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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는 어떻게 노비인구의 증가를 저지했나?

lemie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1.12 12:04:07
조회 1515 추천 20 댓글 1
														





후삼국시대가 개막하기 직전까지 신라의 지배체제는 농민인 정호(丁戶)를 토지에 긴박하고 호적대장에 등록하여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재지사회에서 사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하고 노비를 대규모로 보유하며 이를 경작하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국가에 의한 확고한 농민에 대한 지배가 파괴되고, 각치에서 전란이 확대되고 치안이 불안정해지면서 유민이 증가합니다. 호족으로 성장한 세력가들은 더 이상 눈치보지 않고 이렇게 생성된 유민을 노비화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각지의 호족들 간의 전쟁은 전쟁포로의 노비 공급을 증가시킵니다. 후삼국의 전쟁에서 자기 병력들을 이끌고 공을 세운 호족들은 포로를 분배 받아서 자신의 노비로 삼게 됩니다.


후삼국시대는 이 전쟁포로와 인신매매를 통한 노비인구의 증가가 발생한 시기였습니다.


겨울 10월에 태조가 출병하여 도와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견훤이 신라의 왕도에 들이닥쳤다...

국가 창고의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및 자녀들과 온갖 장인들 중 솜씨가 있는 자들을 취하여 몸소 데리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견훤열전, 927년 10월, 금성을 침공하다.


여름 4월 임술 해군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과 능식(能式) 등을 보내어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강주(康州)를 치게 하니, 전이산(轉伊山)·노포(老浦)·평서산(平西山)·돌산(突山) 등 4향(鄕)을 함락 시키고 사람과 물자를 노획하여 돌아왔다..

고려사 태조 10년(927년) 4월, 수군을 시켜 남해 지역을 정벌하다.


우리나라의 양천(良賤)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성스러운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초기에 뭇 신하들 중에서 원래 노비를 소유하던 자를 제외하고 그 외에 원래 노비가 없던 자는 혹은 종군하면서 포로로 얻었거나 혹은 재물로 사서 이를 노비로 삼았습니다.

고려사, 형법지 노비, 982년 6월, 최승로의 상소문


후삼국시대의 노비인구의 확대는 주로 전쟁 중에 포로를 노비로 분배 받거나(從軍得俘), 전쟁의 혼란기에서 유민이나 가난하여 생계유지가 어려운 자가 자기나 자식을 판매하여 노비가 되는(貨買奴之)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7세기에 삼국이 통일되고 통일신라가 구축한 국가에 의한 인신지배구조가 붕괴하면서, 노비인구가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지배층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사노비(私奴婢)의 인구를 증가시키게 됩니다.


기존의 신라시대까지는 노비의 신분이 세습되는지도 모호하고, 그 신분의 비천함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사노비의 증가는 노비소유권이 지배층의 기득권으로 정착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노비를 양인과 보다 분명히 구분하게 만들고 그 세습적 성격을 강화 시키게 됩니다.


이는 국가가 조세를 수취하고, 요역을 부과하는 기본 단위인 정호(丁戶)의 수를 줄인다는 면에서 국가의 역량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력가들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면서 국가권력을 위협하는 불안정 요소를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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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은 즉위한 직후부터 노비의 존재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갈 나라에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건국 직후부터 시작된 고려 초기 군주들의 노비정책


태조 왕건은 918년 6월 궁예를 타도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6월에 환선길과 이흔암의 역모사건이 발발했습니다. 왕건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려 했을까요?


여기에 더하여 기근이 거듭되고 돌림병이 뒤이어 일어나니 가족을 버리고 등지다가 길에서 굶어 죽는 자가 서로 바라볼 지경이었다. 세포(細布) 1필로 겨우 쌀 5승 밖에 살 수 없어서, 백성은 자기 몸을 팔거나 자식을 팔아 남의 노비(奴婢)가 되고 있으니 짐은 매우 괴롭다. 그 소재를 파악해 자세하게 기록하여 보고하라.”

이에 노비로 전락한 1천여 구를 확보하여 내고(內庫)의 포백(布帛)으로 몸값을 치러 원래 신분으로 환원시켰다.

고려사 태조 원년(918년) 8월 11일


태조는 즉위 2개월만에 사노비를 양인으로 속량하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물론 기록상으로만 보면 이는 태조 왕건의 선의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홍승기나 김장수와 같은 고려시대 노비 연구자들은 태조 왕건의 초기 사노비 해방이 그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궁예 지지층의 노비들을 해방시켜 군사적 기반을 약화하고 위협을 감소하려는 시도였다고 봅니다.


왕건은 세력가들에게 노비의 해방을 강요하지 않고 국가재정으로 몸값을 치뤄서 비교적 불만을 최소화하면서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했다는 거죠.


그러나 1개월 후에 임춘길(林春吉)의 반역사건이, 10월에는 청주의 진선(陳瑄)과 선장(宣長) 형제의 반역사건이 발생합니다. 세력가들이 그의 온건한 접근에도 그다지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최승로는 태조의 행동과 이후 정책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태조께서 일찍이 포로들을 해방시켜 양인(良人)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공신(功臣)들의 뜻을 동요하게 할까 염려하시어 편의대로 하는 것을 허락하시었는데....

고려사, 형법지 노비, 982년 6월, 최승로의 상소문


즉 태조 왕건은 노비의 해방을 추구했지만, 공신들의 반발로 인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는 거죠. 노비해방 직후의 2차례 반란은 아직 불안정한 즉위 직후의 정치적 여건에서 왕건이 노비의 해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노비가 증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왕위에 즉위하고 통일을 완수하는 시점까지도 왕건의 기본적인 정책방향이었습니다.


신검이 동생 청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劒)과 광주성주(光 州城主) 용검(龍劒) 및 문무관료와 함께 항복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들을 힘써 위로하고 해당 관청[攸司]에 명하여 사로잡은 후백제의 장사(將士) 3,200인을 아울러 원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왕이 후백제의 도성으로 들어가 명령하기를, “큰 괴수가 항복하였으니 나의 백성을 범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고려사 태조 19년(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왕건이 승리하고 백성을 위무하다.


936년 9월 일리천전투에서 후백제에게 최종 승리를 달성한 시점에서, 왕건은 전쟁포로를 노비로 분배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며, 백성들을 침범하지 말것(無犯我赤子)을 선포합니다.


이는 삼국시대 사다함이 전공으로 분배 받은 전쟁포로를 양인으로 풀어줬던 것을 미화 하는 것처럼 중앙집권적 국가가 추구하는 기본적인 정책방향이었습니다. 노비의 수를 줄이고, 양인의 수를 늘리는 거죠.


하지만 태조 왕건은 노비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만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노비는 가능한 양인화 하고자 했지만, 반대로 그의 왕권에 도전한 자를 국가지배하의 노비로 둔 것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견지합니다.


또 일찍이 관청[官寺]에 예속된 노비(奴婢)와 진(津)‧역(驛)의 잡척(雜尺)이 권세가에게 투탁(投託)하여 신분을 옮기거나 역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왕후나 궁원(宮院)에 빌붙어 간교한 말로 권력을 희롱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여 재앙에 이르게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양민(良民)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그를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

고려사, 태조 26년(943년) 4월, 태조가 훈요 10조를 내리다.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公州)의 금강(錦江)의 후백제 출신 이들을 경계하면서, 아마도 반역죄나 고려에게 반항하여 관노비가 되거나, 잡역을 수행하게 된 이들의 신분상승을 허용해선 안된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런 왕건의 노비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그의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위협에 대한 사고방식에서 나옵니다.


태조께서는 궁내에 소속된 노비가 궁궐에서 공역할 때를 제외하고는 밖으로 나가 교외에 살면서 토지를 경작하여 세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고려사 최승로 열전, 최승로가 성종에게 시무책 28조를 올리다.


왕건은 국가나 왕실이 소유한 노비(內屬奴婢)가 개경에 상주하지 못하도록 하고, 아마도 궁실이나 나라에 속한 토지를 경작하게 하고 조세를 바치도록 합니다. 이러한 노비들은 아마도 그에게 저항하거나 반역한 무리들이 형벌노비로 전락하여 국가 소유가 된 경우였을 겁니다.


그는 이 무리들이 반역을 일으키지 못하게 개경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하고, 외방에 두어서 내부에서 세력가들과 결합할 가능성을 차단하며, 그들이 양인이 되거나 지배층의 신분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경계합니다. 그들은 국가나 왕실소유의 공노비(公奴婢)이므로 사노비와 달리 세력가들의 사적 지배 대상이 되어 위협으로 작동하지 않으니 양인화할 메리트가 없겠죠.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통해서 왕건의 건국 직후부터의 노비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국가 이외에 지배층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노동력을 가능한 줄이고자 합니다.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세력가가 사적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는 노비를 최소화함으로써 정권의 불안정성을 줄이고, 국가가 노동력을 독점하도록 하고자 한 거죠.


하지만 당시 공신들의 반발은 이 정책을 매우 조심스럽게 추진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왕건이 초석을 놓은 이 노비정책은 노비인구의 확대를 막는데 꽤나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증가한 노비인구를 다시 감소시키는 데는 불충분했습니다.


왕건의 의지는 수십년 후 최승로가 기록할 정도로 분명했지만 당시의 초기 고려의 왕권은 지배층의 기득권을 침해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노비인구를 감소시킬 결정적 정책의 실행은 왕건의 4번째 아들이자, 고려의 4대 왕인 광종(光宗)대에 와서야 이루어집니다.



광종 7년(956), 노비(奴婢)를 안검(按檢)하여 그 시비(是非)를 가려내게 하자, 노비로 〈그〉 주인을 등지는 자가 매우 많아지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조가 크게 행해졌다.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원망하자 왕후가 간곡히 간(諫)하였으나 광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광종 후비 대목왕후 황보씨


태조께서 일찍이 포로들을 해방시켜 양인(良人)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공신(功臣)들의 뜻을 동요하게 할까 염려하시어 편의대로 하는 것을 허락하시었는데, 그 뒤 60여 년에 이르도록 소송을 제기하는 자가 있지 않았습니다.

광종(光宗) 대에 이르러 비로소 노비를 안험(按驗)하여 그 옳고 그름을 판별하도록 명령하셨으니, 이에 공신들은 탄식하고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이에 대해 간하는 자도 없었으며, 대목왕후(大穆王后)께서 간절하게 간청하셨으나 〈광종께서는〉 듣지 않았습니다.

고려사 형법지, 노비, 양천의 법규를 분명히 하라는 최승로의 상서문


918년 태조 왕건의 즉위 시점에서 38년이 흐른 956년 광종은 노비에 대한 안검을 실시합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 20년이 지난 시점이므로, 여기서 노비에 대한 시비를 가린다는 내용은 전쟁포로 출신보다는 그 후손들, 그리고 인신매매를 통해 노비가 된 이들이었을 겁니다.


광종의 노비안검법의 의도는 건국 초기 태조의 노비해방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노비안검법의 시행으로 인해서 공신들이 원망하였고, 이복 남매인 왕후 황보씨가 이를 반대했다는 것은 외가인 황보씨 가문의 입장을 대변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즉 광종은 개경의 문무관료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노비들을 표적으로 노비해방정책을 실시했다는 거죠. 왕권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공신들의 무력기반이 될 수 있는 인적자원을 제거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회사 연구자인 홍승기는 광종이 노비안검의 대상으로 삼은 노비들이 원래 가문 대대로 세습한 노비가 아닌 포로가 된 군인 출신이거나 매매에 의한 노비로서, 조상으로부터 상속된 노비가 아니라 사노비로서 개인의 소유가 된 것이 불법적이라는 명분에 의해서 진행된 것이라 추측합니다.


무릇 공노비(公奴婢)나 사노비(私奴婢)를 유인하여 도망시키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린 자는 첫 번째에는 귀향형(歸鄕刑)에 처하고, 두 번째에는 충상호형(充常戶刑)에 처한다.

고려사 형법지, 노비


관노비(官奴婢)와 사노비(私奴婢)를 유인하거나, 양인(良人)의 자식을 매매한 경우는, 여자이면 초범(初犯)은 율문(律文)에 의하여 단죄하고, 재범(再犯)은 귀향형(歸鄕刑)에 처한다. 남자이면 초범은 귀향형에 처하고 재범은 충상호형(充常戶刑)에 처한다.

고려사 형법지, 호혼


고려는 자신의 노비를 남에게 파는 것(放賣他人)을 금지했습니다. 또한 양인의 자식을 매매하여 노비로 삼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태조나 광종이 사노비의 증가에 편집증적으로 대응하는 양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투탁하거나, 또는 매매를 통해서 사적으로 소유하는 노비를 확대하는 것은 국가의 피지배층에 대한 인신지배의 독점에 기초한 조용조체제를 위협해 국가역량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사적인 무력을 확대할 수 있게 만듭니다.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는 양인을 설득하여 투탁하게 하거나(招誘, 引誘), 매매를 통한 노비의 증식이 주된 루트가 될 터인데, 광종의 노비안검은 바로 이 부분이 당시 고려에서 불법화된 상태였고 그를 명분으로 삼아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고려의 지배층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행위였고, 상당한 반발을 받았습니다만 광종은 강행합니다. 이러한 노비안검은 단순히 노비해방에 그치지 않고 기존 공신의 숙청과 지방의 유력자들의 등용, 과거제의 도입과 같은 왕권강화 과정과 병행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고려 건국은 왜 한국 최초의 혁명인가?(링크) 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다루고 있으니 안 보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길...


광종 때에 이르러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켜 부리는 일[役使]이 날로 많아지니, 곧 밖에 살던 노비까지 징발하여 부역에 충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궁(內宮)의 몫[分]으로는 경비 지급이 부족하여 창고의 쌀까지도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또 궁궐 내에서 기르는 말의 수가 많으니 헛되이 소비하는 것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국경에 환란이 있게 되면, 군량이 원활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오로지 태조의 제도에 의거하여 궁궐 안의 노비·마구간에 있는 말의 수를 헤아려 결정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내보내십시오.

고려사 최승로 열전, 최승로가 성종에게 시무책 28조를 올리다.


광종은 태조대에 공노비(公奴婢)가 외방에 거주하도록 한 것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공역을 수행하게 했다는 이유로 최승로의 비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최승로가 이 대목에서 궁궐 내에 기르는 말의 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후삼국 시대에 형벌노비로서 공노비가 된 이들은 수십년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 태조가 우려하던 반역자라기 보다는 국가와 왕실이 소유한 인적자원의 성격에 가까워집니다. 광종은 태조와 달리 그들을 불러들여 개경에 거주하게 하고, 공역에 투입하며 왕실재정만이 아니라 국가의 재정으로 먹여 살립니다.


최승로는 왜 하필 궁궐에 소속된 노비와 말이 너무 많다고 지적할까요? 광종이 궁궐에 속한 노비의 수와 말을 많이 기른다는 것은 광종이 사적으로 직접 통제하는 병력자원과 그들이 탑승할 군마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광종은 세력가들의 사노비 소유를 제한하면서 반대로 개경에서 자신이 소유하는 노비의 수와 이들이 탑승할 군마를 늘립니다. 이는 왕권강화와 숙청과정에서 발생할 반역을 제어할 수 있는 사적인 무력기반이 되었겠죠?


종(光宗)이 참소(讒訴)를 믿어 장수와 재상을 벌주고 죽임에 이르러 스스로 의심이 생겨 주군(州郡)에서 풍채 있는 자를 선발하여 들어와 시위하게 하였는데, 당시의 의논이 번거롭기만 하고 이로울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려사 병지(兵志) 2권, 숙위


광종은 노비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유력자들을 군인으로 선발해서 개경에서 숙위하게 합니다. 궁궐의 노비와 말들이 광종 개인의 사적 무력기반이라면 지방 유력자 출신 시위군은 개경의 공신과 문무관료들을 견제하는 지방세력의 등용과 공적 무력기반의 확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무력기반은 노비안검법, 공신의 숙청, 해외 망명자와 지방의 재지유력자의 등용과 과거제 도입과 같은 광종의 개혁정책에 대한 기득권층의 반발을 제어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겁니다. 공신들은 불만을 품었지만 감히 광종에게 도전할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사노비의 해방이 광종과 초기 고려에게 왜 중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죠. 지배층의 사노비 소유의 확대를 저지하고, 이를 양인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가의 사적 무력기반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겁니다.


광종의 노비안검법을 비롯한 개혁정책은 955년 그의 장남 경종(景宗)이 즉위하면서 완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즉위하시어 오래 동안 참소하고 중상한 문서들을 불사르게 하시고 여러 해 무고한 죄수들을 석방하시니 원한과 울분이 모두 제거되어, 조정과 민간에서 칭찬하고 축하하였습니다...

경종께서 즉위하시니[踐祚] 옛 신하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피해를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모두 후생(後生) 참적(讒賊)들이므로 진실로 애석하지 않습니다.

고려사 최승로 열전, 최승로가 성종에게 글을 올려 선왕들의 업적을 평가하다.


최승로는 광종 시기의 공신 숙청과 개혁을 잘못된 것으로 평가절하하면서, 반대로 경종 시기 복수법의 시행으로 인한 무분별한 살해 행위에 대해서는 별 문제 없었던 일로 치부합니다. 이는 광종의 개혁과 지방세력의 등용에 재경사족들이 반감을 심하게 품었으며, 이에 대한 사적 복수에 대해서 통쾌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성상(聖上)께서는 지난 일을 깊이 거울로 삼아 천한 자가 귀한 사람을 능멸하지 못하게 하시고, 노비와 주인의 구분에 있어서 공정한 도리로 이를 처리하십시오.

대체로 벼슬이 높은 자는 이치를 알아 불법적인 행동이 적으며, 벼슬이 낮은 자는 족히 잘못된 것을 꾸며낼 수 있는 지혜가 없으니 어찌 양인으로 천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오직 궁원(宮院) 및 공경(公卿)들 중에서 비록 간혹 위세를 가지고 불법적인 것을 행하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정치가 거울 같아서 사사로움이 없으니, 어찌 그들이 제멋대로 하겠습니까?

고려사 형법지, 노비, 성종 원년(982년) 양천의 법규를 분명히 하라는 최승로의 상소


982년 최승로는 광종의 노비안검을 비판하면서 양인과 노비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 천한 자가 주인을 능멸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후 성종 6년 원래의 주인을 모욕하거나 다툰 이를 환천(還賤)하라는 법령이 기록되므로 아마도 이 시기에 기존에 노비에서 양인이 된 이들에 대한 환천이 실시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광종 시기에 가혹하게 기존 개경의 공신들을 몰아붙인 고려 왕실이 경종과 성종 시기를 거치면서 공신들의 기득권을 어느정도 보장하는 타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승로는 광종시기 궁궐에서 거주하던 공노비와 숙위군의 수를 줄이라고 주장하는데, 개경에서의 왕권-신권 사이의 긴장관계를 야기하는 무력기반을 감축하자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타협을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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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의 노비안검법은 무효로 돌아가버린걸까?-----


그렇다면, 태조대부터 이어져온 고려 군주들의 사노비 인구를 제어하려는 시도는 이 타협으로 인해서 실패로 돌아간 것일까요?


하지만 이는 고려군주들과 신하들이 타협한 결과이지, 일방적인 양보의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는 고려전기에 노비를 통한 대토지 경영이 실존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광종의 개혁은 중지되었으나, 양인을 노비로 만드는 것이 불법적인 것이라는데 대해서는 광종을 거의 증오하다시피하는 최승로 조차도 인정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태조부터 광종에 이르는 노비인구의 억제정책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다만, 이 시기에 노비에 대한 사적 소유의 권한은 분명해집니다. 1039년 정종(靖宗)대에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 제정되어 양인과 천인이 혼인했을 때, 그리고 주인이 다른 노비가 혼인했을 때 그 자식이 누구의 것이 되는지 그리고 노비신분이 세습된다는 게 명확 해지죠. 다만 이것이 양천교혼을 허락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노비인구의 증가를 가능하게 하는 양인의 노비화는 명확하게 불법화되어 있기 때문이죠.


자손을 합의 하에 판매(和賣)하여 노비로 삼게 한 경우, 도(徒) 1년, 속여서 팔아치운(略賣) 경우, 〈도〉 1년 반에 처하고, 〈그와 같은 상황을〉 알면서도 고의로 산 경우, 1등급을 더한다.

고려사 형법지, 호혼


이러한 법령은 경종이나 성종, 그리고 그 이후의 고려 전기의 군주들이 지배층의 기득권을 보장하기는 하지만, 양인의 노비화를 통한 노비인구의 증가를 허용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경종과 성종대에 지배층에 대한 양보가 이루어졌다면, 마찬가지로 지배층 역시 무분별한 사노비의 확대를 추구하지 않는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최승로가 어찌 양인으로 천인을 만들겠냐(以良作賤)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때문인지 고려 전기의 노비는 경작노비보다는 가사노비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성종 987년에 고려사에 남의 노비를 차지한 자가 보상해야 하는 노비의 공정가격은 성인 남자노비가 포 100필, 성인 여자노비가 120필로서, 여자노비의 가격이 더 높습니다. 그들의 경작 노동력보다는 집안 내에서의 가사노동력이 선호되었다는 의미죠.


고려의 군주들은 대토지를 경영할 만큼 다수의 사노비를 지배층이나 유력자가 보유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대신, 그들에게 다른 경제적 대가를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성종 시기 고려의 왕권과 지배층 간의 정치적 타협이 왜 노비인구의 증가를 저지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비인구의 증가를 가로막는 고려전기의 토지제도


만약, 노비가 고려 초기의 지배층에게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면, 광종의 개혁은 훨씬 더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을 겁니다. 그가 등용한 지방의 유력자들도 광종의 개혁에 불만을 품었을 것이고, 이후 성종대의 정치적 타협도 어려웠겠죠.


저는 노비인구의 억제가 단순히 국가의 정책과 법령을 통한 강제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봅니다. 노비가 경제적으로 덜 필요한 상황, 즉 수요가 제어되지 않으면 고려 전기의 충분히 강력하지 않은 행정력으로는 노비인구의 확대를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니까요.


무엇이 고려 전기의 지배층이 노비의 필요성을 충분히 강하게 느끼지 않도록 만들었을까요?


다시 후삼국시대로 돌아가봅시다. 이전 연재글 고대, 중세 한국에는 왜 대지주가 없었을까?(링크) 에서 재지기반이 없던 무장세력이 읍치를 장악하고 호적대장을 통해 손쉽게 지방에서 세력을 구축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신라 중앙조정과 지배층이 가진 수조권(收租權)을 통해 손쉽게 경제적 기반을 확보합니다. 즉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은 직접 토지를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 결합되어 있는 정호(丁戶)들에게서 조세를 수취하는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다만 감히 공공연하게 왕을 칭하지는 못하였다.

스스로 서명하기를[自署] 신라서면도통(新羅西面都統)....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食邑) 2,000호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견훤 열전, 892년 신라 서면도통을 자칭하다.


흥달(興達)은 견훤(甄萱) 휘하의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 성주(城主)였다.....

태조가 이를 기쁘게 여겨 흥달에게 청주(靑州)의 녹읍을, 아들 준달(俊達)에게는 진주(珍州) 녹읍을, 웅달(雄達)에게는 한수(寒水) 녹읍을, 옥달(玉達)에게는 장천(長淺) 녹읍을 하사하였다. 또 밭과 집(田宅)을 하사하여 치하하였다.

고려사 열전, 흥달(興達)


이총언을 본읍(本邑) 장군(將軍)에 임명하고, 이웃 읍(邑)의 정호(丁戶) 229호를 더 하사하였다.

고려사 이총언(李悤言) 열전


이 시기에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이라고 합니다. 그 단위는 신라의 정호(丁戶)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보이며, 여기서 수취한 조세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셈이죠.


원래 재지기반이 없던 호족들이 백성을 다 노비로 삼고, 땅을 갈취하려고 했다면 사람들이 그들을 지지해주지 않았을 테니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겁니다.


후삼국시대의 각 국가들은 호족들을 포섭하면서 그들이 원래 점유하고 있던 지역이나, 또는 다른 지역에 식읍이나 녹읍을 내려서 그 수조권을 추인하거나 지급하는 식으로 경제적 혜택을 부여합니다.


후삼국시대의 녹읍은 대부분 현지 호족의 지배권을 추인하는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아서 국가의 직접지배는 통일신라에 비해 불완전했을 겁니다.


마땅히 너희들 공경(公卿)이나 장상(將相)과 같이 나라의 봉록을 받는 이들은 내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헤아려 너희들의 녹읍(祿邑)에 편제되어 있는 가호(編戶)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만약 가신(家臣) 가운데 아는 것 없는 무리를 녹읍에 보낸다면,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힘써 마음대로 약탈할 것이니 너희 또한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고려사, 태조 17년(934년) 5월 6일


이 사료를 보면, 녹읍에서 조세를 수취하는 것이 국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조권자의 가신(家臣)이 파견되어 이루어지며, 그 대상은 녹읍에 편성된 가호(編戶)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와 달리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직접 지배가 이루어지는 셈이죠.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통일이 완수되기 2년 전에 녹읍의 수조권자들에 대해서 그들의 무분별한 수취를 경계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경우는 처벌하여 녹봉을 빼앗고 관직을 박탈할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이는 물론 백성을 위한 선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단순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라의 멸망 이후 이완되었던 국가의 인신지배를 복구하고 조세의 수취가 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국가의 지배체제를 매개로 하고자 하는 한 걸음이었다고 봐야겠죠.


태조 왕건이 이 불완전한 상태를 방치했을까요?


태조(太祖) 23년(940) 처음으로 역분전(役分田)을 제정하였는데, 후삼국을 통일할 때의 조신(朝臣)이나 군사들은 관계(官階)를 따지지 않고 그 사람의 성품과 행동의 선악(善惡)과 공로의 크고 작음을 보고 차등 있게 지급하였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전시과


훗날 역분전(役分田)을 제정하면서 사람의 성품과 행실의 선악(善惡), 공로의 대소(大小)를 보고서 차등 있게 공급하였는데, 박수경에게는 특별히 전(田) 200결(結)을 하사하였다.

고려사 박수경(朴守卿) 열전


태조 왕건은 삼국통일이 완수된 후 4년이 지나서 녹읍제를 역분전(役分田)으로 개편합니다. 녹읍이나 식읍은 그 조세의 수취가 수조권자에 의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에 역분전의 수조권은 국가를 매개로 하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녹읍과 식읍과 같이 직접적으로 수취하도록 하는 방식 이외에 역분전과 유사한 수조권 분급이 고려 내부의 지배층의 경제적 혜택으로는 보다 일반적이었을 겁니다.


숭겸이 명령에 따라 쏘았는데 과연 그대로 맞히니 태조가 장하게 여겨 감탄하면서 명하여 평주로 본관을 삼게 하고, 기러기를 쏜 근처의 밭 3백 결도 함께 하사하여, 대대로 그 조세를 받아 먹게 하였으며 인하여 그 땅을 궁위(弓位)라 이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평산도호부, 인물, 신숭겸


태조는 신숭겸에게 토지를 하사하여 대대로 조세를 수취할 수 있게(世食其租) 했는데, 이는 녹읍과는 다릅니다. 녹읍이나 식읍은 통일 이후에는 지급을 확인할 수 없는 반면에, 수조권의 성격을 띤 토지의 지급(賜田)은 이후로도 계속됩니다.


아마도 역분전의 지급 시점부터 조세의 수취가 수조권자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 지배체제에 의해서 수취가 이루어지고 운송되어 수조권자에게 공급되는 양상이 점차 확대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조세의 수취대상인 정호(丁戶)는 신라시대처럼 국가의 지배하에 있고, 수조권자는 녹읍과 달리 직접적으로, 그리고 임의로 그들을 수취할 수 없게 되는 셈이죠.


정종(定宗) 4년(949) 광종(光宗)이 즉위하여 원보(元甫) 식회(式會)와 원윤(元尹) 신강(信康) 등에게 명령하여 주현(州縣)의 세공(歲貢) 액수를 정하게 하였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공부


광종은 즉위한 해에 주현의 공물의 수취액수를 정리하였으며, 955년, 956년(광종 6, 7년)에 토지조사(量田)를 실시하였습니다. 국가가 조세의 수취액수를 정하고 토지조사를 실시한다는 것은 기존의 녹읍제와 달리 지배층의 임의적인 수취가 국가에 의해 점차 제한된다는 걸 말합니다.


이러한 개편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고 꾸준히 이루어졌을 겁니다. 940년 역분전의 도입으로 단숨에 수조권자와 정호(丁戶)가 분리된 게 아니라 국가의 지방통치 시스템이 점차 강화되고, 조운과 역참 등 운송체계가 구축되어 가면서 말입니다.


수조권자가 수취대상인 정호(丁戶)에 대한 지배에서 분리되면서, 과거 지방을 지배했던 호족들은 개경에 거주하는 상층 호족들의 경우에는 과거 신라의 지배층처럼 농업경영에서 분리되어 버립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노비는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적 무력기반으로의 노비는 광종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감소하게 되고, 성종 시기 왕권과 지배층 사이의 정치적 타협을 거치면서 그 필요성이 감소합니다.


경종(景宗) 원년(976) 11월에 처음으로 직관(職官)과 산관(散官) 각 품의 전시과(田柴科)를 제정하였는데, 관품(官品)의 높고 낮음은 따지지 않고 단지 인품(人品)으로만 이를 정하였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전시과


경종(景宗) 2년(977) 3월 개국공신(開國功臣) 및 의(義)를 좇아 귀순한 성주(城主) 등에게 훈전(勳田)을 50결부터 20결에 이르기까지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공음전시


경종은 즉위한 다음해에 기존의 역분전을 전시과(田柴科)로 최초로 개편하고(始定), 그 다음해에 공신들에게는 훈전을 추가로 지급함으로써 광종대의 과격한 왕권과 지배층 간의 대결구도를 완화하고 지배층에게 경제적 혜택으로서 수조권을 분급하게 됩니다.


성종 11년(992년)에 공전(公田)의 조(租), 즉 토지에 할당된 수확량이 1/4로 종해지고, 논과 밭의 상중하등에 따라서 1결당 수취량이 정해집니다. 김건태에 따르면 사전(私田)의 수취량도 공전과 일치합니다.


이제 수조권자가 얼마나 수취할 수 있는지도 국가에 의해 명확하게 규정된다는 거죠.


또한 동년에 이렇게 수취된 조세를 운송하는 조운선의 포구(浦)의 운송가격(輸京價)이 정해집니다. 포구의 운송비용이 존재했다는 건 조세의 운송이 민간, 아마도 포구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 운송가격이 992년에 정해진다는 건 가격이 원래는 호족과의 협상에 따라 유동적이었다는 것이고, 그 가격이 정액으로 정해진다는 건 이제 운송에 있어서도 국가의 통제와 영향력이 확대되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정종(靖宗, 1018~1046)대에 국가가 정한 12개의 조창(漕倉)에서 국가가 직역을 부과하여 국영으로 운영하는 조운선(漕船)에 의해 운송되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이제 조세의 운송은 민간의 손에서 완전히 국가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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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 1호선 목간----


13세기 초중반에 침몰한 마도선에서 발견된 목간 중 일부는 개경의 관직자에게 향리인 호장(戶長)이 보낸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화물의 취합을 향리가 해서 개경에 보내는데, 이 목간에는 전출(田出)이란 명목으로 곡물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현물로 전복, 꿩등의 해산물이 기록되어 있죠.


농업사 연구자 김건태는 "결부제의 사적추이"에서 이에 대해 수조권자에게 해당 수조지(田)에 할당되어 있는 곡물과 쌀로 책정되어 있는 값어치에 상당하는 현물을 수취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고려 초기부터 차곡차곡 정비되기 시작한 수조권의 분급제도인 전시과는 경종대의 왕권과 지배층간 타협 이후 점차 완성되어, 지배층에게 직접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안정적으로 필요한 곡물과 현물을 수취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게 됩니다.


국가는 지방통치의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들을 통해, 국가의 공적 지배하에 수취체계를 지배하고 수조권자는 이런 공적 지배체제를 매개로 하여 수조권이라는 경제적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 거죠.


굳이 왕실과 조정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가며 다수의 노비를 소유하고 이들을 관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높은 관직을 얻거나 공을 세워 수조권을 추가로 분급받는 게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근데, 이건 중앙 조정의 지배층에게만 해당하는건 아닐까요?


군현(郡縣)의 안일호장(安逸戶長)들에게 직전(職田)의 반을 주었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전시과, 목종 원년(998년) 3월


안일호장이란 군현의 호장 중에 나이가 70세에 달한 이들입니다. 이들에게 직전(職田)을 절반을 내려주었다는 건 이미 실무를 담당하기에 너무 나이가 든 이들은 직역(職役)을 수행하는 대가인 수조권을 절반만 제공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이는 개경에 있는 지배층만이 아니라 재지사회에 있는 향리들에게도 수조권이 분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죠.


문종(文宗) 30년(1076)에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를 경정(更定)하였다....

제12과, 전지 40결, 시지 10결....대상(大相)....

제13과, 전지 35결, 시지 8결...원보(元甫....

제14과, 전지 30결, 시지 5결...원윤(元尹)...

고려사 식화지, 전제 전시과, 문종 30년(1076년)


1076년 수정된 전시과에서는 향리의 직책명들이 등장합니다. 1인당 30~40결의 밭(田)과 5~10결의 시지(柴地), 땔나무등이 할당되어 있죠. 이는 향리들 역시 수조권의 분급이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95년 추정 신라촌락문서에 촌주에게 할당된 촌주위답(村主位畓)이 19결 70부였던걸 생각하면 제공되는 혜택이 상당히 커진 셈입니다.


7세기 신라와 비교했을 때 11세기 고려의 토지생산성이 더 높을 거라는 걸 감안하면 고려의 향리는 이전의 신라나 이후의 조선과 비교했을 때 합법적인 경제적 혜택이 가장 잘 배려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영(李永)은 자가 대년(大年)이고 안성군(安城郡) 사람이다. 아버지 이중선(李仲宣)은 안성군의 호장(戶長)으로 경군(京軍)에 선발되었다.

이영은 어려서부터 스승을 따라 공부하였고, 아버지가 죽자 영업전(永業田)을 물려받아 서리(胥吏)가 되려고 정조주사(政曹主事)에게 문서를 주었는데, 〈이영이〉 읍(揖)만 하고 절하지 않으니 주사(主事)가 노여워하며 욕하였다. 이영이 즉시 그 문서를 찢어버리며 말하기를,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벼슬할 것인데 어찌 너희 같은 무리에게 예를 차리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사 이영(李永) 열전


12세기 초 숙종 시기 이영의 기록은 향리에게 수조권이 분급될 뿐만 아니라 하급의 실무직인 서리가 되는 것 만으로 이 수조권의 상속이 가능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외에 조세수취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향리는 수취과정에서 수수료 혜택을 받습니다.

처음에 좌창(左倉)과 우창(右倉)의 말[斗]과 평미레[槩]가 법제에 맞지 않아 쌀[米] 1석(石)을 납부하는데, 더 내는 것이 2두(斗)에 달하였으며, 외리(外吏)들이 이를 이유로 더 많이 거두었으므로 오래도록 민폐가 되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전제(田制), 조세(租稅) 명종(明宗) 6년(1176) 7월



이처럼 고려의 수조권 기반의 토지제도는 재경사족부터 지방의 향리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지배층에 대한 경제적 혜택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조권 기반의 토지제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국가가 조세를 수취하는 원천인 충분한 노동력이 그 경작지와 결합되어 국가의 독점적인 지배에 놓여야 한다는 거죠.



바로 다음 글 고려 지배층은 농업경영에 대체로 무관심했다(링크)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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