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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팬픽] Whiskey Bonbon -11

ㅇㅇ(14.32) 2020.09.21 00:02:25
조회 422 추천 23 댓글 6
														


10화(링크)에서 이어집니당


이번 화.... 난장판...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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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저딴 인간이 다 있어! 세면대 거울 너머 케이크 범벅 얼굴을 바라보며 안나가 씩씩거렸다. ‘깜짝 푸드파이트’는 안나의 완패였다. 평소 ‘당한 만큼 되갚아 준다’가 그녀의 싸움 신조였건만,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는 어느새 몰려든 구경꾼 속에서 부모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어마마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무의식 저편에서 ‘얌전’이라는 단어가 경고등처럼 번쩍거렸고, 결국 안나는 한 주먹감 헐랭이를 눈앞에 둔 채 작전상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길에서 마주치기만 해 봐, 아주!”


조각이 아니라 한 판을 통째로 먹여줄 테니! 안나는 분노가 담긴 손길로 물을 얼굴에 찰박찰박 끼얹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름기와 씨름하고서 화장실을 나오던 찰나, 맞은 편 벽에 기대어 선 이두나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음...... 안나는 조용히 문을 걸어 잠그려 했으나 가만히 넘길 이두나가 아니었다. 이 문 열어! 안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고, 이두나가 화장실 안으로 성큼 몸을 들였다.


“보고도 못 본 척 하면 없는 일이 될 것 같니?”
“엄마, 제발 이러지 말고 말로 해요, 우리!”
“지금 그렇게 하고 있잖아.”
“그럼 지금인지 지금만인지 확실하게 해주실 수 있나요?”
“이 와중에도 잔머리 굴리는 노력이 참 가상하구나.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 없단다. 그냥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뭐, 뭔데요?”


안나는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반신반의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바로 이 순간에도 은근슬쩍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 딸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이두나가 화두를 던졌다.


“우리 딸, 혹시 ‘얌전’이 무슨 뜻인지 잊어버렸니?”


도리도리.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겠냐는 듯 안나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알고 있다는 거야?”


끄덕끄덕.


“그럼 내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겠다, 그렇지?”


끄덕끄덕끄덕.


“다행이구나, 나는 혹시나 모르고 있을까봐 걱정했단다.”


이리 와. 우리 아기. 이두나는 10년 전의 안나에게나 써먹던 상냥한 목소리를 지어내며 딸을 품에 안았다. 여기서 당장 도망가야 한다고 안나의 본능이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온몸이 엄마의 또아리 안에 감겨 있었다. 움직이지 말렴. 이두나는 한 손을 뻗어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날 물고문 하실 생각인가?! 안나는 있는 힘껏 몸부림쳤으나, 다른 쪽 팔이 놓칠세라 꽉 붙들고 있었기에 탈출은 수포로 돌아갔다. 물에 젖은 손을 딸의 턱가에 가져가며 이두나가 나긋나긋 말했다.


“아마 우리 딸이 케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모양이야, 여기저기 묻히면서까지 먹고.”
“엄마, 말로 해달라고 해서 죄송해요.”
“가만있어 봐. 아직 붙어 있잖니, 개구쟁이야. 엄마가 닦아줄게. ......자, 됐다. 나가던 길이었지? 이제 다시 가보렴.”
“저, 정말요? 이래 놓고 나중에 저한테 대형견용 하네스를 채우고서 정원 울타리에 묶어둘 거 아니죠?”
“그럼, 우리 딸은 욕구에 몸을 맡기는 짐승이 아니라 때와 장소는 분간할 수 있는 인간이니까.” 


윽, 묵직한 한 마디가 안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다, 당연하죠, 저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잖아요. 따끔거리는 양심을 부여잡고 안나가 말했다. 그럼, 내가 키웠는데 아주 잘 알지. 이두나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러니 자유와 방종을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안나는 이게 어머니가 내미는 마지막 옐로카드임을 자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화장을 고치고 다시 거실로 돌아온 안나는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트로피 딸내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오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어요. 다음에도 자주 연락드릴게요, 운전 길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손님들을 배웅했다. 작은 기념 선물(물론 초콜릿)도 잊지 않고. 술에 떡이 되고 개가 된 가족구성원을 푸짐한 욕과 함께 차로 구겨 넣는 장면은 제법 장관이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이 지옥 같은 밤도 안녕이다!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파티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이는, 비록 인정하긴 껄끄러웠지만, 공짜 칵테일이 가져다 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었다. 남아있는 손님들이 마침내 한 자리 수로 접어들자 안나의 미소는 더더욱 진심어린 빛을 발했으나, 신나서 날뛰는 사촌이 뒤에서 달려드는 순간 쩌적하고 금이 갔다. 공짜 칵테일의 나쁜 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나랑 브라이덜 샤워 해야지!”
“취했으면 너도 저 사람들 따라서 얌전히 집에 가라.”
“왜 그렇게 매정해, 정말 나한테 약혼 축하도 안 해줄 거야, 응?”
“축하, 잘 가, 안녕, 또 봐. 이보다 길게는 힘들 거 같다, 됐지?”
“되기는! 자, 이리 와. 저기가 나를 위한 쁘띠 파티장이야.”


안나는 남의 파티에 와 놓고 자기 파티를 여는 애가 대체 어디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현재 자신은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얌전을 기해야하는 신세이므로 그저 묵묵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끌려간 파티 속의 파티장은 엘사가 마련한 간이 바였다. 이런 젠장. 안나와 엘사가 동시에 읊조렸다. 잠깐, 지금 나보고 그런 거야? 본인 행동은 생각지 않고 단번에 표정을 사납게 바꾼 안나였으나, 정작 엘사가 지칭한 대상은 다른 이였다. 눈을 가늘게 뜨며 엘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 잔 주면 또 오고 또 주면 계속 오네.”
“네! 그게 바로 단골이랍니다~”
“저기요, 온 김에 이 골든 리트리버 좀 데려가 주세요.”
“제가 왜요? 둘이 알아서 잘들 놀고 있나본데 계속 그러고 있으면 되겠네.”
“아아, 안나, 그렇게까지 질투하면 사이에 낀 사람이 너무 불편하잖아! 내 생각도 좀만 해줘!”
“이게 무슨 질투라는 거야!”


갑작스런 샤우팅에 엘사는 바짝 움츠러들었으나, 오랜 친우는 이 정도는 일상이라는 듯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 그러면 우리 세 친구가 사이좋게 놀기다. 자, 바텐더 언니, 대충 이름 야한 걸로 세 잔 부탁해요.”
“함부로 친구 카테고리에 엮지 말아줄래? 다짜고짜 케이크를 남의 얼굴에 뭉개놓는 무례한 인간이랑은 특히!”


주문받은 재료를 챙겨들고 안나 근처를 스쳐지나가며 엘사가 작게 투덜거렸다.


“하, 냉수랑 가시덤불 세례랑 견주면 깜찍한 미용비결 수준인데 말이죠.”
“너나 잔뜩 하세요. 아니면 우리 이따 뒤에서 잠깐 볼까? 깜찍을 큼직으로 만들어 줄게요.”
“아쉽네요, 제 피부 타입하곤 맞지 않는 모양이라.”


엘사는 싱긋 웃으며 셰이커를 열고 칵테일을 잔에 따라 부었다.


“대충 이름 야한 칵테일 나왔습니다. 대충 드세요.”
“뭐 이런 대충 일하는 바텐더가 다 있담.”
“자, 내 브라이덜 샤워를 기념하며 대충 건배!”


그러나 라푼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잔을 들지 않았다. 이럴 수가! 라푼젤이 실망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아무도 호응 안 해주는 거야!”
“저도 하는 거였어요? 왜 세 잔인가 했네.”
“저 인간이 만든 칵테일에는 독이 들었을 거라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다 같은 셰이커에서 나온 액체랍니다. 뭐, 싫으면 마시지 말든가.”


엘사는 전혀 아쉬울 게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어차피 비용은 이미 받아둔 지 오래였기 때문에. 의기양양한 태도가 얄밉기 그지없어 안나는 불편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아르르...... 내가 광견병 백신을 맞은 지 얼마나 지났더라? 엘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찰나 라푼젤이 잔을 냅다 들이밀었다.


“그럼 우리 둘이서라도 건배하고 마셔요!”
“......죄송합니다, 제가 금주 중이어서요.”
“하하, 재밌다. 다른 바텐더 농담도 해줘요, 언니.”
“농담이 아니라 진짠데요.”
“네? 이유가 뭔데요?”


아, 또 이유 타령이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주면 안 되나? 엘사는 5대선언을 선포한 이후로 따라붙는 질문들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준비한 많은 변명거리 중 이번에도 대충 하나를 골랐다.


“임신 중이거든요.”


네?! 안나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이건 진짜 농담인데.”


창피해져서 슬그머니 다시 앉았다. 저 인간은 장난칠 게 따로 있지! 그러나 라푼젤은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긴지 박장대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참자, 멀쩡한 내가 참자. 안나는 답답한 마음에 목이 타 옆에 놓인 칵테일을 들이켰다. 아차! 뒤늦게 깨닫고 잔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안나의 초코초코 입맛에도 딱이었다. 저 인간한테 또 1점 뺏겼네. 머릿속 엘사 vs. 안나 스코어 표가 한 장 뒤집히자 안나는 바싹 약이 올랐다.


한 1년치 폭소를 풀어낸 라푼젤이 슬슬 웃음을 마무리하는 듯싶더니, 포기란 걸 모르는지 엘사를 붙잡고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진짜 이유는 뭔데요?”


엘사는 무미건조하게 다른 카드를 꺼냈다.


“개종해서요.”
“와, 무슨 종교로요?”


정말 끈질기군. 엘사는 몸을 숙여 라푼젤의 귀에 대고 초콜릿 광신도 귀에는 들어가면 안 될 신성모독을 불어넣었다. 이번에도 라푼젤은 우당탕 대폭소를 터트렸다. 보나마나 안티-초콜릿 농담이겠지. 자신의 눈치를 살살 보며 속삭이는 엘사를 보고 안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지 오래였다.


“엄청 웃기다, 하하, 알고 보니 재밌는 언니였네!”
“저게 엄청 웃긴 게 아니라 네가 엄청 취한 거라고 본다.”
“좋아해주시니 다행이에요, 그럼 이건 제가 한 잔 살 테니 제발 드세요.”


엘사는 본인도 몰랐던 본인 잔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러나 웃음의 브레이크가 영 듣지 않았던 라푼젤은 이제 외부의 개입 없인 스스로 웃음을 멈추지 못할 것 같았다. 웃음 속에 파묻힌 말을 담백하게 건져내자면 이랬다. 뭐야, 원래 공짜잖아요! 엘사가 또다시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하, 들켰네~ 그러자 라푼젤은 깔깔 웃으며 엘사의 상완을 주먹으로 퍽퍽 두들겼다. 맞다, 얘도 이 집안 사람이지. 엘사는 장단을 맞춰주는 척 하며 어깨를 슬쩍 뒤로 뺐다. 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라푼젤이 말했다.


“내가 약혼만 안했으면 대책 없이 들이대 볼 텐데.”
“그런 무서운 가정하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이미 맡아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니까......”


라푼젤은 안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얘는 진짜 집에 안 가나? 어쩌구 칵테일이 간신히 올려놓은 행복지수가 단숨에 폭락했다. 안나는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힘주어 발음했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
“우리? 우리가 누구죠?”
“그래, ‘아직은’ 그러겠지. 탐색전 단계니까.”


저 입을 그냥! 안나는 홧김을 식힐 목적으로 칵테일을 한 입에 몽땅 털어 넣었다. 바텐더에게 빈 잔을 넘기며 안나가 말했다. 한 잔, 아니 두 잔 만들어 줘요, 독한 걸로! 어... 오싹한 데자뷰가 생각나 엘사가 머뭇거리고 있자, 상대방이 이글이글한 눈으로 노려보는 탓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라푼젤에겐 묘한 눈빛이 오고가는 것으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방해꾼은 이만 가봐야겠다.”


안나는 그만 일어나려는 라푼젤의 치렁치렁한 금발을 움켜잡고 억지로 앉혔다.


“벌써 가려고? 약혼 축하해 달라며?”


자, 건배하자! 완성된 칵테일을 넘겨받으며 안나가 독배를 권했다. 오냐, 네 기억을 깡그리 날려버리지 않고선 두 발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주지!



**



엘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감당할 자신이 요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서술 시점은 안나에게로 넘어갔다. 하, 네, 뭐, 그러세요! 나는 기분이 좋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신난다! 정말 최고의 파티야! 아까 우리 엄마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게 아닐 거야! 나는 위스키를 한 모금 넘긴 후, 쿠키몬스터가 쿠키를 먹는 것처럼 초콜릿을 와구와구 입에 넣었다. 하하, 위스키랑 초콜릿은 정말 최고의 궁합이야! 그들은 이런 나를 실패한 실험체인 것 마냥 심각한 눈으로 쳐다보며 소곤소곤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건 바텐더 언니가 잘못한 거예요. 중간쯤에서 적당히 물로 바꿨어야죠!”
“물인지 술인지 입만 대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괘씸하다면서 나한테 뿌려대는데 어떡해, 그럼! 지금 제 옷 다 젖은 거 안 보여요? 아니, 쟤는 그렇다 치고 대체 당신은 왜 멀쩡한 건데?”
“제가 치유 능력이 뛰어나걸랑요. 알코올쯤이야 순식간에 간에서 순삭이죠. 와, 운율 좀 봐.”
“지금 그런 말 할 때야? 이걸, 아니 이 사람은 어쩌죠? 이대로 버려두고 저는 퇴근해도 되겠죠? 그렇다고 해줄래?”


퇴근? 퇴근이라니! 나는 아직 더 마시고 싶단 말이야! 나는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두 사람은 놀란 토끼 눈이 되어선 나를 바라봤다.


“제가 퇴근이라고 했나요? 분명 당근이라 했을 텐데.”
“맞아, 나도 그렇게 들었어.”
“하, 내가 취했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하려는 속셈인가 본데! 근데 진짜 당근이라고 했어요?”
“그래, 유기농 당근이요, 그럼 저는 당근 좀 가지러 집에 다녀올게요, 안녕.”
“안 돼, 못 가! 그게 퇴근이랑 뭐가 달라요! 당근 말고 술을 달라고!”


나는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나가려는 근무태만 바텐더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지 말고 초심으로 돌아가요, 우리, 그래, 아까 그 야한 칵테일로! 한 잔 만들어 주세요!”
“이러지 마세요, 저한테는 먹여 살려야 할 전자기기들이 있답니다. 제 아이패드가 잘 있는지 너무 보고 싶어요.”
“야한 거! 해달라고!”
“......이 인간이 미쳤나, 당장 그 입 안 다물어?”


누구 보고 미쳤대? 반항심이 깃든 내 입은 ‘야한 거!’, ‘해 줘!’라는 말을 쩌렁쩌렁 반복재생 했다. 


“못 들어주겠네, 진짜!”


엘사는 내 입을 손으로 거칠게 틀어막았다. 흥, 내가 엄마한테 이걸 한두 번 당한 줄 아나. 나는 손바닥을 낼름 핥았다. 그러자 예상대로 엘사는 기겁을 하며 손을 뗐다.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핥은 건데요.”
“누가 몰라서 물어보나, 남의 손을 함부로 왜 핥아!”
“그럼 그 쪽은 남의 입을 함부로 왜 덮었는데요!”
“이젠 내가 미쳐버리겠네.”


엘사는 두 손을 머리에 짚은 채로 끙끙 앓았다. 하하, 거 봐, 당한 만큼 되갚아 준다고 내가 그랬다!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며 내가 말했다.


“그래서 칵테일 안 줄 거예요?”
“줄 게, 준다고, 그러니까 제발 제 허리 좀 놔줘요!”


좋아, 거래 성립! 나는 콧노래를 흥흥 부르며 얌전히 칵테일을 기다렸다. 이 집안사람들이랑 또 엮이면 나는 흥청망청 완전 멍청이다. 엘사가 중얼거렸다. 자기 딴에는 안 들릴 줄 알았나본데, 그렇지만 나는 알코올로 인해 온갖 감각이 활성화된 상태였다! 나는 엘사의 조각 같은 옆모습을 쏘아보았지만 칵테일이 손에 쥐여지자마자 화는 사르르 녹았다. 신나서 홀짝이고 있자니 이 기쁨을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초콜릿과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활성화된 내 시각으로도 초콜릿은 주변에서 통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람?


“초콜릿이 다 어디 갔지?”
“어디로 가긴, 당신 뱃속으로 들어갔죠. 먹는 게 아니라 아주 잡아먹는 수준이던데.”
“거짓말, 그렇게 많았는데?”
“저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어요.”


......아하, 그럼 그렇지! 거짓말쟁이 바텐더의 자백을 바탕으로 정답으로 가는 방향이 드러났다! 나는 휘청휘청 자리에서 일어나 범인의 곁으로 갔다. 뭐, 뭐예요? 엘사는 긴장한 눈치로 한 발짝 물러났고, 나도 곧장 따라잡기 위해 발을 옮겼으나 바닥이 갑자기 울렁거리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안 돼, 내 사랑스런 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아픔은 찾아오지 않았다. 마침 잘 됐다, 어지러움이 가실 때까지 이대로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혹시 이대로 잠들 건 아니죠? 머리 위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내가 엘사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바닥에 넘어지기 전 재빨리 잡아준 모양이었다. 왜 하필 이 인간한테! 눈이 번쩍 뜨여 몸을 밀어내려한 순간, 이번에는 활성화된 후각이 내게 신호를 보냈다. ‘근방에 초콜릿이 있습니다. 주위를 잘 확인해 주세요.’ 정말! 초콜릿 향기잖아! 그새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잊고 나는 킁킁거리는 데 집중했다. 


“이건 또 무슨 대답이지, 코 안 치워요?”
“분명 초콜릿이 여기 어딘가 있는데......”


내가 수상하다는 듯이 위를 올려다보자, 엘사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확신을 얻은 나는 엘사의 옷자락을 움켜쥐고선 더욱 적극적으로 수색에 나섰다. 부탁이니까 내 유니폼을 노즈워크 담요처럼 다루지 말아주세요! 애원조는 무시하고 나는 엘사의 조끼 위를 코로 종횡무진 누비다, 마침내 가장 향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가슴주머니 속으로 코를 돌진시켰다.


하, 역시! 숨겨두고 있을 줄 알았어! 나는 가련하게 떨고 있는 초콜릿을 냅킨 째로 이에 물었지만, 초콜릿 납치범이 몸을 계속 이리저리 비트는 통에 이내 놓치고 말았다.


“가만 있어요, 쫌!”
“어떤 미친 여자가 가슴에 코를 부벼대는 것도 모자라 이까지 세우는데 잘도 가만히 있겠다!”
“저기, 여러분, 친교를 쌓는 와중에 죄송한데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될 존재같이 느껴져서 이만 부모님을 모시고 집에 가려고 해요. 바텐더 언니, 안나를 잘 부탁해요! 그럼 안녕!” 
“여기다 대고 안녕은 무슨 안녕, 어디 가, 야, 노랑머리! 이......! (이하 욕설 표현)”


엘사가 라푼젤에 온통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나는 무사히 초콜릿 일병을 구출해냈다. 그러자 아연실색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얼굴이란! 정말이지 이 순간만큼은 이 인간 표정보다 더 훌륭한 안줏감은 없을 터였다. 아, 물론 초콜릿은 제외하고. 입 속에서 오물오물 초콜릿을 녹이며 내가 물었다.


“초콜릿 더 없나요?”
“없! 어!”
“하, 어쩔 수 없네요. 내 방에서 비상용 초콜릿을 가져오는 수밖에.”
“뭐? 그럼 처음부터 그걸 먹으면 됐잖아!”
“비상용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모르겠다, 그래요, 모르겠으니 저는 이만 퇴근하렵니다. ......여보세요? 네, 택시를 부르려고 하는데요, 위치는 어디냐면.......”


다음 순간 나는 스스로도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했다. 한창 통화중인 엘사의 핸드폰을 뺏은 것도 모자라, 아예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엘사에게 나 역시도 방금 전의 충동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냅다 도망가는 길을 택했다. 도중에 몇 번 바닥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천장이 땅으로 꺼지는 경험을 했으나, 다행히도 이 집의 구조가 술래에겐 익숙하지 않았던 덕에 나는 잡히지 않고 내 방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또 내가 이겼지롱, 안심(?)하고 방문을 닫으려던 순간 문틈으로 엘사의 발이 훅 끼어들어왔다. 악! 내가 깜짝 놀라 문고리를 놓자 무시무시한 얼굴로 엘사가 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소용이 있을 진 모르겠지만) 내가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근 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당신 이상한 사람인 거 원래 알고 있었고, 또 지금은 취해서 더더욱 정신이 오락가락하겠죠. 왜 그랬는지 묻지 않을 테니까 빨리 돌려주세요. 저 정말 침대와 이불 사이에 있고 싶어요.”
“소, 손님방에서는 어때요?”
“내 집에서!”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 라는 강렬한 눈빛을 보내며 엘사가 팔을 뻗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피했고, 그러자 말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엘사가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내 방 상태는 몸싸움을 벌이기엔 다소... 산만한 환경이었던지라 어쩔 수 없이 나는 침대 위로 몸을 피신했다. 엘사는 침대와 핸드폰을 번갈아보며 망설이는 듯싶더니, 금방 고민을 접고 내 침대로 뛰어 들어왔다. 악! 나의 싸구려 매트리스가 요동치는 데다 원래 있던 술기운이 겹쳐 나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핸드폰을 든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내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허락 없이 남의 침대에 올라오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너는 뭐 허락을 맡고서 내 핸드폰을 가져갔나 보네요? 저도 좋아서 올라온 거 아니니까 볼 일 마치면 알아서 잘 내려갈 거예요, 빨리 그거나 돌려 줘!”


잇, 야잇, 이리 안 내놔? 엘사가 이리저리 팔을 휘둘렀으나 나는 온 힘을 다해 굴러다니며 핸드폰을 사수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내 등에서 투둑하고 튿어지는 느낌이 또다시 찾아왔다. 지퍼도 없이 혼자서 열심히 제 할 일을 하던 후크마저도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며 파업을 선언한 모양이었다. 안 돼! 드레스가 벗겨지지 않게 손으로 추스르던 틈을 노려 엘사가 내 위로 올라탔다. 체스로 치면 체크였다. 으으... 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드레스를 잡고 있던 팔을 뻗어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엘사는 코웃음을 치며 내 손목을 붙잡은 채 그대로 침대에 내리 고정했다. 이젠 완전히 체크메이트였다.


이대로 뺏기는 건가? 엘사는 바로 택시를 부르겠지? 그렇게 떠나가면 우린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일이 없을 테고, 그러면 좀 아쉬울....... 내 의식의 흐름이 감정의 영역에 도달하기 직전, 나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술기운이 부풀려 놓은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특히 저 인간이랑 관련한 부분에서는!


다시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한 나는 엘사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저거 봐, 나한테는 관심도 없고 핸드폰에만 정신이 팔려선...... 이대로 뺏기면 안 되겠다는 다짐은 더더욱 굳어졌다. 그럼 차라리 숨겨볼까? 그러나 바로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주머니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니. 이대로 포기하려던 찰나, 기억의 저편에서 ‘손을 쓸 수 없을 때, 물건을 보관하는 다른 방법’이 떠올랐다. 아하! 나는 ‘내가 또 이겼네’ 라는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내 가슴과 드레스 사이에 살포시 끼워 넣었다.


그러나 곧 좋은 방법이 아니란 생각이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어차피 저 인간은 이미 나랑 볼 장까지 다 본 데다 이젠 관심도 없으니 분명 거리낌 없이 집어갈 게 뻔했다. 아, 술이란 게 그렇다니까, 판단력을 흐려놓기나 하고!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예를 들면 창문 밖으로 집어 던진다든가! 왜 그렇게 안 했지? 아냐, 그랬으면 진짜 화냈을 거야. 화내는 건 싫은데......


우울한 기분에 눈을 내리깔자, 아직도 내 가슴에 얹혀있는 핸드폰이 보였다. 안 가져가고 뭐 하는 거지? 나는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고, 그곳엔 복잡한 표정으로 허공에 연신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는 엘사가 있었다.


“뭐야, 손에 쥐났어요? 그럼 입으로 가져가든가.”
“뭐?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 애초에 왜 이런...... (엘사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장난을 하는 거예요?”
“그러게요, 안 그래도 수를 잘못 뒀다고 후회하고 있었어요. 어차피 그 쪽은 이미 탐방한 영역이니 점잖은 척 그만 하고 빨리 가져가서 날 비웃기나 하세요.”
“아직도 그 소리예요? 나는 당신이랑 한 적이 없다니까!”
“아, 진짜, 이제 우리 둘만 있으니까 시치미 뗄 필요 없잖아요!”


결국 서러움이 폭발한 내가 울먹이며 외쳤다. 술은 단지 감각뿐만이 아니라 감정 역시 활성화시킨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이 인간 앞에서 다시 눈물을 보일 리가 없으니. 그래, 눈물이라는 단어가 내가 처음으로 엘사를 만난 그날의 기억을 다시 생생하게 불러오기 시작했다. 내 입은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꼴사나운 잡음과 함께.


“그래요, 그날도 이렇게 개떡같이 취해서, (흑흑), 내 새끼를 품에 안고 발 닿는 데로 거리를 쏘다니고 있자니, (엉엉). 기분만 더 나빠지길래 술이나 더 마실 겸 아무 술집이나 들어갔는데, 거, 거기서 만난 바텐더가 친절한데다가 예쁘기까지 해서, (흐어엉), 나, 나는 바보처럼 그 사람을 믿어버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내 초... 콜......”


릿을 맡겼죠..... 미처 끝맺지 못한 문장이 떠오름과 동시에 내 머리 위에 번개가 내리쳤다. 곧이어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이 찾아와 지금까지의 상황과, 이 인간이 왜 나를 만날 때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미친 사람처럼 바라보는지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눈 깜짝할 사이 이해할 수 있었다! 충격적인 진실에 내가 울음도 멈추고 그대로 굳어져있자 전혀 다른 걱정을 했는지 엘사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일어나요, 누워서 토하다가 질식하기 싫으면.”
“그런 거 아니거든요! 딸꾹, 나 완전 멀쩡한데! 아, 방금은, 딸꾹, 놀라서 나온 거예요!”


하지만 나조차도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고, 엘사는 내 몸 위에서 내려와 또다시 ‘그걸 보는 눈’으로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똑바로 설 수 있겠어요? 엘사가 물었다. 당연하죠! 내가 증명하려는 듯 당당히 허리를 세우자, 느슨해진 드레스 앞섶이 아래로 흘러내린 탓에 망할 놈의 핸드폰이 다리 사이로 떨어졌다. 이보다 더 쪽팔릴 수가 있을까? 나는 재빨리 옷을 끌어올렸지만 아무래도 조금 늦은 모양이었다. 흠흠, 조금 붉어진 얼굴로 엘사가 입을 열었다.


“어, 제가...... 저걸 주워가도 되나요?”
“......그러세요.”
“제가 줍는 순간을 노려서 제 손을 발로 뭉개거나 그러지 않을 거죠?”
“이제 그런 거 안 한다고요!”


이제...? 엘사의 머리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 엘사가 입을 떼기 전, 나는 얼른 핸드폰을 주워 건넸다.


“자요, 이번에는 진짜 통화 방해 안할 테니 걱정 마세요.”
“어, 속은 이제 괜찮아요? 화장실까지 부축해줄까요?”
“괜찮다니까!”


나한테서 그만 신경 끄고 그냥 당신 스윗홈에나 가라고! 나는 억지로 엘사를 복도로 떠밀곤  눈앞에서 문을 꽝 닫았다. 그러고선 바로 후회했다. 나는 왜 화를 내고 있지?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근시일 내가 부린 추태들(특히 오늘)이 떠오르자 몸에서 열이 솟았다. 나는 어깨에 걸친 숄을 풀러 아무렇게나 던졌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와아앙’ 소리 질렀다.


창피해 죽겠어! 어떻게 그걸 착각할 수 있지? 말이 되나? 무슨 소설도 아니고! 나는 감정을 이렇게나마 발산하기 위해 팔다리를 침대 위에서 동동동 굴렀다. 그야말로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활활 타는 기분이었다. 그래, 내 속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무심코 코를 킁킁거렸고, 그놈의 활성화된 후각이 이게 실제 상황임을 다시 깨우쳐주었다. 잠깐, 뭐라고? 나는 눈물콧물화장투성이 베게에서 얼굴을 떼고 주위를 살폈다.


아악! 나는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치만! 엄마의 숄이! 하필이면! 내가 켜둔 향초에 떨어져! 활활(※과장된 표현입니다) 타오르고 있는걸! 내가 패닉 상태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 내 비명을 들었는지 누군가가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엘사였다. 먼 훗날 그녀가 묘사하기를, 수없이 많은 화분들 사이에서 옷을 입은 건지 만 건지 모르겠는 여자가 얼룩덜룩 번진 화장으로 불 주위를 총총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수상한 종교현장을 방불케 했단다. ......듣는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지만 반박할 순 없었다. 결국 그 상황에서 날 구한 건 엘사였으니.


다행히 엄마의 고급 숄은 순도 높은 캐시미어였기에, 불이 번지는 속도는 그리 빠르진 않았다. 경황이 없던 날 대신하여 엘사가 손으로 몇 번 내리치자 불은 금방 꺼졌다. 정신을 차린 내가 고맙다는 말을 1초에 세 번씩 하려던 순간 엘사의 찡그린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다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엘사의 손을 쥐고 상태를 살폈다. 엘사의 중지와 약지에 작은 물집이 잡히고 있었다.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화상 입었잖아요!”
“저도 보면 알아요.”


말을 그렇게밖에 못하나? 순간 울컥했지만, 이 모든 사태는 내가 자초한 일임을 되새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는 책상으로 걸어가 먼지 쌓인 구급상자를 열었다. 기한이 남은 화상 연고, 멸균 면봉, 밴드, 그리고 물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 이것도. 필요한 도구들을 추려서 나는 다시 돌아왔다. 엘사는 ‘내 손에 과산화수소수나 70% 에탄올을 콸콸 들이부으면 어떡하나’하는 표정으로 나를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 이게 다 내 자업자득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앉았다.


“여기로 오세요. 응급처치해 줄 테니까.”
“.......”
“저도 불 쓰는 사람이라 화상치료는 자주 해봤단 말이에요.”
“.......”
“초기에 방치하면 흉터로 남을 수도 있어요.”


결국 엘사는 내 옆에 얌전히 앉아 손을 내밀었다. 나는 상처부위에 연고를 짜서 고루 퍼뜨리고 그 위에 화상 전용밴드를 감았다. 그리고 위에 라텍스를 씌우려는데 엘사가 꽥 소리를 질렀다.


“무슨 장난이에요, 또!”
“깜짝이야, 뭐가 장난인데요? 이것만 하면 되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아니, 이걸, 이게 뭔데, 뭔 줄 알고 남의 손에 씌워요! 넣지 마, 넣지 말라니까!”

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뭐냐니, 당연히 라텍스 골무지! 


※ 사진 참조 (구글에서 핑거코트를 검색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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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질색팔색 난리람? 가만 좀 있어요, 물집 터지면 더 골치 아프니까.”
“내가? 내가 이상한 건가? 아아, 차라리 내가 할게, 손 좀 놔주세요!”
“거의 다 했대도! 나를 좀 믿어 봐요!”
“믿는 건 둘째 치고 기분이 좀 그래서 그냥 제가 한다니까요!”
“그런 기분은 무슨 기분이야, 아, 또 힘쓴다, 또! 다친 사람이 왜 이렇게 날뛰어요!”


내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하나, 엘사는 내가 말로만 해서는 좀처럼 통하지 않는 인간임을 이미 학습했기에 또다시 무력수단을 동원했으며, 둘, 그때 나는 라텍스 골무가 순전히 ‘표기사항 용도’로만 사용하는 줄 알았으며, 셋, 나는 엘사의 손가락에 콘... 아니 라텍스 골무를 씌우느라 양손을 써야 했기에 흘러내린 드레스를 추스를 수 없었고, 넷, 엘사가 급하게 들어온 탓에 내 방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다섯, 우리는 몸싸움에 정신이 팔려 바깥 상황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안나, 무슨 일 있는......”


그러니까, 좀 전의 비명을 듣고 부모님이 내 방으로 올라왔을 때, 드레스를 반쯤 벗어던진 나랑 수상한 걸 손에 걸친 엘사가 내 침대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엎치락뒤치락하던 광경을 목격하는 건 다 이런 이유가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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