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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Praying prey 34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01 2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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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시간을 맞추지도, 맞춘 시계도 없었는데도 안나의 무의식 속에는 재머의 상태를 점검해야한다는 강박감이 남아있었다. 정확히 3시간 뒤에 일어난 안나는 지난 며칠간 쌓였던 피로가 풀린 것을 느꼈다. 눈꺼풀은 가벼웠고 텅 빈 위장은 비명을 질렀다. 엘사와 멜리사는 안나의 팔을 안고 자고 있었다. 마치 중세 시대에 쓸 법한 수갑에 구속된 느낌이었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구속된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두 아이가 깨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팔을 빼 일어났다. 대신 춥지 않게끔 두 아이를 서로 붙였고,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정돈해 찬 공기가 스며들지 않게 했다. 두 아이는 안고 있던 따뜻한 팔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손을 더듬거리다 이내 서로의 손을 잡으며 몸을 더욱 웅크린다. 안나는 금방 돌아올 것을 자고 있는 아이들에게 약속하고 주섬주섬 옷과 장비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경무장은 포기하고, 방탄복에 점퍼, 그리고 cz탄창 2개를 점퍼 왼쪽 주머니에, cz권총을 오른쪽 주머니에 넣은 것까지 확인한 안나는 엉거주춤 트렁크에서 몸을 일으켜 뒷좌석, 그리고 운전석으로 이동했다. 아직 재머는 잘 작동하고 있지만 과열되어 있었다. 안나는 일전에 농장에 재직했을 때 이런 류의 방탄 차량을 많이 몰아본 경험이 있었다. 추적기는 3개가 있었고, 그 위치가 바뀌는 일은 의외로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이 차량은 추적기의 위치를 바꿔놓지 않았다.



안나는 곧 글로브 박스와 양쪽 도어포켓에서 재머와 비슷한 손바닥 크기의 검은 상자들을 찾아냈다. 위치추적기였다. 재머가 언제 고장날지 모르므로 지금 전원을 꺼두기로 했다. 세 개의 위치추적기를 무력화시킨 안나는 이번엔 트루돈 나이프를 꺼내 추적기를 비틀어 열었고, 안에서 배터리들을 분리했다. 혹시 몰라 전자기판을 칼날로 모두 긁어 두어 추적의 가능성을 모두 배제하기로 했다.


재머를 잠시 끈 안나는 문득 핫라인 스마트폰을 충전하지 않아 방전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개인 휴대전화는 애초에 챙겨오지 않았다. 전파 및 위치 추적의 위험이 더욱 큰 것이 개인 휴대전화고, 그래서 차폐 처리된 핫라인, 그리고 지휘자인 메가라와 통신할 무전기만 챙겨온 것이었다. 안나는 핫라인 스마트폰을 콘솔박스 케이블에 꽃았고, 재머를 끈 다음 차 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동쪽 하늘에 흰색과 파랑색의 그라데이션이 만들어졌다.


아직 햇살에 뎁혀지지 않은 공기들이 폐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안나는 그 갑작스러운 찬 기운에 기침을 토했다. 입김이 새어나와 마치 담배 연기를 음미하다 뿜어낸 것 같은 모습이 그려졌다. 안나는 일단 한 블럭 옆에 위치한 식료품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한 안나는 그곳에서 자기 전에 생각해둔 토마토 샌드위치, 그리고 크로크 무슈를 각각 3개씩 샀다. 아이들은 많이 먹을 것이기 때문이었고, 안나는 빵 하나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지나치게 먹는다면 식곤증으로 쓰러져 버릴 것 같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그 다음으로 고른 것은 엘사가 먹을 초콜릿 과자 통과 멜리사의 사탕 통에 넣어줄 사탕들을 골랐다.


두 아이의 머리색은 서로 달랐고, 좋아하는 간식의 색깔도 거의 반대되는 색깔에 흥미를 품으면서 안나는 뎁혀진 생수 통들을 세 통 정도 샀다. 차가운 물은 아침에 좋지 않았고, 엘사와 멜리사가 얼음을 다룬다지만 찬 물을 마시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얼음물의 기억이 떠올라 안나 또한 그렇게 구미가 당겨지진 않았다. 치약과 칫솔들까지 모두 산 안나는 식료품점 주인에게서 많이 구매한다는 이유로 보온 팩을 서비스로 몇 개 받아낼 수 있었다. 또한 안나가 옷가게와 공중전화들의 위치를 묻자 주인은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차로 돌아온 안나는 뒷좌석에 보온 팩을 넣은 음식 봉투들을 넣어 뒀고, 남은 보온 팩들은 엘사와 멜리사가 덮은 이불 사이사이에 끼워 두었다. 보온 팩들이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안나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시 차에서 나온 안나는 이번엔 아이들에게 입힐 옷들을 사기로 했다. 3블럭 앞으로 떨어진 곳에 작은 옷가게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엘사와 멜리사의 사이즈를 어림잡아 구입하기로 했다. 가장 처음에 고른 것은 엘사와 멜리사의 새 내의였다.


겉옷을 입은 채로 이불을 덮으면 답답할 수 있기에, 가장 편하면서도 얇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기본적인 옷이었다. 그 다음으론 머리 색깔에 맞춘 하얀색과 검은색 모크넥 스웨터였다. 엘사의 성격에 맞는 단정한 옷이었고, 멜리사의 외모에 맞는 고딕 느낌이 있는 옷이었다. 바지는 기모가 있는 바지를 두 벌 구입했다. 차가 히터를 튼다지만 기름을 더 먹고, 지속적으로 환기를 시켜야 했다. 그럴 때를 대비해 옷을 좀 더 두껍게 입히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옷가지들을 산 안나는 두 동생에게 옷들을 입혀줄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차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안나의 인기척에도 곤히 잠들고 있었다. 안나는 뒷좌석에 옷가지들을 쌓아 놓은 다음 어느 정도 전량이 확보된 핫라인 스마트폰을 가지고 차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도로변이 아닌 덤불 속에 안나는 서 있었다. 핫라인을 켰을 때, 당텍에게서 온 전화나 메세지는 없었다. 안나는 조금의 정보라도 얻기 위해 당텍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기본 컬러링이 5번 정도 울린 다음에야 당텍은 전화를 받았다.

"당텍, 저예요."

"스칼렛, 아직 살아 있나 보군요. 다행이예요."

당텍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한스에 대한 정보는 없어요?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부스러기라도 좀 던져 봐요."

"어... 저도 지금 조사 중이예요. 근데 이게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니라 거의 광부 수준으로 파고 들어가야 해서요. 또 조사하다 아톤 측에서 압박이 들어올지도 모르죠."
당텍이 걱정하는 건 대기업의 심기를 건들여 쥐도새도 모르게 '정리'당하는 행위였다. ASIC에서 나름 방비책을 세워 두었어도 그것이 적재적시에 작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방향에는 장애물이 있기 마련이다. 안나는 아톤의 압박을 떠올리면서 메가라가 했던 '자문관의 죽음'을 기억했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우스운 발언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말한 메가라의 부탁을 곱씹어 볼때 당텍에게 의중을 떠 보아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당텍, 혹시 죽었어요?"

"예? 당신이 작업거냐고 물을 때 이후로 들은 최고의 개소리라고 지껄여도 될까요?"

당텍은 처음 핫라인을 건내기 전 안나의 농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트라우마를 일으킬 정도로 당텍은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었다.

"그렇죠? 아뇨,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이 죽었다고 메가라가 말한 적이 있어서..."

"스칼렛."

당텍의 진지하게 말했다.

"저를 못 믿으십니까?"

"아뇨, 아뇨, 못 믿는다는 건 아니고..."

안나가 말을 얼버무렸다. 일단 안나는 당텍을 믿는 쪽이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안나는 그저 가볍게 떠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당텍은 진심으로 기분이 나빠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가벼웠던 대화는 금세 고문 없는 심문으로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입장을 바꿔 말하면, 멀쩡히 살아있던 사람에게 누군가의 출처 불분명한 말로 죽었냐고 물어보는 것도 상당히 무례한 축에 속했다.

"아무래도 메가라는 국가 기관에서 일하니까... 더 조사를 많이 해서 그런 가보다 싶었죠."

"저희 기업도 국가 기관에 비견할 만큼 정보 확보에 힘을 씁니다. 전직 방첩 인사들도 많이 포섭하고 있고요. CIA의 정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전 별 말 안했어요. 그냥 증거를 제시하라고 했고, 그쪽에선 정보원이 기밀이라고 해서 제시를 못했어요. 이게 다예요."

"스칼렛, 저는 당신을 위해서 모든 정보를 다 조사했고, 심지어 케메로보 세이프하우스도 관리자들을 설득해 겨우 허락을 받아냈어요. 당신은 부담없이 세이프하우스를 이용했고요, 맞죠?"

기관총처럼 쏟아지는 당텍의 말에 안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음을 느꼈다. 찬 바람이 덤불 속 이름모를 식물의 향을 가져와 안나의 코를 간질였다. 피톤치드와 비슷한 향은 안나를 정신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렇죠."

"그리고 지금 전 언제 암살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톤의 '한스'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 작업을 망친 사람도 찾았어요. 변절자 말입니다."

"변절자요?"

배신자와 비슷한 사람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리고 메가라가 요청했고, 안나가 무언으로 수긍한 그 제안 속에서 찾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 사람만 잡으면 메가라가 알아서 처리할 테고, 안나와 엘사, 멜리사는 신변은 보장될 수 있었다. 저절로 귀를 기울여 들을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지금 당신이 어떤 상황인지 몰라 말할 타이밍을 못 잡고 있었거든요."

당텍이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요. 새벽에 추격이 조금 있었지만..."

"무슨 추격이요? 아톤?"

"날 잡으려고 전 직장 동료들이 찾아왔는데, 중국 쪽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들도 찾아왔죠. 뭐, 직장 동료들이 중국 친구들을 사살했고, 전 그 동료들을 제압했지만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종교를 믿으시는지 모르겠는데 신이 있다면 스칼렛 당신의 편에 서 있겠네요."

"무종교예요. 저는 제 자신만 믿어요. 그래서 그 변절자는 누구예요?"

메가라의 제안을 수락했어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변절자를 찾는 것은 제 아무리 날고 기는 킬러였던 안나도 무리가 있었다. 작업에 관련된 자들이 딱히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갈 곳을 골몰하던 안나의 앞길에 나타난 당텍이란 이정표는 안나에게 길을 알려 주었다.

"절 거짓말쟁이라 생각하실 수 있어요."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겠어요."

"정말 믿을 수 있어요?"

"예, 믿을게요. 말해 봐요. 정보를 유출한 사람, 그 변절자가 누군지."

핫라인 너머에서 당텍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가 싫은 것인지, 아니면 말하기 싫은 연기를 소름끼치게 잘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들어봐야 했다.

"이두나 사장님입니다."

"예?"


당황과 경악의 연속이었다. '이두나가?' 안나의 머리속엔 이두나의 상냥한 얼굴이 떠올랐다. 비록 짧은 3일이었지만 안나의 기억 속에서 이두나는 그럴 사람은 전혀 아니어 보였다. 물론 겉모습이 무조건 진실한 것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 작업을 유출시킴으로써 안나와 엘사를 빈사 상태까지 몰고가게 만들었다.


메가라는 이두나와의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당텍은 CIA의 정보가 항상 정확한 것이 아님을 안나에게 상기시켰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말한 것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두나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이 두 사람에겐 깔려 있었다. 유출, 잠적. 기분 나쁘게 상성이 좋은 단어였다. 두 사람의 말을 조합하면 이두나는 정보를 유출시키고 안나가 작업을 하러 러시아에, 메가라는 랭글리로 귀국하는 동안 잠적을 했다는 스토리가 완성되었다.


"믿기 힘드시다는 거 압니다. 저도 나름 시간 쪼개가면서 따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이렇게 나올 줄은 저도 몰랐어요."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요?"

정황은 거의 맞아 떨어졌지만, 그것을 증명할 근거가 없었다. 구두로 판단하기엔 안나는 이두나를 단순히 사장 이상을 넘은 친한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톤 측하고 나눈 대화 로그를 찾아냈어요. 잠깐 전화 끊어 봐요. 메신저로 로그를 보내드릴테니까요. 다 읽으면 전화하세요."

당텍이 전화를 끊고, 안나는 트렁크 안을 잠깐 돌아봤다. 선팅이 되어 있어도 어느 정도는 차량 내부의 윤곽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동생은 아직 자고 있었다. 안나는 덤불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갔다. 잠시 뒤 짧은 알림음과 함께 음원 파일이 첨부된 장문의 메세지가 와 있었다. 안나는 천천히 메세지 속 텍스트를 읽어내려갔다.



[H, 안 좋은 소식이예요]

[초승달이 알려지기라도 했습니까?]

[그것도 있지만, 제 회사에 커미션 하나가 떨어졌어요. 당신네 연구소를 습격한다고 하네요.]

[I, 사람을 여럿 보낸다면 저희도 감당할 수 없어요.]

정황상 I는 이두나의 I, H는 한스의 H를 말하는 것 같았고, 작업 계획을 마친 직후에 남겨진 로그인 것 같았다.

[걱정 말아요, 한 사람만 보낼 거니까요.]

[수행원 인포 얘기해 보세요. 알파킬러 급입니까?]

[헌터킬러 이상이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작업을 모두 설명하진 않았으니까, H가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작업은 연구소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작업을 모두 설명하지 않았다는 대목은 구조팀의 전멸과 컷아웃 오로라의 아파트 참극을 뒷받침 해주는 뾰족한 문장이었다.

[손실이 크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정보를 알려줘서 고마워요 I.]

[별 말씀을요, 저희와 지속적인 계약만 잘 맺어주시면 되는 걸요.]

[덤으로 소스를 몇 개 드리겠습니다. 수단에서 민주화의 바람이 불 것 같더군요. 형세는 민중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고,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 평의회 의장이 민주주의 성립 이후의 과도기에 불안해질 치안을 유지할 병력을 물색하고 있으니 그쪽에다 컨택을 넣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건 어디서 찾으시는 거예요?]

[저희 회사가 만드는 약 중엔 에이즈 치료제도 있습니다. 따로 아프리카에서 교육 사업과 후원 재단도 유지하고 있으니 모이는 게 정보고, 그것이 곧 돈이 되는 법입니다. 당신이 저희에게 경고를 했으니, 저도 당신에게 그만큼의 대가를 줘야 하겠죠.]


텍스트는 여기서 멈췄다. 글을 읽었을 때, 이미 이두나는 아톤과의 거래가 예전부터 존재했고, 안나는 존재 자체가 위험한 헌터킬러 이상의 수행원이었지만 작전 정보에 대해 완벽한 정보 전달을 설계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된다. 안나는 의식적으로 두 눈을 깜빡이며 텍스트를 다시 읽어 보았다. 잘못 읽은 것이 아니었다. 그 미소, 그 친절, 그 뱅쇼가 모두 거짓이란 가설은 섣불리 받아들이기 힘든 항생제 같았다.


안나는 발작과 부상 이외엔 손을 떠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안나는 음원 파일을 누르려는 그 손가락이 발작을 맞이한 것처럼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안나는 덤불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불안한 모습을 아이들이 눈치채길 원하지 않았다. 엘사는 주변의 상황을 눈과 얼음으로 만든 디오라마로 능력을 발현하지만, 지금은 자고 있었다. 어느 정도 서버번과 떨어졌다고 생각한 안나는 겨우 파일을 누를 수 있었다.




<블루라운드는 걱정 안 되십니까?>

익숙한 변조음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봤을 그 변조음이 안나의 신경을 긁었다.

<어차피 지루한 회사였어요.>

이두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진정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곁에 있어 보리라고 결심하게 한 그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지금 안나에게 느껴지는 건 뮬란이 죽어갈 때의 것과 같았다. 뇌수가 허망함이란 이름의 구정물로 뒤바뀐 것 같았다.

"....왜."

이두나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두나에게 물은 게 아니었다. 그 한 글자 물음은 허공에 흩어졌지만, 안나의 머릿속엔 메아리처럼 공명했다.

<더 나은 즐거움이 없거든요. 당신이란 사람 앞에선.>

이두나의 말투와도 흡사했다. 위증이 아닌 실증이었다.

<만약 스칼렛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으면, 그 때 식을 올릴까요?>

<좋습니다. 이두나 아...아니, 이두나 웨스터가드.>

변조음의 말을 끝으로 이어진 소리들은 옷과 살이 스치는 소리, 이윽고 서로를 짐승처럼 탐하며 질펀하게 들려오는 젖은 살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발정에 차 헐떡이는 교성이 휴대폰을 가득 채웠다. 안나는 재생을 멈춘 다음 당텍에게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이 울리기도 전에 당텍은 안나의 전화를 받았다.



"...진짜예요?"

"...진짭니다."

당텍의 목소리는 여지껏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무거웠다. 당텍 또한 충격이 컸을 것이었다. 압박과 감시에도 겨우겨우 찾아낸 유출자 겸 변절자가 다름이 아닌 파견된 기업의 사장이었으니 할 말을 잃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당텍의 질문은 간단한 1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차적 의미는 1차 의미와 정반대였다.

"제 입장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당텍이 조심스레 물었다.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이 작업을 치면서 수없이 많은 죽음에 직면해야 했어요. 원래였다면 당신은 지금쯤 모든 일을 해결하고 약 100만 달러의 보수를 받아 블루라운드에서 늘어지게 자며 다음에 찾아올 계약을 기다렸겠죠. 하지만 이건...단순히 생포로 끝나기엔 진즉에 선을 넘은 것 같습니다."

"...당텍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저라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죽였을 겁니다. 그 정도로 화가 안 나는게 이상할 정도예요, 스칼렛. 사장...아니 이두나는 한스와 한 통속이예요."

마음 속 저울이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두나의 죽음을 담은 접시 쪽으로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래야겠죠."

메가라는 유출자 색출을 안나에게 맡기면서 유출자를 사살할지 생포할지 말하지 않았다. 즉, 안나에겐 비공식적인 사살 권한이 부여된 셈이었다.

"...지금 이두나가 어디 있는지도 알아요?"

"단순히 입으로 말하기엔 좀 그러니, 좌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가라앉은 당신과 얘기하자니 저도 마음이 심란해요. 다 가라앉는다면 그때 전화 해주시는게 서로에게 더 좋을 것 같네요."

"미안해요. 그럼 끊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통화를 마치고 나자, 몇 초 뒤 안나의 메신저로 지명이 적힌 지도와 장소의 이미지가 수신되어 있었다.


나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안나는 여전히 비극의 바다에 떠 있는 돛이 부러진 조각배의 운명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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