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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팬픽] Whiskey Bonbon -15

ㅇㅇ(14.32) 2020.10.18 19:55:06
조회 351 추천 21 댓글 5


14화(링크)에서 이어집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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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면 안 돼.”


자고로 쉬는 날엔 집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친구가 영업 시작 전부터 가게에 나타난 일은 충분히 놀랍고도 남았지만, 올라프는 애써 태연한 척 코를 긁었다.


“산책 중에 악성 팬들에게 쫓기기라도 했어?”
“오늘은 성질이 약간 달라. 그렇지만 네 도움이 필요해.”


그의 무덤덤한 반응에 엘사는 안심하고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문지방을 넘은 이가 안나임을 알아채자 올라프는 꺅, 하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허겁지겁 숨을 곳을 찾던 그가 걸레 빤 물이 담긴 양동이를 머리에 뒤집어쓰려고 하자 엘사가 혀를 찼다.


“놀라지 말라니까.”
“어떻게? 단어만 깜빡깜빡하는 줄 알았더니 이젠 사람조차 못 알아보다니! 저 빌런이 누군지 정말 모르겠어?”
“듣는 빌런 기분이 좀 그렇네요.”
“진정해, 이 사람이 바로 미스 콧수염이야.”


뭐라고? 안나는 코 밑에 저절로 손이 갔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알아들었다는 마냥 입을 쩌억 벌린 남자의 반응이었다. 어머나! 올라프가 외쳤다.


“초콜릿 언니란 걸 알면서도 출장을 갔던 거야?”
“내가 자학적인 면이 있다지만 마조히스트는 아니야.”
“왜... 왜 이제야 말했어!”
“미리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어?”
“그럼, 조언은커녕 무조건 반대했을 거야! 지금도 봐, 우리를 한 대씩 쥐어박고 싶단 표정이잖아!”
“잘도 보셨네요.”


히익! 번뜩이는 안광을 마주하자 올라프가 냉큼 카운터 아래로 몸을 숨겼다. 안나! 엘사가 곧장 타일렀다. 쟤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런담? 올라프가 머리를 빼꼼 내밀어 전황을 살폈으나, 우려와는 달리 안나는 잠자코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그러자 그가 믿을 수 없단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성격이 정반대인 쌍둥이인 건 아닐까?”
“서식지엔 하나뿐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대체 어떻게 맹수를, 죄송해요, 길들인 거야?”
“그렇다기보단, 목줄과 입마개를 채운 셈이지.”


듣자듣자 하니 사람을 대놓고 짐승 취급하는 분위기에 안나는 치아가 근질거렸으나, 말마따나 함부로 날뛸 입장은 아니었다. 에휴, 그녀는 신세를 체념하듯 콧김을 푸욱 내뿜었다. 그런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올라프가 입가를 두 손으로 감쌌다. 항상 휘둘리기만 하더니, 엘사, 드디어!


“오늘 만우절은 아니지?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응?”
“그게 말이지......”


엘사는 자랑하듯 무용담(사실상 피해담)을 펼쳐놓았다.



*



다시 돌아가, 엘사가 휴대전화를 내민 직후였다.


하지만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안나는 화면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경멸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도 우리 엄마가 시킨 일이겠죠?”


두 번 당할까 보냐! 안나가 눈을 부릅떴다. 불타는 전의에 당황한 나머지 엘사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냥, 그게, 제가 찾, 찾은 건데...... 그러나 상대방은 판이하게 받아들였다. 정곡을 찔린 모양이지?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안나가 고자질쟁이를 닦달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엄마한테 일러바친 거예요, 설마?”
“아, 아니에요!”
“그럼 더는 안 보겠다면서 으름장을 놓던 분이 다시 찾아 온 이유가 뭔데요? 사주 받아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또 사람 말 안 듣네, 그런 적 없다니까요!”
“발뺌해도 소용없어요! 이제 난 죽었다, 직접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엘사는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참자, 참자, 무서워서 피하는 거다, 무서워서......


“잘 생각해봐요, 여사님이 이 사실을 아셨으면 저를 대신 보내겠어요?”


안나는 입을 다물었다. 일리 있는 말씀이었다.


“제게 크리스마스 마켓이니 뭐니 지시할 바에야, 직접 왕림하신다면 십분도 지나지 않아서 상황이 정리될 게 분명할 텐데요. 저야 번호도 알고 있겠다(요전날 안나를 기다리며 나눈 대화에서 비롯한 성과였다), 전화 한 통만 하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는......”


엘사는 점점 말끝을 흐렸다. 그러게, 내가 왜 사서 고생을 한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단 생각에 엘사가 빠른 속도로 연락처를 훑었다.


“성함이 뭐더라, 나이두? 두이나?”


그녀의 개떡같은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찰떡같이 눈치를 채서는 안나가 안달복달 애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시겠죠.”
“지금은 말씀드릴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폭풍전야나 다름없다구요!”
“매도 몰아 맞는 게 낫대요, 위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먼저 맞는’ 이에요,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뭐든 맞으면 죽는 매니까 그렇죠!”
“저런...... 저랑은 전혀 상관없는 얘기네요.”


‘동정에 호소 작전’이 먹히지 않자, 안나는 체면 따윈 내팽개치기로 했다. 직업정신을 한껏 발휘해 그녀가 밀크초콜릿보다 달콤한 말을 입에서 자글자글 뱉어냈다.


“부디 위로 대신 아량을 베풀어 주심 안 될까요? 네? 잘생기고 예쁘고 목소리도 끝내주는데다 성격까지 좋은 언니?”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아무 감흥도 없군요.”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선 엘사가 대꾸했다. 조금만 더 놀려볼까? 복수할 기회는 이때다 싶어 엘사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비록 아무 버튼도 누르진 않았지만. 네, 여보세요? 그간 안녕하셨어요? 다름이 아니라, 결국 따님께서......


그러나 엘사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어머님 모시고 와’ 시나리오가 펼쳐지는 것만은 막아야겠단 일념 하에 안나가 또다시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엘사는 저항도 못한 채 눈  앞에서 핸드폰을 강탈당했다. 데자뷰인가? 엘사가 어이없다는 투로 소리쳤다.


“도둑이야!”
“죄, 죄송해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진부한 건 알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어요, ......죄송하면 단 줄 알아!”


이리 내놔! 혹독한 경험(!)을 통해 저 인간 손에 핸드폰이 넘어가게 두어선 안 된다는 걸 학습한 엘사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절박한 건 마찬가지였던지라 안나도 지지 않고 맞섰다.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으나, 체력이 딸리는 엘사로선 장기전이 될수록 불리했다. 그녀는 힘 대신 머리를 쓰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시리야, 엄마한테 전화 걸어줘!”


그러자 안나의 스마트폰 비서가 착실하게 통화를 연결했다. 닥쳐, 시리야! 주인을 배신한 핸드폰에 정신이 쏠린 틈을 타, 엘사는 인질을 무사히 회수했다. 여유를 되찾은 승리자는 전리품을 자랑하듯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나 상대에겐 약 오르기 짝이 없는 퍼포먼스였다. 이잇...! 안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용을 써보았지만, 간신히 닿을까 말까한 수준이었다. 그 광경에 엘사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뚜껑이 열린 안나가 메뚜기... 아니, 토끼처럼 깡총 뛰어올라 목표물에 강스파이크를 때려 박았다. 아악!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에 엘사는 휴대전화를 놓치고 말았다. 고래싸움을 벗어난 가여운 새우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조금 뒤 요란뻑적지근한 소리를 내며 단단한 주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예상컨대 기기나 바닥 타일, 무언가 하나는 박살이 났을 게 분명했다.


난리법석 후 찾아온 정적에 안나가 먼저 입을 뗐다.


“......죄송해요.”


엘사는 한 손으로 지그시 눈가를 덮었다. 누구처럼 확 울어버릴까, 하는 충동에 휩싸였으나, 그랬다가는 이 여자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릴 거란 생각에 꾸욱 참았다.


“제, 제가 책임지고 고쳐올게요!”


안나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러자 급속냉각을 실행하던 머리에 다시금 열이 올랐다. 책임이란 말을 아무데서 아무한테나 아무렇지 않게 말하네? 너는 한 번 혼나봐야 해! 엘사는 짐짓 굳은 얼굴로 말썽꾼을 몰아세웠다.


“고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 전에 수리비 감당은 할 수 있겠어요?”

“요, 요즘엔 다들 보험에 가입하니까......”
“제가 안 들었으면 어쩔 건데요?”
“그럼 전액을 내는 수 밖에......”


엘사가 불쑥 손을 내밀며 안나의 말을 끊었다.


“핸드폰 줘 봐요.”


제 건 산산조각 났으니까. 안나는 고분고분 따르면서도 한 편으로는 똑같은 꼴을 당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나 괜한 기우였다. 엘사는 묵묵히 홈페이지를 열어 수리비용과 관련한 탭을 클릭했다.


“정확한 건 센터에 가야겠지만, 이걸로 대략적인 금액은 알 수 있겠죠?”


엘사는 찾던 내용이 줄줄 담겨있는 화면 그대로 안나에게 돌려주었다.


“일단 액정이 나간 건 누가 봐도 확실하고, 저기 굴러다니고 있는 부품이 제 핸드폰에서 나왔다고 치면 기타비용도 추가되겠네요. 참고로 제 기종은 가장 위의 가격이에요.”


안나는 화면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미친 거 아냐, 무슨 수리비가 이렇게 비싸? 맥북이라도 돼? 차라리 새로 사는 게 낫지 않겠나 싶은 액수였지만, 감히 먼저 꺼낼 수 있을 말은 아니었다. 피해액 산정 단계부터 파산의 위기가 솔솔 찾아왔다.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안나가 말했다.


“하, 할부는 안 될까요?”
“그건 카드 사정에 따라 다르겠죠? 혹시나 하는 마음이지만, 연체될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안 그래도 돈 나갈 구실이 많아 보이던데. 엘사가 덧붙였다.


“대출받으려다 신용등급 때문에 막히면 곤란하잖아요.”
“......덕분에 신용불량자 될 일은 없겠네요.”


고마우셔라. 그녀가 비꼬듯이 응수했다. 남의 경제사정에 함부로 말을 얹는 태도가 다소 불쾌했던지라, 안나가 톡 쏘아붙였다.


“......돈 관련해선 저도 나름대로 해결책이 있으니 괜한 걱정은 그만 해주시겠어요?”
“믿는 구석이 뭔데요, 혹시 권리금?”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사는 이를 긍정의 표시라 받아들이고, 그녀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조곤조곤 설득을 시작했다.


“그 쪽도 물론 알고 있겠지만, 들어올 때의 권리금을 나갈 때에도 똑같이 회수할 거라곤 장담할 수 없어요. 특히나 영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엔 말이에요.”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 괜한 반항심을 일으키진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안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조금은 다행이라 여기며 엘사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 근방이 나름 번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가게를 내어놨다고 해서 다음 사람이 바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요.”
“......”
“그러니 지금처럼 계획에 없던 큰 지출이 생기면 부담스럽겠죠. 저도 알아요.”


엘사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안나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상함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만약 괜찮다면, 수리비는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갚는 건 어떨까요?”


나무라는 줄 알았더니만 갑자기 무슨 속셈이지? 긴장한 탓에 안나의 몸은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가 바로 넘어오지 않자, 엘사는 미끼를 더하기로 했다.


“물론 이자는 치지 않을게요.”


안나의 내면에서 ‘속지 마!’라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으나, 부드럽게 어르는 음성과 도닥이는 손길에 차츰 누그러지고 있었다.


“저... 저는 그 편이 낫긴 하지만......, 그 쪽에겐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것 아니에요?”
“공짜로 하자는 것도 아니잖아요. 단지 급하게 받을 필요가 없을 뿐이에요.”


문서로 남겨도 좋아요. 엘사가 덧붙였다. 순진한 안나의 경계심은 이제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그럼요.”


다만, 조건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엘사의 미소에선 스멀스멀 꿍꿍이가 피어났다.



**



이러한 연유로 안나가 각서를 쓰게 된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올라프에게 엘사가 부탁했다.


“증인이 되어 줄래?”


그래서 온 거였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사는 만족스럽단 표정으로, 종이를 찾아 그 위에 조항들을 쓱쓱 써내려갔다. 가만 있자. 문득 의문점이 떠오른 올라프가 다가와 속닥거렸다.


“저번에 케어 뭐시긴가 가입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는 내가 입이 꽤나 가벼웠나보다.”
“하긴, 네 성격상 보험을 들어두지 않았을 리가 없지.”
“직접 말하기 전까진 비밀로 해줘...... 좋아, 다 썼다.”


엘사는 구겨질세라 종이를 소중히 안아들고, 구석 자리에 방치된 안나에게 다가갔다.


“자, 같이 확인할게요. 급하게 써서 조금 허술한 점 이해해 주세요.”
“그래요, 마음대로 하세요.”


날 잡아잡수, 안나는 소파 위에 몸을 늘어뜨렸다. 엘사는 맞은편에 앉아 종이를 읽어나갔다.


“첫 번째, 안나 차일드는 본인이 파손시킨 휴대전화 수리에 있어 자기부담금을 대신 지불한다. 다만, 기간은 유예를 둔다.”
“......확인했어요.”


내용에 미심쩍은 부분이 없나 곰곰이 되짚어 보고선 안나가 응했다. 그러나 헛수고에 불과했다.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덫에 걸려든 셈이었으니. 이제부턴 제가 제시하는 조건이에요, 엘사가 바로 다음 조항을 읊었다.


“두 번째, 안나 차일드는 가게를 내놓기 전 남은 12월 한 달 동안 근무에 성실히 임한다. 이를 어길 시 엘사 라이언은 안나 차일드의 부모와 연락을 취한다.”


곧장 반박이 들어왔다. 이 사기꾼아! 안나가 목청을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빼요!”
“왜 그래야 하죠?”
“미리 말 해둔 게 아니잖아요! 언제 그만두건 제 마음이죠!”
“조금 전엔 제 마음대로 하라면서요?”


안나는 끓기 직전 주전자 뚜껑처럼 부르르 머리를 떨었다.


“그래, 마구마구 갖다가 다 일러바쳐라!”


이제 됐죠? 집에 갈 거야! 돌아가려는 안나를 붙잡고서 엘사가 뻔뻔스럽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다시 앉아요, 아직 하나 더 남았어요.”
“아니, 핸드폰 고쳐준다는 내용에 조건이 대체 몇 개가 붙는 거람!”


안나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부당계약서!’, ‘사기죄!’, ‘경찰 불러!’ 등등의 단어가 쏟아져 나왔으나, 엘사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부서지면 고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좋게 다가오진 않네요. 제 핸드폰은 레고블럭이 아니잖아요?”


데이터에 복구 못할 손상이 일어났으면 어떡할 거예요? 혼수상태에 빠진 핸드폰을 증거물로 제시하며 엘사가 물었다. 올라프는 그녀가 클라우드 서비스 애용자임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엘사는 뒤이은 말로 안나의 죄책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젠 먼 곳에 계신 부모님 사진도 볼 수 없을지 모르는데......”


뭐? 안나는 깜짝 놀라 올라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위로하듯 친구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대역죄인이 된 기분을 느끼며 안나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소파에 붙였다.


“......그래서 다음은요?”


언제 그랬냐는 듯, 엘사가 우울함을 벗어던지고 마지막 조항을 또랑또랑 읽었다.


“세 번째, 안나 차일드는 올해 크리스마스 마켓에 참가한다. 참여 시 해당 기간 동안 가게에서 근무하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아니, 그게 도대체 뭐하는 건데요! 설명 한 톨 없이 자꾸 끼워 넣기나 하고!”
“해주려고 했는데 누가 부숴버려서 말이죠.”


뭘 해도 제 무덤이란 사실을 깨달은 안나는 소파에 파묻혀 깜빡깜빡 눈만 뜨기로 결심했다. 핸드폰을 볼 수 없으니, 대신 기억에 의존하여 엘사가 크리스마스 마켓에 대해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했다.


“음, 지금부터 인터넷으로 부스 신청을 받더라고요. 마켓이니까 뭐라도 팔면 되겠죠? 사실 올해가 처음이라 잘 모르겠더라고요. 위치는 광장이나 강가였던 것 같고요. 기간은, 그게 5일부터였나, 5일 동안이었나? 여튼 끝나는 시점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저렇게 남의 일이랍시고 대충대충 얘기하는데 과연 제가 믿고 나가야할까요?’라 써진 표정으로 안나가 올라프를 쳐다보았다. 그의 맘속에선 갑자기 안나에 대한 동정심이 솟아났다. 전날 본인에게서 보다 정확한 내용을 들었던 올라프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구청에서 주관하는 거니까 구청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될 거예요. 판매 품목은 마켓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인데, 각종 먹거리, 의류, 소품, 중고물품 같은 거죠. 부스는 광장 근처 강가 양쪽으로 배치될 거래요. 그리고 기간은 당연히 5일 동안이에요. 아니면 신청이 이미 끝났게?”

“그래, 그런데 똑같은 걸 굳이 두 번씩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똑같긴 뭐가 똑같아! 안나와 올라프가 동시에 엘사를 구박했다. 이제 안나는 올라프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리고서 질문했다.


“그럼 혹시 참가비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품목에 따라 다른 것 같아서, 정확하게는......”
“먹거리 부스는 1일 참가비가 이 정도였어요.”


엘사가 자랑스럽게 열손가락을 펼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안나는 여전히 불신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저렴하다고요? 생략된 숫자가 있는 것 같은데요. 도대체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냐, 엘사 말이 맞아요. 저도 처음 듣고 의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유가 뭘까요?”


엘사는 입을 다물었다. 집계한 판매액의 대부분이 자선단체에 기부된다는 사실은 그녀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 사이에 올라프가 나서서 그럴싸한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뭐, 이런 행사가 처음이니 참여를 독려하려는 목적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엘사는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안나, 참가해서 나쁠 건 없을 거라 생각해요. 한번 해보지 않겠어요?”
“음......”


안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같은 품목으로 실패했단 경험이 쓰라린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선 부정적인 상상이 튀어나와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른 곳은 손님으로 북적거리는데, 내 부스에만 한 명도 없으면? 혼자 우두커니 서서 맞은편 상점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으려나? 게다가 이번엔 실내도 아니라 사방이 노출된 장소에서 말이지!

 
성냥팔이 소녀가 따로 없군! 안나가 자조하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다 된 밥이 수포로 돌아갈까 염려된 바텐더들이 앞 다투어 열을 올렸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이들에게 홍보할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작은 동네에 기회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몰라요!”
“그러게요, 저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요.”


올라프는 ‘혼자’라는 말을 할 때, 안나의 안색이 어두워진 낌새를 눈치 챘다. 그는 가슴포켓에서 펜을 꺼내, 세 번째 항목의 ‘안나 차일드’를 두 줄로 직직 긋고 그 위에 ‘안나 차일드와 엘사 라이언’을 적어 넣었다. 가만히 있다 불똥을 맞은 엘사가 언성을 높였다.


“뭐하는 거야?”
“네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우리에게도 홍보하기 좋은 기회라는 건 똑같아. 게다가 돈도 되고.”
“아니, 이걸로 돈을 벌기엔...... 됐다, ‘우리’라면서 내 이름만 적은 건 또 뭔데?”
“나는 남아서 가게를 봐야지.”
“뭐? 그럼 나 혼자 하란 거야?”


올라프는 검지로 각각 엘사와 안나를 가리키더니, 자동차 와이퍼마냥 가운데를 향해 모으는 시늉을 반복했다. 이를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한 엘사가 물었다.


“서로 싸우라고?”
“저기, 같이 하란 말 같은데요. 그 쪽은 대화에 도움이 안 되니까 이럴 땐 그냥 뒤로 빠져줄래요?”
“이거 봐, 말하는 거 보면 지금 나한테 싸움 걸고 있잖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지?”
“......초콜릿 언니 말이 맞아.”


조금 확신을 잃은 투로 올라프가 대답했다. 틈만 나면 아웅다웅하는 앙숙을 붙이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그러나 만약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면, 안나에겐 가게를 일으킬 계기가 될 것이며, 엘사에겐 새로운 친구가 생길 것이며, 올라프는 부와 명예... 까진 아니더라도 홍보 효과와 친구의 행복을 얻을 터였다.


이보다 걸맞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없지, 산타클로스로 거듭난 올라프가 결심을 굳혔다.


“안나, 조금 껄끄럽겠지만 혹시 이 친구를 부탁해도 될까요?”
“......이미 저 하나로도 벅찬 걸요?”
“아,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일은 저보다 낫거든요.”


기억 속에서 은혼식 때의 엘사가 어슴푸레 떠올랐다. 그러니 마음껏 부리세요. 올라프가 선심 쓰듯 말했다. 안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누구 맘대로!’를 부르짖는 당사자만 뺀다면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럼 당부하고 싶다는 건 뭔가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고요, 홍보에 누가 되지 않게 고삐를 잘 간수해달란 뜻이죠. 단골 분들과, 아마 당신은 ‘진짜’ 모습을 알고 있겠지만, 일단은 신비주의를 유지하고 있거든요.”
“......알만 하네요.”


안나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잘만 다루면 손님을 왕창 끌어 모을 수 있을 거예요.”
“당신들 날 구경거리로 만들려고 작정한 모양이지.”


취급이 영 마땅찮았는지 엘사가 구시렁거렸다.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마, 입만 다물고 있으면 넌 최고야.”
“맞아요, 입만 다물고 있으면요.”


엘사는 성원에 보답하기로 했다.


“그럼 다들 동의하는 거죠?”


영업시간이 다 된 것 같아서요. 올라프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내키지 않는 구석이 차고 넘쳤으나, 당장 돈을 마련할 구석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안나는 하는 수 없이 펜을 들었다.


자요, 서명을 마치고서 안나가 각서를 넘겼다. 진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던(강가와 안나를 조합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란 농담을 떠올리던 차였다) 엘사가 깜짝 놀라 딴소리를 했다.


“저도 적어요?”
“그럼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려고요?”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엎어뜨릴 기세에 눌려 엘사가 서명했다. 흔쾌히 각서를 맡아주겠다던 올라프였으나, 이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엘사였다. 그녀는 자택금고에 여권과 같이 보관해둘 작정이었다.


때맞춰 밖으로 나온 둘은 말없이 걷다, 광장 근처에 도착하자 엘사가 입을 열었다.


“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상투적인 멘트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머지, 안나가 어버버 대답했다.


“어, 없어요!(?)”
“그래요, 앞으로 마켓 관련해선 비둘기로 연락할 테니 가게 창문이나 잘 열어두고 기다리세요.”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엘사가 응수했다. 설마 본인도 신비주의 컨셉이었나? 곧 실수를 깨달은 듯 안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허둥지둥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번호를 적고, 종이를 찢었다.


“여기요.”
“고친 뒤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엘사는 이후 안나의 번호를 ‘받지말자16’으로 저장할지 고민하다, 마음을 돌려 ‘단기 비즈니스 파트너’로 바꾸어 적었다.





+) 후일담 1


후환이 두려웠던 엘사는, 접수 마감이 끝난 다음에야 진실을 털어놓았다. “우리 중에 예비 기부천사가 있는데 누굴 것 같아요?”로 시작한 물음은, “박리다매, 초박리다매라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러니 각서에 불붙이려는 거 그만 둬요!”란 통한의 외침으로 끝이 났다.





+) 후일담 2


“내가 자랑스럽게 들이댈 때부터 알아봤어, 밑지는 장사일줄! 이래서 수리비는 언제 갚는담!” 안나가 마침 발에 채인 돌멩이를 강물 쪽으로 걷어차며 씩씩거렸다. 엘사는 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안나.”, “......네?”, “그러다 개구리 죽어요.”, “니가 무슨 개구리 왕국 출신이야?”.


날아드는 주먹과 발차기를 피하며 엘사가 깔깔거렸다.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하며 안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안나,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개구리 시리즈면 진짜 죽는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까는 긴장해서 그만 농담이 나와 버렸어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엘사가 털어놓았다.


“전부터 쭉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기회가 온 것 같아서요”. “......무슨 얘긴데요?” 안나는 숨을 삼켰다. 먹먹한 불꽃이 가슴께로 퍼져나갔다. “사실...... 저......”. 엘사가 뜸을 들이는 순간마다 안나의 마음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소방작업 따윈 필요 없었다. “수리비 보험 들어뒀거든요.”


“그래서 저번에 보여준 가격이 아니라 일정 금액만 내면...... 앗, 아앗, 기뻐할 줄 알았는데 왜 때리는 거예요!”, “모파상의 목걸이 읽고 느낀 점 없어요? 응?”. 할 말이 있으면 빨리빨리 하란 말이야, 괜히 애태우지 말고! 가슴에서 머리로 올라온 열기는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식지 않았다. 결국 엘사가 사죄의 뜻으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사다 바치고서야 안나의 분노를 달랠 수 있었다.




--------


ㅎㅎㅎ... 빨리 올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넘 길어졌음...ㅜㅜ


다음화는 현퀘 사정상 그 다음주에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중간에 잘 끊을 수 있으면 짧게나마 담주에 올릴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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