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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Stolen Ice 25 (해커엘사, 사기꾼안나)

설공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2.22 19: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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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모음 (설갤)

이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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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5*: Friction, Part the First

(마찰, 첫번째 파트)



스코틀랜드는 봄날 쪽지를 확인하지 못한 듯했다. 새싹과 새순이 피우려고 했지만, 태양이 괴팍스러운 성질을 부리며 며칠 동안 휴가를 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바람은 온화하지도 거세지도 않았지만 집요하게 불어 댔다. 매일같이 스코틀랜드의 차가운 바다 안개는 잿빛 돌 위를 두텁게 뒤덮었고, 이슬은 삿갓조개의 껍질 같은 바위 틈새에 매달렸다. 난층운은 정시에 제 몸을 풀기 시작했고, 계절성 저기압이 안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추위를 탔지만 그녀의 불평을 정당화할 만큼 기온이 낮지는 않았다. 아무리 뜨거운 차를 마셔도 근육에 시동이 걸리지 못했고, 지루함에 난방기 뒷면의 주의사항 문구를 읽다보니 이젠 전부 외울 지경이었다:


2kW 정격출력. 온도조절 탑재. 과열방지처리. IP44. 규격: 220 x 225 x 285 mm


정말로 지루했다. 그녀와 제인은 2성급 호텔의 침대 하나로 버틴 지 이제 나흘 째다. 얼마전 두 명은 유럽 내에서도 가장 큰 박람회로 알려진 에딘버러 국제 과학박람회에 도착했다. 거의 모든 호텔에 예약은 가득찼고, 빈 방(좋은 방은 차치하고서라도)은 읎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같은 침대를 사용해야한다는 건 이상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운 좋게 방을 구했다. 안나의 지인들은 전부 런던 기반이었기 때문에 이 석조도시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말고 다른 방은 없는 거 확실해요?” 안나는 카운터에 문의를 했었다.

“그기 축제 중간에 오셨다는 거 아입니꺼. 그카고 축제가 날씨 때메 일정을 다 미라버려서 한동안 계속 빈 방이 읎지싶어예.”

“그럼 있는 방이라도 주세요. 나중에라도 빈 방 생기면 알려주세요, 알았죠?”

“알겠심더, 잘 시다 가이소.”


그게 4일 전의 대화였다. 모든 것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제인이 인터넷 연결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녀는 안나보다도 더 심퉁이 나 있었다.


“젠장!” 그녀는 짜증을 내며 정돈되지 않은 매트리스 위로 태블릿을 던져버렸다. 머리 위로 비가 후두둑 내리고 있었고, 창문은 스산한 기운을 내비치고 있었다.


“무슨 문제 생겼어?” 안나가 물었다.

“접속 자체가 안돼.” 제인이 으르렁댔다.

“무슨 의미야? 그냥 네 힘으로—”

“그런 식으로 작동되는 거 아니거든,” 제인이 딱딱거렸다. 불빛이 번쩍였고, 히터가 꺼져버렸다. 이걸로 오늘만 세번째다. 제인은 불만 가득하게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뭐 때문에 연결이 안되는데?” 안나가 물었다.

“그야 당연히 과학 박람회를 하시겠지. 그것도 우리가 막 도착했을 때를 맞춰서.”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건물 2개 옆 박람회에 거대 초전도자석을 전시하고 있고, 우리가 여기 도착하고 난 이후로 계속 시범운영을 하고 있어.” 제인이 투덜댔다. “네트워크 연결이 망했으니, 한스가 그의 계정들 중 하나라도 접속을 했는지 어떤지 알 수도 없어. 해결하려면 국제 위성 여러 개를 재프로그래밍해야 된다는 소린데, 그렇게 하면 너무 눈에 띄니 한스 추적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말인즉슨, 그를 추적할 수 없다는 소리야. 호텔이 자석 바로 옆에만 있지 않았어도—”


“그럼 다음 호텔은 네가 고르던가,” 안나도 당연하게 짜증이 날 수 밖에. “우리가 처음에 알아봤던 몇 군데는 와이파이조차 없었어.”

“와이파이는 필요없어. 간섭없이 알아서 연결할 수 있으니까. 내게 필요 없는 건 핵발전소도 돌릴 수있을 정도로 강력한 초전도 자기장이 있는 장소야, 그것도 코 앞에 버젓이!”

“그럼 자기장에서 벗어난 곳을 찾아 나가봐. 카페나 뭐 그런 곳. 그리고 어쩌면 그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어서 접속을 못한 걸 수도 있잖아.”


아니면 그냥 런던으로 돌아간 걸 수도 있고. 그는 보통 이런 북쪽까지 올라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니이이이이이이 제인이 그가 스코틀랜드에 있을거라고 우기니 난 해기스(*역주: 양의 내장으로 만든 순대 비슷한 스코틀랜드 음식)를 견디고 끔찍한 백파이프 음악을 망할 새벽 6시에 듣고 있어야하네.


“넌 그가 여기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거지?” 제인이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말 안했거든.” 안나가 받아쳤다.


뭐, 의중에 담겨있긴 했지. 주변에 없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추적을 해?


“봐, 우리 너무 좁은 공간에 오랫동안 답답하게 지낸 탓에 둘 다 살짝 곤두서 있어.” 안나가 말했다. “어쩌면 밖에 나가서 환기를 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맞아, 미안해, 너한테 짖어댈 생각은 아니었어.” 제인이 말하며, 장비들을 더플백 안에 챙겼다. 제인은 틱택(*역주: 민트)을 한 알 먹고는 딱 맞는 잠바를 걸치더니 지퍼를 잠궜다. “난 잠시 나갔다올게. 뭐 잡히는 게 있는지 몇 군데 시험해보고 올게. 아니면 앞으로 몇시간 안에 한스가 접속하기를 존나 기도하면서 새로고침만 누를 수도 있지만.”


“알았어, 좋아.” 라고 안나가 말했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때로는 말은 긴장감만 증폭시킬 뿐이었고, 사람들의 믿음과 달리, 안나는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 밖을 나섰고, 이 때 처음으로 안나는 제인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맙소사, 땋은 백금발 머리만큼이나 꼬인 제인의 머릿속에 꼭꼭 숨겨둔 게 뭔지 모른다는 점에 안나는 답답했다. 갤러리로의 작은 외출은 클럽 유토피아의 공연 이후의 일종의 환기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덜너덜한 타이어에 붙인 임시 땜빵이었고, 공기는 새고 있었다. 땜빵으로는 둘 사이의 행동에 누가봐도 분명한 긴장감이 자리한 것을 돌이킬 수 없었다. 그 끝이 길한복판에 버려진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랐다.


제인은 그렇게나 불편했을까?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침대는 영국식으론 킹사이즈, 미국에선 퀸사이즈로 받아들여지는 크기여서 분명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였다. 누워서 REM 수면을 시도하는 것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왜냐하면 안나가 자러 가는 시간에 제인이 절대로 같이 자러가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문제는 일어나는 것이었는데, 자기 것이 아닌 몸에 복잡하게 감싸안은 상태에서 잠에서 깨는 점이었다. 이게 다 제인이 안나를 끌어당기는 망할 블랙홀이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뒤척이며 웅얼대다 자신이 제인의 쇄골에 침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새하얗게 질린 채로 그녀가 깰까 조심조심 지렁이 굴을 만들면서 빠져나오기 십상이었다. 세번째 아침에는 가만히 응시하던 것을 제인한테 들켰다. 잠에 취해 흐릿한 눈을 한 그녀는 작게 꿍얼대며 등을 돌려 누웠는데, 등을 돌리기 직전에 보여준 싱긋 웃어준 미소는 안나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한 쪽 끝이 살짝 올라간, 취기가 올라온 바보같이 웃는 붉은 입술. 그녀는 의식없이 안나의 손을 쥐고 깍지를 끼워 마주 잡은 손을 자기에게 둘러 배꼽 위에 올려두었다.


그럼 어쩌면 제인은 거북하지 않는 걸지도? 젠장, 언제부터 그녀의 생각을 읽기 힘들어진거지?


그녀를 마음 속에 품기 시작했을 때부터겠지, 안나의 마음의 소리가 핀잔을 줬다.


안나는 박자를 맞추듯이 머리를 벽에 박기 시작했다. 벽을 타고 올라가 눈을 뽑아버리기 전에 이제 그만 이 울적한 스코틀랜드 호텔에서 벗어나 할 만한, 제인이랑 관련없는, 일이 떠오르기를 바랐다.


제인은 외출했고, 우린 항상 붙어다닐 정도로 친밀한 관계도 아냐. 그녀가 내 인생에 들어오기 전에도 난 혼자서도 즐겁게 잘 지냈단 말이야. 그리고 난 타인을 통해서만 자존감을 확인하는 상사병 걸린 머저리가 절대 아니라구. 뭐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나…군중들은…음, 뭐 물론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져주는 건 좋아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안나는 잠바를 챙기고 성큼성큼 호텔 방 밖을 나섰다. 근방에 과학 박람회를 한다고 하니, 그녀는주기율표의 원소기호들이나 로켓발사체, 그리고 제인이 그토록 혐오하는 자석을 보다 보면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좋은 작전이야.


그녀는 안내데스크 앞으로 껑충껑충 뛰어가 박람회를 위한 안내책자를 받고는, 손짓과 불분명한 사투리로 위치에 대한 대략적인 안내를 받았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호텔의 입구 앞 석조바닥에 내딛으니 끊임없이 내리는 빗 속을 마주했다.


그 전에 커피 한잔부터.


안나는 실수로 티 하우스에 들어가 메조 아메리카노(있다면, 모카샷 하나 추가로)를 주문하니, 카운터의 바리스타-줄긋고-찻집 여주인이 콧방귀를 뀌며 알아듣기 어려운 투덜거림을 되돌려주었다.


카페인과 설탕으로 가득채운 안나는 다시 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바깥은 집요한 잿빛 하늘 덕에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시내 중심지를 향해 몇 블록을 걸어가니 매혹적인 과학 전시를 마주하게 되었다. 복잡하게 얽힌 여과 시스템이 과학 박람회를 주최하는 호텔 중 한곳의 배수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열정 가득한 갈색 머리의 남자는 갈대와도 같은 마르고 물에 흠뻑 젖어 있는 채로 빠르고 높게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복잡한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그를 미친 사람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지. 제인 같은 사람들—


또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되돌아와버렸다.


외부 전시물들이 불행하게도 날씨와 씨름하는 동안 스코틀랜드 토박이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비를 대하고 있었고 안나는 틈 사이로 보행자길로 매끄럽게 들어섰다. 안나는 몇 블록 앞까지도 관광객들을 바로 골라낼 수 있었다. 그들은 우비와 장화, 혹은 우산 등 저마다 다양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기묘한 기계 하나가 폭발하며 그녀의 왼쪽으로 형형색색의 색종이띠를 내뿜어 석회석 위에 희미하게 염료를 묻혔다. 축축하게 젖은 무지개 같이.


안나는 고개를 숙여 전시의 열린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다양한 나라의 과학박람회에서 우승한 대학들의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멀기로는 칠레나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뉴질랜드 대표는 달을 향해 특정 패턴으로 레이저를 쏘아올려 리더기로 하여금 반사된 파장을 읽어 ‘작은 별’을 연주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녀와 파트너가 반응하는 영상은 유투브에 꽤나 널리 알려진 모양이었다. 조회수만 300만 이상이란다. 그들은 스코틀랜드인 심시위원들에게 이론을 성멸하고 있었고, 짧은 검은 머리의 남성은 과학의 신비에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저희가 ‘up above the world so high, like a diamond in the sky' 부분을 연주했을 즈음에 바로 대상을 바로 확정 지었죠!”

(* 역주 ‘작은 별’ 영어 가사 일부. 우리나라 버전으론 ‘동쪽하늘에서도, 서쪽하늘에서도’에 해당하는 파트)


하늘 위의 다이아몬드처럼 (Like a diamond in the sky.)


제인.


젠장.


안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심포지엄의 소란스러움을 즐겼다. 그녀는 자기가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면 어땠을 지 상상했다. 부모님이 계시고, 집이 있고, 단단하게 고정된 무언가가 있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대학에 다니고 있었을까? 그 때도 변함없이 미술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취향이 이공계쪽으로 바뀔 수도 있었을까? 제 기억이 올바르다고 한다면 지금쯤이면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신입생 티에서 벗어나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로 짓눌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데이트도 했을까? 동아리 가입은? 성적은 좋았을까, 아니면 그저 그렇거나 나쁜 편이었을까? 전공은 무엇이었을까? 좋아하는 음식은 달랐을까? 그녀는 알아서 자라난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부모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매해 몇 파운드씩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초콜릿을 꿀꺽하게 놔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어쩌면 내가…방울 양배추같은 말도 안되는 채소를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몰라.


안나는 빽빽하게 밀집된 군중 사이(한 가족은 이중유모차를 끌고 우는 아이 세 명을 데리고 있었다)로 밀고 들어가, 여과기 장치들이 모여있는 구역으로 이동했다.


또, 파이프랑 수로랑 보일러랑—잠깐.

저거…한스 아냐?


안나는 유리 실험 기구 장치 뒤로 몸을 숨겨, 붉은 액체가 보글거리고 있는 삼각 플라스크 사이로 초록 눈의 괴물을 슬쩍 쳐다보았다.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가수도 비웃을 저 구렛나룻을 보아하니 의심할 여지도 없네. 내가 아주 저 자식을 그냥—


워워, 안나.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구. 마음의 소리야 아드레날린한테 쭈그리가 되기 십상이었지만, 이번에는 웬일인지 그녀를 붙잡는데 성공했다. 왜냐하면 이 모험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인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수백만 달러를 강탈해간 남자에게 자연스럽게 걸어가 “아니 너를 여기에서 만나다니! 이거 봐, 분젠 버너랑 비커 재미있다, 안그래?”라고 말을 걸면 그는 도망칠 것이고 그녀는 그를 추적할 길이 없었다. 그를 놀래키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제인에게 연락하는 편이 나아보였다. 한스의 위치를 제대로 잡아낸 제인에게 말이다.


안나는 죄책감을 뒤로 하고 제 눈 앞의 문제에 집중했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봐도 잡히는 거라고는 27 파운드와 호텔룸 키 밖에 없었다. 그녀는 일하는데 항상 소모품만 사용했기 때문에 제인에게 선물받은 아이폰을 상시로 챙기는 버릇을 아직 들이진 못했다.


한스는 아일랜드 대표단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보아하니, 물어볼 것도 없이 무시당하고 있었다. 부스에 선 두 명의 소년들은 살짝 혼란스러워하며 열정적인 한스를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신기할 것도 없네.


안나가 보기엔 그는 두 명을 설득할 리 만무해 보였지만, 그는 끈질기게도 자기 명함을 건내고는 폭풍처럼 전시장을 휩쓸고 나갔다. 안나는 안간 힘을 써서 사람들을 밀치며 그를 쫓았지만, 군중의 반대방향으로 치고 들어가야했기에 빗 속을 뚫고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코너를 돌아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희미하게 잡은 것이 고작이었다.


분명 오른쪽으로 돈 거 같았는데, 맞지?


방향은 아무래도 좋았다. 안나가 코너를 돌아서 보니 지근거리에 골목길이 5개, 버스 정류장 3개에(심지어 신호등 2개 건너 앞에 2층 버스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깜박이를 키며 대기하고 있는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헛기침을 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어떻게—아, 그렇지.


“안녕, 얘들아.” 안나는 아일랜드 소년들에게 활기차게 인사했다. 그녀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들은 전시장에서 부스를 해체하고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커다란 통들을 수레에 싣거나 구릿빛 관을 케이스에 집어넣고 있었다. 한 사람은 초록, 하양, 오렌지 깃발을 접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율리시스의 인용구가 적힌 액자를 포장하고 있었다. 인용구는 이러했다: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유년기에 자신의 것이라 들은 이름을 적을 때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 율리시스: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 Ulysses를 제목으로 한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현대영문학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대작. 그러나 난해한 문체와 수많은 함축적인 문장들과 은유로 읽기 가장 어려운 소설로도 손꼽히기도 한다.)


“네가 모를까봐 얘기하는데, 전시는 이제 끝났어.” 짙은 머리와 푸른 눈의 소년이 말했다.

“제임스, 다물어. 우리 부스에 온 걸 환영할게.” 당근색 머리에 푸른 눈에 다소 순박하게 생긴 소년이 말했다.


빙고.


“너희들은 여기에서 뭘 전시하고 있었어?” 안나는 물었다.

“미국 대표단에서 온거야?!” 진저 머리가 물었다.

“아, 안타깝게도 아냐. 그냥 관람객이야.”

“흠, 만약 에스코트가 필요하다면 여기 제임스와 내가-참고로 난 콜린이야- 기꺼이 널 데리고 나가-“

“미안해. 나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안나가 말했다. “아까 너희랑 얘기하던 남자 말인데,”


그들의 얼굴이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처럼 찡그려졌다.


“너 그 남자랑 만나?” 제임스가 물었다.

“그렇지는 않아. 그는 내…오빠거든.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하려는 중이야.”

“넌 독일억양을 쓰는 것 같지 않은데.” 콜린이 말했다.

“떨어져서 살거든. 난 엄마랑 미국에 같이 사는데, 아빤 베를린에 계셔…조금 복잡한 가정사야, 아무래도 좋지만.” 안나는 파리를 쫓아내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냥 오빠가 왜 너희를 괴롭히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어. 그를 대신해서 사과할게.”

“아, 봐 봐, 열정이랑 매너는 살아있는 거 같네, 콜린.”

“오 그러게, 그녀는 다르긴 하네. 그리고 그렇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어, 그냥 조금 이상한 남자였지. 그는 우리 공정에 대해서 질문을 많이 했을 뿐이야.”

“정확히 어떤 공정인데?” 안나는 그들이 말을 이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

두 청년은 또 다른 판자를 가리켰는데, 아서라는 이름이 파인트 유리잔 그림 옆에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필체로 쓰여져 있었다. 안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둘의 행동을 따라하자, 콜린이 큰소리로 말했다.


“우린 더블린 기네스 브루어리에서 일하고 있어. 초기 개발 중이긴 한데, 지금 새로운 스타우트를 만들고 있어.”

“난 이게 대학 대회인 줄 알았는데.”

“우리 대학생이야!” 제임스가 말했다. “UCD에 다녀. 근데 브루어리에서 우리가 대체 효모를 이용해서 발효 시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가 맥아즙 재발효에 성공하니, 그들이 우리에게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하더라구.”

“너희들이 밀조업을 하고 있어서 그들이 고용했단 거야?” 안나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콜린이 조금 불쾌한 듯 말했다. “이건 뒷숲에서나 하는 밀조가 아냐. 우리가 하는 건 과학이라구.”

“물론 그 덕에 넌 꽤나 헤롱대지만 말이지. 너 저번 학기에 플래티넘 위크를 세 번이나 달성했잖아!” 제임스는 장난기 가득하게 콜린을 팔꿈치로 찔렀다. “우리들 중에는 자제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거든.” 그는 놀리며 손으로 콜린을 슬쩍 가리켰다.

(* 플래티넘 위크: 아일랜드 대학생들 사이에 도는 말로 ‘학교에는 왔는데 술 마시느라 일주일 내내 빠짐없이 수업 통째로 빼먹기’를 말함.)


“근데 왜 한스는 너희들의, 뭐였지, 메가즙?에 관심이 있는거야?”

“맥아즙,” 콜린이 말했다. “보리를 으깨서 얻은 액체인데, 전통적인 주조의 원재료야. 그리고 그가 우리가 기네스를 떠날 생각이 있으면 자기랑 일하지 않겠냐고, 물량공급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구.”

“너라면 기네스를 떠나겠냐고.” 제임스는 눈을 굴렸다.

“그가 너희를 채용하고 싶어한 거구나?” 안나가 물었다.

“그는 큰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 얘길하더라. 우리보고 물량을 대 줄 수 있는지, 미국으로 운송하면 얼마나 들지, 거기에 투자 전망이 어쩌구 개소리를 하더라구. 그는 우리가 어리다고 멍청한 줄 아나 보더라”

“어차피 우린 그런 건 취급하지 않아.” 제임스가 말했다. “우린 양조업자들이고, 과학자들이고, 수공업자들이지. 우린 네 루비빛 입술을 타고 들어갈 가장 완벽한 맥주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카사노바씨, 진정해.” 안나가 핀잔을 줬다. “그가 어디 갈 거라던지 얘기는 안했지? 오빤 맨날 날 두고 제멋대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거든.”

“어, 그가 얘기해줬다고 장담하지 못하겠어. 근데 한 잔 시음해 볼 생각 없어? 전시용으로 갓 만든건데. 버리기엔 아까워서 말야.” 콜린이 말했다.

“그니까. 우리 여기 떠나기도 전에 너 곯아떨어질까 무섭다.” 제임스가 콜린에게 말했다.

“닥쳐!”

“고마워, 얘들아.” 안나가 온화하게 말했다. “근데 난 이제 가볼 시간이라서.”

“너 에스코트 없어도 되는 거 확실해?” 콜린이 소리쳤다.

“난 혼자서도 괜찮아. 너희 둘 서로 잘도 많이 놀려먹는다.”

“형제가 다 그렇지 뭐, 안 그래?” 제임스가 말하며 콜린에게 헤드락을 걸어 항복을 받아낸다.

안나는 웃었다. “난 알 길이 없거든.”


제임스는 콜린을 놓아주며 밀어냈다.


“뭐? 한스가 한번도 널 골탕 먹이거나 그러지 않았단 말야?”

“그녀는 그와 멀리 떨어져서 지냈다잖아, 무신경하게 굴지마.” 제임스가 지시했다.

“오, 아니, 내 말은, 난 남동생이 아니라…여자니까—여동생 같은 거잖아, 그러니까 다른 거겠지, 아마?” 안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안해 얘들아, 이제 가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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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코멘트:


- 스코틀랜드 사투리는 억양 센 대사는 적당히 K패치.

- 초반부에 엘사가 깍지 낀 손 어쩌구 부분은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해석하기로는

엘사가 잠이 덜 깬 채로 웃음 -> 안나손을 깍지낌 -> 등을 돌려 누우면서, 안나 손을 당겨 배에다 가져다 댐(백허그 자세)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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