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픽/혁명]Praying prey 63~64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4.19 23:05:06
조회 437 추천 52 댓글 5

공약:Praying prey 61~63화 쪄오기,  

추가)64화+@ 쪄오기






1~60화 링크

https://sulgal.tistory.com/m/2109



61~62화 링크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nowpiercer2013&no=893263





160.


"무슨 일이야?"


해가 중천에 뜬 시리아는 모래먼지와 아지랑이가 시가지 곳곳에 피어올라 반투명한 해초를 연상케 했다. 샐리맨더의 아즈 수크나흐 기지로 진입한 모래색 험비의 뒷좌석에 앉아 있는 메가라는 안나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잠시 졸은 사이에, 안나에게 전화가 한 통 와 있었던 것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호출'로 연락했어야 했기에, 생명에 직결되는 위협으로 전화를 건게 아니란 것이라 메가라는 생각했다.


[내가 사과를 못한 것 같아서.]


"사과? 무슨 사과."


[있잖아. 병원에서 너한테 막말한 거.]


수화기 너머로 안나의 울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이 잠기기라도 한듯 안나는 연신 기침을 해댔다.


"이미 사과한 거 아니었어? 난 이미 다 잊기로 했는데."


[그것도 있는데.. 한나한테 들었어. 네가 독헌트 해제시켰고, 나 구해보겠다고 개고생 했다면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울프독의 목소리는 곧바로 머릿속에서 이미지화 되었다. 소파에 앉아 남은 한 손을 꼼지락대면서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전화를 하고 있을 안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한나가 말하기 전까지도, 난 널 의심하고 있었어.]


"의심은 잘못이 아니야. 우리의 모토였잖아. 의심하라, 그리고 믿되, 그저 믿어라. 넌 훈련받은 대로 가능한 많은 변수를 생각했고, 그 중에 내가 포함된 것 뿐이야. 너라면 그럴 수 있어. 너한테 독헌트를 알려준 거도 나였잖아."


[이거는 달라. 독헌트는 상부 지시였고, 애초에 잘못한 팀이 따로 있었어.]


"트리플 2는 이제 없어. 팀 해제에 불명예 퇴직 당했거든."


[꼴 좋네... 그곳은 어때? 살만 해?]


"이제 막 도착했어. 저기 손 드는 사람이 보이는데...저 사람이 필립스인가?"


[회색 반팔에 군복 바지를 입고 부니햇을 쓰며 한쪽 팔을 휘두르고 있지 않아?]


메가라는 할 말을 잃었다. 기지의 전속 관리자이자, 아직도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이 나라에서 미군과 협력해 임무를 지시하는 자가, 맥없는 옷차림과 행동으로 메가라를 놀라게 했다.


[아무 말 없는 거 보니까 아직도 그러나봐?]


이윽고 험비는 필립스의 옆에서 멈춰 섰다. 피어오른 모래먼지를 손으로 쫓아내며 필립스는 메가라가 앉은 창가를 두드렸다.


"어서 와요! 여기까지 오는 데 힘드셨죠!"


[맞나 보네. 전화 좀 바꿔줘.]


메가라는 차 문을 열었다. 필립스는 넉살 좋게 웃으며 메가라에게 악수를 하려 손을 내밀었다.


"전용기까지 대주실 줄은 몰랐어요. 제 친구가 당신 좀 바꿔달라는데, 통화 가능해요?"


"예?"


메가라는 당황하는 필립스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었다. 필립스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발신자가 누군지 알고싶어 귀에 휴대전화를 가져갔다.


"필립스입니다."


[저예요. 스칼렛.]


"아, 스칼렛. 살아 있었어?"


[메가라가 얘기 안해줬어요?]


"안해줬지. 여기서 무슨 실험 감독 겸 신변보호라는 말밖에 안했었어. 난 네가 아무런 소식도 없어서 우리 수송기 수리비를 CIA한테 청구했는데, 어떻게 하면 램프를 부수고 나간거야?"


[CIA 내 킬팀들이 부순거예요.]


안나가 기가 찬듯이 말했고, 필립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CIA란 단어가 나오자 메가라는 트렁크에서 짐들을 빼내며 필립스를 흘겨보았다. 


"농담이야. 그래서 우리 전 직원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뭔지 듣고 싶은데?"


필립스는 메가라의 캐리어들 중 하나를 잡아 들었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직속 부하에게 턱짓으로 메가라의 짐을 들으라 지시했다.


[메가라 좀 잘 부탁해요. 요 근래 잠도 못자고 저 케어해줬거든요.]


"메가라 씨한테 들었어. 기관 내로 아톤이 잠입해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여기엔 아톤의 힘이 미치지 않아, 애초에 네가 여기서 쌓아 놓은 명성 덕분에 여긴 지역 저항군들한테 침공당할 일도 전혀 없고."


필립스와 메가라는 회황색 CH-47 치누크 헬기들이 정비중인 격납고를 지나고 있었다. 정비공들은 필립스를 보고 손을 흔들었고, 필립스는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정비공들은 필립스 뒤를 따르는, 먼지를 뒤집어 쓴 정장 차림의 여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메가라는 정비공들이 자신의 엉덩이에 시선을 집중하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고 졸린 눈으로 필립스를 졸졸 따라갔다.


[구스만 씨의 휴대폰은 어떻게 되었어요?]


"메가라 씨가 보상 차원의 위로금과 함께 소포로 구스만에게 송달시켰다고 하네? 카자흐 쪽에서 별 말 없는 거 보니까, 구스만도 만족한 모양이야."


[구스만 씨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 거에 마음 가지지 마. 목적을 위해서 뭔들 못하겠어?"


"저기, 이제 제 휴대폰 돌려주셔도 되지 않을까요?"


뒤따르던 메가라가 필립스에게 말했다.


"오, 원 주인이 다시 돌려달래. 스칼렛, 다음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마. 알았지?"


필립스는 안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메가라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나야."


[필립스가 좀 오지랖이 넓어. 근데 좋은 의미로 참견하는 거니까 부담은 갖지 말고 있어.]


"내 일을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도와드릴까요?"


필립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세 사람은 필립스의 개인 숙소에 도착했다. 멋이라곤 전혀 없는 투박한 3층 건물의 모습에 메가라는 이곳의 재정 상태를 의심했다. 본사의 사무실보다 생활하기 힘든 환경이 아닐까도 생각한 메가라를 뒤로 하고, 필립스는 문에 달린 도어락의 키패드를 두드렸다. 명랑한 음과 함께 문이 열렸고, 필립스는 들어오라고 오른쪽 어깨를 으쓱였다.



[기지 어디에서 지낼 거야?]



"어...엄청 멋없는 건물에서 지낼 거 같아."



[막사나 직원 숙소가 아닌 거 같은데, 그럼 필립스 집이겠네.]



"여기 원래 재정이 안 좋은 기업이었어?"



"뭐라고요?"



건물 안에서 필립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필립스가 미적 감각이 좀 떨어지는 편이거든. 그래도 그곳이 기지 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 3개에 꼽힐거야. 현관문부터 방폭 목적으로 달아놨으니까.]




"그으래...?"



메가라는 가방이 문턱에 걸리지 않게 천천히 숙소로 들어왔다. 1층은 접대실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놓여진 낮은 오크재 탁자를 사이에 두고 민트색 가죽소파가 마주보며 배치되었고, 그 뒤로 권총들과 기관단총들이 유리장 안에 전시되어 벽에 걸려 있었다. 무엇보다, 후덥지근한 기후에 맞추어 천장에 달린 에어컨의 바람이 후덥지근해져 이마에서 새어나온 땀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살...만 하겠네?"



잠시 캐리어를 내려놓은 메가라는 이마를 손등으로 한 번 훔쳤다. 등 뒤에서 문 닫는 소리와 함께, 메가라의 또다른 캐리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운전수가 놓고 자기 일을 하러 간 것이었다. 여기까지라도 옮겨준 것에 감사하며, 메가라는 원래 들던 캐리어를 올려 놓은 뒤 다시 가지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짐 정리해야지?]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아. 사과는 잘 받았으니까 너무 마음 두지 마. 넌 동생들 생각만 해. 난 한스하고 실험에만 집중할 테니까."



[동생들은 아까 너희 의료팀이 데려갔어. 하루 일찍 왔더라.]



"그 중에서 벨이라는 사람이 있지 않았어?"


[있었지. 따님들이 암 때문에 고생하신다던데.]


"그럼 확실히 내 팀이 맞아. 난 또, 당텍 같은 케이스인줄 알았네."



이미 한스는 당텍으로 위장해 블루라운드로 접근한 바 있었다. 만일 그가 접근했었더라면, 주변에 퍼져있는 경호 전담 요원들이 눈치를 채고 셰필드가로 진입했을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벨은 안나에게 공감을 표하기 위한 정보를 안나에게 흘렸고, 이는 메가라도 아는 정보 중 하나였다.



"이제...작업을 기다리면 돼."



[애들이 보고 싶어.]



"조금만 참... 조금이 아니지. 슬퍼도 참아줘. 지금 당장의 목표에 집중하자."



[그래야지. 이만 끊을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그럼 끊..]



갑자기 안나의 목소리가 거칠게 끊겼다.


[메가라, 힘내요.]



안나와 비슷하지만, 더 단정한 목소리였다. 메가라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챘고, 미소를 지었다. 메가라가 올라오지 않자 의아함 느낀 필립스는 계단을 내려왔고, 메가라는 필립스에게 캐리어를 밀었다.



"난 하인이 아닌데."



어깨를 으쓱이며, 필립스는 메가라가 밀은 캐리어와 운전수가 두고간 캐리어를 양 손에 하나씩 들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한나, 안나에게 말 안해줘도 되는 일이었어요."


[마냥 참고 살 수는 없을 거 아니예요. 지금 상황에선 서로 믿는게 더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아톤의 장난으로 나이를 먹었다 하더라도, 메가라의 전화를 받는 상대방은, 설표같이 순수함이 그득한 아이였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인간관계 속의 암묵적인 규칙을, 한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물론이죠. 한나, 사장님과 안나를 잘 부탁해요."



[제가 다 지킬 거예요. 메가라도 조심해요.]



한나의 목소리가 사라졌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통화는 종료되었다. 메가라는 휴대폰을 바지에 넣으며, 생각치도 못한 아렌들의 걱정을 받아들였다. 별 다른 일이 없다면, 한스는 죄값을 치를 것이고, 안나의 언니는 아렌으로 돌아갈 수 있다. 여기서 또 다른 변수가 생길 확률은 희박했기에, 메가라는 샐리맨더로 오면서 곤두세웠던 신경의 가시를 쓸어내렸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하는 문을 연 메가라는, 그곳이 자신이 생활하게 될 장소임을 알았다.



"어때요?"



필립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메가라의 평가를 기다렸다. 메가라의 앞에는 간이 침대도 아닌, 두 사람이 넉넉하게 누워도 될 군청색 침대, 그리고 서랍을 겸비한 옷장이 벽 한쪽에 붙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방의 가장 먼 곳에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었다. 침대의 옆에는 간이 냉장고, 그 위엔 권총 한 자루, 기관단총 한 자루와 멀티캠 방탄복 하나가 거치대에 걸쳐져 있었다. 작업하기 편해보이는 철제 책상과 바퀴달린 이동식 의자를 보고서야, 메가라는 필립스를 향해 돌아보았다.



"최곤데요."



"당장은 힘들겠지만, 시간이 되면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따로 벽을 만들 거예요. 제 집 겸 사무실이 위쪽에 있고, 제가 단순히 서류 작업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필립스가 캐리어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미안하게도, 지금 이 층에 에어컨은 없어요. 제 직원이 곧 이동식 에어컨을 가져다 줄 테니까, 1층에 있으셔도 되고, 3층에 있으셔도 돼요."



필립스는 메가라에게 작고 동그란 금속이 달린 플라스틱 조각을 건넸다.


"도어락 열쇠니까.. 부담없이 나갔다 들어와도 돼고요. 비밀번호도 필요해요?"


"아뇨, 괜찮아요. 이것만 있어도 충분해요. 고마워요."


"뭐...당신들이 나중에 저희 회사랑 계약을 자주 맺어주신다면야, 이 정도 투자는 당연하지 않을까요?"



필립스는 메가라의 신변 보호 요청을 '추후 계약'의 조건을 내세워 받아들였다. 방첩 기관의 작업은 은밀하거나, 더러운 작업들이 대다수겠지만, 필립스는 CIA와 MI5가 블루라운드에게 직접 의뢰를 한 것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기관에서 맡은 의뢰를 수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커넥션이 생기는 것이고, 업계에서의 입지를 더 넓힐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규모의 경제라고 하죠. 처음엔 밑밥을 많이 깔아야 하지만, 일단 기반을 다져 놓으면, 그 이후에 지출될 비용은 아주 적게 들어요."


"전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아서요."


메가라가 입에 공기를 가득 모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침대 위에 캐리어들을 올려놓았다.


"근데, 도대체 뭘 가져온 거예요? 웬만한 것들은 여기서도 구할 수 있는데요."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그래요. 뭐... 좀 위험한 장치들도 있어서."


메가라가 지퍼를 잡아 열었을 때, 그곳에는 검은 헤드셋과 라디오를 생각나게 하는 장치가 스프링코드로 연결되어 있었다. 캐리어 한 켠에는 소음기가 장착된 p320 서브컴팩트 모델이 놓여 있었다. 또한, 자그마한 철제 케이스가 시선을 집중시켰다.


"워우, 역시 비밀 기관 아니랄까봐 소음기는 기본이네요?"


"시끄러운 것보단 조용한게 더 좋잖아요."


"저건 뭐예요? 결혼 반지 케이스는 아닐 테고."




안나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사심이라곤 전혀 없는, 참견에 목마른 사내였다. 안나가 이 사람 밑에서 몇 년간 일해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안나의 명성 때문에 그나마 조용히 지내고 있었던 것일수도 있었다.


"카니보어가 든 USB예요. FBI 쪽이라서 구하는데 엄청 힘을 썼거든요."



"아, 그 이메일 감시 프로그램인가 하는 거, 맞죠?"


"프리즘(NSA에서 사용했던 광범위 통신 감청 시스템)보다 구식이지만, 나름 감청하는데 필요할 거라서요."



"[우리는 스캔할 수 있다.](Yes, We scan)를 하시려고요?"




필립스가 혀를 찼다. 일반적인 성격의 기업과는 다르지만, 샐리맨더 또한 기업 내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고, 감청이란 단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게 많이 필요할까도 싶어요. 지금 ASIC과 같이 표적의 위치를 찾고 있는데... 내부 정보통인 사람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폭로할 자료들은 연줄이 있는 언론사에 넘겼다. 빠르면 내일, 늦으면 모레 기사가 전세계에 퍼질 것이었다. 한스의 음침한 행동거지로 미루어 보면 위치를 감출 수 있었기에, 내부고발자인 제인의 단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위치가 불명확했기에, 제인이 특정해준 지역 단위로 팀을 보내 수색 중에 있었다.


"명분은, 있습니까?"


필립스가 물었다. 사적인 명분으로 움직이기엔 리스크가 크다는 사실은 비관련자인 그도 알아챌 정도였다.



"대의적인 명분은 있어요. 마약 성분을 직접 약을 조제하는데 썼고, 그가 황금 초승달 지대에 있었던 블랙박스 영상도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마약 유통 경로의 끝엔 미국이 존재하죠. 스칼렛 건이 끝났지만, 저흰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저희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죠. 당신을 제외하고."


메가라가 카니보어 케이스, p320, 그리고 감청 장치를 하나씩 책상에 올려 놓았다.




"이제 나가주시겠어요? 옷 정리를 해야 하는데."



필립스는 메가라의 말에, 열린 캐리어를 내려다 보았다.




"어.....음, 야하네요."




"안 나가요?"



"어어어, 나가요, 나가!"




메가라가 p320을 겨누려 하자, 필립스는 서둘러 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알람과 함께 필립스가 밖으로 나간 소리까지 들은 메가라는, 그제서야 캐리어 안에 담겨진 속옷들과 사복들을 꺼내 옷장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메가라의 등에는 땀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장 자켓까지 벗었지만, 덥고 습한 실내 공기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메가라는 방의 좌우 창문을 열어 바람을 통하게 했다. 여전히 뜨거웠지만, 사뭇 건조한 바람이 방 안의 습기를 내보내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캐리어를 정리한 메가라는 연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캐리어를 열었다.




두 번째 캐리어에서 나온 랩톱과 외장용 디스크, 웹캠을 책상 위에 올린 다음, 포트에 케이블로 연결 시켰다. 세 번째 캐리어에는 제인의 USB에서 뽑아낸 자료들을 묶은 서류철이 들어 있었다. 메가라는 서류철을 꺼내 책상과 벽이 마주하는 곳에 기대어 놓았다. 캐리어들을 한쪽에 잘 쌓아둔 메가라는, 그제서야 지친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의료팀과의 화상 통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랩톱의 전원을 눌러 부팅한 다음, 기관 내 소통 프로그램에 로그인한 메가라는 곧바로 벨의 메신저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세 번의 신호음이 이어졌다.




[팀장님?]



"벨, 나예요. 상황 좀 보고해 주시겠어요?"



휴대폰 너머로 차량의 엔진음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아직 이동 중인 모양이었고, 송글거린 땀을 겨우 닦아낸 지친 얼굴을 한 중간 길이의 포니테일 여성이 화면에 나타났다.



[30분 전에 셰필드가에서 멜리사와 엘리사를 수습했어요. 인큐베이더에 입실시킨 채로 이동하고 있는데, 하실 말이라도 있으세요?]


"별 얘긴 없어요. 아까 안나한테 속사정을 얘기하셨다고 해서, 그냥 노파심에 전화 건 것 뿐이예요."



[본사 연구소까지 가는데 하루 정도 걸릴 거라고 생각해요. 그 때 가서 전화드리면 되나요?]


"그래요. 저도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연구소에서 세팅 마치면 그 때 통화하도록 해요."



무미건조한 대화가 끝나고, 메가라는 케이스에서 카니보어가 설치된 USB를 꺼냈다. 단순한 이메일 감청 프로그램이기에, 아톤의 그림자를 털끝이라도 밟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ASIC에서 오게 될 정보를 얻기 전에, 가능성이 있는 조금의 수단이라도 써먹어야 했다. 메가라는 포트에 USB를 삽입시켰다. 잠시 뒤, 화면에 뜬 USB의 창에서 설치 프로그램을 바탕화면으로 끌어냈고, 아이콘을 클릭해 설치를 시작했다. 설치가 완료되었다는 창과 함께 FBI의 로고와 함께 아이디와 패스워드 입력창이 화면에 나타났다.





메가라는 프로그램을 제공해준, 인연이 있는 FBI 측 요원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잠시 뒤 나타난 프로그램의 창에는 세계지도의 이미지가 띄워져 있었다. 메가라는 러시아를 클릭했다. 요원이 알려주기를, 카니보어는 '키워드' 중심으로 프로그램 내 자체적인 다차적 필터링으로 테러분자가 보내는 이메일을 찾아낸다고 밝혔다.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아톤에 대한 정보를 거르고 걸러 진짜 '비밀' 정보를 가려낼 수 있다는 소리가 되었다. 어쩌면 한스의 위치를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들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내재해 있었다.
"자, 자, 한번 해보자. 아..자!"
메가라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고개를 돌려본 다음, 어설프게나마 기합을 외쳤다.










160.





건물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필립스는 멍하니 2층을 올려다보았다.
"필립스 씨, 뭐 하고 계신겁니까?"
점심 시간이 되어 사내식당으로 걸음을 옮기는 격납고의 엔지니어들이 필립스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아뇨, 별 거 아닙니다. 음..."











161.

자, 자, 한번 해보자. 아..자!




...대체 저 여잔 누굽니까? 제정신은 아닌 거 같은데.


...알려고 하지마요.

.











162.






"의원님, 잘 계십니까? 하하..."



한스는 자신이 심어 두었던 추적자들의 서면 보고서를 읽으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얼음이 띄워진 브랜디가 든 유리잔에는 물방울이 맺혀 하나의 작은 물줄기가 되었고, 이내 책상 위 유리커버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한스, 지금 별 일 없는 게 확실한가?]


상대방의 목소리는 진지하면서도, 불안해 하고 있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우리 측 요원이 저지르려는 대폭로 말일세.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만약 우리쪽 그림자까지 밟혀 있다면 어서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나?]


한스는 그 말을 듣고,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쇼. 그 요원은 폭로하지 못할 겁니다. 지금 그 요원은 어디 있습니까?"


[시리아로 떠났어. 조력자의 보호 밑에서 자네를 공격하고, 실험을 지휘할 걸세.]


"실험? 무슨 실험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스는 의아했다. 2호 개체를 놓쳤긴 해도, 현재 안나 아렌과 같이 있다는 정보, 그리고 '아렌들의 병원 이송'이라는 정보가 보고서에 쓰여져 있을 뿐이었다. 안나 아렌이 2호 개체를 쉽게 CIA에게 놓아줄 리는 만무했다.


[울프독이 순순히 실험체들을 넘겼어. 이제 살아있지 않거든.]


한스는 순간, 상대방의 입에서 뱉어진 말을 의심했다. 실험체'들', '살아있지 않다'. 두 번의 충격적인 말이 연달아 한스의 뇌에 어퍼컷을 날렸다. 한스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유리잔을 들어 입에 기울였다. 한스의 착잡한 마음과는 다르게,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브랜디의 맛은 알싸하면서도 상쾌했다.


"죽었다고요."


[자네의 소중한 사람들이었나?]


"'들'이라 얘기하셨으니, 어느 정도는 소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스는 브랜디 잔을 내려놓고,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옮겼다. <제인의 4번째 대역을 사살>, <제인 사살.>. 킬러들의 보고에 의하면 제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한스의 정보를 현재까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 제인이라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을 여자였다. 순종적인 외모 밑에, 어떤 간악함이 들어 있을지는 신도 모를 터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녀는 대역을 4명까지 만들어 놓고서 한스를 농락했다. 한 때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을 지라도, 지금은 잡히지 않는 모기같은 존재였고, 끝내 모기는 죽어서 피를 흘렸다.



[한스, 자네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지금 우린 앞으로 찾아올 역경에 더욱 대비책을 세워야 하네.]




한스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셰필드가로 암살조를 보내 모두 바디백에 넣어 태평양 어딘가에 담가버리고 싶었지만, 상황은 그러지 못했다. 이미 한 차례 셰필드가에서 이두나를 납치해 공작을 벌인 적이 있어 경찰들이 주변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안나 아렌은 전 CIA 출신이었다. 어떤 연줄을 통해 보호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보고서의 밑에 새로 추가된 이란, 한스에게는 맥이 빠지는 두 문장이 뚜렷하게 써져 있었다. 암살, 납치에 성공한다 해도 뒤를 밟힐 게 분명했다. 한스는 반쯤 비워진 브랜디에 손가락을 넣어 얼음을 꺼내 입안에 넣었다. 차가운 얼음이 혀를 무감각하게 만들면서, 이내 차가운 물로 치환되어 브랜디로 물든 입안을 중화시켰다.



"대폭로 하겠다는 요원 암살은 안 됩니까?"



[우리에겐 중요한 인재고, 아마 암살은 무리일 걸세. 우리 끄나풀이 심어내지 못한 군사기업 중 하나인 데다가, 해당 기지 관리자가 그렇게 쉽게 볼 상대는 아닐세. 자네만큼 과거가 궁금한 사람이고, 우리가 수집한 정보도 거의 전무한 상태야.]



"그렇단 말이죠."


한스는 덮혀 있던 랩톱을 열어 부팅시켰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한스가 미리 켜놓은 인터넷 창에는 밤새 세계에서 일어난 뉴스들의 요약문이 띄워져 있었다. 그 요원에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한스의 기업의 치부는 피어싱을 박듯 인터넷 어느곳에서나 박혀 있게 될 것이었다. 한스는 한참을 인터넷 한 곳 공백을 멍하니 바라보다, 상대방의 기침 소리를 듣고 정신을 바로잡았다.



"이봐요. 우린 지금 한 배를 같이 탄 거, 맞습니까?"


[당연한 걸 왜 묻고 그러나?]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방금 좋은 묘안이 하나 떠올랐거든요."



[한번 말해보게.]



상대방은 한스를 재촉했다. 한스는 이 늙은 돼지를 향해 겉으로는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만, 이 매국노가 지을 웃음은 역겨워했다. 금방이라고 욕설이 목울대를 긁어댔다.


"당신네 쪽에도 요원들 내지 수뇌부가 있는 걸로 아는데, 그들을 압박하세요. 무슨 실험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좋다 이겁니다. 하지만, 그 요원이 하려는 대폭로는 어떻게든 막아 보십시오. 자칫하다간 다음 경선, 그리고 대선에 아주 좋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당신들이 잘못하면 나도 죽고 당신들도 죽는다,  이말입니다."



[할수 있는 데까지 해 보겠네. 저기 한스... 이 일이 끝난다면...]


"뭔데 그러십니까?"



갑자기 비굴해진 상대방의 목소리에, 한스는 얼음 하나를 더 집어 먹었다. 이번엔 녹여먹지 않고, 이빨로 소리내듯 까드득 씹어먹었다. 한스의 얼음 씹는 소리를 들었는지, 잡음이 섞인 상대방의 헛기침이 찢어지듯 들렸다.



[어떻게... 루코일 사에게 말 좀 해서... 그쪽 채유권을 좀 딸 수 없을까?]



상황이 이런데도, 돈을 찾는 돼지는 사람의 말을 할 줄 알았다. 한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이 자를 언제까지 믿을 수 있을까? 언제라도 돈의 앞에서 명예도 팔아먹을 작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스와 상대방, 그리고 상대방이 속한 집단의 일부는 한 배를 탔다. 배가 육지에 도착하기까지 거세진 파도를 헤쳐나가야 했다.



"제가 그쪽하고 잘 얘기해 보겠습니다. 어지간히 돈 맛이 좋으신가 보군요."


[당연하지, 자네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었지만, 난 아니거든.... 자네라면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네. 나도 필요한 조치를 강구할 테니까. 아, 한스, 만약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나라의 증인 인증 프로그램에 자네를 가입시켜 줄테니 마음 놔두게나. 그럼 이만 끊지.]



"살펴 들어가십쇼."



상대방과의 통화를 마친 한스는, 남은 브랜디와 얼음을 입에 털어넣었다.


"시발."




무심코 입에서 욕이 튀어나온다. 한스는 책상 위에 놓여진, 2호 개체의 사진이 들어있는 작은 액자를 내려다 보았다. 겁에 질린 얼굴, 그 아이는 언제나 한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고, 항상 울먹거리며 방의 구석으로 숨어 거리를 두었다. 멜리사는 오히려 한스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한스는 멜리사를 포기했다. 보고서에 쓰여진 '실험체들'에는 멜리사도 포함되어 서술되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두 아이를 품으며, 사선을 넘어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준 안나 아렌에게 이젠 경외심까지 들 정도였다.





안나 아렌은 상식을 넘어서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에게 어떠한 혐오도 내비치지 않고, 낙오자도 없이 이별을 맞이했다.






정작 한스는 낙오자를 만든데다, 보고서를 확인한 뒤에야 이별을 실감했다.












163.


"크리스마스."


"요리."


"캠핑."


"가족 행사."



엘리사와 멜리사를 떠나보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하늘에선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로라가 부엌 창문, 제인은 거실 창문을 커튼으로 가렸고, 집안은 전등으로 만들어진 인조광에 내리쬐였다. 분위기는 안나가 잠시 메가라와 통화를 했을 때를 기점으로 전혀 밝아지지 못했고, 한참 동안이나 다섯 사람들 사이마다 적막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참다 못한 한나는 이두나와 안나에게 '만약 모든 가족이 모이면 하고 싶은 일 말하기'를 제안했다. 이두나와 안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무작정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순 없다고 판단했고, 나름 효과적이었다.



"난... 그것도 했으면 좋겠어."


"뭐가?"



한나의 소심한 주장을 안나는 궁금해했다.



"여기 방 여러 개잖아. 우리도 나중에 더 많아질 거고... 그래서 매일, 아니면 이틀마다 자리를 바꿔가며 자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좀 아닌가?"



한나가 멋쩍어하며 어깨를 긁었다. 안나는 한나의 의견을 토대로 상상했다. 하루는 엄마와 같이 자고, 또 하루는 엘리사, 모레는 멜리사, 글피는... 생각만 해도 푸근해지는 계획이었다.



"엄마 생각은 어때요?"


한나는 자연스럽게 이두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두나는 한나와 안나의 사이에 앉아 있었다. 이두나는 두 딸의 손을 잡았다. 서로 이어진 듯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좋은 생각이구나. 하루의 마지막을 각자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잖니? 엄마는 찬성이란다."
한나는 슬며시 이두나의 팔을 안아 어깨에 기댔다.



"그럼 내가 첫 번째로 엄마랑 같이 잘래요. 언니, 그래도 돼지?"


"오늘부터?"


"아니다, 오늘은 다같이 자는게 어때, 엄마는요?"


지난 밤, 안나와 이두나는 멜리사와 엘리사를 안은 채로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잠자리에 익숙하지 않은 한나는 다락에서 이불을 가져와 소파 위의 사람들에게 덮어주면서, 한편으로는 섭섭함에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메가라가 말한 이기적인 행복을, 한나는 잠을 같이 자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침대가 2인용 밖에 없을 텐데, 괜찮겠니?"


"네네네네, 저 잠버릇 없어요."


"나도 딱히 그렇다 할 잠버릇은 없어."


안나는 이두나에게서 받은 MEU의 소음기를 손바닥에 굴리며 답했다.


"엄마가 가운데에 누우시면 되겠어요."


안나는 이두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약하지만, 그만큼 부드러운 지지대였다. 안나는 휴대폰을 꺼내 한나에게서 블루투스로 연결해 받은 엘리사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떠난지 6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차고도 넘쳤다. 손가락을 스크린에 가져가며 엘리사의 볼을 간접적으로나마 쓰다듬으며, 안나는 하,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보고 싶니?"


이두나가 안나의 휴대폰 속을 들여다 보았다.


"엄청 보고 싶어요."


"안나, 아이들 걱정은 하지 말아주렴. 불안함은 생각을 망상으로 이어지게 하는 법이란다."


이두나가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나의 머리칼에는 샴푸의 라벤더 향이 옅게 배어 있었다.


"지금은 즐거운 상상을 하는게 어떠니? 아니면 우리가 서로를 더 알게 되는 주제로 대화를 나눠보는게 더 좋겠구나."


"그럼 난 할 얘기가 없어지는데요..."


한나가 이두나의 팔이 얼굴을 부비었다. 이두나는 그런 한나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살 간질였다.


"한나, 경험은 지금부터 쌓아도 늦지 않으니 지금은 엄마와 안나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겠니?"


"대신 내 질문엔 꼭 답해주셔야 해요. 꼭이요."


한나의 말에, 이두나와 안나는 살풋이 웃었다. 질문에 답해주지 않을 일은 전혀 없었다. 이미 한나는 가족이었고, 이두나에겐 엄마, 안나에겐 언니라고 친근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곧 적응과 교화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저 먼저 시작할게요. 음...엄마는 어떻게 블루라운드 사장직까지 올라가셨어요?"


안나는 이두나의 직책에 대해 궁금해했다. 처음 블루라운드에서 접했을 때, 단순히 말해 안나가 생각하는 군사기업의 임원이 가지는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정확히는, 아그나르의 직책을 승계받은 거지. 너희들을 중동에서 잃어버렸을 당시에, 우리 가족은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어. 내가 극구 말렸지만, 그이는 직원들이 경호해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강행시켰지. 기업의 대외 이미지에도 도움이 된다길래, 난 너희들과 동행하되, 너희들은 최대한 섭외시킨 지역구 아이들과 놀도록 했단다. 하지만..."


"우리가 있던 곳에 포격이 떨어졌죠."


안나는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엘사와 같이 동네 아이들과 모래장난을 하며 공터에서 놀고 있었다. 하늘에선 얇은 회색 구름이 선을 그으며 날아오는 것을 지켜보며, '방구별이다, 방구별!'이라고 하늘을 놀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폭죽이 아닌, 폭탄임을 알았을 때, 일대는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주저앉아 부모님을 외치며 울던 안나를, 엘사의 하얗디 하얀 손이 안나를 그자리에서 빼내었고, 자매들은 포격이 만들어낸 미로들을 지나면서, 때때론 넘어지고, 엎어지며 눈물 범벅으로 부모님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부모님과 재회하는 일은 없었다. 한참을 헤매던 끝에, NFF에게 납치같은 구출을 당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아그나르는 실성한 채 너희들을 찾기 위해 벙커를 나섰다가, 그만..."


이두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두나가 매듭짓지 못한 다음의 내용을, 안나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그나르는 생전에도 유언장을 써두곤 했어. 그이의 유언장에는, 너희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너희들과 나한테 기업을 승계하겠다고 쓰여 있었지."


"기억은 안나지만, 엄청 따뜻한 아빠였네요. 마치 엄마처럼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안나의 칭찬에, 이두나는 조금 음울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니? 그리고.. 어떻게 엘사랑 헤어진 거니?"


이두나의 차례였다. 반올림해서 20년의 세월이 지나 나타난 둘째딸은 CIA를 통틀어 킬러 업계에서의 전설로 돌아왔고, 첫째딸은 아톤의 실험에 동원된 모양인지 똑같은 모습을 한 새로운 딸이 이두나 앞에 나타났었다.



"NFF에게 구해졌을 때, 그들은 엄마 아빠가 모두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우린 그 말을 그대로 믿었죠. 근데, NFF는 미국 측에서 지원을 받아 활동하는 저항군 단체였더라구요. 하지만 장비가 많아도, 사람이 부족하니까... 저흴 훈련시켰어요."



"힘들지 않았니?"


"엄청 힘들었죠."


안나는 멜빵을 풀고 셔츠를 들어올렸다. 다부진 근육들의 주변에 칼집을 낸 듯한 흉터들이 가득했다.



"그 땐 그 사람들이 착하다고 생각했고, 블루라운드로 오기까지에도 착한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NFF도 결과적으론 절 속인거나 다름 없네요. 엄마는 지금 내 앞에 살아 계시고, 언니도 살아있어요."


"엘사가 살아있단 사실을 몰랐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너와 엘사는 분명 같이..."


이두나는 안나의 말에 오류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연유로 같이 붙어 있던 두 딸들이 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저는 훈련을 주로 받았지만, 언니는 조직의 안쪽 일을 주로 도맡아 했어요. 그러니까.. 요리라거나, 빨래라거나, 아니면 총기 손질이라거나 하는 등의 일이요. 언니 체력이 엄청 딸렸잖아요?"


"그랬지. 엘사는 항상 너한테 끌려다니곤 했단다."


이두나는 안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한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갈 수 없고, 질문거리도 없어 조용히 듣기로 했다. 



"NFF의 훈련 끝에는 실전이 있었어요. 말 그대로 전투에 투입된단 소리예요. 전 어느 지방.... 어디였는지 기억은 잘 안나요. 작전이... 저희랑 성격을 달리하는 반군의 리더를 암살하는 일이었어요. 조금 트러블이 생겼었지만 반군 리더의 목을 담그는 데 성공했고, 저흰 며칠에 걸쳐서 NFF로 복귀했죠. 그런데, NFF 기지의 절반이 또다른 폭격으로 날아간 거예요. 그 때, 제 윗사람들은 엘사 언니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죠. 전 언니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언니가 일하던 주방과 빨래터에는 검게 타서 형체도 못알아볼 시체들이 산더미였거든요. 언니의 하얀 머리가락도 찾지 못했어요. 그냥.... 검은 산들이 있었죠."





"어쩌면 NFF가 아톤과 모종의 거래를 했을지도 모르겠네."



가만히 듣고있던 한나가 말했다.



"생각해봐. 엘사 ㅆ...언니가 갑자기 러시아 기업에 들어갔을 리가 없잖아. 중동하고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들이 뜬금없이 엘사 언니의 유전자로 우성 개체들을 만들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아마 내 생각인데, 아톤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NFF인가 하는 자들과 연계했나봐. 언니는 그 거래의 희생양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 거래에 한스가 개입되었을 수도 있겠어. 엘리사를 엄청 아낀다고 1호 개체였던 멜리사가 그러더라."


"이쁜 건 아나보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두 쌍둥이는 '엘리사가 이쁘다'로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덩달아 한스를 향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말은 즉, 아톤의 한스가 엘사를 두고 실험을 했단 소리로도 해석되는구나. 정말 파렴치한한 인간이야. NFF란 단체도 나중에 메가라 요원에게 말해둬야겠구나. 아무리 지원을 받았어도 세상의 비난은 받아야 한다고 이 엄마는 생각하고 있어."




이두나는 한스의 만행에 치가 떨렸다. 납치하는 것도 모자라, 안나를 속여 자신을 죽이게 만들었으며, 그 직전에는 안나의 휴대폰에 불륜을 연상케 하는 추잡스러운 합성 영상을 보내기까지 했다. 도의심은 한스에게조차 아까운 감정이었다. 또한 NFF란 단체가 한나의 가설이 맞게 된다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한스는 죽어도 싸. 죽어도 세상 사람들이 동정하지 않을 거야."


"엄마한테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어요."


안나는 말하면서, 한나와 눈을 맞췄다. 한나도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두 사람의 기억 속 이두나는 가끔 알 수 없는 눈빛을 가지고 있지만서도 나긋한 목소리와 말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엄마의 입에서 다소 거친 말이 나온 것은 적잖은 충격을 동반했다. 그만큼 이두나가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안나, 이번에 한스를 작업할 때, 무조건 팀을 꾸려서 가도록 하렴."


화가 난 만큼, 제인이 제시한 조건을 충족시키면서도 안나의 안전에 만전을 가해야 했다. 이두나는 안나가 스칼렛 위커 때처럼 무작정 뛰어들지 않길 바랬다.


"곧 메가라한테서 연락이 오면, CIA 팀이랑 연계해서 갈 거 같아요."


"만약 안된다면 엄마에게 부탁하렴. 엄마가 말한 네 회사 선배들이 싱가포르에서 돌아와 본사 숙소에서 대기 중이라고 새뮤얼이 전해줬단다."


"3명이었죠?"


"부족하면 더 채워줄 수 있단다."



하지만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구미가 당겼지만, 기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였다.



"아뇨,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민간인이 개입할 성격이 아니고, 더군다나 블루라운드는 경호, 치안유지 위주로 운영하잖아요. 샐리맨더처럼 자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이상은 무리예요."



"하지만 넌 민간 차원이 아닌 일도 해냈잖니."


이두나의 대답에, 안나는 소음기 구멍에 후 후 바람을 불어넣었다. 약한 피리소리가 바깥으로 삐져나왔다.


"제 경우에는 특수성을 적용해야죠. 제 뒷배경이 상당하다는 거, 엄마도 아시면서."


안나는 소음기를 탁자 위에 놓고 이두나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너희들에게 뭔들 못해주겠니. 한나, 우리 둘만 얘기하느라 심심했지?"


이두나는 거의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던 한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예요. 엄마와 언니가 힘든 시간을 보낸걸 알았고, 제가 겪은 일들은 부스러기 축에도 안 끼는 것들이었어요."


하핫, 한나가 멋쩍이 웃었다.


"한나, 힘들다는건 상대적인 거야. 힘든 것에는 가볍고 무거움이 없어. 그냥 힘들다, 하면 그게 가장 힘든 일인 거지."


안나가 한나에게 위로하듯 말하며, 탁자 위에 접어둔 담요를 쭉 펴 한나와 이두나, 그리고 자신을 덮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화들짝 놀란 한나였지만, 그것이 엘리사와 멜리사를 덮었던 담요임을 알았다. 두 아이의 체향이 물씬 남아있는 담요에 한나는 얼굴을 파묻었고, 그런 한나를 이두나는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우린 한나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은데, 말해줄 수 있겠니?"


"엄청 짧을 텐데... 그리고 엄마도 어느 정도 아시잖아요...."



한나가 웅얼거렸다. 이두나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듯 안나에게 눈짓을 보냈고, 신호를 받은 안나는 한나 옆에 앉아 이두나와 함께 한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마요오...."



한나는 저도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한편으론 제대로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나의 폐 속으로 하얗고 검은 아이들이 남긴 향이 젖어들어갔다.





비를 머금은 구름이 가득찬 오후에, 세 모녀는 슬픔을 머금은 구름을 겨우 걷어낼 수 있었다.





추천 비추천

52

고정닉 1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시세차익 부러워 부동산 보는 눈 배우고 싶은 스타는? 운영자 24/05/27 - -
공지 음란성 게시물 등록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63] 운영자 14.08.29 167255 509
공지 설국열차 갤러리 이용 안내 [2861] 운영자 13.07.31 439691 286
1123622 오후갤먹 ㅇㅇ(223.38) 12:54 6 0
1123621 잠이깬 거시애오 ㅇㅇ(223.38) 05:44 8 0
1123620 격하게 밤샌 다음날 [1] ㅇㅇ(222.233) 00:07 26 0
1123619 일요일이야 ㅇㅇ(110.47) 06.01 11 0
1123618 이거 몬가 떠난 설쥬미와 설갤 같음 [4] ㅇㅇ(110.47) 06.01 42 0
1123617 눈이 퀭~ [1] ㅇㅇ(110.47) 06.01 13 0
1123616 안줌 술버릇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1 26 0
1123615 엘사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1 20 0
1123614 오타쿠짓하다 발견 [6]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1 55 1
1123613 구케엘 이제 디아블로4 하냐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1 25 0
1123612 안나는 평생 공주하고 엘사는 여왕하자 [1] ㅇㅇ(223.38) 06.01 30 0
1123611 맨날 카멜레온 같이 아이피 바뀌더니 ㅇㅇ(223.38) 06.01 17 0
1123610 설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1 19 0
1123609 설...하... [1] ㅇㅇ(211.234) 06.01 15 0
1123608 왜 6월임 ㅇㅇ(221.143) 06.01 13 0
1123607 엘산나 언제까지 애틋할거야 ㅇㅇ(223.38) 06.01 19 0
1123606 아 미친 6월 첫글을 잊다니 ㅇㅇ(110.47) 06.01 17 0
1123605 6월첫글 차지해 ㅇㅇ(223.38) 06.01 17 0
1123604 이러다 뽀뽀할거같음 [5] ㅇㅇ(110.47) 05.31 69 11
1123603 정신 차리니까 벌써 금요일 ㅇㅇ(223.38) 05.31 16 0
1123602 엘산나갤입니다 ㅇㅇ(223.38) 05.31 17 0
1123601 맛점해러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31 26 0
1123600 내 5월 어디감 [1] ㅇㅇ(106.101) 05.31 20 0
1123599 하 혐퀘 [1] ㅇㅇ(211.234) 05.31 20 0
1123598 5월도 안녕 ㅇㅇ(223.38) 05.31 19 0
1123597 5월 마지막의 첫글이노라 ㅇㅇ(110.47) 05.31 18 0
1123596 능력 혐오하는데 능력 없는건 싫은 엘사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30 69 5
1123595 아 맞다 쥬미들아 인스타펌글 올릴 때 조심해 [1] ㅇㅇ(110.47) 05.30 68 3
1123594 누가 이거 1이 안나고 2가 엘사랬는데 [2] ㅇㅇ(110.47) 05.30 57 0
1123593 설갤만큼 엘산나에 진심인 커뮤가 있냐 [1] ㅇㅇ(223.38) 05.30 40 0
1123592 모든 삶이 엘산나야 ㅇㅇ(223.38) 05.30 30 0
1123591 우중충한 날엔 빠와가 있는 노래를 들어야 해 [3]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30 40 0
1123590 설갤 덕분에 글도 써보고 [1] ㅇㅇ(223.38) 05.30 32 0
1123589 크으 이틀만 견뎌 ㅇㅇ(223.38) 05.30 20 0
1123588 그래서 대체 왜 목요일에는 다들 없는거임??? [2] ㅇㅇ(112.157) 05.30 38 0
1123587 핵정전의 목요일 ㅇㅇ(112.157) 05.30 20 0
1123586 설하 [1] ㅇㅇ(106.101) 05.30 21 0
1123585 소설이란걸 써본게 설갤이 처음인디 [3] 설갤러(221.145) 05.30 50 0
1123584 크윽 늦었다 [1] ㅇㅇ(223.38) 05.30 25 0
1123583 첫글접수 ㅇㅇ(110.47) 05.30 20 0
1123582 고요한밤 설갤러(118.43) 05.29 19 0
1123581 막글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9 20 0
1123580 코피 철철철 ㅇㅇ(110.47) 05.29 22 0
1123579 저 밑에 새의상 [1] ㅇㅇ(223.38) 05.29 34 0
1123578 후 빡센 오늘이었따 [1] ㅇㅇ(223.38) 05.29 28 0
1123577 엘사가 사라지는 꿈꾸는 안나 [2] ㅇㅇ(223.38) 05.29 46 0
1123576 설하 [1] ㅇㅇ(115.138) 05.29 18 0
1123575 오늘 유익한 악몽을 꿈 [2] ㅇㅇ(211.234) 05.29 33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