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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2)

ㅇㅇ(222.110) 2020.06.20 16:45:29
조회 979 추천 78 댓글 15


향긋한 커피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진다. 안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곱게 간 커피가루에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붓는다.

유리잔 안에 한 방울 씩 떨어지던 커피가 금세 유리잔에 가득 담긴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아침잠이 많은 안나에게 꼭 필요한 일과였다. 일어나서 진한 커피 향과 함께 약간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안나의 주말 풍경이었다.

안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원목으로 된 식탁 의자에 앉아 유리창 너머 정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과 정원의 푸른 나무들이 오늘은 하루 종일 날이 맑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하늘은 끝없이 푸르렀고 집안에 있기엔 아쉬운 완벽한 날씨였다.


오늘 안나에게는 생각해둔 계획이 몇 가지 있었다. 짐과 옷을 간단히 챙겨서 집을 나가 다음주에 돌아오는 것이 첫번째 계획이었다.

계약서대로라면 굳이 이 집에 일주일 내내 있을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애인의 집에 가서 지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엘사에게도 더 편할 것 같았고.


두번째 계획은 혹시라도 엘사가 안나의 의견에 반대할 경우였다. 집을 나갈 수 없다면 낮에는 애인의 집에서 지내다 잘 때만 집으로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어느 쪽이라도 안나는 상관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도 비슷했으니까. 다만 엘사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었다. 

물론 계약서를 위반하는 일은 아니었으니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엘사가 이것을 받아들일지는 다른 문제였다. 

어제 결혼했는데 바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너무 염치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던 차에 막 방에서 나오는 엘사가 안나의 눈에 비쳤다.

안 그래도 빛나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더 빛나는 것 같았다. 마치 뒤에 후광이라도 미치는 것처럼 주위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예뻐도 되나?’


안나는 비현실적인 모습에 속으로 생각하며 엘사를 바라보았다.

엘사는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전형적인 미인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사업을 하기 보다는 모델을 하는 편이 엘사와 인류에게 더 이득일 것 같았다.


그저 자기를 바라보는 안나의 모습에 엘사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약간 멍하니 보기만 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이었다. 엘사는 천천히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면서 겨우 첫마디를 꺼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안나.”


“..아, 네..”


엘사의 말에 안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엘사의 아침 인사에 그런 식으로 대답하려던 것은 아니었기에 약간의 후회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엘사의 표정은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애초에 안나의 대답은 상관없었다는 듯이.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미안함에 안나는 커피를 권했으나 엘사는 고개를 저었다.


“전 나중에 마실게요.”


“그래요,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이 흘렀다.

엘사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안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약을 위반하는 건 아니니까 괜찮을거야.’


안나는 한 모금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놓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쨌든 일주일 중에 하루만 집에 있으면 되는 거니까 다른 날은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게 안나의 생각이었다.

안나는 조심스럽게 곁눈질로 엘사를 살펴봤다.

엘사는 물을 다시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곧장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 낌새가 보이자 안나는 다급히 엘사를 불러 세웠다.


“엘사!”


엘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안나를 바라보자 안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오늘부터 다른 곳에서 지내다가 다음주에 돌아오려고 해요. 일주일에 하루만 집에서..”


“안나.”


예상과는 다르게 엘사는 안나의 말을 잘랐다. 엘사는 무표정으로 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짙푸른 저 눈동자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이 안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느낌에 안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엘사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화를 내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에 손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내게 알려줄 필요 없어요. 사생활은 간섭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안나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저 말을 마지막으로 엘사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안나는 그제야 온 몸의 긴장이 풀리며 식탁 위로 엎어졌다.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아주 조금의 동요도 없는 엘사가 대단하게 느껴 지기까지 했다. 안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닫혀 있는 엘사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저 닫힌 문 너머로 엘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엘사는 계약서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것 같았다.

오히려 겁을 먹은 쪽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계약서를 내민 것은 이쪽이었으면서 엘사의 눈치를 봤다는 사실에 우스워 고개를 털며 턱을 괴었다.

애꿎은 컵만 만지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핸드폰이 깜박이며 문자가 왔다는 것을 알렸다. 안나는 곧장 핸드폰을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엘사도 허락했으니 이젠 거리낄 것이 없었다. 안나는 들뜬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향했다. 어찌 되었든 빨리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나간다는 인사는 없었다. 엘사 역시 굳이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은 사업 파트너보다 못한 사이니까. 서류상으로 부부였으나 실상은 그저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방안에서 엘사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오직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소리 없이 들어오는 바람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결혼 전, 안나가 자신을 찾아와 애인이 있으니 파혼했으면 한다는 말에 조금의 충격도 받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안나 해밀턴이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자신에게 털어놓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약점은 감추는 법이니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안나는 이제껏 엘사가 만나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오히려 엘사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물론 해밀턴이라는 집안과 사돈을 맺어 얻는 이득이 훨씬 중요하긴 했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생각을 거쳐 내린 결론은 결혼은 하되 사생활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엘사도 집안에서 시키는 결혼을 무를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제안에 누가 봐도 놀란 표정을 짓는 안나를 보니 오랜만에 흥미가 생기는 것 같았다.


평소 생각하는 게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이구나. 이것이 엘사가 안나를 보고 내린 첫번째 인상이었다.

엉뚱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는 사람. 사업가라고 하기 보다는 예술가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물론 결혼한 다음날 안나가 바로 집을 나간다는 것은 예상에 없는 행동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계약을 위반한 것도 아니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디서 지내든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주 작은 가시가 목에 걸린 듯 어딘가 불편했다. 분명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왠지 모를 쓴맛이 혀 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단순히 피곤해서 이런 걸까.


엘사는 노트북을 덮고 등을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아침에 봤던 안나의 어색한 표정이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뻔뻔하게 계약서를 요구한 것은 안나였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눈치를 보는 그 녹색 눈동자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전 생활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집에 잘 안 돌아오는 룸메이트가 생겼을 뿐.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엘사는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어차피 텅 빈 집안에서 할 것은 없었다.


어쨌든 안나는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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