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t's such a good shit!"
아마 스맥다운에 있을 때였을 거다. 난 그때 스맥다운의 탑 선역이었다.
어느날 각본진 작가가 대본을 건네줬는데, 너무 황당한 거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마 그날 경기장에 올 때 외발자전거를 거꾸로 타서 왔다느니
노숙자랑 피자를 나눠먹었다느니 하는,
당신 친구가 하면 재밌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선수가 할만한 짓들은 아니었다.
얼간이나 할 짓들이었지.
그래서 난 "이런 대사는 못 치겠으니 평범한 걸로 바꿔달라"고 했고
잠시 후 작가가 다시 와서 고친 각본을 보여주는데
빈스가 그 부분을 다시 집어넣은 거다.
난 한숨을 쉬고 빈스를 찾아가
"이런 대사는 못 쳐요. 너무 실없잖아요." 했다.
그러자 빈스는
"끝내주잖아(It's such a good shit)! 이런 게 사람들이 자네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특이하고 남들과 다른 것! 이게 바로 자네야!" 라고 했다.
이런 프로모나 세그먼트가 나올 때마다 수백만번씩 빈스와 얘기했지만
항상 그 얘기의 끝은 빈스의 "끝내주잖아! 이게 바로 자네야!"로 끝났다.
그래서 내가 "그럼 전 얼간이인 거네요?" 했더니
웃으면서 "아니, 이게 자네지! 자넨 독특해!" 하더라.
이제 내가 지난 6년간 무엇과 싸워왔는지 다들 대충 이해했을 거다.
- pooper-scooper
LA에 쇼가 있는 날, 쇼가 일찍 오후 5시에 시작하는 날이라
정오에 미리 경기장에 도착했다.
각본진 사무실에서 앉아 폰을 꺼내 들고 계약이 며칠 남았는지 헤아리며
'계산해보니 12~15번만 더 뤄에 출연하면 되는군.
좋아.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어.'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곧 각본진이 몰려와 나한테 대본을 잔뜩 들이밀었다.
당시 세스와 대립하며 내가 악역을 맡고 있었는데,
세스가 나보고 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고 하지만
난 온종일 프로모만 6개 정도 스크린에 띄우다가
쇼 막바지에야 링에서 둘이 한판 붙는다는 게 기본 아이디어였다.
여기저기 이동하며 프로모를 6개나 찍어야 되니 긴 하루가 될 터였다.
라이브 프로모도 있고 녹화 프로모도 있지만,
30초짜리 프로모도 조명이 어떠니 뭐니 하며 40분동안 찍는 게 WWE니까.
아무튼 그렇게 받은 프로모 대본의 대사들은
하나같이 전형적인 WWE식 대사들이었다.
양만 많지 뻔하고 실없는 대사들.
게다가 하나 같이 말이 안 되는 대사투성이였다.
스토리 진행도 안 되고 캐릭터가 부각되지도 않고.
내가 제일 신경쓴 프로모는 맨 마지막 링 안에서 하는 프로모였는데,
내가 보기에 그 프로모 대본은 완벽한 개씹쓰레기였다. (absolute hot garbage awful crap)
그 대본의 요지는 대충 관중들이 냄새나고 역겹다는 거였는데
빈스가 그 대사를 외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질 정도였다.
"리버풀이라니, 무슨 피부병 같은 이름이군!" 처럼.
(제리코: 나도 그날 거기 있었어 ㅋㅋㅋㅋ)
빈스가 썼는지 누가 썼는지 몰라도 이거 듣고 있으면 창피한 줄 알아라.
계속 냄새난다는 둥 관객을 모욕하기만 하지,
말도 안 되고 세스나 나한테 득이 될 게 전혀 없는 대본이었다.
그 중 제일 내 심기를 건드린 부분은 똥 푸는 삽(pooper-scooper) 부분이었다.
(정적) 다시 한번 말해주겠다. 똥 푸는 삽.
대충 "똥 푸는 삽 없이는 여기 오지도 못하겠다!" 운운하는 대사였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이건 도저히 못 하겠다. 대사를 바꾸자. 이거 빈스가 쓴 거냐?"하자
작가가 "누가 썼는진 모르겠다."고 하더라.
WWE의 각본 수정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솔직히 나도 아직 왜 과정이 이따위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빈스가 회의 때문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각본을 고쳐서 인쇄실에 보내 인쇄한 뒤 빈스 책상 위에 둔다.
이때 똥 푸는 삽 같은 단어들을 빼는 거다.
안 그랬다간 빈스는 그따위 단어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버릴 테니까.
"아, 당연히 똥 푸는 삽은 넣어야지! 끝내주잖아(It's such a good shit)!"라고 할 테니.
(제리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작가는 냄새 자체를 욕하는 대신 좀 더 뭉뚱그려서
"LA 이 쓰레기 같은 동네, 방독면 없인 올 수도 없겠네" 식으로 바꿨다.
이 '방독면'을 기억해라. 나중에 중요해지니까.
난 작가에게 "암튼 됐고 일단 똥 푸는 삽부터 빼서 빈스한테 보여주자고!" 했다.
각본을 수정해서 돌려놓은 뒤
우린 빈스가 원래 버전이 아닌 우리가 수정한 버전의 대본을 읽게 되기를 빌었다.
이 정신 없는 짓거리에 다소 지친 채로
다른 작가가 들고 온, 복도가 배경인 두번째 프로모 대본을 봤는데
이 역시 말도 안 되고 하물며 내가 야유를 받게 (getting heat) 하지도 못하는 대본이었다.
그걸 보고 난 작가에게
"이봐, 우린 똥 푸는 삽 같은 단어를 빼려고 우왕좌왕 하는 대신
제대로 앉아서 스토리에 걸맞는 대본을 짜려고 노력할 수도 있잖아.
창조성을 발휘하는 대신 얼간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용쓰고 있다니..."라고 했다.
뭐 작가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어버버대긴 했지만.
암튼 그 프로모를 끝내고 각본진 사무실에 돌아갔더니
대본에 첨언이 들어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VKM으로부터의 노트:
딘은 자신이 왜 관중을 모욕해야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딘은 대본을 살릴 생각을 해야지, 고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한숨) 명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작가는 잘못이 없었지만 난 작가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대체 왜 여기서 일하는 거야? 난 프로레슬러잖아.
프로모를 통해 스토리를 풀어나가고
사람들을 들썩거리게 하는 기술은 진작에 익혔다고.
근데 나보고 남이 쓴 멍청한 대사나 읊으라고?
니들이 쓴 구린 대사를 읊을 사람이 필요하면 차라리 배우를 고용해.
나보다 걔들이 더 나을 테니까. 난 생각 없어."
여전히 똥 푸는 삽이 빠진 버전의 각본을 빈스가 보길 바라며,
난 다음 프로모를 준비했다.
이번엔 라이브 프로모였던 것 같은데, 이 역시 아무 의미 없는 대사투성이였다.
사실 이 프로모 때문에 일찍 빈스에게 찾아갔었는데
백혈병 투병 중인 내 친구 로만 레인즈를 공격하는 굉장히 불쾌한 대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지금 장난해? 빈스한테 따져봐야겠어. 이건 분명 뭔가 착오가 있는 거야."
하고 프로덕션 미팅 중인 빈스를 찾아갔었다.
내가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진짜 나보고 이런 대사를 하라는 건 아니겠죠?"하자
빈스는 "하지만 로만도 스토리에 포함시켜야 하잖나.
그 대사로 인해 로만이 계속 스토리와 연관되는 거야."라고 하며
그 대사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처럼 포장하기 시작했다.
듣다 보니 나도 어느새 "어어... 그렇네요." 하게 됐다.
제대로 '빈스식 제다이 세뇌(Vince Jedai mind trick)'를 당한 거다.
당시 나름 면역이 돼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간간이 당하더라.
(제리코: 그거 간간이 당하게 된다.)
내 실수다. '제다이' 당해버렸으니까.
하지만 정작 프로모를 찍을 때,
그 대사를 입 밖으로 내자마자
난 '맙소사, 내가 이딴 소릴 지껄이다니.'하고 생각했다.
(제리코: 무슨 대사였는지 기억해?)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암에 걸렸잖아, 그거 안됐네 ㅋㅋㅋ" 스러운 대사였을 거다.
쓰레기 같은 대사였지.
그놈의 똥 푸는 삽을 빼는데 정신이 팔려서
절대 입 밖으로 뱉고 싶지 않은 대사를 치고 만 거다.
그러고 나서 다시 각본진 사무실에 돌아갔다.
혹시 이 얘기를 따라오는 것도 벅차다면,
그날 나는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말도 안 되게 지쳐있었다.
암튼 각본진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똥 푸는 삽이 빠진 버전의 각본을 승인 받는데 성공했었다!
까먹을까봐 말하자면,
지금 우린 자타공인 천재가 운영하는
수 조원 가치의 대기업에서
다 큰 성인들이 하는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거다.
근데 똥 푸는 삽을 빼니 넣니로 동분서주하고 있지.
암튼 수정된 각본을 읽어보니
빈스가 몇 군데 손 본 부분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딘 앰브로스, 수술용 마스크를 착용한 채 입장'
이전에 있던 '방독면'을 보고 '수술용 마스크'를 넣은 거다.
냄새나고 역겨운 관중들로부터 질병이 옮지 않도록!
빈스한테 각본을 보여줄 때는 단어 선정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빈스는 단어를 순식간에 소품으로 바꿔버리니까.
이번주에는 수술용 마스크, 다음주에는 방독면,
그 다음주에는 방호복을 착용하고 나온다는 거였다.
나는 "아우 좀!"하고 빈스를 찾아갔다. 또 다시.
빈스의 방에 들어가기 직전
근처에 있던 소품 상자에 잠시 기대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피로했다.
그 날 뿐만이 아니라, 이 짓을 6년 간 하며 쌓여온 피로였다.
6년 동안 이 노인의 사무실에 들어가
왜 수술용 마스크를 쓰는 게 바보같은지,
왜 빨간 카트를 링에 몰고 들어가는 게 바보같은지,
왜 링에서 마네킹을 조각내는 게 바보같은지
셀 수 없이 설득하며 쌓인 피로였다.
암튼 방에 들어가서 나는
"마스크로 입을 가리면 사람들이 제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을 거 같아요."
라고 했다.
결국 빈스와 나는 대신 손수건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좀 덜 창피하니 다행이었다.
빈스는 "이거 딱 자네인데! 자네만의 특징을 잃으면 아깝잖나!
자네는 창의력을 발휘할 여지(creative license)가 많잖아! 뭐든 할 수 있고!
코에 빨래집게를 꽂을 수도 있겠지! 소품을 한번 뒤져봐!" 라고 했다.
난 '창의력을 발휘할 여지? 나한테 그딴 게 어딨어?
난 니가 시키는 쓰레기 같은 짓거리(terrible crap)밖에 못 하는데!'고 생각했다.
쇼가 끝나고 난 빌딩에서 말 그대로 뛰쳐나왔다.
막판 싸움은 꽤 괜찮았고 나도 아드레날린이 좀 돌긴 했다.
다들 성공적이라고 자축하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스탭도 있었다.
하지만 난 호텔 방에 돌아오자마자 술을 찾으며 생각했다.
'뭐 이딴 시간낭비가 다 있지? 오늘 우린 아무것도 못 했어.
프로모를 6개나 했는데 뭔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고,
스토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르겠어.
나랑 세스의 대립은 완전 죽었어. 이미 죽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할 말이 없었다.
(제리코: 내가 WWE를 떠난 건 2017년 5월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핫할 때 왜 떠났냐고 물었지만
난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있었다.
매주 네가 했던 짓을 해야했거든.
빈스 사무실 앞에서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언제까지고 죽치고 기다리고,
내 아이디어가 옳다는 걸 설득하고 하다보면 진이 빠진다.(burns you out)
오히려 경기는 쉬운 부분이다.)
애티튜드 시대 등 고참 레슬러들이
'요즘 애들은 짤릴까봐 겁낸다.
새로운 걸 시도하고 각본을 벗어날 패기가 없다.'고 하던데
솔직히 짜증난다.
난 한번도 짤리는 게 두려운 적은 없었다.
내가 그만큼 잘났다는 게 아니라,
내 의견을 표출하는 것 때문에 짤릴 거란 생각은 한 적이 없다.
난 항상 내 의견을 표출했다.
난 최선을 다해 내 의견이 낫다는 걸 납득시키려 했지만,
쇼가 시작할 때까지 납득시키지 못하면
어쨌든 월급 주는 건 그쪽이니까,
그냥 불평만 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각본을 멋지게 수행하려했다.
가령 쿠바 샌드위치를 먹으며 링에 들어가는 게
바보같은 아이디어라는 걸 납득시키지 못하면,
얼굴을 머스타드 범벅으로 만드는 등
어떻게 해서든 그 장면을 간지나 보이게 만드려 노력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내가 그 정도 능력이 있다는 건 충분히 증명한 것 같다.
1시간 40분 짜린데 이제 30분 분량 ㄷㄷㄷ
나머지는 시간 되는대로 올리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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