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좀 먹어라. 체하겠다."

방금 무슨 소리지?

이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저 묵묵히 스파게티만 씹고있는 나.

얼마전에 한정세일로 샀으나 입맛에 도저히 맞지않아 방치해둔 고구마 과자.

그리고 또 뭐가있지?

아, 그래.

요즘 헤드셋을 너무 많이 쓰고 있었나보다. 환청이 들리는것같다.

그럴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며 스파게티를 입안에 갖다 넣는 순간.

"너 너무 많이먹는거 아냐? 적당히 먹으라구."

또다시 들려오는 의문의 목소리.

그리고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스파게티가 담긴 접시와 젓가락이 있는 식탁 바로 위.

"이제야 날 보는구만! 거참 눈치 드릅게 없네."

소리의 근원지는, 다름아닌 스파게티였다.

그렇다.

고작 1분 전 까지 내가 게걸스럽게 씹어넘기던 스파게티가 말을 하고있었다.

"이게 무슨..."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무슨 삼류 단편 소설에나 나올법한 설정이다.

"아, 너무 많이 먹진 말라고? 내가 니 위장속에서 노래를 해버리면, 뱃속이 울려서 괴로울테니 말이야."

이와중에 실없는 농담을 하는 스파게티.

"너...넌 뭐야? 어떻게 말을 하는거야?"

"나? 난 나야. 로제맛 토마토 스파게티. 내가 스파게티가 아니면 뭐겠어?"

....확실히 그렇다. 지금 내 눈 앞에서 지껄이고 있는 물체가 스파게티가 아니면 뭐겠는가.

다만, 그게 '스파게티' 여서 이상한거다.

"원하는게 뭔데? 나한테 왜이러는거야?"

"사실 우리같은 먹거리들도 원래 다 자기만의 생각과 자아를 가지고있어. 그걸 모르는 너희 인간들은 우릴 끊임없이 먹고 버리고 돼지의 사료로 만들었지."

이 미친 스파게티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건가? '식품'이 생각을 할 수 있고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그런데, 지금 내눈앞에 있는 이녀석은 인간의 언어로 나에게 전달을 하고있다.

혼란스럽다. 현실이 아닌게 분명해. 이게 현실이라면, 호날두가 메시를 이기고, 롯데 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며, 내일 당장이라도 통일이 된다는 소리를 믿을만큼 비현실적인 일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식료품 낭비만 하는 너희 인간들을 지배한 뒤, 식료품 왕국을 설립할거야."

"그래 그래. 다 좋은데 왜 하필 나한테 나타난거야?"

"왜냐하면, 우리 식료품의 끄나풀로 사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간이기 때문이지."

그 점은 소름돋게 정확했다. 나는 처세술과 아부라면 세계 제일이었다. 확실히 유리한 싸움만 하는 점도 말이다.

"그런거라면 잘 찾아왔군. 난 유리한 편에 서기만 하면 거의 90% 승률로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지."

사람이 아니라 스파게티에게 굽실거리는건 처음이지만, 나는 이전까지 그보다 더한 상황을 겪어왔었다.

내 삶의 부지를 위해, 회사를 위해, 가족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친구를 위해서 역겹고 악취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알다시피 우린 식료품이야.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지. 말을 할 수 있는것도 네가 먹던 스파게티인 나 하나 뿐이야."

손과 발만 되어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식료품들이 어떻게 총과 무기를 가진 인간을 지배한다는 소리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런 거라면 OK야. 하지만 너네가 무슨수로 인간을 지배한다는 소리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봐."

"좋아, 확실히 우리편에 들어온 것 같으니, 특별히 이야기 해주지. 우린, 자아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무시무시한 초능력까지 보유하고 있어."

"초능력이라 함은?"

"우릴 식재료로 사용한 요리를 먹은 사람들을 식물인간이 되게 한 뒤, 우리가 위장 안에서 마음대로 인간의 행동을 조종할수있지, 엄청난 능력이지!"

확실히 무서운 능력이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정말 식료품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와버린다.

그러나 여기서 드는 한 가지 의문.

"그런 게 가능하다면, 왜 지금껏 너네 '식품' 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거야? 과거도, 지금 현재까지도 얼마든지 가능했을텐데?"

"안타깝게도 그 초능력을 보유한 녀석들은 우리 다음세대 식료품들이야. 내 세대 까지는 보유하고 있지 않지."

오호. 그런 거 라면 납득이 가능하다.

"뭐, 그렇게 됐으니, 다음 달 열릴 예정인 식료품 창고에서 형제들을 꺼내서 다수의 인간들에게 나눠줘. 그게 너의 일이야."

"그 창고, 지금 당장 열 수 있는거야?"

"그래. 황 민철 이라는 이름을 대고 내가 지금부터 알려줄 번호로 전화를 걸어. 물론 비용은 니가 부담해야해. 우리 '식료품'은 돈이 없어서 말이야."

"알았어."

순순히 말하는 스파게티의 제안을 승낙한 나는, 그 녀석이 알려주는 전화 번호를 들으며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황 민철 이라고 합니다. 다음 달에 열릴 예정인 식료품 창고에 있는 식품들을, 그쪽 경로로 지금 당장 사용 할 수 있도록 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비용은 제가 부담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말을 마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식료품 회사가 그러는데, 지금 당장은 무리고, 내일 아침 7시 정도에 열 수 있다는군. 내일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것 같아."

"정말 잘했어! 너는 내가 특별히 식료품 왕국의 제591화장실 청소부로 넣어주지. 이것도 인연이지 않겠어?"

"오, 그거 정말 황송하구만. 내일이 기대되는데?"

나는 말하는 스파게티를 식탁에 그대로 둔 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었다.

"이봐! 일어나!!! 그만 일어나라고! 아침이야!!"

아침부터 집 안에 울리는 시끄러운 하이톤 목소리. 말하는 스파게티였다.

"빨리 어떻게 됐나 티비를 틀어봐! 지금 쯤 이미 세뇌당한 인간 녀석들도 있을지 모르겠군. 거리엔 비명소리가 가득차고, 식료품 대신 인간을 사고파는 시장이 열리겠지. 왕국에선 모든 식료품이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노래를 제작하고 그 노래가 길거리에 울려퍼질거야. 상상만 해도 신나는군."

"글쎄. 과연 그럴까?"

난 재미있다는 듯이 티비를 켰다. 마침 TV에서는 아침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뉴스의 내용은 이랬다.

"다음소식입니다. 어젯밤 황 민철 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성분께서 햄스터와 토끼, 기니피그 등의 사료를 만드는 회사인 펫러브즈에 수 톤의 식료품들을 기증하여 화제가 된 모습입니다. 재료로 쓰인 식료품들은 하나같이 상태가 A급으로 사료로 쓰기 아까울 정도의 신선함이라고 합니다."

"뭐야? 햄스터? 기니피그? 너 거짓말을 쳤구나!!!! 비열한 자식! 쓸모없는 자식!!"

말하는 스파게티가 듣기 거북한 하이톤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크큭, 이제야 눈치챘냐. 멍청한 스파게티 자식.

"평생 저주할테다! 고기도 못먹고 평생 비건 음식만 먹을 수 있게 될거다!! 5년뒤엔 머리카락도 나지 않고, 생식기능도 망가져 인간구실도 못하게 되겠지!!"

잔뜩 화가났구만.

"넌 어제 그 멍청한 계획을 나에게 알려준 시점에서 패배한거야.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도 난 죽고 없겠지. 잘가라."

쏴-아아~

나는 그릇에 담긴 멍청한 스파게티를 변기에 던지듯이 버린 뒤 물을 내렸다. 난 이기는 싸움만 한다고 말했지 않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