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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유혈]꼭두각시의 칼 5~6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31 22:54:19
조회 554 추천 18 댓글 4








디스아너드+어크 엘산나썰, 꼭두각시의 칼 1~4화








9.


"안나, 자니?"


문 밖에서, 마치 고아원 방의 푹신한 이불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문을 타고 전해졌다. 안나는 담요를 덮고 불이 꺼진 방의 천장에 달린 유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린 하늘에서 내려오는 탁한 빛이 창문을 통해 방안을 비추고 있었지만, 방 안은 조금 차가웠고, 안나는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전염병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요, 벨 아주머니는요."



안나는 눈을 힐끔 내려 천장과 가까운 벽에 걸린 원형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짧은 바늘이 11, 긴 바늘이 4를 가리키고 있었고, 해체장 작업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해체장 가기 전에 밥이라도 든든히 먹고 가야지."


"거기서도 공짜로 먹을 수 있잖아요. 여기서 먹으면 오히려 식비만 더 나갈텐데."


안나는 졸업일 이후 곧바로 벨이 운영하는 종달새 정보상으로 들어가 청부를 시작하려 했다. 이제 막 서른에 접어들고, 일찍이 잃은 남편의 사업을 물려받은 벨은 약간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리본이 매달린 끈으로 한데 묶고 안나에게 사무소 내부를 안내했었다. 청부업이 차갑고 딱딱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안나는 예상 외의 따뜻한 벨의 친절함에 고정관념의 끝부분을 도려낼 수 있었다.




벨이 앞으로 전달할 청부들을 해결하되,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했던 안나였다. 하지만, 제국의 개구멍에 흘러들어온 전염병은 안나의 파란만장한 청부업을 순식간에 부숴버렸다. 린든의 주민부터 시작해 이름있는 공작가들은 외출을 자제했고, 사무소를 찾아오는 발길은 뚝 끊기고 말았다. 처음엔 금방 지나겠지, 라고 생각했던 안나와 벨이었지만, 안나보다 일찍이 들어온 사무소 직원들의 일부도 감염되어 운영을 제대로 할 수조차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쥐를 매개로 한 이 괴질에 감염되면 알 수 없는 괴성과 언어를 지껄이며 토사물을 흩뿌리고 다니는, 통칭 '우는 자'들이 거리에 출몰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래도 밖에서 먹는 것보다 여기서 먹는게 더 깨끗하지 않겠니?"

벨이 살며시 안나의 방문을 열며 대답했다. 벨의 뒷머리에 달린 파란 리본이 나비처럼 흔들거렸고, 벨의 미소는 복도에 켜져있는 전등의 빛에 가려져 희미하게 드러났다.

"나 혼자 먹기엔 고기수프를 너무 많이 해버렸지 뭐니. 안나, 한 숟가락이라도 거들어주지 않을래?"


벨은 아직 노란 불꽃을 머금은 촛대와 작은 적색 고래기름통을 들고 있었다. 안나의 방은 고래기름을 연료로 한 유등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었고, 자주 보충해주지 않으면 죽은 박쥐처럼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벨의 나지막한 부탁에 담요를 걷고 일어났다. 일이 끊겼다 하더라도, 벨은 안나의 직장 상사였고, 말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럼 한 접시만 먹을 거예요. 딱 한 접시."


안나는 벨이 내민 기름통을 받아들고 유등을 천장에서 떼낸 다음, 유등의 주둥이에 고래기름을 흘려넣었다. 시큰하면서도 비린 냄새가 유등 속으로 들어갔고, 이내 다 비워진 기름통을 바닥에 내려놓은 안나는 팔을 뻗어 천장의 고리에 유등을 매달았다.


"가요, 아줌마."


다시 기름통을 들은 안나는, 청색의 수수한 긴 치마와 프릴이 달린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벨의 어깨를 살살 밀며 말했다. 문에 가까워지자, 복도의 공기에서 퍼져나오는 수프 냄새에 안나의 배도 절로 비명을 질렀다.


"성공하셨나 봐요? 저번에 수프에다 뭘 넣으셨더라...독버섯 넣으셨죠?"


"하지만 이번엔 다르단다. 고래고기가 시장에 많이 풀렸더구나. 그래서 왕창 쟁여 놓고 네가 잘 동안 나름 요리 연습을 했었지. 이제 너보다 내가 더 요릴 잘할 거 같은데?"


안나는 처음 요리를 만들었을 때를 기억했다. 그녀의 첫 번째이자, 벨에게 대접한 요리는 감자스프였는데, 하필이면 후추가 아닌 아니스 가루를 집어넣어 벨을 화장실로 직행하게 만든 일화가 있었다. 정작 안나는 고아원에서 자라 폭이 넓어진 입맛 때문에 무엇이 이상한지 감지하지 못했다.


"그...건 실수였어요."


"변명을 해도 너한테 요리를 맡기고 싶진 않구나."


두 사람은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며 복도 끝 계단을 내려와 사무실로 쓰이는 1층으로 내려왔다. 문서들과 마스크가 쌓아올려진 벨의 책상과, 직원들의 캐비닛들의 가운데에 자그마한 목재 협탁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위엔 누런 빵 두덩이가 놓여진 접시, 그리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순백색의 수프 접시가 놓여 있었다.



"한 입만으로 끝나지 못할 거 같은데요?"



일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안나는 식객의 처지와 같았기에, 벨의 사무소에 머물면서 부업으로 고래 해체장에서 고래들을 해체하고 받는 고기들과 약간의 임금을 사무소의 재정에 보태고 있었다. 벨은 극구 말렸지만, 나날이 비루해지는 식단을 보고는 더 이상 안나의 보조를 거부하지 못했다. 그런 안나와의 생활을 겪으면서, 벨은 매티어스에게 새삼 감사하며, 온갖 범죄가 도사리는 이 린든에서 보석같은 인성을 가진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 존경을 표했다.


"내가 말했잖니. 더 만들어 놓았다고."


"한 다섯 접시는 먹고... 빵은 한 덩이 더 먹어야겠어요."


안나는 주린 배를 잡으며 말했다. 자신이 조달한 돈과 고기들로 만들었다지만, 최대한 벨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아 굶고 있었다. 해체장은 다른 직종과도 달리 유난히 전염병이 미치지 않아서, 안나가 청부 이전에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선 해체장이 유일한 탈출구였고, 해체장에서 나온 부산물로 굽는 내장구이와 잡탕은 냄새가 고약해도 배를 채워낼 수 있었다. 벨이 협탁에 마주 놓아진 의자 중 오른쪽의 것에 앉자, 안나는 왼쪽 의자에 앉았다. 수프에 담구어져 있어 미지근한 숟가락을 집어 수프를 뜬 안나는, 여전히 김이 나는 수프를 호 호 불어 식힌 다음, 호로록 소리를 내며 수프를 마셨다.


"맛있네요?"


나쁘지 않았다. 수프에 적셔진 고기 이외에도 따로 갈아서 넣은 것일까, 멀죽하게 끓여낸 국물 속에 고기 특유의 풍미가 느껴졌다.



"맛있게 먹어주니 내가 다 기쁘다. 이거 만들려고 고기를 얼마나 버렸는지 몰라."



"...얼마나 버렸는데요."


"음... 싹 다?"




멋쩍이 웃으며 수프 속을 숟가락으로 휘휘 젓는 벨을 보면서, 안나는 익살스럽게 한쪽 볼을 찡그린 채로 빵을 집었다. 빵은 석회석을 집은 것처럼 잔가루가 만져졌지만, 돌처럼 딱딱했다. 고아원을 벗어나도 린든은 린든이었다. 제국의 수도 안에 위치해 있어도 부가 흘러들지는 못했다. 모순적이게도 가장 형편이 좋지 않아야 할 고아원은 유일하게 왕실의 후원을 받아 그나마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전체의 지원 대신, 최하의 빈곤만을 지원한다는 생각을 하며 안나는 두 손으로 빵을 잡아 힘껏 비틀었다. 바사삭, 검은 빵이 안나의 손에서 부서지듯 갈라졌고, 빵의 부스러기는 안나의 수프 위로 몸을 담았다. 안나는 왼손에 집혀진 빵을 다시 접시 위로 놓은 다음, 오른쪽 빵을 수프에 넣었다.


"...아줌마도 해주지 않을래?"


벨이 자신의 빵을 안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날이 갈수록 시장에서 살 수 있는 빵들은 점점 색깔이 진해지기 시작했다. 안나가 고아원 도서관에서 읽은 바로는, 아주 후진 시골에는 매티어스의 피부와 흡사한 딱딱한 흑빵을 먹고 산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땐 막연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였지만, 지금은 거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먹음직스러운 갈색의 빵이지만, 속은 갈색과 검정색의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흰 빵은 언제 먹어봤더라...'


"안나?"


잠시 멍한 표정으로 빵을 바라보던 안나를 벨이 눈 앞에 숟가락을 가져가 진자처럼 흔들었다. 안나는 눈 앞을 방해하는 숟가락을 보고 정신이 돌아왔고, 손 안에 들려있는 벨의 빵을 잡아 반으로 쪼개 돌려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냥 흰 빵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줌마도 흰 빵 드셔 보셨죠?"


아무 의도도 없는, 순수히 음식을 물어보는 안나를 보며, 벨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빵의 단면을 수프에 적셨다.


"나도 몇 번 먹어본 적은 없지. 어디까지나 나도 린든 출신인데, 그래도 이 청부 일을 시작한 뒤로는 좀 먹어보긴 했단다. 수프에 빵을 적실 필요도 없고, 소화도 잘 되고... 무엇보다 맛있지. 고기를 먹는 것처럼 부드럽지 않니?"


"아줌마 생각에 백 퍼센트 동감해요. 으으! 하나만 먹고 싶다아..."


안나도 너스레를 떨며 수프가 흡수된 빵을 집어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여전히 딱딱한 이물감은 남아있었지만, 맨잇빨로 먹는 것에 비하면 훨씬 맛있었다고 안나는 속으로 평가를 내렸다. 빵을 베어물어 씹어삼키기도 전에, 안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사무소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안나는 속으로 저 발걸음의 주인공이 자신의 복수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이 단촐하지만 따뜻한 식사를 방해받지 않기를 바랬다. 그리고 불행은 언제나 적중하는 법이었고, 요란스럽게 사무소 문이 열리며 마스크와 고글을 쓴 멜빵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헉헉대며 뛰어들어왔다.




"안나! 아, 벨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잠시 안나가 필요한데,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안나와 같이 해체장에서 일을 하는, 안나보다 세 살이 더 많은 유진 피츠버그였다. 그가 말한, 안나가 필요하단 말에 당사자인 그녀는 턱을 재촉해 빵을 삼켰다.


"유진, 설마 벌린턱 자식들이 해체장을 습격했다거나, 아니면 우리가 가져갈 고래고기들을 훔쳐갔다는 소식이 아니길 바라."


"벌린턱이 해체장을 습격했어."


"와."


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대며 캐비닛을 열고 청색 페그탑과 붉은색 조끼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캐비닛에서 목검을 꺼낸 안나는 벨의 책상에 있는 마스크 하나를 집어 입에 씌웠다.


"안나, 밥은 다 먹고 가야지."


"죄송해요 아주머니, 지금 이 일 수습 못하면 우리 아사할지도 몰라요."


현재로썬 유일한 밥줄인 해체장이 깡패들에게 넘어가면 그거야말로 최악의 상황임에 틀림없었다. 안나는 유진이 던진 해체 작업용 가면을 쓴 다음 벨에게 대충 인사를 마치고 유진을 따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사무실에는 벨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고기를 좀 아껴 쓸 걸 그랬나..."


벨은 뚱딴지같은 말을 내뱉으며, 안나가 채 닫지 못한 사무소의 문을 다시 닫았다. 닫기 전, 벨은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10.

우중충한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나와 유진은 지역 활성화를 위해 세우려다 건설 자재가 도난당해 뼈대만 남아있는 다리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그 자식들은 머리에 든게 영약밖에 없나?"


안나는 목검의 검올을 잡으며 화를 냈다.


"그러게 말이야. 고래 기름이 고약해서 쥐들이 안오는 걸 텐데."


어느새 안나에게 선두를 빼앗긴 유진이 뒤따르며 말했다. 소문에 따르면 제국의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왕실 의사인 안톤 소콜로프가 만들어낸 붉은 영약이 유일했다. 제국이 영약을 상용화하여 시민들에게 배포하면 역병은 금방 해결될 수 있겠지만, 정말로 소문인건지, 아니면 근왕파라 불리는 자들이 배포를 저지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존재 자체는 사실인 모양인지, 왕실 바깥으로 영약 몇 병이 빼돌려져 일부 지역에선 물에 희석시킨 다음 겨우 몇 방울을 캡슐에 담아 비싼 값으로 판다는 그럴듯한 소문이 린든에도 퍼져 있었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조직원들이 더 많이 쳐들어왔어, 지난번에도 안나 네가 거의 다 막아냈잖아. 네가 오기 전까지 모두 막아보려 했는데... 저들이 살인까지 각오하고 올 줄은 전혀 몰랐어."


"아저씨들이 죽었어? 몇 분이나."


"세 분. 어서 빨리 가야 해. 지금도 아저씨들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몰라."



안나는 뿌득, 소리내어 이를 갈았고, 눈 앞에 보이는 건물의 벽을 딛고 2층 난간을 잡았고, 팔을 굽힌 반동으로 지붕의 처마를 잡아 올라갔다. 복잡한 린든의 길을 이리저리 가로지를 바에야,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것이 거리를 확실히 좁혀낼 수 있었다.


"유진, 아마 안 되겠지만 넌 경찰서로 가서 경관들 좀 데려와. 내가 최대한 제압해 볼 테니까."


"아아... 알겠어! 아, 안나! 이거 받아!"


유진이 품에서 꺼내 안나를 향해 던진 것은 고래기름으로 작동되는 유압 피스톤이 장착된 권총과 탄약 묶음이었다.


"정말 필요할 때 써야 해!"


안나는 유진을 보는 듯 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권총의 실린더를 열어 탄약을 집어넣어 장전했다. 유진의 권총은 기본형인 단발형 권총이라 한 번 발사하면 다시 장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적어도 위협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안나의 불안함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 안나는 장전을 마친 권총을 조끼의 품안에 끼워넣고는, 지붕을 가로질러 건너편 지붕으로 있는 힘껏 도약했다.









11.



"와..."


해체장 지붕에서 내려본 상황은 안나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해체장의 바닥은 고래의 피가 아닌, 인부들이 흘린 피들로 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유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유진이 말했던 죽은 세 사람은, 이제 일곱 명으로 더 늘어나 있었다. 평소 해체장의 인부는 사람 한 둘의 오차를 제외하고는, 안나와 유진을 포함해 열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즉, 남은 사람은 단 하나, 턱수염을 하고 배가 튀어나온 작업반장, 허드슨 뿐이었다.


"이거 좆됐네. 좆됐어. 아주그냥...."


안나는 욕을 뇌까리며 벌린턱 조직원에게 결박을 당한 허드슨과, 그를 면전에 대고 협박하는 사태의 주모자로 보이는 사내의 대화를 엿듣기로 했다.


"씨발, 영약 어딨냐고. 다 알고 왔어, 너희들이 서던에 유통된 희석 영약을 몰래 마시고 다닌다는 것을 말이야!"


"나, 나는 모르네. 우린 그 영약이 무슨 맛인지도 몰라. 그저 고래만 자르는 무식한 놈들만 모인 곳에 어떻게 영약 있겠나? 자네들이 죽인 자들, 저 자들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있나? 오늘 내일 하는 노모와 처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전염병을 피해 여기로 온 가장들이었어. 그런데 네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영약 나부랭이를 얻으려고..."



허드슨은 나름 용기를 내며 주모자에게 반박했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모두가 죽고, 유진은 실종되고, 상황을 그나마 정리할 가능성이 있는 안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너희들은 지옥에 떨어질 거다! 씨발 아웃사이더한테 후장이나 따여버려라! 이 개자식들아!"


끝내 울부짖는 허드슨의 외침에 안나는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넝마 할멈에게 받은 아웃사이더의 룬은 종달새 정보상 안 안나의 방에 고이 숨겨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큰 탓에, 어디 버리기도 뭐했지만, 룬에서 퍼지는 쓰디쓴 향기가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기에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안나는 아웃사이더의 룬을 평생동안 가지고 다니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지만, 그렇다고 아웃사이더의 신앙이 사이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기에, 졸인 가슴을 쓸어내리며 목검을 역수로 쥐었다. 이 상황에서 감정이 격해진다면 남는 것은 피를 빼곤 전무할 것이었다.






안나는 처마의 바로 밑에서 어슬렁거리는 벌린턱의 두 조직원을 내려다 보고, 목검의 끝을 조준했다. 숨을 한 번 골라 쉰 안나는, 이내 지붕에서 두 발을 떼었고, 동시에 역수로 쥔 칼자루를 양손으로 잡아 조직원의 어깨에 내리꽂았다. 퍽 하고 좋지 못한 타격음이 들렸지만, 거세게 내리기 시작한 빗소리는 안나의 자취마저 지워주었다. 조직원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안나는 그의 목을 조르는 동시에, 겨우 눈치를 챈 바로 옆 조직원의 종아리를 걷어차 넘어뜨린 다음 얼굴을 발로 내려찍어 기절시켰다. 목이 졸린 조직원의 몸부림이 잦아들자, 안나는 기름과 내장을 담기 위한 해체장의 드럼통 더미 뒤로 기절한 두 조직원들의 몸뚱아리를 질질 끌어 숨겼고, 눈만 빼꼼 내밀어 동태를 살펴보았다.





주모자는 권총을 뽑아 허드슨을 처형시킬 모양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벌린턱의 조직원은 십여 명 가까이 남아있었다. 10 대 1, 안나가 절대적으로 불리했고, 안나가 가진 거라곤 낡은 목검 하나와 유진의 단발식 권총 한 자루 뿐이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꺼낸 탄약은 겨우 다섯 발 밖에 되지 않았다. 안나는 이렇게 된 이상, 주모자부터 저격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조직원이 권총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리더를 먼저 처리하면 조직은 체계를 잃어 무너진다는 매티어스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안나는 조끼 안에서 권총을 꺼내 주모자의 목을 향해 조준했다. 거리가 떨어진 감이 있었지만, 매티어스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로 사격 또한 연습해 두었던 안나였다. 이것이 첫 살인으로 남게 되고, 틀림없는 트라우마가 되겠지만, 안나는 린든에서 살아왔고, 시체는 강에 빠져 흘러가는 빨랫감처럼 자주 보아왔다.




그리고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아내고, 직장을 구하기 위한 대의적인 명분도 있었기에, 안나는 주저하지 않고 무감각해진 감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총알은 주모자의 어깨에 박히자, 남은 조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안나에게 집중되었다. 주모자도 어깨를 부여잡으며 안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이런 씨발...저년을 잡아!"


주모자가 안나를 향해 손가락질하자, 조직원들이 하나 둘 칼과 몽둥이를 꺼내 안나에게 달려들었다. 안나는 재빠르게 실린더에서 탄피를 뽑아 다시 장전한 다음, 두 번째로 다가오는 적의 가슴에 격발시켰다. 두번째 조직원이 쓰러지자, 첫번째 조직원의 움직임이 잠시 경직되었고, 안나는 그 때를 노려 목검으로 왼팔을 후려쳤다. 


너무 세게 후려친 탓일까, 안나의 손은 전기에 닿은 듯 저려왔지만 안나의 머리로 방향을 튼 세번째, 네번째 조직원의 몽둥이와 칼을 향해 목검을 치켜들어 막아낼 수 있었다. 동시에, 안나는 세 번째 조직원의 사타구니를 발로 차 제압시켰다. 네 번째 조직원의 칼날은 안나의 목검에 박혀 있었고, 조금이라도 힘을 뺀다면 목검이 부러질 것 같았다. 안나는 한 손으로 아직 총열이 뜨거운 권총을 네 번째 조직원의 얼굴에 밀어넣었다. 



유진이 준, 방열 기능이 미흡한 기본형 권총은 여기서 빛을 발했다. 고기를 굽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조직원의 얼굴에서 피어났고, 그는 쓰라린 비명을 지었다. 칼을 쥔 그의 손힘이 느슨해졌고, 안나는 쥐고있던 권총의 손잡이로 조직원의 머리를 여러 번 내리쳤다. 자세가 무너진 조직원의 몸을 발로 찬 안나는, 잠시 확보된 시야 속에서, 네 번째 조직원의 뒤로 세 명의 조직원이 권총을 안나에게 겨누고 있음을 알았다. 저들은 조직원이 쓰러질 때를 기다린 다음 안나에게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안나는 생각을 바꾸어 목검을 조직원의 앞바지춤에 끼운다음 멱살을 잡고 그대로 조직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안나는 발을 구르면서도  다시 권총을 장전했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세 조직원 중 가장 왼쪽에 있던 조직원을 향해 멱살을 잡혀 기절한 조직원을 반쯤 집어던졌다. 몸통 박치기를 당한 왼쪽의 조직원이 쓰러진 것을 확인한 안나는 곧바로 가운데의 적의 어깨에 방아쇠를 당겼다. 안나의 바램대로, 가운데 조직원은 피가 솟구치는 어깨를 붙잡으며 쓰러졌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건 아니었다. 남은 세 명의 조직원이 동시에 안나의 머리, 어깨, 그리고 허벅지를 겨누어 칼을 찌르려 했고, 안나는 몸을 뒤로 뺐다. 두 개의 칼을 피했지만, 남은 하나의 칼은 안나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선홍색의 피가 흘러 안나의 목덜미를 끈적하게 적셨다.





안나는 나머지 오른쪽 조직원이 안나에게 총을 겨누려고 하기에, 들고 있던 권총을 냅다 그의 미간을 향해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권총은 조직원의 머리에 직격했고, 안나는 그 자의 중심이 흔들린 틈을 타 몸을 파고들려는 칼날 중 하나를 방패마기로 쳐냈다. 세 적은 안나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란 것을 알고 그들 또한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안나는 그들의 중심을 향해 뛰어들었다. 목검의 긴 날로는 근거리에서 때리기엔 적합하지 않기에, 안나는 자신의 얼굴을 벤 상대방의 턱을 주먹으로 친 다음, 칼머리로 왼쪽 조직원의 명치를 옆으로 찍었다.



그 때, 등 뒤로 내쳐지는 칼날을 안나는 목검을 뒤로 빼 막아냈지만, 빠드득 소리와 함께 목검의 끝부분이 칼날에 밀려 잘려나갔고, 안나는 부러지면서 걸려진 칼날에 휘말려 뒤로 나자빠지려 했다. 하지만 안나는 매티어스와의 마지막 대련을 기억했다. 구르면서 주먹, 아니면 발차기. 하지만 안나는이번엔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고 확신했고, 넘어지는 척 하면서 굴러 일어나 조직원의 가슴에 등을 맞대었다. 그리고 고개를 힘껏 숙인 다음, 있는 힘껏 뒤통수를 들어 조직원의 미간을 후려쳤다. 그래도 조직원은 쓰러지지 않았기에, 안나는 목검의 칼등으로 비틀거리는 조직원의 정강이를 내려쳤다. 비명소리는 빗소리로 자욱해진 습한 공기에도 무미건조함을 유지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단 하나, 힘껏 상처를 지혈해도 줄줄 흐르는 피를 공포에 질려 바라보는 주모자가, 안나의 싸움을 지켜본 허드슨의 옆에 주저앉아 있었다.



"허드슨 아저씨, 괜찮아요?"

"안나, 또 네가 날 구해줬구나."


"다른 아저씨들은 모두..."


안나는 말끝을 흐렸다. 고래기름에 섞여 불쾌한 대비를 이루는 바닥의 적색 유화는 안나의 발과 쓰러진 조직원들의 몸뚱이에 계란 노른자를 터뜨린 것처럼 흩어졌다.


"어떡하면 좋죠. 유진한테 경찰 부르라고 했는데.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어요."


안나가 손을 내밀자 허드슨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의 처량한 인상의 곳곳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안나는 그놈의 영약의 E자만 떠올려도 혐오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나마 입에 풀칠할 수 있을 유일한 직장은 존재유무조차 확인되지 않은 푸른 약에 홀린 깡패들에게 박살이 났기 때문이었다.



"내가 예언 하나 할게, 경찰은 여기로 안 올거다. 그놈들이 벌린턱과 한 통속이라는 거, 너도 잘 알잖니."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퉤 하고 뱉은 허드슨이 말했다. 다른 인부들이 죽었음에도, 그는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안나는 그와 달리, 자신들의 품삯을 안나에게 나눠주던 그들의 죽음에 슬퍼했다. 하지만 안나의 판단보다는, 허드슨의 판단이 더 현실적이었다. 유진이 데리러 오기로 한 경찰은 '일상적인 소란'으로 결론지어 오지 않을 것이고, 몇 시간 뒤, 아니면 저녁께가 되서야 잠깐 순찰을 도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안나는 끝이 날카로워진 목검을 바닥에 탁탁 내리치며 뭉툭하게 만들었다. 고아원을 나가기 전 매티어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해서 얻은 새 목검은, 해체장에 쳐들어오는 벌린턱과의 싸움으로 군데군데 잔금이 생겼고, 몽둥이들과 부딛혀 회색으로 바래져 있었다.



"아마 당분간은 해체 일도 못할 거 같구나. 지금껏 싸움만 있었던 곳에서 살인까지 벌어졌으니, 사장님도 깨닫는게 있으시겠지. 그리고 벌린턱도 알게 될 거야. 해체장에 고래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여기도 쥐들에게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허드슨은 절뚝거리며 몸을 돌려 주모자를 내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신음을 흘리며 안나와 허드슨을 노려보았다.


"이....씨발.... 좆같은 새끼들..."


"좆같은건 너고."


안나는 허드슨을 대신해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은 그의 손을 발로 밟았다.


"그 정도론 안 죽으니까 엄살 부리지마. 그리고 네 두목에게 확실하게 전해. 여기엔 영약도 뭣도 없다고 말이야."


"대체...쥐는...그럼.."


"고래 기름이 역겨우니까 걔네들도 안 오는 거겠지. 뇌가 럼주에 절여 있기라도 한 거야, 뭐야?"


안나가 발을 떼내며 말했다.


"그리고 영약이 사실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아? 소문은 확증적이지 않으면 믿지 말아야지, 너 때문에 씨발...."


안나는 그의 다리를 발로 찼다. 해체장이 재개되려면 며칠은 걸릴 테고, 크로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얻어온 고기들은 벨이 요리를 가장한 실험들로 모두 소진되었으니, 쫄딱 굶는 건 시간 문제에 가까웠다.



"우린 뭐 먹고 살으라고! 이 씨발놈아!"


상황도 정리되었겠다, 감정의 절제를 계속 이을 필요가 없어진 안나는 목검으로 주모자의 머리를 때리려 했고, 허드슨이 안나의 어깨를 잡아 겨우 말렸다.


"안나, 안나. 진정해! 얘마저 기절시키면 벌린턱 두목에게 말해줄 사람이 없게 되잖아! 네 힘을 생각해!"


안나는 허드슨의 제지에 화를 삭히며 목검을 허리춤에 다시 채웠다.


"그리고 사장님이 이럴 때를 대비해 지원금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했고, 돈이 든 금고는 내가 관리하고 있어. 자, 여기 열쇠야."


"아저씨가 가져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직접 가져가면 도난의 위험이 있잖아요."


허드슨은 그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듯 한쪽 볼을 찡그렸다.


"매티어스 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인성이 올곧더구나. 물론 안나 네가 이렇게 과격하게 싸우긴 하지만... 그래도 품성의 흠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맡길 수 있는 거란다."


허드슨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황동색 열쇠를 꺼내 안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금고에서 꼭 한 자루만 꺼내야 한다!"


안나의 손바닥과 거의 같은 길이의 열쇠를 물끄러미 내려본 안나는, 해체장 한쪽에 위치해 있는 사무소로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벨이 준비한 수프는 거의 식어가겠지만, 그녀는 안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녹슨 사무실의 문을 열자, 안나와 인부들의 해체 장비가 들어있는 캐비닛들의 끝에 있는, 바이저와 연장들이 놓여있는 목재 책상과 의자 옆에 커다란 금고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나는 금고 앞으로 다가가 잠금쇠에 열쇠를 집어넣고 손목을 비틀었다.





잠시 뒤, 딸깍 소리와 함께 두꺼운 쇠문이 열렸고, 그 안에는 안나의 머리색과 흡사한 적갈색의 두툼한 자루들이 쌓여 있었다. 안나는 그 중 하나를 꺼냈고, 생각보다 무거운 주머니를 가늠하면서 보조금이 많이 들어있기를 바랬다. 금고 문을 닫고 다시 열쇠를 돌린 다음, 소란스러운 바깥으로 나오자 유진이 사람들을 끌고 허드슨과 얘기하고 있었다. 허드슨의 말대로 유진은 경찰들을 끌고오지 못했고, 린든에서 힘 좀 쓰며 벌린턱을 혐오하는 사내들을 데리고 와 있었다. 빗소리에 섞여 무엇을 얘기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허드슨의 해체장 임시 폐쇄라는 말을 유진이 전해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안나는 여전히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쳐내며 아우성대는 인파를 향해 걸어갔고, 유진은 그제서야 안나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안나, 괜찮아?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잖아!"


"이건 금방 아무니까 걱정마."


안나는 손사레를 치며 신경 끄라고 유진에게 표시했고, 땅에 떨어져 있던 유진의 권총을 주워 그에게 내밀었다.


"아물기는 무슨, 네 입술을 봐. 그것도 아물었다고 말할 거야?"


유진은 안나의 입술을 세로로 가로지른 흉터를 보며, 주머니에서 엄지만한 파란색 통을 꺼내 안나에게 튕겼다. 안나는 한 손을 뻗어 통을 받았고, 유진은 안나에게서 권총을 회수했다.


"연고니까 피 좀 닦고 발라둬."


"이거 고래기름으로 만들었잖아!"


안나는 뚜껑을 돌려 열은 다음, 습기찬 공기 중으로 퍼지는 고약한 냄새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통을 닫았다.



"그래도 이거보다 효과있는 건 없을걸? 더 나은 연고를 구하려면 어디... 에버튼 가나 시실리 가로 가보던가. 안나, 열쇠 좀 줘. 보조금 받아야 한다면서."



"난 받았어. 아, 탄약도 가져가, 여기."



안나는 바지주머니에서 탄약더미를 꺼내 유진에게 주었고, 해체장 밖으로 나와 장대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안나의 볼에서 흘러나와, 원래 붉었던 조끼를 더욱 붉게 만든 피들이 비에 씻겨내려갔다. 빗물이 안나의 볼 상처에 쓰라리듯 긁고 지나가자, 안나의 눈가엔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 정도 씻겨내려갔다 생각한 안나는 숨을 참으며 상처 부위에 연고를 발랐다. 절반 정도 남고, 안나는 유진에게 돌려주려 몸을 돌렸다.



"유진, 연고 가져가!"


"난 됐으니까, 너나 가져!"


사무소로 걸어들어가는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체 안나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유진과 안나의 사이에, 인부들의 시체와 쓰러진 조직원들의 몸을 수습하려는, 땟국물이 흐르는 사내들의 모습이 시야를 섞였다. 안나는 문득 소름이 등을 타고 흐르고 있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 안나는 사람을 거의 죽일 뻔 했었다. 하지만 안나는 아저씨들의 죽음과 강제 휴직에 대해서만 슬퍼하고 있었다.





매티어스의 아이들도 린든의 색깔에 물들어 있었다.













12.




안나는 우산을 챙겨오지 못했기에, 장대비 속을 처벅거리며 뛰고 있었다. 안나는 이번엔 지붕으로 올라가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미끄러져 추락해 목이 꺾여 죽을 수도 있는데다가, 보조금이 들어있는 자루를 열어보았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사장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조금은 구두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들어있는 보조금도 2크로네 동전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을 줄 알았던 안나였다.




하지만 주머니를 열자, 안나의 생각은 180도 뒤바뀌었다. 20크로네 동전들과 100, 200, 500 크로네 지폐들이 한데 엉켜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전의 무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선 안나의 예상과 달라진 건 없었지만,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휘젓자 지폐들의 부드러운 감촉들이 안나의 손가락 마디를 훑고 지나갔다. 안나는 이 정도 보조금이라면 해체장이 다시 열리기까지 벨과 함께 의와 식은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추측하며, 린든 안에 있는 식료품 점으로 몸을 돌렸다. 두 블럭을 지나 모퉁이를 꺾고 두 블럭, 그리고 한 번 더 꺾으면 품질은 좀 떨어지고,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린든의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식료품점이 있었다.






안나는 쥐고기가 아닌 토끼 고기라도 있기를 바라면서,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벨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씩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기에, 안나는 최대한 처마가 있는 건물에 붙어 지나갔다. 거리는 역병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이 지나지 않았다. 안나는 어쩌면 전염병이 위생이 취약한 린든의 사람들을 모두 죽인 것이 아닐까라는 무서운 생각을 했다. 닫혀있는 건물들 속에 썩고 있는 시체들이 즐비하고, 아직 썩지 않은 연골들과 살점들을 쥐들이 갉아먹고 있는 거라면? 안나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쥐 몇마리가 안나의 발 근처로 후다닥 지나갔고, 안나는 화들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애비, 애비!"



안나는 멀어져가는 쥐 무리들을 향해 휘 휘 손을 저었다. 안나는 다시 거리를 뛰기 시작했고, 어느덧 첫 번째 모퉁이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온 몸을 감싸는 남색 제복, 그리고 험악하게 생긴 커피색 얼굴형 마스크의 이마에는 C자 문양을 가로지르는 삼지창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주시자들, 제국이 공인한 폐쇄주의적 종교단체들의 복장을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와, 씨발 젖통 봐라. 진짜. 한번만 주무르게 해줘."


"왜 너희 주시자들은 전염병에도 멀쩡한 거냐? 어? 영약으로 씹질이라도 하는거야?"


"주시자를 따먹으면 역병에 면역이라던데, 한번 해볼까?"



단순하게 해석해도 좋지 않은, 상스러운 말들이 주시자에게 쏟아졌다. 가면에 가려진 주시자의 얼굴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이지 않았지만, 우연히 안나가 들여다 본 루벨라이트색 눈동자는 단단히 겁에 질려 있었다. 안나는 주시자들에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필이면 두통을 낫게 해주는 약이 아웃사이더의 룬이어서 가급적이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주시자들은 아웃사이더의 신봉자들을 '교화'시키고, 룬과 제단을 파괴하는 일을 주로 하는지라, 안나와는 상성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나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주시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스키아보나를 뽑아 사내들에게 겨눴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멀리서 들어도, 주시자의 목소리는 린든에 있기에는 너무 여린 감이 물씬 풍겼다. 어느덧 주시자는 사내들의 한가운데에 둘러싸였고, 스키아보나를 휘둘러 보았지만, 뒤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칼을 휘두를 수도 없게 된 주시자는 이내 다리마저 잡혔고, 사내들은 주시자의 제복과 바지를 주무르며 단추를 거칠게 풀기 시작했다.


"놔.. 놔... 놔! 저기요! 살려주세요! 저기요!"


안나는 주시자의 가련한 외침을 듣기도 전에, 포장 공사를 한지 오래되어 군데군데 튀어나온 벽돌들을 집어 사내들의 무리에 힘껏 던졌다. 빗속을 뚫고 지나간 하나의 벽돌은 한 사내의 목 뒤로 직격했고, 그는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고꾸라졌다. 이내 다른 사내들의 눈이 안나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강간하려는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싸움을 거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고아원 여우로 불리면서, 지금은 해체장에서 일하는데다, 얼마 전에는 벌린턱 조직원들과 일대 다수로 싸워서 때려눕힌 여자, 안나가 그들을 향해 목검을 치켜들며 뛰어왔다. 안나는 아무말도 외치지 않았다. 린든에서 자라난 안나였지만, 모두가 미쳐 돌아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역병이 사람의 인심까지 죽여버린 것일까, 주시자가 속옷이 드러날 정도로 공개적으로 윤간을 당하기 직전인데도, 적지만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저 힐끔거릴뿐 말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내들의 눈에 들어온 안나의 모습은, 우리에서 탈출한 미친개를 연상시켰다.












13.



"이."



안나는 마지막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때렸다.



"씨발."


또다시 주먹이 사내의 코를 후려쳤다.


"변태 새끼들아."



안나가 세 번째 주먹을 휘둘렀을 때, 사내의 코에선 발로 밟은 통 속의 케첩처럼 코피가 주륵 쏟아졌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인해 피는 점점 입가에 번져갔다.


"제, 제발...그만..."


"안 끝났어 병신새..."


안나가 피에 젖은 주먹을 다시 한 번 치켜들자, 그녀의 손목을 주시자가 잡았다.


"저기... 전 괜찮아요. 정말로요."


그녀는 안나가 목검으로 성욕에 미친 사내들의 머리통을 병따개마냥 따고 있을 동안, 거리의 한쪽 구석에 숨어서 반쯤 벗겨진 바지와 제복을 다시 입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칼을 쥐어 자신을 구하려 든 갈색 머리의 여자를 도와주려고 스카니보아를 들고 나왔을 때, 상황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사내들은 모두 얼굴에 멍이 가득한 채로 비를 맞으며 쓰러져 있었고, 안나는 한 사내의 멱살을 잡고 남은 손으로 연신 얼굴에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괜찮다고요?"


주시자의 눈에 비친 여자의 눈은 약간 초점이 풀려 있는, 흔히 말해 탁한 눈을 하고 있었다.


"네, 네. 전 괜찮....아윽."



주시자는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윤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을 때, 그녀는 여리지만 있는 힘을 다해 다리를 잡은 사내의 어깨를 찼지만, 되려 충격은 주시자에게 전해졌고, 발목이 끊어질 듯 시큰거렸다. 주시자의 아픔 섞인 신음에 안나는 주먹질을 멈췄고, 멱살을 쥔 손 폈다. 털썩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돌바닥에 널브러졌고, 안나는 몸을 숙여 무릎까지 올라온 주시자의 검은 가죽 부츠를 벗겼다.




아무런 때도 묻어있지 않은, 발을 감싼 흰 양말을 보며 안나는 주시자들의 깨끗한 생활을 잠시 부러워했다. 이내 안나의 시선은 주시자의 부어오른 오른쪽 발목에 주목했다. 주시자가 발을 맞은 건 아니었으므로 삔 거라고 안나는 결론을 내렸다. 성욕에 미친 깡패들을 모두 때려눕혔지만, 안나는 먹을 거리를 사러 가야 했고, 주시자의 경로는 분명 안나와는 다른 곳일 게 분명했다. 안나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지금 식료품점에 가지 않으면 썩기 시작한 고기 내장 정도만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주시자를 여기에 두고가는 것 또한 마음에 걸렸다. 방금 전까지 입에 담기 힘든 상황을 목격했고, 다시 당하지 않을 보장 또한 없었다.


"많이 심한가요...?"


주시자가 우는 소리를 내며 물었다.


"삔 거 같은데, 이 상태에서 더 걸었다간 발목이 분질러질 거예요."


"어떡하죠....어떡하죠..."


안절부절 몸을 떨며 주변을 휙 휙 둘러보는 주시자를 본 안나는, 아직 몸이 많이 피곤하지 않았음을 느꼈고, 어떻게 해야할지 결론을 내리며 목검의 날을 팔꿈치로 내리쳐 두 동강을 내었다. 그것을 본 주시자는 안나의 괴력에 몸을 움찔 떨었다.


"뭐하시려는 거예요...?"


"잠깐 발목 딱 대봐요."


안나는 입고있던 조끼를 이빨로 찢어 긴 천 하나를 만들어 낸 다음, 주시자의 발목과 목검을 둘러 묶어 임시 부목을 만들었다. 부목을 완성시킨 안나는 다시 부츠를 신겼고, 주시자를 등지며 몸을 숙였다.


"업혀요."


"네?"


"아, 업히라고요. 여기 계속 앉아있다간 감기걸리고, 또 당할 거잖아요."


"어디로 갈 건데요?"


주시자가 천천히 일어나 안나의 등에 몸을 받히며 말했다. 주시자의 입장에선 이 이름모를 소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이 미친 거리에서 살아나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소녀가 언제 뒤통수를 칠 지 몰라도, 적어도 자신이 범해지기 전에 목검을 들고 뛰어와 모두를 때려눕히고, 부목까지 해준 것에 대해 확실한 선의를 느낄 수 있었다.


"저희 집...아니, 제 하숙집이요."



어느덧 안나는 주시자를 업고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주시자의 가면이 안나의 뒤통수에 닿아 두드려졌지만, 그만큼 세차게 내리는 빗방울들은 어떤 두드림인지 분간하기 힘들게 했다.




"그 전에 반찬거리 좀 사고!"



"네?"














14.


저기, 이름이 뭐예요! 전 안나라고 해요!

제 이름이요? 저... 왜 물으시는 거예요!

다 나을 때까지 저희 집에서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다리로 어딜 가겠어요?

아....안 그러셔도 되는데..

여기다 두고 갈 거예요!

.....한나, 한나 피제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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