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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여름눈송이 20부

ASIS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9.26 2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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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20부] 



부부가 노신사와 면담을 하는 짧은 동안, 안나는 뒤에서 허리를 붙잡힌 채 엘사의 품에 갇혀 있었다. 평소의 가볍게 장난치는 분위기와 다른, 너무나도 절실한 포옹에 안나는 함부로 몸을 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뺐을 때 엘사의 반응이 두려운 것도 있었지만 푹신하게 안긴 채 편히 있고 싶다는 심리도 그녀의 우유부단함에 큰 기여를 했다.



어깨에 턱을 얹고 부벼오는 금발 소녀에 간지럽다는듯 웃고는 안나는 안긴 채 옆으로 몸을 뉘어 얼굴이 마주하게끔 몸을 반대로 돌렸다.



몸을 뒤집을 때 잠시 느슨해진 결박은 안나가 자리를 잡자마자 다시 강도를 더해왔다. 살아있는 쿠션에 둘러쌓인 안락함에 안나는 스멀스멀 몰려오는 졸음을 내쫓으며 힘겹게 엘사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 눈송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응석을 부릴까...”



변함없이 심각한 금발 소녀의 표정에 안나는 피식 웃고는 엘사의 턱 아래로 고개를 묻었다.



“이렇게 꽉 잡는 거 보면 멀쩡한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한 거라도 본 거야?”



목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입김에 엘사는 앓는 듯이 몸을 떨었다. 간지럽혀지기 딱 좋은 자세라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나와는 떨어지기 싫었다.



“아... 전에도 말했지만, 네 몸 진짜 푹신해서 기분 좋아. 그거 알지?”



옅게 웃는 미소를 느끼고 금발 소녀도 덩달아 웃었다. 자신 품에 안긴 천사가 행복하다면 자신은 베개든 쿠션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똑똑, 하는 소리에 안나는 퍼뜩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엘사가 파리지옥마냥 자신을 양팔로 감싸 품 안에 가두자 안나는 당혹스러우면서도 가슴을 간질이는 설렘에 결국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문을 열고 휴게실에 있던 세 사람이 들어오자 안나는 부끄러움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 안 좋은 타이밍에 들어왔나?”



농담조로 건넨 의사의 말에 안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헬란드 부부 역시 엘사의, 아이스크림 통을 지키려는 꼬마가 짓는 뚱한 표정에 잠시 넋이 나갔는지 허, 하고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니에요. 이건... 엘사 좀 놔줘.”



얼굴이 발개진 채 품에서 벗어나려는 안나를 엘사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렇게 힘이 강했는지 안나는 거듭 놀라며 어떻게든 어색한 이 상황을 벗어나려 했지만, 금발 소녀가 제 목덜미에 턱을 묻고 강하게 고개를 가로젓자 비로소 저항을 멈췄다. 



아, 이젠 모르겠다. 그나마 자신이 알거나,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 앞이라는 사실이 안나의 수치심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내내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던 라피키는 눈앞의 치정극에 터지려는 웃음을 힘겹게 참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보아하니 팔팔해서 별 문제 없는 것 같다만... 엘사, 일단은 혹시 모르니 하루 정도는 더 병원에 있는 걸 권하마. 그리고... 안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잠시 좀 빌려가도 괜찮겠니?”



일이 끝나면 바로 돌려보내마. 라피키의 말에 엘사는 안나를 묶은 팔을 조금은 느슨히 했다. 적어도 이 의사는 안나가 자신만의 것이며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짧게 고민하던 그녀는 이윽고 팔의 결박을 완전히 풀고 안나를 품에서 방면시켰다.



“엘사 너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는 거 알아?”



안나가 재빨리 품에서 벗어나 부끄러운 듯이 불평하자 엘사는 정신을 차린 이래 처음으로, 활짝 미소를 지었다.





*****





“앉으렴.”



라피키의 진료실은 진료실이라기보다 원룸에 가까웠다. 전자레인지에 세탁기, 따로 달려있는 화장실에 침대까지 안나는 넘치는 생활감에 연신 주변을 살폈다. 책장에 빼곡히 들어찬 의학 서적과 벽에 매달린 가운만이 자신이 있는 곳이 진료실이라고 상기시켜 주었다.



벽의 시계가 10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을 가리키자 안나는 삼촌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늦어도 9시까진 돌아오겠다고 했건만 본의 아니게 또 약속을 어긴 셈이 되어버렸다. 이래서야 내일 엘사와 휴대폰을 같이 사러 갈 계획도 취소시켜야 할 판이었다.



늦는다고 연락할 휴대폰이 고장난 것을 유감스러워하며 안나가 새 휴대폰을 단념할 무렵, 라피키가 안나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건넸다.



“헬란드 공께 들었다. 휴대폰이 고장났다지? 가족 번호를 좀 찍어다오. 내가 연락해서 좀 늦는다고 말해 두마.”



흡사 구세주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안나는 휴대폰을 받았다. 삼촌의 휴대폰 번호를 하나씩 꾹꾹 입력하자 팟 하고 뜨는 연락처의 메모에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론다이트 크리스티앙 - 한스 크리스티앙의 보호자’



어...?



라피키는 번호를 누르다 말고 뚫어져라 화면을 응시하는 안나를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떨리는 손으로 돌려받은 화면에 아론의 이름이 뜨자 라피키는 설마하는 생각에 눈을 부릅떴다.



설마... 한스의 동생... 아니 설마 그런 우연이.


일단은... 일단은 전화가 먼저다.



시선을 안나에게 고정한 채 라피키는 전화를 걸었다. 안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창백해진 낯빛으로 연신 손톱을 뜯었다. 빨리 전화를 마쳐야 겠다는 생각에 라피키는 어서 착신음이 끊기길 기다렸다. 



“라피키 박사, 무슨 볼일이지? 이런 시각에 전화를 하다니 기본적인 예의가 없군.”



짧은 안도감도 잠시, 짐짓 솟는 이마의 힘줄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라피키는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이것 참 미안하군요. 다름이 아니라, 안나의 귀가가 좀 늦어질 거 같아서 귀띔을 드리려 했소만.”



급히 의자를 끌며 일어나는 소리에 라피키는 안나에게서 몸을 돌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이 왜? 안나는 어디있지?”



사납게 따져묻는 목소리에 라피키는 높아지려는 언성을 의식적으로 낮췄다.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게 도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진지하게 따져묻고 싶은 마음을 그는 힘겹게 내리눌렀다.



“내가 엘사의 주치의인데, 그녀에 관해서 안나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오. 충분한 대답이 됐소?”



듣자하니 헬란드 부부는 사전에 아론에게, 엘사가 안나의 도움을 받는 것에 동의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아론이 보는 앞에서 엘사가 쓰러졌고 그런 그녀를 안나가 따라갔으니, 이쯤이면 아론도 상황을 이해했을 터였다.



“왜 당신이 전화하지? 안나는 어디가고.”



가시가 돋은 아론의 반응에 라피키는 비웃듯이 조소를 흘렸다.



“안나의 휴대폰이 고장났다고 하던데, 몰랐나 보군. 정 원한다면, 안나와 통화라도 하게 해주면 되나?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데 말이지.”



라피키는 썩어들어가는 아론의 표정을 상상하고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환자와 그 보호자가 세트로 이렇게 무례할 수 있는지는 둘째로 치고, 유명한 변호사를 언변으로 누르는 것에 그는 남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아니, 필요없소. 이만 끊지.”



단단히 빈정이 상한 것이 목소리로 나오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론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늙은 의사는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시선을 작은 소녀에게 향했다. 엘사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이 소녀와는 한스의 문제와 더불어 여러모로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다.



“삼촌과는 연락했으니 걱정은 덜어도 되겠구나. 일단은... 늦은 시간에 이렇게 만나줘서 고맙다. 전부터 엘사에 관해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거든. 다만...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어쩌겠느냐? 원한다면 나중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해도 상관 없다.”



“아니에요. 지금... 지금 이야기하고 싶어요. 지금 꼭 당신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요.”



역시나. 라피키는 절실하게 물어오는 소녀를 앞에 두고 짧게 혀를 찼다. 안나가 뭘 걱정하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말해보렴.”


“선생님은... 한스의 주치의이기도 한 건가요?”





******





“맞다. 한스의 치료 담당이기도 하지. 공교롭게도 한스와 엘사 두 명을 같이 맡게 되었구나.”



낯빛이 파리해진 안나에 맞춰 그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는 전화하기 전부터 안나의 불안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전화를 마친 지금 이미 그녀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래... 지금 엘사와 한스는 똑같이 이 병원에 있다. 이 넓은 병원에서 둘이 만날 가능성이야 희박하다만... 이건 섣불리 넘겨 짚을 문제가 아니구나.”



“당장 엘사를 내보내야 해요! 오빠가... 오빠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구요.”



격한 반응을 보이는 소녀에게 라피키는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입 안의 씁쓸함을 혀로 밀어 없앴다. 누이에게마저 이런 취급이라니... 그 소년도 참 팔자 한번 사납군.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렴. 한스는 지금 병동에 격리되어 있어. 문이야 열려있다만, 간호사들이 24시간 교대하면서 감시하고 있고 절대로 허락 없이는 그 층을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한스는 엘사가 이 병원에 와 있는 줄도 모르지. ...하지만, 네 불안은 이해한다. 지극히 합당한 걱정이지. 엘사가 오래 머문다면 동선이 겹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걸 감수할 만큼 나는 안일하지 않아. 한스를 내보낼 수 없는 이상, 엘사는 아무리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집으로 돌려보낼 거다. 상태도 솔직히 말해서 별 문제 없어 보이고 말이지. 헬란드 부부에게는 내가 따로 이야기하마. 그들이라면 아마 당장에라도 엘사를 데리고 돌아갈 것 같다만... 일단 그건 잠시 뒤로 미루자꾸나.”



라피키는 창문 아래 선반의 커피 포트를 가져와 종이컵을 두 개 꺼냈다.



“코코아 좋아하니? 좀 달긴 하다만 기운 없을 때는 이만한 게 또 없지.”



안나는 컵을 건네는 의사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며 따뜻한 코코아를 받았다. 자신의 불안을 이해하고, 음료 취향까지 비슷한 이 할아버지와는 왠지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엘사를 맡고 있는 의사라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깊은 흥미를 가지게 했다. 어쩌면 엘사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조언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 그러면... 뭣부터 물어봐야 할까...”



머리에 떠오르는 첫 번째 질문에 라피키는 진중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엘사랑 언제부터 사귀었니?”





*****




안나는 머리 끝까지 열기가 확 오르는 걸 느끼고 티셔츠 옷자락을 잡았다. 좀 창피한 질문이라며 뒤에 덧붙이는 노신사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아.. 안 사귀어요.”


“...안 사귀어?”



이번에는 라피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럼 아까 백허그는 뭐였니? 턱밑까지 차오르는 질문을 가까스로 갈무리하고 노신사는 흰 수염을 매만졌다. 놀람을 감추려할 때 으레 튀어나오는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이것 참, 미안하구나. 그럼... 질문을 바꾸마. 너희 둘은 무슨 관계니?”



“저희는... 그게...”



썸타는 관계? 아니아니 그것도 좀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하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소녀를 보며 라피키는 남몰래 웃음을 지었다. 머리색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발개진 얼굴에 대답을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엘사 쪽이야 뭐 더 볼 것도 없었고.



“이거, 질문을 한 내가 다 쑥스럽구나.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한 내 무례함을 용서하거라. 너와 엘사가 무슨 관계인지 알 필요가 있었거든.”



안나는 옷자락을 그러쥐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톤의 말마따나 자신은 거의 유일하게 엘사와 교감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엘사의 의사라면 무릇 자신이 어떻게 엘사와 소통하는지 궁금해할 법도 했다.



“엘사는... 꽤 치료가 더딘 환자야. 최근 몇 개월간, 정말 놀라울 정도로 나아지긴 했다만 아직도 갈 길이 멀지. 여전히 말을 못 하니 말이다.”



안나는 입에 코코아를 가져다 댄 채 귀를 기울였다. 점차 무거워지는 대화의 주제에 발개진 얼굴은 본래의 색을 빠르게 되찾아갔다.



“너도 알고는 있겠다만, 엘사는 유일하게 너에게만 반응을 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려 해. 헬란드 부부나 나나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들도 있지만 너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 오늘 물어보고 싶은 건 첫째로, 어떻게 엘사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둘째로, 엘사가 치료에 응하게끔 설득해줄 수 있는지. 이 두 가지다.”



하나씩 손가락을 꼽아가며 라피키는 설명을 마쳤다. 이 소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여하에 따라, 자신이 엘사를 도울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되게 된다.



“어... 엘사는요... 그러니까...”



안나는 일렁이는 코코아에 문득 엘사와 나눠먹은 초콜릿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은 엘사가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자매끼리 그러하듯 그녀에겐 엘사의 생각이 투명하게 비쳐 보였고, 한번도 그에 대해 이렇다할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왜 나한테만 엘사가 경계를 풀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네... 그리고 엘사가 뭘 하든 그냥 처음부터 속이 훤히 보였는걸... 나 은근 대단한 건가?



새삼 발견한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도 놀랐는지 소녀는 신기하다는듯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부터 납득할 만한 답변을 기대하지 않았던 노신사는 예상했던 반응에 살짝 주눅이 들었다. 독심술사라고 말해주길 내심 바랬건만 역시 그건 기대가 지나친 듯했다.



역시... 엘사 쪽에서 이 아이를 아주 깊게 신뢰하는 게 틀림없는 듯하군. 안나가 동년배에 비해 관찰력이 좋다 한들 그것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리가 없다. 언어와 문자의 부재를 초월할 정도로 엘사 쪽에서 적극적으로 의사 표시를 했기에 둘 사이의 교류가 가능했을 터였다. 거기까지 안 이상, 라피키는 예상했던 하나의 커다란 질문에 도달했다.



이 소녀가 대체 엘사에게 무슨 사람이기에.



라피키는 이에 대한 답변이 모든 것을 해결할 만큼 중요한 열쇠라고 직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눈앞의 소녀일 뿐이라 생각하며 라피키는 다음 질문으로 화두를 돌렸다.



“환자들 중에는 오직 특정 몇몇에게만 제한적으로 마음을 여는 부류가 있어. 엘사와 너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듯 하구나. 그러니, 네가 알아들을 만큼 적극적으로 의사표시를 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지.”



물론, 말이나 문자 없이 이야기하는 네 능력도 참 대단하긴 하긴 말이다. 마지막 말에 안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엘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자신은 유독 칭찬받는 것이 잦았다.



“음... 이게 오늘 밤에 있어선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 같다만... 뭐 이건 질문보다는 부탁에 가깝구나. 엘사가 치료에 응하게끔 설득해줄 수 있는지 말이다.”



“저... 처음부터 잘 이해가 안 됐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엘사가 치료를 안 받으려 하나요?”



소녀의 질문에 라피키는 자신이 너무 서둘렀음을 깨달았다. 기본적인 설명조차 없이 대뜸 말을 꺼내봤자 16살 소녀가 알아들을 턱이 없다. 자신의 조바심을 자책하며 라피키는 하나씩 설명을 풀었다.



“여기서부터는 환자 개인 정보라 원래는 발설이 금지되어 있지만, 내 재량으로 그냥 이야기하마.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네가 엘사를 치료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사람이라 판단해서 이렇게 말해주는 거란다. 내 말 이해하니?”



안나가 자신의 당부를 이해한듯 고개를 끄덕이자 라피키는 간단한 것부터 하나씩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엘사는, 그러니까, 너 이외에는 다른 사람을 인식하려 들지 않아. 그건 알고 있지?”



“네. 그렇죠.”



“그런데, 그건 의사들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지금껏 엘사는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질 못했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껏 누구도 왜 엘사가 말을 하지 못하는 건지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진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문진이 안 되니까.”



“문진이요?”



“어디가 아프고 언제부터 그랬고, 그런 일련의 질문을 하는 과정을 말하는 거란다. 병력 청취라고도 하지.”



소녀의 알아들었단 반응을 확인한 라피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말은 고사하고, 글자로도 의사소통을 못 하니까 뭐가 문제인지 기본적으로 진단이 안 돼. 검사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만 엘사는 유감스럽게도, 단순히 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두려워하는 부류지. 따라서, 강제로 검사를 시행할 수조차 없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아이에게 뭘 어떻게 하겠니.”



안나의 눈이 짐짓 심각한 기색을 띠자 라피키는 빠른 이해에 내심 감사해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일단은 검사에 협조하게 만들기 위해 그간의 진료는 엘사의 대인기피증을 완화시키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그래야 검사든 뭐든 진료가 가능할 테니까. 결과야 뭐... 딱 까놓고 말해서 진전이 없었어. 너와 만나기 전까진 말이지.”



“지난 10년간은 엘사를 담당하는 사람만 바뀐 채 계속 이런 치료만 무의미하게 반복되어 왔다. 헬란드 부부가 희망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지.”



안나는 경악으로 얼굴이 굳은 채 생각에 잠겼다. 전문가에게서 직접 들으니 엘사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이 피부로 와닿았다. 안톤과 카트린이 느꼈던 절망감이 어떠했을지 자신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막연하게 어떻게든 될 거라며 안이하게 놀기만 했던 자신의 모습에 안나는 엘사를 돕겠다는 자신의 의지가 애초에 정말 있기나 했던 것인지 스스로에 대한 불신마저 들었다.



“네 역할은, 쉽게 말해서 엘사가 의사가 묻는 질문에 대답하고 검사에 응할 수 있을 정도로 엘사의 두려움을 극복시켜 주는 거야.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좀 서둘러줬으면 하구나. 듣자하니 전에도 엘사가 기절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만약 기질적인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최대한 빨리 손을 써야 하니까. 가능성이야 낮다만 함부로 넘겨 짚을 문제는 아니니 말이다.”



연이은 설명에 점차 안나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노신사는 기나긴 설명을 마쳤다. 소녀의 표정에 서린 낙담을 보며 라피키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16살 소녀가 감당하기엔 무거운 짐이었지만 어쩌랴. 그녀 이외에는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그녀 스스로가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종이컵에 남은 코코아를 마저 입에 털어넣고 라피키는 근심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사로서의 의무를 떠넘겼다는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이 노인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안나의 눈동자에 새로운 결의가 영글어 굳은 심지로 뿌리내리는 것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노신사는 소녀를 인도해 진료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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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593 설갤만큼 엘산나에 진심인 커뮤가 있냐 [1] ㅇㅇ(223.38) 05.30 40 0
1123592 모든 삶이 엘산나야 ㅇㅇ(223.38) 05.30 30 0
1123591 우중충한 날엔 빠와가 있는 노래를 들어야 해 [3]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30 42 0
1123590 설갤 덕분에 글도 써보고 [1] ㅇㅇ(223.38) 05.30 32 0
1123589 크으 이틀만 견뎌 ㅇㅇ(223.38) 05.30 20 0
1123588 그래서 대체 왜 목요일에는 다들 없는거임??? [2] ㅇㅇ(112.157) 05.30 39 0
1123587 핵정전의 목요일 ㅇㅇ(112.157) 05.30 20 0
1123586 설하 [1] ㅇㅇ(106.101) 05.30 21 0
1123585 소설이란걸 써본게 설갤이 처음인디 [3] 설갤러(221.145) 05.30 51 0
1123584 크윽 늦었다 [1] ㅇㅇ(223.38) 05.30 25 0
1123583 첫글접수 ㅇㅇ(110.47) 05.30 20 0
1123582 고요한밤 설갤러(118.43) 05.29 20 0
1123581 막글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9 20 0
1123580 코피 철철철 ㅇㅇ(110.47) 05.29 22 0
1123579 저 밑에 새의상 [1] ㅇㅇ(223.38) 05.29 35 0
1123578 후 빡센 오늘이었따 [1] ㅇㅇ(223.38) 05.29 28 0
1123577 엘사가 사라지는 꿈꾸는 안나 [2] ㅇㅇ(223.38) 05.29 46 0
1123576 설하 [1] ㅇㅇ(115.138) 05.29 1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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