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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어느 바랑인 노병의 이야기(9편 완결)

파르바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5.23 15: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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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둘을 태운 조각배는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물살이 배를 밀어준 덕분에 배는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안나는 이대로 갈리폴리까지 가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배에 밀항할 생각이었다. 


"안나, 좀 쉬어. 이제 내가 저을게."


만류하는 안나를 뿌리치고 엘사는 직접 노를 잡았다. 엘사에게 방향을 가르쳐주고 나자마자 안나는 죽은 듯이 깊게 잠들었다.

어느새 해가 높이 떠올랐고 사방에는 무역선들이 나타났다. 엘사는 잠시 쉬면서 혹시 군함이라도 섞여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다.


"우웅... 엘사..."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안나도 이내 긴장한 채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챙겨온 짐을 다시 점검했다. 육포, 건빵, 물, 뇌물로 줄 금화까지도.


"...지금이 차라리 낫겠는데..."

"응?"


"갈리폴리는 아직 한참 남았어요. 저 무역선들... 아직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를 거예요. 차라리 저 배들 중에 하나를 잡아타는 게 나을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안나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나아가는 배 옆으로 다가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알렉산드리아로 가려다 조난당했으니 좀 도와달라며 금화를 두둑히 쥐여주자 선장은 씨익 웃으면서 선실을 하나 내줬다. 도착하면 선금만큼 더 준다는 약속까지 더해서.


그래도 덕분에 둘은 간만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조각배로 갈리폴리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니까. 이제 남은 건 지금 탄 무역선이 무사히 도착하는 일뿐이었다.


****************************


며칠 지나지 않아 무역선은 지중해를 종단해 알렉산드리아 근해에 진입했다. 잠도 교대로 자면서 긴장을 풀지 못하던 둘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배 근처로 날쌘 정찰선들이 접근했다. 뜻밖에도 정찰선들은 깃발로 정선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보자마자 안나는 엘사를 깨웠다.


"엘사, 엘사... 도망가야 돼요, 로마군이 쫒아왔어요...!"


사색이 된 엘사를 붙들고, 안나는 숨을 죽여가며 선미로 빠져나왔다. 선미에도 정찰선이 하나 붙어있었다.


"제가 셋을 세면 바다로 뛰어내리세요. 제가 먼저 저 배로 올라갈게요. 제가 올라가서 손짓하면 올라오세요. 숨 크게 들이쉬면 절대 안 가라앉으니까, 놀라지 마세요."

"알았어, 안나."


엘사의 표정에 굳은 의지가 보였다. 안나는 셋을 세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정찰선엔 병사가 서너 명뿐이었다. 안나는 병사들을 모조리 바다로 던져버린 후 황급히 엘사를 건져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저기다! 잡아라!!!"


'제발... 제발...!'


다행히 순풍이 불었다. 바람을 받은 정찰선은 빠르게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나아갔다. 안나는 노를 놓고 검을 뽑은 채 후미를 경계했다. 추격하는 정찰선들이 화살비를 퍼부었다.


"돛부터 쏴라! 돛부터!"


안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신들린 검술로 화살을 쳐냈지만, 돛을 노리는 화살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엘사가 노를 잡았다. 거의 다 왔는데 코앞에서 잡힐 수는 없었다.


"큭...!"

비 오듯이 퍼붓는 화살 세례에 결국 돛이 떨어졌다. 배가 갑자기 느려졌다.

그러다 뒤에서 한 차례 큰 파도가 몰아쳤다. 파도를 맞은 배가 해안으로 떠밀려갔다. 엘사도 노를 놓쳤다.


바닷물을 뒤집어쓴 엘사의 눈에 쓰러지는 안나가 보였다. 엘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직후, 파도에 휩쓸린 배가 해안으로 던져졌다.

붉은 피가 바다로, 모래톱으로 뿌려졌다. 가슴에 화살을 맞은 안나의 모습이 엘사의 눈에 들어왔다.


"안돼!!!!!!"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건지, 엘사가 휩쓸려가는 안나를 붙들었다. 그때, 화살이 꽂힌 채 고통스러워하는 안나를 붙들고 주저앉은 엘사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무슨 소란인가 했는데, 그대를 만나게 될 줄이야..."

"...살라흐 앗 딘...?!"


황급히 고개를 든 엘사의 눈앞에 초승달이 새겨진 깃발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자 로마의 정찰선들은 황급히 배를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그 순간, 엘사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20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오. 서로 통성명은 필요없겠지."

"그런... 전 이제 그저 도망자일 뿐입니다."

"허허, 내게도 눈과 귀가 있다오. 찬탈자 따위를 인정할 순 없지 않겠소?"


살라흐 앗 딘이 웃으면서 멜리갈라를 권했다. 잔을 받아든 엘사의 손이 떨렸다.


"동행인은... 안나라고 했소? 궁정 최고의 의사들을 동원했으니, 알라께서도 자비를 베푸실거요. 엄청난 전사던데, 이대로 보낼 순 없지..."


하지만 살라흐 앗 딘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안나의 상태는 몹시 위중했다.

엘사의 눈시울에 눈물이 맺히자 살라흐 앗 딘은 자리를 떴다. 엘사는 이내 안나의 방으로 향했다. 시녀들을 물리고, 엘사는 안나의 손을 붙들고 기도를 올렸다.


"전능하신 만군의 주님, 세상의 구원자시여, 병든 자의 의사이시고 도움을 주시는 이여, 

병자를 낫게 하시는 구세주시여,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의 슬픔을 치유하시는 이여,

죽음을 물리친 이여, 당신께 간청하나이다...!"


엘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악문 잇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오딘... 이 빌어먹을 애꾸놈아! 여기 네 자식이 죽어간다고! 좀 나와봐야 할 거 아냐!!!"


허공을 바라보며 엘사가 삿대질을 날렸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도 모자라 모스크까지 간 엘사에게 더 이상 거리낄 것은 없었다.


"오딘!!! 지혜의 신이라며? 듣고 있어? 제발! 제발 안나 좀 살려줘... 흐흑..."


엘사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사방에 안개가 차오르며 주위가 어두워졌다.

기겁한 엘사가 고개를 들자, 그 앞에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쓴 노인이 나타났다.


************************


"어... 그대가... 오딘...? 님...?"


"불러놓고 물어보다니 별일 다 보겠군."


오딘이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이내 오딘은 안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 오딘 님, 안나는 괜찮은가요? 제발..."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이제 내겐 그만한 힘이 없다네."

"네...?"


엘사의 표정에 절망이 떠올랐다.


"그대들의 신이 세상을 가지지 않았나. 이제 내 자식은 저 아이 하나일세. 다른 신들은... 이미 아스가르드로 돌아간 지 오래고, 나 역시 돌아가야만 하는 신세지... 우린 미드가르드에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어."


엘사가 털썩 주저앉았다.


안 돼.

절대 안 돼.


"오딘 님, 제발..."

엘사가 안나를 돌아봤다.


"제 생명을... 안나에게 주세요. 그조차도 안되나요...?"


오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망할 놈의 노른들, 쉬는 줄 알았더니 마지막까지 나를 고생시키는구만.

...그래, 이제 내게 누굴 살릴 권능 따윈 없다네. 하지만 자네 말대로 생명을 맞바꿀 순 있지.

저 아이는 내 자식이니... 그대가 희생한다면, 나의 마지막 권능으로 저 아이를 살릴 순 있다네."


"그래요... 그거면 됐어요."


엘사가 환하게 웃었다.

도대체 얼마만에 웃어보는 건지, 엘사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엘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일어난 안나가 자신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었다.



에필로그

"...그 이후로 나는 천지 사방을 떠돌아다녔다네. 처음엔 복수를 하려고 했었어... 하지만 크리스토프 그 자식, 1년도 못 가서 백성들한테 맞아 죽었지.

복수할 원수조차 없어지니까 정말로 살 이유가 없어지더군. 하지만... 폐하께서 주신 생명을 내 마음대로 놓을 순 없었어.

전쟁터란 전쟁터는 다 가봤다네. 특히나 십자가를 든 악마놈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범했을 땐 미쳐버리는 줄 알았지.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 그놈들 대대 하나가 날아갔더라고."


"세상에... 어르신은 도대체..."


"자포자기하려다가도, 내 생명은 폐하께서 주신 거란 게 떠오르면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어..."


안나는 얘기를 나누던 손님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봤다.


"그러고보니 자네 눈이 그분을 퍽 닮았군..."


손님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안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손님이 얘기 좀 들려달라고 한 건데, 왜 이리 편하게 얘기가 나오는지.


안나가 손님을 다시 쳐다봤다. 뜻밖에도 손님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있었다. 안나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발퀴리아..."


"네, 맞아요."


어느 새 나타났는지, 챙 넓은 모자를 쓴 오딘이 발퀴리아 옆에 나타났다.


"오딘 님...!? 설마 절 에인헤랴르로 만드시려고...?"


"아니, 아니.

...이제 내게 그런 권능 따윈 없느니라. 발할라? 없어진 지 오래야.

그대를 끝으로 내 자식은 사라진다네. 다만... 아스가르드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축복이라도 내려주려는 것뿐...

자네 덕분에 그나마 내가 여태껏 미드가르드에서 버틴 거니까..."


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퀴리아가 투구를 벗자, 그립고 그립던 백금발이 흘러내렸다.


"엘사...!"

"안나...!"


탁자에 엎어진 여관 주인의 몸이 서서히 식었다.


*********************


"엘사! 프슷! 엘사!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안나, 잠이나 자..."

"안돼, 하늘이 깨어났어, 그래서 나도 일어난거야, 우린 놀아야 한다고?"

"너 혼자 놀아~"


엘사가 안나를 침대 밖으로 밀쳐냈다. 안나는 잠깐 입술을 깨물고 생각을 하더니,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언니의 눈꺼풀을 들추며 속삭였다.


"같이 눈사람 만들래?"


엘사가 씨익 웃으며 눈을 떴다.


그 순간, 지혜의 샘 옆에 걸터앉은 오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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