관을 꺼내 앨런의 입에 흘려넣었다. 잠시 뒤, 앨런이 희미하게 눈을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승자는... 안나 윈터!]




앨런이 죽지 않았다는걸 확인한 사회자는, 이내 안나의 마지막 카운터 킥을 떠올리며 검술 대회의 첫 승리를 알렸다. 안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좌우 관중을 지켜보았다. 열광과 절망, 분노가 점철된 시민석, 그리고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흥미로운 시선을 가진 귀족들, 그리고 흐뭇하게 지켜보는 메가라가 있었다.





"훌륭하군."


그리고 등 뒤에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안나는 알 수 있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마치 한밤의 숲에서 마주친 맹수의 울음소리같았다. 필시 황제인 아그나르일 것이었다. 안나는 긁어 부스럼이 안 나게 하려고 천막 안을 향해 뻣뻣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가, 감사함다!"






48.



엘사의 오른쪽 볼은 흰색의 창백한 피부와 어울리지 않은 붉은빛을 띄고 있었다. 그녀는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자신에게 들렸던 소문을 잠시 잊어두기로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하지만 사회자가 천막을 나서는 순간, 굳어가던 다짐은 한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그나르의 연설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특등석의 한자리에 숨어서 대회의 시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그나르는 헤아리지 못했고, 이내 그녀의 뺨에 따귀를 날렸다. 어찌나 세차게 맞았는지, 첫번째 시합이 끝나기 직전까지도 두통이 머리에 동반하고 있었다. 엘사는 천막 바깥에서 싸우는, 자신과 비슷한 체격의 여검사에게 알수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수많은 관중에 둘러싸여서 침착하게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 엘사는 어쩌면 저 검사가 자신보다 공주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동화 속 서로 닮은 왕자와 거지가 신분을 바꾸어 살아갔던 것처럼, 엘사는 태어나서부터 받게 되었던 공주라는 수식어가 불편했다.



"훌륭하군."



아그나르가 첫 승리를 거머쥔 안나라는 검사를 보며 짧은 칭찬을 남겼다. 아니면 엘사가 들으라는 듯 비꼬는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엘사는 상관하지 않았다.



"감, 감사함다!"



"어?"



그리고 뜻밖에 들려온 안나의 목소리가 엘사의 불안한 마음을 기분 좋게 휘감았다. 이곳에 오기 전 마차와 마주쳐 다칠뻔한 그 소녀의 목소리였다.









듣고 싶은 목소리, 품고 싶은 목소리.
목소리가 우연의 징검다리를 건넌 끝에,
그녀의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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