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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강화, 1955년 10월~1956년 6월
새롭게 취임한 대통령은 이제 그의 종교파 동맹들을 토사구팽할 만큼 충분히 강력했다. 대통령은 혁명위에게 자진해산을 요구했고, 그들이 그 요구를 수용하자 그는 혁명위를 이끄는 정당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1955년 말이나 1956년 초반기 쯤, 정부는 호아하오교의 Dân Xã(민주사회주의당), 찐민테가 세운 국민저항운동, 그리고 까오다이교의 Phục Quốc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1956년 1월 중순, 혁명위의 전 의장이자 민주사회주의당의 총서기였던 Nguyễn Bảo Toàn은 응오딘지엠을 공개적으로 독재자라고 비판한 뒤 캄보디아로 도망쳤다. 많은 다른 민주사회주의당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Nguyễn Bảo Toàn은 몇년 뒤 베트남으로 돌아왔으나, 정부 요원들이 그를 암살했다고들 전해진다. 까오다이교의 두 정당의 운명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적다. 2월 중반, 혁명위의 총서기 Nhị Lang은 마찬가지로 정보부장 Trần Chánh Thành로부터의 박해를 피해 캄보디아로 도망친 덕에 까오다이교의 두 장군 Nguyễn Thành Phương과 Văn Thành Cao간의 경쟁에 휘말리는 걸 피했다. 종교파 정당들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자치적인 정치 조직들의 종말이 온 나라에 알려졌다. 응오딘지엠은 종교파와 연관된 정당들의 존재 자체는 용인해줬으나, 그들의 독립적인 지도자들을 그들로부터 분리해버렸으며 그들을 한낱 지방 조직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종교파 정당들의 몰락과 동시에 종교파 군대들에 대한 최종적인 숙청도 이루어졌다. 1955년 가을 초, 베트남군은 다시 Rừng Sát에 아직 숨어있던 빙쑤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Dương Văn Minh의 지도 아래 한달 동안의 빙쑤옌 잔당과의 공방전이 일어났고 10월 중순에 바이비엔이 프랑스로 도망치면서 승리했다. 10월 초, 응오딘지엠은 Nguyễn Thành Phương을 보내 까오다이교의 마지막 유력 반정부 군대였던 Phạm Công Tắc의 종교 친위대를 무장해제시키려 했다. 하지만 장군은 신도들의 실망 때문에라도 그들의 종교 지도자를 물러나게 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역주: Nguyễn Thành Phương이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친정부 성향으로 남아있어서 신도들의 민심이 안 좋아서 그의 말을 안 들었을 거라는 뜻 같음.) 1956년 2월, 대통령은 종교 본부를 점령할 것을 지시했고, Phạm Công Tắc은 체포를 피해 캄보디아로 달아났다. 응오딘지엠은 중진 공무원이자 훗날의 부통령인 Nguyễn Ngọc Thơ로 하여금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와 협상하도록 했다. 2월 28일, Nguyễn Ngọc Thơ는 까오다이교가 가지고 있던 떠이닌 성의 행정권을 인수하며, 종교의 예배의 자유를 보장하며, 정치에 대한 개입 중지에 대한 동의에 도달했다. 1월 말, Nguyễn Ngọc Thơ는 호아하오교 장군 Trần Văn Soái와 협상에 들어갔으며, 다음 달에 그의 군대를 해산시키겠다고 동의했다. Nguyễn Ngọc Thơ는 또한 Lê Quang Vinh에게도 협상할 것을 제안했으나, 응오딘지엠이 Lê Quang Vinh의 항복 요구를 거절해버렸다. 4월, 정부군은 Lê Quang Vinh을 놀라울 정도로 손쉽게 생포했고 목격자들은 Nguyễn Ngọc Thơ가 그를 속여서 그랬다고 추측했다. Lê Quang Vinh는 1956년 7월 13일에 길로틴으로 처형됐다. Huỳnh Phú Sổ의 아버지 Huỳnh Công Bộ는 호아하오교의 충성스런 신도들에게 반박의 여지 없는 지도자가 되어 있었으나, 정치로부터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그럼에도, 그는 1962년에 납치되었으며, 많은 신도들은 그의 실종에 응오딘뉴의 방첩기관을 욕했다.
1956년 FEC의 철수는 응오딘지엠의 권력 강화에 마침표를 찍었으나, 이 성과는 스스로의 노력 뿐 아니라 미국의 힘 덕분이기도 했다. 미국이 지원을 줄인 덕분에 FEC의 병력 수가 제네바 협약 후 첫해부터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6년 초,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6년 6월 이후로는 잔존한 프랑스 병력에게 지원을 끊어버리겠다고 발표했다. 사이공에서는 응오딘지엠은 프랑스인들에게, 특히나 사이공 전투 중에, 매우 위협적인 환경을 만들어냈다. 대통령의 강해지던 권력과 미국이 그를 지원하기로 한 결정도 프랑스의 이익에 좀 더 친화적인 다른 지도자가 출현하는 걸 막았다. 그의 행정부는 FEC의 급격한 병력 감소와 완전한 처룬을 요구했다. 맟침내 1956년 3월 30일, 베트남과 프랑스 정부는 다가오는 철군의 일정에 합의했다. 1956년 4월 28일, 프랑스는 FEC와 최고 사령부를 해산시키고 다음해로 예정되었던 해공군 훈련을 취소했다. 1956년 봄에 응오딘지엠은 그의 모든 비공산주의 적들에 대해 승리했다.
정리
본격적으로 응오딘지엠 이 새끼한테 개쌍욕이 나오는 편임. 이 씹새끼는 그냥 안보 문제 때문에 종교파 군벌들을 족치기만 한 게 아님. 이새끼는 그저 자기보다 위대한 업적을 가졌거나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모든 종교와 그 지도자들을 없애버리고 싶어했음이 이제 명확하게 드러남. 자기한테 그나마 우호적이던 혁명위 간부들과 정당들은 자기 요구를 들어줬음에도 모조리 체포해버리고, 항복하는 군벌 지도자도 속임수를 써서(확실치는 않지만...) 붙잡아 처형해버리고, 심지어 정치와 전혀 상관없던 종교 최고지도자조차도 의문 속에 납치되었음. 이새끼는 그냥 지가 모든 걸 차지하고 싶었던거야. 미친 독재자임.
한 가지 포인트는... 이 종교파 간부들이 전부 남서쪽 캄보디아 국경 지방들에서 세력이 컸던 양반들이라 전부 캄보디아로 도망갔네... 크메르 루주가 권력 잡기 전에 거기서 빠져나왔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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