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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청혼하러 가는 길(16)

ㅇㅇ(125.129) 2020.03.19 20:34:41
조회 687 추천 68 댓글 14


정말 오래 전 일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따사로운 햇살과 평화로웠던 오후. 아무도 몰래 혼자 왕실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어린 엘사는 독서에 흠뻑 취해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어느새 잠이 들었던 엘사.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을 때쯤 엘사는 숨을 쉴 수 없어서 잠에서 깼다. 그런 엘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매캐한 연기. 무언가 이상했다. 서재는 이상할만큼 따뜻했고 밖에는 커다란 빛이 일렁였다.  엘사는 터져 나오는 기침을 애써 참으며 서재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함과 비명소리, 자욱한 연기, 커다란 불길. 

엘사는 두려움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천장에서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불에 타고 있던 나무기둥이 엘사를 덮쳤다. 엘사는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무기둥은 정확히 엘사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고 엘사는 점점 뜨거워지는 나무 기둥 아래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불길은 점점 거세졌다. 동시에 엘사의 정신도 서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 어려웠기 때문에 기침만 나왔다. 결국 온 몸에 힘이 풀린 엘사가 정신을 잃는 순간, 누군가 엘사의 몸에 젖은 천을 덮은 것이 엘사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엘사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왕궁을 절반이나 태운 불길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그리고 엘사의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없어진 엘사를 찾으려 불길 속을 뛰어다니던 부모님은 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생명이 위독했다.


그 사실을 안 엘사는 자신의 탓이라며 부모의 곁을 지켰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어머니를 먼저 떠나 보내고 아버지마저 떠나 보낸 엘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어깨에 남은 화상 자국과 훌륭한 왕이 되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전부였다.


그날 이후 엘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엇을 하든 항상 무의미한 것처럼 아무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엘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자는 생각도 수없이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엘사를 막아섰다. 


엘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억지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고통에 익숙해졌을 무렵, 엘사는 생각했다. 부모님께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지막 유언대로 왕이 되는 것뿐이라고. 더 이상 엘사 자신의 상처와 고통은 상관없었다. 오직 부모님의 유언을 지키는 것만이 엘사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다.









엘사와 안나가 있는 공간이 마치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안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엘사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엘사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고통을 갖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안나는 주먹을 쥐고 있는 엘사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미세한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엘사...”


“…… .”


안나가 엘사를 불렀지만 엘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고개숙인 엘사의 눈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눈물에 안나는 조심스럽게 엘사의 볼에 손을 갖다댔다. 하지만 엘사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안나는 그런 엘사를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엘사가 갖고 있는 상처는 너무 깊어서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안나는 그런 엘사를 자신의 눈동자에 담아내며 말했다.


“..엘사, 당신 탓이 아니에요..그건 그냥 사고..”


“아니, 내 탓이에요.”


“엘사..”


“...미안해요, 안나. 나..나는 괜찮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왕이 되는 것도, 당신도..”


“…… .”


“그런데...내가 너무 무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봐요..”


한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단 한번도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 없었다. 심지어 함께 자란 한스에게도. 안나는 억지로 신음을 삼키며 우는 엘사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엘사가 갖고 있는 상처는 자신에 감당하기엔 벅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사...당신 탓이 아니에요..”


안나는 그저 엘사의 등을 쓸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엘사는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란 것을. 자신의 욕심 때문에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안나는 자신 때문에 엘사가 왕위를 포기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엘사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어느 덧 새벽이었다.

진득하게 얽히는 입술과 거칠어져가는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달콤했어야 할 입맞춤은 눈물 때문에 짭짤한 맛으로 변했고 뜨거워지는 얼굴과 몸은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하아..엘사..”


안나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엘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엘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가능한 오래, 가능한 많이 담아두고 싶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안나는 엘사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작게 속삭였다.


“안아줘요, 엘사.”


“안나?..”


그 말에 엘사는 당황하며 안나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안나는 오히려 엘사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안나는 엘사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우리 시간 없잖아요. 조금이라도..당신의 흔적이 내게 남았으면 좋겠어요.”


“안나, 나는..”


“좀 더 오래 당신을 기억할 수 있게...제발..”


떨리는 안나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엘사는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안나는 엘사를 놔주려 하고 있었다.


“당신을..원해, 엘사.”


“..안나.”


“안아줘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안나는 팔을 풀어 엘사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망설이는 엘사의 얼굴을 잡고 다시 진하게 입을 맞췄다. 엘사는 입맞춤을 거부하진 않았지만 차마 안나를 안을 수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안나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날 안아요, 엘사.”


엘사의 망설임에 안나가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순간 떨어지는 안나의 눈물을 본 엘사는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어떠한 심정으로 저 말을 꺼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엘사는 천천히 안나의 옷을 벗겼다. 진득하게 얽힌 혀와 달아오른 몸이 이미 벗어날 수 없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찬 공기가 속살에 닿자 움찔거리는 안나를 보며 엘사는 조심스럽게 안나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안나의 신음소리가 엘사의 귓가를 파고들자 엘사는 서서히 입술에서 귀로, 귀에서 목으로, 목에서 목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안나는 그런 엘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엘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안나의 목소리에 엘사는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안나는 엘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천천히 엘사의 단추를 풀었다. 하지만 전부 풀기도 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화상자국이 안나의 손을 멈추게 했다.


“안나?..”


안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엘사의 어깨에 걸쳐 있던 옷을 벗겼다. 그제서야 엘사는 안나가 무엇을 보고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엘사의 어깨에 있는 흉터.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악몽 같은 상처였다.


“...아직 아파요?”


안나의 말에 엘사는 고개를 저었다. 안나는 조심스럽게 흉터를 쓸어보았다. 조금은 거칠고 조금은 울퉁불퉁한 흉터는 안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안나..”


그 말과 동시에 안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이미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랑해요.

누가 했는지 모를 말에 엘사는 안나의 볼을 잡고 천천히 입을 맞췄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아무리 사랑한다 말을 해도 부족했다. 그건 안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뜨거운 입술이, 혀가 서로 섞이며 간간히 들려오는 숨소리와 신음소리만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서던에서의 마지막 새벽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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