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는 약자를 병탄한다!

강자는 약자를 인탄한다!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18회에서 참 속을 후비는 대사가 나왔지.

천 년 전 고려의 백성과, 천 년 후 대한민국의 국민이 겪는 고통과 절망이

어떤 점에서는 한 치도 다르지 않아서 저 대사 들으면서 속이 많이 쓰리더라.

그리고 '병탄한다', '인탄한다'. 낯선 이 말에 새삼 신경이 쓰였어. 

병탄은 흔히 쓰는 말이라 그러려니 했어.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았던 한일합병을 '일제병탄', '일제강제병탄'이라고도 하잖아.

곧 병탄에는 남의 것이나 영토를 강제로 빼앗는다는 뜻이 들어 있어.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이렇게 뜻풀이가 나오지. 

병탄(竝呑/倂呑)[병ː-]   
「명사」
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

하지만 인탄이라니, 이런 말은 정말 듣도 보도 못했어.

그러니까 이건 실제로 있는 말이라기보다는

<육룡이 나르샤> 작가들이 만들어낸 조어라고 보는 게 맞을 거야.

그런데 왜 하필 인탄일까?

뒤의 '탄'은 병탄과 운율을 맞춘 것일 테지만,

앞의 '인'은 과연 무슨 뜻으로 만든 것일까?

인탄(躪呑)의 '인'은 흔히 '유린' 할 때 쓰는 한자야.

이때 유와 린은 같은 글자로 똑같이 '짓밟다'라는 뜻을 지녔어.

그래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렇게 뜻풀이를 하지. 

유린(蹂躪/蹂躙/蹂蹸)   
「명사」
남의 권리나 인격을 짓밟음.

그러니까 인탄은 좀  더 세밀하게 뜻풀이를 하자면,

"남의 권리나 인격을 짓밟아 빼앗는다"는 뜻이야.

자, 여기서 재미있는 생각이 들지 않아?

병탄은 남의 재물이나 영토를 빼앗는 거고,

인탄은 남의 권리나 인격을 빼앗는 거라면,

그 차이가 아주 확실하잖아?

맞아. 병탄은 물질적인 빼앗음이고,

인탄은 정신적인 빼앗음이야.

병탄이 물질적인 착취라면 인탄은 정신적인 착취인 거지.

그러니까 세상의 강자는, 소위 힘 있는 권력층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까지 철저하게 다 짓밟고 빼앗아 왔다는 거야.

바로 그랬기에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계속 지배층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거지.

그래서 대사를 돌이켜보고 무진장 속이 쓰렸어.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고 인탄한다는 저 대사가,

백성의 물질뿐 아니라 정신마저 처참하게 짓밟았다는 뜻으로 들려서.

주제곡 <무이이야>에서도 묻잖아.

생사를 가름에 정치와 칼이 다를 바 무어냐고.

아무 차이가 없다고.

칼이 물질적인 힘을 뜻한다면, 정치는 정신적인 힘에 가깝겠지.

하지만 결국 칼도, 정치도 백성의 생사를 가르기만 할 뿐,

그 억울한 죽음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아.

어차피 들풀(백성)은 짓밟히고 희생당하는 존재라고 여기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들풀은 짓밟히기만 할 뿐, 분노하지도 일어서지도 않을까?

천 년 전에도, 후에도 허망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빼앗기고 또 빼앗기기만 할까?

아니, 그렇지 않아.

오랜 역사를 거쳐서 진실로 세상을 바꿔 온 것은

강자가 아니야. 권력층이 아니야. 지배층이 아니라고.

약자로 불리는, 권력을 갖기는커녕 내내 강자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강인한 생명력과 올곧은 희망을 잃지 않는 백성이 진짜 역사를 써 왔다고.

육룡 중 백성 대표인 분이가 말하잖아.

"살아 있다면 뭔가를 해야 하잖아요."

그 '뭔가'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바뀌어 왔어.

그 뭔가를 하지 못하게 억누르고 빼앗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뭔가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아주 조금씩이나마 좀 더 나은 쪽으로 나가고 있는 거야.

(비록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금은 봉건군주제가 아닌 것처럼, 조금씩이나마.)

그래, 아주 조금씩이나마.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희망을 지닌 사람들 때문에.

결코 병탄하지도 인탄하지도 않는, 오히려 함께 나누고 인내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러니까 나는 아마 기다리게 될 것 같아.

지극히 약하고 작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크고도 강한 힘을 지닌,

세상의 모든 약자들, 들풀들, 백성들의 거대한 반란을.

아니, 진정한 개혁을.

고려라는 거악을 끝장내고 새 나라를 세우는 이 드라마에서

바로 그 백성들의 이야기가 큰 틀을 이루기를.

강자가 약자를 병탄한다고?

강자가 약자를 인탄한다고?

아니, 그건 가짜 강자들의 자기변명이고 자기도취에 불과해.

진정한 강자는 약자를 병탄하지도, 인탄하지도 않아.

그보다는 약자를 비탄해하고, 애탄해하지.

약자들의 슬픔에 함께 슬퍼하고, 약자들의 애통함에 함께 아파하지.

그래서 그 슬픔, 그 애통함 모두 안고,

백성들과 더불어 나란히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이 진짜 강자야.

강자는 약자를 비탄한다. 강자는 약자를 애탄한다....... 그게 맞다고.

아니, 어쩌면...... 강자 약자 구분조차 의미가 없을 거야.

그저 사람과 사람, 힘이 강하든 약하든, 권력이 크든 작든, 재물이 많든 적든,

다 상관없이 그저 사람과 사람이 다 똑같이 평등하게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새 나라'가 이뤄야 하는 세상이 아닐까.

아무래도 역사가 스포(;;)인  <육룡이 나르샤>에서

과연 어디까지 그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기다리게 돼.

진정한 의미의 백성이 함께하는 새 나라를.

천 년 전에도, 후에도 모든 백성들이 끝없이 힘을 보태고

그렇게 아주 조금씩이나마 다가가는 그 아득하고  평등한...... 꿈의 나라를.

PS.

모두 함께 기다릴 거지?

그러니까 제발 싸우지 좀 말자.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