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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29)

ㅇㅇ(222.110) 2020.09.07 00:14:59
조회 644 추천 48 댓글 15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 순간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누구도 먼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고 빈 자리는 침묵과 분노, 슬픔이 쌓여갔다. 

금방이라도 뜰 것 같았던 해는 보이지 않았고 밖은 여전히 어둑어둑한 새벽이었다. 

안나와 엘사는 아직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엘사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그저 전부 괜찮은 척 안나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엘사가 발버둥쳐도 이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동화도, 악몽도 아닌 그저 현실.


떨어지는 안나의 눈물을 보며 엘사의 마음도 무너진 현실이었다. 

엘사는 떨려오는 손을 감추며 천천히 안나에게 다가갔다. 안나에게 다가갈수록 온 몸의 피가 점점 식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안나에게 다가섰을 때 엘사의 얼굴에선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이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것 같았다.


“..전부 얘기해 줄게요.”


“…….”


“하나만 약속해준다면.”


“…….”


엘사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애써 괜찮은척하고 있었지만 안나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과 핏기 없는 얼굴이 괜찮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안나는 불안한 눈으로 엘사를 쫓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앞에 서 있는 엘사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현재 안나에겐 진실이 더 중요했다.


“..무슨 약속?”


“내 얘기가 끝나면 부탁 한 가지 들어준다고 약속해요. 그게 무엇이든.”


“…….”


“그거 하나만 약속해주면 전부 말해 줄게요.”


“..좋아요. 약속해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쉽게 들어주면 안 된다고 누군가 경고하는 것 같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안나는 엘사가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불안한 눈빛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안나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괜찮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안나의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엘사의 눈은 점점 어둡게 물들어갔다. 

확고한 안나의 태도에 엘사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모든 것을 얘기하고 정리해야 할 때였다.















아직 해가 온전히 뜨지 않았지만 루나드는 이미 회사에 갈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는 회장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모든 일에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비정하고 냉정했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부터 온 급한 연락이 달갑진 않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연락을 다 주시다니요, 부회장님.”


“죄송합니다, 회장님. 급히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요.”


루나드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위즐튼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꽤 다급해 보였다. 

루나드는 현관으로 나가려던 발을 돌려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밖에서는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그나르가 알아챈 것 같습니다.”


“무엇을?”


“아렌델 프로젝트에 대해서요.”


“...이상하군요, 아무 이상이 없는 프로젝트인데 뭘 알아챘다는 건지..”


“회장님, 제 말은..”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제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까?”


“...... .”


“문제 없는거지요?”


“..네, 죄송합니다. 제가 이른 시간부터 무례를 저질렀군요. 아무 문제없게 하겠습니다.”


루나드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통화를 끊었다. 어차피 해밀턴에서 잡음이 생길 것은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걸 처리하는 것은 위즐튼의 몫이고. 

앞으로 해밀턴의 수장이 되려면 그 정도는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루나드가 이 일에 투자하는 보람이 있을 테니.


루나드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즐튼에게 해밀턴의 일을 맡겼으니 자신도 블랙우드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 

아그나르가 대놓고 이 프로젝트에 대해 항의할 리는 없겠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야 했고 무엇보다 엘사의 처우를 결정해야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엉뚱한 선택을 할 경우에 대비해 다음 계획을 미리 세워야 할 것 같았다.












마치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짧다면 짧은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어느 누구도 울지 않았다. 대답 대신 침묵이, 분노 대신 슬픔이, 희망 대신 절망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안나는 엘사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저 심한 농담을 하는 거라고 믿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서야 도저히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으니까.


루나드와 위즐튼이 해밀턴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계획했다고? 

이 결혼도 그저 계획의 일부였다는 말을 내가 어떤 식으로 받아 들여야해? 지금 이 말을 믿으라고?


하지만 너무나 진지한 엘사의 표정에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엘사의 눈이 전부 진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안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머리속이 새하얘지면서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떨리는 손은 충격 때문에 떨리는 것인지, 분노로 인해 떨리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진실을 원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만큼 숨겨져 있던 사실은 잔혹했고 가슴 아팠다. 

안나는 한순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을텐데.


프로젝트, 결혼 이 모든 것이 전부 계획된 일이라는 사실은 안나의 목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안나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엘사를 바라봤다.

엘사는 무슨 생각으로 이 모든 걸 혼자 안고 가려고 했을까?

엘사는 이걸 어떻게 감당하고 있던 거야? 블랙우드라서? 아니면..

나를 좋아하는 척 해서?


“..안나.”


“…….”


엘사는 안나를 조용히 불렀다. 이미 빛이 사라진 눈동자는 갈 곳을 잃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이 이야기를 한 순간부터 엘사와 안나의 관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엘사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 목소리를 내려 애쓰고 있었다. 어차피 맞아야 하는 매라면 일찍 맞는 게 나았다.


“..약속했죠. 내 부탁 들어준다고.”


“…….”


“안나.”


내가 사랑하는 안나.

나의 둘도 없는 가족이자 내가 유일하게 돌아올 수 있는 곳.

이제 당신을 놔줘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이혼해요.”


미안해, 안나.

이게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내 마지막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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