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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Praying prey 57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4.05 23:09:43
조회 402 추천 52 댓글 9

1~53화

https://sulgal.tistory.com/m/2109


54~55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nowpiercer2013&no=881902


56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nowpiercer2013&no=881913







148.


곰팡이의 비린내는 지난 밤에 내린 비로 인해 더욱 강해졌고, 지난 밤 유난히 편안하게 잠든 안나의 잠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창가 사이로 새어드는 따스한 햇살이 안나의 눈에 쏟아져 들어왔다. 눈부심이 손목으로 눈을 비빈 안나는, 왼쪽에 누워있는 멜리사의 머리에 팔을 얹고 자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어..음."




아무리 반응이 없는 멜리사라도, 안나의 팔은 또래의 여자애들보다 근육이 붙어있는 편이어서 조금은 더 무거웠다. 안나의 팔에 멜리사의 삐죽 솟아오른 머리들이 한 풀 꺾여 있었고, 안나는 미안함에 손가락으로 멜리사의 눌려진 머리카락들을 다시 올려주었다. 그리고 오른쪽이 왠지 모르게 비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나가 고개를 돌렸을 때, 침대의 오른쪽에 누워 있어야 할 엘사는 보이지 않았다. 안나는 벽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8시 20분, 아침 식사 시간인 9시 15분이 되려면 55분이나 남아 있었다. 안나는 그저, 엘사가 화장실이 급해서 안나도 모르게 침대를 빠져나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엘사의 눈가루는 정신적으로 안정케 하는 효과도 있었기에, 지난 밤 편하게 잘 수 있었던 것이 엘사가 잠결에 안나의 머리에 눈가루를 뿌려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귀여운 잠버릇이 아닐까 싶었고, 안나는 엘사가 자는 모습을 떠올리며 화장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린 지 5분 즈음이 지났을 무렵, 안나는 엘사가 '큰 것'을 보고 있고, 화장실에는 화장지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려 슬리퍼를 신었다. 병실을 나가기 전에, 안나는 멜리사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고요한 인사를 건넸다.



"엘사 데리러 금방 갔다 올게. "



멜리사는 들을 수 없을 인사였지만, 안나는 그래도 해주고 싶었다. 동생들을 향한 사랑을 담은 그릇을 비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추위를 느낄지 의문이었지만, 안나는 멜리사의 침낭을 침대 한가운데로 끌어당겼고, 그 위로 이불을 푹신하게 덮어 주었다. 겨우 멜리사의 눈이 빼꼼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덮은 뒤, 안나는 바지 옆구리에 끼워 둔 MEU가 간호사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상의의 옷자락으로 손잡이를 가렸다. 메가라가 병원 직원들을 매수했을 수도 있어 주의를 풀어도 되겠지만서도 안나는 그러지 않았다. 지난 일들을 겪고 난 뒤 얻은 새로운 강박이었다. 안나는 누가 참견하지도 않을 텐데도 문을 조용히 열어 병실을 나섰다. 카운터로 나서자, 졸린 눈을 하고 있는, 금발 머리를 얇은 핀으로 꽂아 말아올린 푸른 옷의 간호사가 지루한 듯 컴퓨터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안나는 업무용 미소를 띈 채로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간호사는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이내 표정에서 졸음을 쫓아내었다.


"무슨 일이세요?"


메가라가 어디까지 이 사람들을 매수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 여자의 기분을 거슬리면 목이 따여 푸줏간의 고기처럼 벽에 걸릴 겁니다.'와 비슷한 협박을 한 걸지도 모른다. 친절을 배제할 필요는 없었다.


"아, 혹시 화장지 좀 쓸 수 있을까요? 제 동생이 화장지를 안 챙기고 간 것 같아서요."


간호사는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나가 정신을 잃은 3주간, 엘사는 좋든 나쁘든 간에 병원의 어른들의 눈이 띄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생분 성함이...엘사 이셨죠?"


카운터의 밑부분은 윗부분과 일체형으로 막혀있어 볼 수 없었지만, 비닐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간호사의 질문과 함께 찾아왔다. 안나는 혹시 몰라 오른손을 옆구리에 가져갔다. 간호사에게 MEU를 보여줄 일은 없겠지만, 모든 결과를 내다보아야 했다.


"엄청 귀엽던데요. 저도 그런 동생 하나 가졌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잠시 뒤, 간호사가 화장지와 함께 고개를 내밀었다. 안나는 그녀의 명찰에서 '라푼젤'이란 이름을 확인했다. 라푼젤, 안나는 이 간호사가 머리를 말아올려 고정한 이유를 동화에서 찾아냈다.


"요즘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메가라가 영안실까지 얘기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간호사들이 교대 근무를 해서 모든 간호사들에게 지침을 전달하지 못한 가능성도 존재했기에, 안나는 최대한 얼버무리기로 했다.


"병원이란게 애들이 뛰놀기엔 좀 그렇잖아요. 애들이라면 밖에서 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거나 해야 하죠. 병원은 지루하잖아요?"


"맞아요. 여기 있으면 환자분들 약 챙겨드리고, 링거 교체해 드리거나, 가끔 말 동무 해드리고, 야근도 할 때도 있고... 확실히 막 즐거운 그런 곳은 아니죠. 하지만 저라고 다르겠어요. 다들 지치지만 그 직업으로 살아가는 건데."


"그 말에 동감해요, 라푼젤."


라푼젤에게서 화장지를 받은 안나는 라푼젤에게 손인사를 하고 카운터를 나섰다.


"엘사 데려오면 꼭 저한테 와 줘요! 사탕 좋아할 것 같은데!"


카운터를 꺾어 지나, 뒤에서 들려오는 라푼젤의 발랄한 소원을 돌아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만들어 보여준 안나는, 각 병실마다 들려오는 사람들의 코골이, 잠꼬대, 그리고 발음이 뭉개진 대화들을 들으며 청록색으로 테두리가 칠해진 도로 같은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끝에 창가에는 맑고 부드러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오른쪽엔 남자화장실, 그리고 왼쪽에는 여자화장실이 있었다. 엘사가 성별을 판별하지 못하진 않을 것이기에,  안나는 왼쪽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의 칸막이를 둘러보려던 안나였지만, 문들은 모두 열려 있었다.



"엘사?"


이름을 불러도, 애초에 화장실엔 안나 혼자뿐이었다. 받는 이가 없는 뻣뻣한 울림을 들으며, 안나는 화장실 밖으로 나와 남자화장실의 입구에 섰다.


"엘사아?"


안나는 남자화장실 안쪽을 향해 엘사를 불렀다. 착각할 수도 있었다. 엘사는 연구소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왔으므로 남성과 여성을 뜻하는 그림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번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안나는 불안해진 마음에 다시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엘사는...어? 안 데리고 오셨어요?"


"라푼젤, 혹시 제가 여기로 오기 전에 엘사 못 봤어요?"


"당연히 못 봤죠! 그래서 안나 당신에게 엘사 안부 물어 봤잖아요?"


라푼젤은 천진난만하게 결백을 주장했다.


"혹시 집에 있는 걸 착각하신거 아녜요? 안나가 먹는 약의 부작용에는 환각 증상이 내포되어 있어요. 일단은 병실로 돌아가서 휴식을..."


환각은 절대 아니었다. 약을 먹기 전, 안나는 영안실에서 엘사를 만났다. 그 감촉, 그 미소, 그것을 어떻게 환각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안나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엘사는 안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또 다시 혼자 영안실로 이두나를 치료하러 갔다. 약속을 어겼다면 혼을 내야겠지만, 혼을 낼 상황도 아니었기에, 안나는 영안실에서 엘사를 만나면 좋게 타이른 다음 이두나의 치료를 지켜보고 엘사를 데리고 올라오기로 했다. 화장지를 라푼젤에게 돌려주자, 라푼젤은 안나에게 보라색, 흰색, 그리고 파란색의 매끈한 포장지에 감싸진 사탕 세 개를 쥐어주었다.



"기분이 안 좋으실 수도 있어요. 음, 그러니까, 그그그....꿀꿀할 땐 단 게 최고죠. 안 그래요?"


분명, 크리스토프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안나에게 초콜릿을 내밀면서 했던 말과 비슷했다.


"맞는 말이예요. 라푼젤, 혹시... 크리스토프란 사람 아세요?"


"크리스토퍼?"


"프요. 크리스토프."


라푼젤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단순한 상상을 인연이라고 엮어버릴 뻔한 안나의 착각이었다. 안나는 알겠다고 라푼젤에게 묵례를 한 다음,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안나는 흰색 포장지로 싸여진 사탕 하나를 입에 넣고 씹어삼켰다. 설탕을 섞은 우유맛은 엘사의 눈가루와 비슷했다. 그저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한 안나는 한 칸 씩 계단을 내려가는 대신, 두 단씩 뛰어내려갔다.


바닥을 딛을 때마다 바지에 끼워둔 MEU가 달랑거렸고, 그 때마다 안나는 손바닥으로 손잡이를 누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1층으로 내려가면 응급실의 입구가 바로 보였고, 오른쪽의 코너를 돌면 영안실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안나는 엘사가 추워할 것이라 걱정하며,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입에 남은 사탕 부스러기가 거의 녹아 사라졌을 즈음, 안나는 1층의 입구를 마주보는 계단까지 내려왔다. 복도에는 급한 발걸음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누군가의 육성이 한데 모여 부산스러운 오페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안나가 1층으로 완전히 내려왔을 무렵, 소음들이 모두 응급실로 옮겨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안나의 몸은 액체 질소에 담궈진 것처럼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응급실에서 이어진 적지 않은 피들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있었다. 그 작고 붉은 오아시스들은 안나의 발에서 방향을 급격히 꺾어 오른쪽, 영안실로 향하는 복도까지 이어졌다. 피가 응급실에서 영안실로 갈 일은 전혀 없었다. 영안실에서 응급실로 피웅덩이가 생길 일은 딱 하나 존재했다. 영안실의 출입이 가능한 사람, 그 사람이 안나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다면. 안나는 부정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의 발은 천천히, 응급실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아니야.'



영안실에서 엘사가 다칠 일은 전혀 없었고, 이두나가 깨어날 가능성은 아직까지도 미지수였다. 한스가 보낸 킬러들이 벌인 소행이라면, 엘사가 아니라 안나의 머리에 총을 쏘았을 것이다. 오로지 한 단어, [왜?]라는 물음만이 남았다. 어느덧 안나는 응급실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을 들어 은행의 금고를 여는 것처럼, 안나는 여느 때보다도 더 힘겹게 문을 열었다. 응급실은 밖에서 들은 대로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오로지 한 병상에만 간호사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의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익숙한 머리를 한 사람이 붉게 얼룩진 수의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땋은 머리를 이마에 말아 얹은 귀부인 같은 머리스타일을 했지만, 예전과 다르게 엘사의 얼음 줄기의 두께만큼의 하얀 브릿지가 그녀의 검은 머리 위로 물들어져 있었다. 안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 당혹감과, 반가움, 그리고 경악이란 감정이 서로를 잡아먹으려 날뛰었고, 그 결과는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되었다.


"이....두나."


'엄마.'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어머니가 안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두나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움이 눈물에 섞여 흐르고 있었다. 안나는 이두나에게 걸어갔고, 이두나도 안나를 향해 두 걸음 다가왔다. 이두나가 여기 있다면, 침대에서 의사의 제세동기로 소생술을 받고 있는 사람은, 확정을 지을래야 지을 수 없는, 단 한 사람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겨우 이두나와 손을 잡았을 때, 안나는 이두나의 손이 따뜻했는지, 차가웠는지 느낄 수 없었다. 겨우 한 나절이었다. 비극이 지나고 나서, 겨우 평극으로 돌아오는 과정 중 극히 일부였던 그 한 나절은 과분하지도 않은 작은 굴곡일 뿐이었다.


"대체..."


이두나의 얼굴을 보았으니, 기뻐야 했다. 하지만 안나와 이두나를 둘러싼 환경이, 그럴 때가 아니라고 안나에게 지적했다.


"스칼렛, 전 어떻게 살아있는 거죠? 그리고 이 아이는...."


이두나 또한 궁금한게 많았다. 어떻게 살 수 있었고,  잃어버린 어린 딸과 똑같은 이 아이는 누구인지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안나는 이두나가 잡은 손을 풀고, 무거운 발을 떼어 침대로 다가가, 간호사들의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불쾌함으로 가득찬 욕설과 만류가 들려왔지만, 안나는 개의치 않았다. 인간이 만들어 낸 푸른 덤불을 해치고, 겨우 하얀 평야가 보였을 때, 그곳에는, 붉은 치마와 스웨터를 입고, 입에는 채 마르지 않은 피를 걸친 엘사가 누워 있었다. 멜리사보다 더 심하다면 심했지, 덜하지 않은 참상이었다. 피가 묻은 엘사의 손은 조금 굽어 있었지만, 거의 펴져 있었다. 안나는 떨면서 그 손을 잡았다.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 자리를 대신한 한기가 안나에게 엘사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엘사의 손을 잡은 안나의 손에, 굵은 눈물이 톡, 톡, 얕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어째선데...."




들리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무음방에,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미의 품을 파고드는 아기새처럼 잠이 든 엘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힘없이, 제세동기마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해 맥없이 누워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같이 내려가기로 했잖아... 근데 왜..."


물음은 곧 울음이 되었다. 멜리사는 안나에게 이글루에 대한 평가를 원한채 기약없는 잠이 들었다. 하지만 엘사는, 안나에게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이두나를 살리는 대신, 자신을 살리는 데에 소홀히 하고 말았다. 엘사를 보면서, 안나는 이 아이가 영안실에서 어떻게 고통에 몸부림쳤을지 알 수 있었다. 푸르던 치마, 커피색이던 스웨터는 선명한 붉은색으로 모두 물들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러운 울음에 아무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어떠한 말을 해주거든, 그 말은 안나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안나의 울음은 이제 비명을 자아낸 울부짖음이 되어 있었다. 침묵만이 가득한 그 응급실에는,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의 걸음소리가 안나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듣지 못했다. 그저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지막 기억 속에는, 엘사를 안아들고 병원 밖으로 향하는 응급실의 출구로 뛰어간 순간이었다.




끝까지 엘사를 놓치고 싶지 않겠다는, 안나의 무의식이었다.











149.




안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안나는 병원 뒤편에 마련된 환자들의 휴식을 위한 정원까지 와 있었다. 발을 찌르는 고통에 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엘사의 몸 밑으로 안나의 까진 상처에서 배어나온 피로 얼룩진 발이 보였다. 뛰어오면서 슬리퍼가 벗겨졌음에도, 안나는 그 사실을 까마득해진 정신 상태로 뛰어온 것이었다. 안나는 터벅터벅, 연보랏빛 등나무 꽃과 녹음이 어우러진 나무의 집 안 벤치에 앉았다. 향그러운 꽃향기가 안나와 엘사의 비린내를 적셨다. 폐 속으로 깊게 스며들 새도 없이, 차가운 공기, 따스한 햇살이 불협화음을 이루어내며 향기를 쫓아냈다. 저 멀리서 안나와 엘사를 찾는 의료진들의 고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적어도 몇 분간은, 찾기 힘들 거라고 안나는 생각했다. 영원히 찾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엘사와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안나는 천천히 품에 안은 엘사를 벤치에 내려 놓아 앉혔다. 엘사는 벤치에 앉자마자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지려 했기에, 안나는 엘사의 몸을 기울여 안나의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힘없는 그 작은 육체엔 생기라곤 전혀 없었다. 멜리사와 같은 느낌이었다. 안나는 고개를 조금 돌려, 아직 싱그러운 엘사의 백금발 머리카락을 내려다 보았다. 엘사의 푸른 머리띠는 이제 낡아 있었고, 드문드문 금이 가 있었다.


"....말하지 그랬어."


무엇을 듣고 싶었던 건지, 안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머리띠를 사달라는 것? 아니면 힘을 모두 소진해 이두나를 살려야 한다는 것?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안나 자신도, 그저 한 마디의 넋두리만을 겨우 뱉었을 뿐이었다.


"사탕...간호사가...너..."


안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두 개의 사탕을 꺼내, 엘사에게 내밀었다. 당연하게도 엘사가 사탕을 받아드는 일은 없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았고, 심장의 박동도 없었다. 그저 인형처럼 안나의 어깨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먹으라고...준 건데...왜."


다시금 차오르는 눈물은 안나의 손목에 방향을 잃었다.


"멜리사처럼 말이 없는 거냐고!"


안나는 엘사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누굴 위한 분노인가, 스스로를 자책하는 분노일 것이었다.


"같이 내려가면 되는데, 왜! 왜 엘사 혼자서 내려가냔 말이야, 왜!"


엘사의 머리는 금방이라도 목이 부러질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제발 말이라도 해봐..."


안나의 고개는 결국 푹 꺾이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화사하면서도 수줍게 웃던 그 작은 아이가 없고, 입가에 피를 머금고 눈을 감고 있는 인형이 보일 테니까. 안나는 다시 엘사를 안았다.


"제발...너마저 떠나가면."


피와 토사물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안나의 신경을 거스르지 못했다. 멜리사는 안나를 살렸지만, 자신을 살리지 못했다. 엘사는 이두나를 살렸지만, 자신을 살리지 못했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안나는 엘사의 볼에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선득한 피가 얼굴에 묻어 얼룩이 져도, 안나는 엘사를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엘사의 소리를 잡아보려고, 안나는 여느 때보다 더욱 팔에 힘을 주었다.


"가지마..."


듣지 못할 말이어도, 계속해서 애원한다. 닿지 못할 말이어도, 계속해서 되뇌인다. 아침의 햇살은 따사로웠지만, 엘사의 몸은 차가웠다. 햇빛마저도, 안나마저도 엘사의 몸을 녹이지 못했다.


"안 울 테니까...제발 가지마..."




아이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고요하고 밝은 지옥이, 안나의 세상을 무너뜨렸다.










150.



이두나는 의료진들이 스칼렛의 행방을 찾지 못하자, 그들과 떨어져서 찾기로 했다. 핏자국들은 띄엄띄엄 떨어지더니, 이내 낡은 실처럼 끊어지고 말았다. 스칼렛이 어디로 갔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해 이두나는 병원 주변을 배회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은 거친 콘크리트로 짓물리기 시작했다. 주저앉을 정도의 고통이 있었지만, 스칼렛은 그 이상의 것을 겪고 있을거라고 이두나는 생각했다. 엘사와 똑같은 아이와 스칼렛이 어떤 관계일지는 추측만이 가능했다.


스칼렛이 맡은 작업에서의 패키지2가 엘사와 같은 아이일 것이리라. 인체 실험에 관련한 작업, 엘사와의 유사성. 이두나의 가설이 맞다면 죽어있는 엘사는 아직 살아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엘사와의 접점이 있을 것이었다. 또한, 스칼렛과 죽어있는 엘사는 보통의 관계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톤과 러시아의 습격에서 친해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가족..."



생각하고, 또 생각해 도출해낸 한 단어가 이두나의 입에서 머물렀을 때, 이두나는 길 한가운데에 나뒹구는 슬리퍼 두 짝을 발견했다. 희미한 핏방울도 그 주변에 채 마르지 않고 맺혀 있었다. 이두나는 조심스럽게 원래는 하얬을 슬리퍼를 집어들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군데군데 거칠게 긁혔고, 붉은 상처들이 슬리퍼에 가득했다. 스칼렛의 것이 분명했다.


"안나..."


스칼렛은 안나가 제대로 컸다면 20살의 동갑이었다. 그리고 가족을 잃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 엘사와 닮은 아이와 유난히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 보였다. 정말로, 이두나가 생각하는 스칼렛이,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두 딸들 중 하나인 안나 아렌이라면, 이두나는 지금 여기서 걸음을 멈출 이유는 없게 된다. 발의 통증은 상관없었다. 몇 백, 몇 천 걸음을 걸을 지라도, 스칼렛에게 묻고 싶은 한 가지 질문이 급격한 상황의 흐름을 타고 이두나의 목에 걸렸다.


'안나, 안나 아렌이니?'




쉽게 질문하지 못할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스칼렛은 지금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두나는 일단 스칼렛을 만나보기로 했다. 드문드문 떨어진 핏방울들은 연보랏빛 등나무가 우거진 병원 내 정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두나가 정원으로 들어서자, 그 곳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양지 속의 비극 안에서, 작은 사람은 큰 사람의 옆에 눈을 감고 기대어 있었고, 큰 사람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둔 채 촛점을 잃은 눈으로 등나무의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두나의 발소리가 들렸음에도, 큰 사람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조금 벌려진 입으로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이두나가 스칼렛을 내려다 보았을 때, 스칼렛의 시선이 아주 잠깐, 이두나의 눈과 마주쳤다. 스칼렛의 입이 파르르 떨렸고,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이두나가 말하려던 질문은, 다시 기도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 이두나는, 몸을 숙여 스칼렛의 발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갈라진 상처들이 터져 피가 잔뜩 배어져 있었고, 이두나는 직접 스칼렛의 발목을 잡아 천천히, 아프지 않게 슬리퍼를 신겨주었다. 이두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스칼렛 위커는 그곳에 없었다.


"엄....엄...마아..."


안나 아렌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망가진 얼굴을 하며, 손목으로 눈물과 콧물을 닦고 있었다.


"엄마아아...."


이두나는 몸을 일으켜, 안나 아렌과, 엘사를 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으렴. 아가야. 그냥.... 울어도 된단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냥 울어주렴."





안나는 그 말을 듣고, 정원의 정적을 깨뜨리고도 남을 정도로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이두나는 두 사람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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