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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학개론

픽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10.30 00:24:09
조회 721 추천 15 댓글 5


*2013년 배경


벚꽃이 활짝 핀 교정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계절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고 있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마냥 행복하지 않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 박안나도 그 중 하나다. 박안나는 또래 고3 중 아직도 스마트폰이 없다. 아직도 2009년형 애니콜 매직홀폰을 쓴다. 다른 애들처럼 카톡도 하고, 페북도 하고, 애니팡 하트도 주고받고 싶....지는 않지만 뭔가 박탈감을 느끼는 것 같다. 전화기가 뭐라고 고3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다.


"오늘 끝나고 뭐 해?"


중딩 때부터 친구인 박엘사의 목소리다. 최신형 아이폰을 손에 들고 말하고 있다. 모르겠다.


"학원."


"오늘 나랑 째자."


얘는 자기가 고3인줄 모르는 걸까? 잠시 칠판을 본다. 수능 디-삼백몇일 이렇게 쓰여 있다. 모의고사는 이틀 뒤이다.


"저승 가서 많이 째."


"너는 내가 짜증나?"


"아 몰라 꺼져."


힝 소리를 내며 엘사가 멀어진다. 안나는 다시 엎드려 말소리를 듣는다. 남자애들은 사사오오 모여 해외 축구 얘기와 게임 얘기로 시끌벅적하고, 여자애들은 연애 얘기로 시끌벅적하다. 돌아보니 범생이들은 이어폰 꼽고 공부하고 있다. 자신은 어차피 해봤자 4,5등급이다. 엘사는 공부를 어디서 하는지 2등급 아니면 3등급이다. 그만 생각하자. 다시 엎드려 잠을 청한다.


----


얼마나 지났을까.


"아 씨 차가!"


엘사가 콜라 캔을 세 개나 사서 자신의 얼굴에 한 개를 대고 있다. 나머지 두 개는 두개 다 자기가 먹을 건지, 아니면 구색으로 들고 다니는 건지 알 수 없다.


"뭐야.."


"세 개나 샀는데 먹기 싫어?"


"먹는다 먹어."


한 개를 집어 든다. 엘사는 나머지 두 개를 자기가 먹지 않고 남자애들한테 준다. 철수야 민수야 목마르지. 철수와 민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아 든다. 야 쟤가 웬일이냐. 미친 별 일을 다 겪네. 중얼거리며.


결국 지가 먹을 건 아닌가 보네. 안나가 중얼거린다. 쟤는 중딩 때부터 나를 안 그런듯 엄청 챙겨준다. 중3때 은따 당했을 때 유일하게 쟤가 챙겨줬다. 결국 쟤가 만든 무리에서 놀면서 자연스레 졸업했다. 근데 쟤는 나를 왜 그리 좋아할까? 나는 요즘 말로 흔녀인데. 엘사는 얼굴로 따지자면 훈녀고. 모르겠다.


-------


아직 저녁은 쌀쌀하다. 엘사는 내 옆에서 애니팡 신기록을 달성하고 있다. 너한테 줘서 같이 해야 되는데 니가 하필 폴더라 아쉽네. 중얼거리며. 안나는 아무 말도 없다. 난 그게 존나 궁금한데. 넌 그렇게 폰 들고 하루 종일 놀면서 어떻게 공부를 잘하냐? 물어본다. 엘사는 게임하느라 정신이 없다가 정신 차리며 응? 왜 공부 잘하냐고? 내가 잘하는 건가?


"구냥... 니 사진 보면서 공부하니까 잘하는 거지."


안나는 어이가 터진다. 뭐 이런 미친 년이 다 있는지 모르겠다.


"너 혹시..."


"어? 혹시? 맞어 맞어. 히히."


그러면서 잠금 화면을 켠다. 엘사와 안나가 작년에 수학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엘사가 너무 뒤로 가서 안나 얼굴이 크게 나온 그것이다. 좋아한다면서 흑역사를 폰에 박제시키는 미친 인간이 다 있나 모르겠다.


"우리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대학."


대학이 뭐 별 거야? 거저 주는 게 대학이지. 엘사가 말한다.


"대학 가면 하루 종일 술 먹고 밤 샐 거야."


너랑. 이라고 안나가 중얼거린다. 뭐래.


-------


수능 D-100


쪄 죽을 것 같은 날씨인데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나간다. 선생들이 휴대폰을 다 걷어서 분위기가 조용하다. 칠판 옆 벽에는 여기 다니는 학생 싹 다 병신. 그럼 너도 병신이네. 응 조까ㅗ. 더워 뒤진다. 에어컨 바꿔라 시바. 낙서가 적혀져 있다.


안나는 영단어장과 수능 특강 한국사 책을 펴서 공부를 하고 있다. 수능이 100일인데 한국사를 절반밖에 모르겠다. 엘사는 무슨 책을 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폰을 뺏겼으니 할 것이다.


얼마 후 엘사가 자신의 공책에 존나 덥다. 라고 적는다. 안나가 뭐임. 이라고 적자 끝나고 베라 갈래? 라고 적는다. 안나도 그러던가. 라고 적는다. 얼떨결에 이후 목적지가 베스킨라빈스로 정해졌다. 오늘 너네 집 놀러가도 되냐? 엘사가 또 낙서한다. 라면 끓여 먹고 싶다. 엘사가 적는다. 그러던가. 안나가 비슷하게 응대한다. 또 얼떨결에 목적지가 안나의 집으로 정해졌다. 왜 항상 목적지를 지가 정하는지 모르겠다.


베스킨라빈스에 가니 여름이라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엘사는 아이폰으로 카스를 둘러보다가 주문을 시작한다. 나는 슈팅스타하고 엄마는 외계인 너는? 안나의 취향도 엄마는 외계인이었지만 취향이 겹치면 엘사가 또 공공장소에서 난리칠 것 같아 다른 걸 주문하기로 한다. 민트 초코랑 레인보우 샤베트로. 민트 초코라니. 치약 맛 나는 그것을 먹기는 싫지만 나오는 대로 이미 씨부려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엘사가 헐. 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개의치 않는다.


"맛있냐?"


민트 초코와 레인보우 샤베트를 섞어 먹는 안나를 본 엘사가 말한다. 엘사의 컵에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맛있는 게 두개 있다. 아이 씨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뒤늦게 후회가 밀려오지만 때는 늦었다. 더우니 무엇이든 해치워야 한다. 중딩 때 널려 있던 캔모아도 없어지고 남은 곳은 캔모아 밑에 있던 베스킨라빈스 뿐이다. 내 추억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 같아 슬프다.


"또 또 아련한 표정 짓는다. 일 더하기 일은?"


미친년아 공공장소에서 뭐해. 안나가 말리고 나서야 엘사는 행동을 멈춘다. 그래도 아이스크림 입에 묻히고 닦아 줘. 이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생각한다.



----


안나가 사는 405호엔 부모님이 여행을 가서 아무도 없었다. 엘사는 안나 집에 오자마자 마치 자기 집인 양 티비를 켜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다. 꼬마야 먹물먹은 등신들은 다 내 편인것 같구나. 말하면 죽일거야. 말 들은 놈도 죽일거야. 대사도 따라 하면서 지 혼자 웃는다. 저런게 뭐가 재밌다고 만날 보는지 모르겠다. 안나는 서랍 속에서 라면을 찾는다. 안성탕면 3개와 짜파게티 1개가 있다. 안성탕면 3개를 뜯어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그러는 사이 엘사는 이미 드라마에 관심이 없어지고 게임에 빠져 있다. 안나가 살며시 다가와 티비를 끈다. 안 잔다. 엘사가 말하고 티비를 다시 켠다. 개그 프로가 재방송되고 있다. 다시 엘사는 티비에 눈을 고정한다. 프로 속 관중이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겠다.


그러는 사이 물이 바글바글 끓기 시작한다. 스프부터 넣고 면을 넣는다. 나는 그래야 맛있더라. 총각김치도 꺼내서 준비한다.


"야 먹어."


오오 주님 감삼당. 엘사가 사바사바 시늉하며 자리에 앉는다. 라면 맛도 못 느끼게 라면이 들어가는 사이 엘사가 안나에게 물어본다.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


"라면 먹다가 사레 들렸냐?"


"당연히 들렸지. 그냥 묻는 거야. 알잖아."


그리고 하나만 묻자.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


"그냥 예쁜 친구. 너 예쁘잖어."


사실이긴 하다. 중딩 때부터 엘사가 복도를 지나가면 남자애들은 힐끔댔고 여자애들도 예쁘다며 바라보았다. 근데 그렇게 예쁜 애가 나랑 친구라는 것도 설정미스인데 나를 좋아한다고? 말도 안 되지. 그렇게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았다.


"난 너 좋아하는데."


엘사가 말했다. 야야 오해하지 마 이성적이 아니라 친구로서야. 엘사가 말했다. 안나에겐 그 말이 들릴 리 없다. 라면을 주스 게워내는 것처럼 도로 게워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다.


"고3이 공부 해야지 그런 감정을 왜 갖고 있어."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근데 넌 엄마가 스마트폰 안 사준대?"


"엄마가 수능 끝나면 잘 보든 못 보든 최신형으로 사준대."


너랑 빨리 카톡하고 싶은데. 몇 달을 기다려야 된다니. 아쉽다. 엘사가 말한다. 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진다. 8월에 얼굴이 빨개지니 덥다. 엘사가 저녁 전에는 빨리 꺼져줬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나는 양성애자였던가.


"몇 시에 갈 건데."


"공부는 안 해? 머리 좋다고 막 나가게?"


엘사는 그 말을 듣고도 미동이 없다가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주섬주섬 챙겨입고 나갔다.


------


안나는 침대에 누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도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고3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데 그냥 쟤가 미쳐서 나 함 떠볼려고 그러는 건가? 희망회로를 돌려본다. 그러기엔 엘사가 너무나도 진심으로 보인다. 훈녀/남이 흔녀/남을 좋아한다는 클리셰는 이미 인소나 자작 썰에서 많이 봤지만 그게 자신의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군다나 재작년이나 작년이었으면 극복이라도 할 수 있는데 고3때 직면하니 더 골치 아프다.


"저거 그냥 경찰에 신고해 버릴까? 동성 희롱으로"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로 안나는 무척 심각하다.


------


수능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나무는 빨간색 노란색으로 꽃피우고 있고 저녁엔 제법 쌀쌀하다.


"졸업 여행 경비 걷는다."


반장이 졸업 여행 경비 만천원을 걷는다고 돈을 내란다. 안나는 돈이라고는 카드에 있는 돈이 전부다. 그마저도 오천원 뿐이다. 남자애들도 (현질하려고 아껴둔) 만원을 꺼내 바구니에 넣는다.


마침내 안나의 차례가 왔다. 졸업 여행 목적지는 통영인데 별로 가고 싶진 않다.


"돈 없어?"


반장이 재촉한다. 그때.


"내가 안나 것까지 낼게."


뜻밖의 구세주가 등장한다. 남녀 할 것 없이 엘사를 향해 오오오오오오 소리를 내며 환호한다. 이쯤되면 좋아하는 거 맞는거 아니냐? 내가 뭐랬어. 씹 돈 떼이게 생겼네. 각자 중얼거린다. 아마 내려 한 만원 중에는 내기에 걸려던 돈도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고마워."


"내가 박안나한테 고맙다는 말까지 다 들어보네. 그래도 좋은 마음은 갖고 졸업하겠다."


그러고는 안나를 향해 윙크를 날린다. 미치겠다.


------


수능이 한 달 남으니 선생들도 다 자습만 준다. 요새 반 분위기는 쉬는 시간 제외하고 조용하다. 안나는 자신도 이제 곧 스마트폰을 받는다는 생각에 은근히 수능이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엘사야. 나 궁금한게 있는데."


"뭔데?"


"너는 나 같은 흔녀가 왜 좋냐?"


"그냥. 너니까."


너니까.


너니까.


...


"나니까?"


"응. 난 너 볼 때마다 좋은데?"


수능이 한 달 앞이니 드디어 미쳤나 보다.


"너 중3 때 은따당했을 때 내가 은따당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더 니 옆에서 챙겨주고 니가 싫다는데도 밥 같이 먹어주고 니가 괜찮다는데도 조 같이 해주고 그랬지. 내가 박안나 빽이다. 이런 생각으로."


그랬구나...


쟤는 나를 진심으로 챙겨주려고 하는데. 나는 얘를 그저 미친년으로 바라보고 불편해했구나. 박안나 돌은년아. 너 그동안 왜 그랬니. 빡대가리 4등급 새끼야. 대학도 못 갈 새끼야. 한심한 년아....


"미안해... 엘사야.. 너 미친년으로 생각한 거랑 너 피해 다닌 거.. 내가 미쳤지."


"왜 또 사과하고 그래. 나 원래 이렇게 태어났어. 나 원래 미친년이야. 니가 사람 잘 본거야 왜 그래."


"흐잉..."


엘사도 생각한다. 쟤가 나를 불편해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미안해 안나야.


"우리 수능 잘 볼 수 있겠지? 초콜릿 먹으면 대가리 잘 돌아가서 잘 칠 수 있겠지?"


"당근이지."


안나는 눈물을 닦고 엘사의 핸드폰 잠금화면을 바라본다. 여전히 우리 둘의 사진이다.


-----


2013.11.7


수능 날이다. 드디어 안나가 오늘이 지나면 스마트폰을 받는다.


엘사는 안나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같이 등교하려는 모양이다.


"으으 존나 떨린다. 수험표 챙겨왔지?"


"당연하지. 내 이름은 잊어도 수험표는 절대 안 잊어."


후배들이 꽹가리를 연주하며 선배님 사랑합니다. 설국고 재수없어. 니가 대학 못 가면 누가 가리. 이런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고 있다.


후배님들아. 나 대신 고생 좀 해라.


------


수능이 끝났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무난하다.


"안나님! 잘 쳐써? 우리 같은 대학 서울에 있는 대학 인 서울 할 수 있겠지?"


같은 단어를 세 번씩이나 말한다. 2등급도 어지간히 긴장됐나 보다. 근데 그 모습이 귀엽다. 그제야 깨닫는다. 나도 얘를 내심 좋아하고 있었구나. 자각을 못했을 뿐 나도 똑같았구나.


"모르지. 채점해 봐야 알지."


나는 폰 받으로 간다 뿅. 안나가 이젠 장난도 칠 줄 안다. 엘사는 웃으며 부모님께 달려간다.


------


같은 대학에서 만나리라는 꿈이 반쯤 이루어짐과 동시에 안나가 드디어! 스마트폰을 개통했다. 카카오톡, 애니팡, 페이스북, 앵그리버드, 트위터 할 것 없이 다 깔았다. 엘사의 번호 010 1222 0621부터 저장했다. 엘사의 프로필이 카카오톡에 뜬다. 상태 메시지:빨래 끝! 닉네임:존예여신.


존예여신에게 카톡을 보낸다. 하이.


바로 답장이 날아온다. 야 샀냐? 나 니네집 앞인데. 나와.


나가기 전에 카스도 살펴본다. 카스도 프사가 우리 둘 사진이다. 엘사의 카스에는 나에 대한 내용이 있겠지 생각한다.


-----


"여러분! 신이시여 드뎌 제 소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엘사가 자기 일처럼 환호한다. 웃음이 나온다.


"안나야. 이제 너한테 나는 뭐야?"


"크큭. 여ㅊ..."


꺄악! 사람 살려! 엘사가 도망간다. 안나가 웃으며 말한다. 이걸로 니 대가리 깨 버린다! 그러며 쫓아간다. 다만, 그건 언제 하지? 아직 19살인데 아직 이르다. 20살이 되고 나면 생각해야겠다.


2013년 어느 날, 그들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간다.


fin.


----

cookie.


2013.12.25


존예여신:메리크리스마스 어디냐


안나:지금 집에서 나홀로집에 보는중


존예여신:지금 밖에 눈오는데


안나:뭐


존예여신:나랑 눈사람 만들래? ㄱㄱ


안나:ㅇㅋ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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