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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테라 공성전 : 종말과 죽음 2부] 5:xv 파편들

말카도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1.15 14: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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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xv 파편들



벼락이 하늘을 가르고, 그 틈으로 짙은 연기가 흘러나온다. 맹렬한 지옥의 풍광이 춤을 춘다. 검은 비가 수문을 찢고 쏟아붓는 몬순의 호우처럼 내린다. 장대한 구름이 갈라지는 너머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이 엿보인다. 하지만 밤은 그저 펼쳐지는 워프의 빛없는 육신이요, 별은 깜빡임 없는 사악한 눈동자일 뿐이다.






라우트의 늑대, 타라스 그룬리(Tjaras Grunli)가 마지막 숨을 내쉰다.


이레닉 망루의 폐허 속에 등을 기대고, 우슬릿 판에 어깨가 기댄다. 흡사 영안실 바닥에 누운 시체나 다름없다. 상처가 너무도 깊어 움직일 수조차 없다. 블러드 엔젤 군단과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 화이트 스카 군단, 샐러맨더 군단, 부서진 군단, 최정예 정규군 소속의 필멸자들까지, 모두의 시신이 사방에 널려 있다. 살아있는 것은 피로 흠뻑 젖은 채 도끼를 쥔 그룬리 뿐이다. 쓰러진 형제들의 시체 위로 그룬리가 쓰러뜨린 데스 가드 군단병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일어설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끝없이 펼친 복수와 저항의 흔적이다.


하늘은 검은 스모그로 가득 찼고, 가장 낮게 드리운 자락이 그의 얼굴에 닿을 기세다. 반쯤 보이는 별들이 음침한 휘장 너머 눈짓한다. 마치 지켜보고 있다는 듯이. 저 별들 중 펜리스의 겨울 밤에 떠올랐던 별들이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데스 가드 군단의 보르크스는 그가 죽도록 내팽개친 채 떠났다. 처형도, 가치 있는 적을 위한 명예로운 처형도 없이.


그리고 그룬리는 죽는다. 그 역시 안다. 그룬리는 숨을 들이쉬며, 그것이 마지막 호흡이 될 것을 안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이킬 수 있는 호흡임을 안다. 그가 내뱉고 나면, 더 이상의 숨결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룬리는 마지막 호흡을 붙들고 있다. 피가 가득 찬 허파 속에, 마지막 삶의 조각과 마지막 열기, 마지막 거품으로 붙든다. 아직 그가 죽지 않았기에.


데스 가드 군단이 빚은 병든 자들의 대열 뒤를 따라 불생자들이 이리저리 쏘다니며 몸부림친다. 입에는 구더기가 가득하고, 시체를 갉아먹을 태세가 만반이다. 놈들이 쓰러진 늑대를 향해 서로 더 다가오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들 중 구부정한 몸뚱이의 빼빼 마른 놈이 있다. 갈고리와 고리칼을 든 놈이다. 그가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 그의 내장을 긁어내어 거기로부터 미래를 읽으려 들리라(Haruspice, 각주 1).


타라스 그룬리는 마지막 숨을 내쉬기를 거부한다.






화이트 스카 군단병 소죽은 그대로 워드 베어러 군단병의 머리에 자신의 툴와르를 꽂아 넣는다. 발뒤꿈치에 힘을 실어 지렛대 삼아 다시 검을 뽑는다.


갈륨 관문의 폐허 속, 화염의 고리에 포위당한 채 소죽은 그의 형제들을 이끌며 영원한 급습을 떠난다. 상위 차원의 전략도, 아카무스나 헤게몬 사령부가 내리는 지시도 없다. 복스에서는 그저 마른 붓 소리를 연상시키는 잡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움직이고, 살육하고, 죽이고, 찢겨나간 개활지를 누비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공격을 퍼붓는다.


이런 기동전은 그의 형제들,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과 블러드 엔젤 군단에 속한 형제들의 철학과는 상반된다. 소죽은 그 형제들이 아직도 자신을 따르고 있음에 놀란 채다. 이미 계급은 무의미하다고 여겼건만. 하지만 최소한 그게 헤아릴 수 있었던 9시간 동안 그들은 32차례 교전을 벌였고, 그는 매번 승리를 이끌었다. 지금 전사들이 소죽을 따르는 것은 계급 때문이 아니다. 더 값진 것, 존중 때문이다.


전사들은 불타는 시신들이 쌓인 도랑 위의 너덜너덜한 석조 절벽 위에서 잠시 멈춘다. 갈륨 관문의 폐허에서, 소죽은 힌드레스 요새와 남부 팔라틴의 포대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그 대신 그의 눈에 든 것은 완전히 무너진 세상을 대변하는 부서진 기념물, 어떻게 봐도 사자의 문을 떠올리게 하는 폐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전쟁의 소용돌이라는 혼란 속에서 생각보다 더 여정을 헤매고 다녔던 것이 아니라면 그럴 리가 없다. 소죽은 다른 기념물이나 다른 관문일 거라고 추측한다. 물론 그는 황궁의 구조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오직 사냥해야 할 적 뿐이기에 그 무지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냥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


서쪽에서, 미사토로 빚어진 협곡과 타래처럼 이어진 참호 일대에서 움직임이 느껴진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적의 대형이다. 그가 이끄는, 점점 수가 줄어드는 병력보다는 확실히 우세한 숫자다. 하지만 놈들은 그 수 때문에 느릴 것이고, 소죽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소죽이 적 병력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희망이 있겠습니까?”


기진맥진한 채인 호르트 칼리잔(Hort Kalizan) 소속의 병사 하나가 묻는다.


“없다.”


소죽이 답한다.


“하지만-”

“희망에 대한 약속이 너무도 크기에 지치는 것이다. 희망이 줄어들고 있음에 기뻐하도록 해라. 더 이상 바랄 희망이 없을 때, 두려워할 것 역시 남지 않는다.”






죽음은 그 범위를 점점 더 넓힌다.


황폐해진 팔라틴의 대지 위로, 원소의 폭풍 속에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포위당한 충성파와 침략해 오는 반역파의 부대가 격돌한다. 들불, 매서운 바람, 쏟아지는 검은 비, 치명적인 가스와 연기가 그들을 휘감는다. 모두가 거점을 확보하고, 기동하고, 엄폐처를 찾고, 방향을 잡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전장은 그런 시도를 매번 배신한다.


끈적하게 엉켜오는 진흙밭 위로, 제국 정규군에 속한 부대들은 방향을 찾을 수 있는 표식을 찾아 비틀대며 폭우 속을 헤친다. 온 사방으로 뱅뱅 도는 나침반을 이제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보루와 참호에 갇힌 보조병단 여단들은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적을 찾는다. 상처 투성이의 절뚝이는 기갑부대들이 거리를 헤집으며 광기 어린 선회를 거듭하지만, 유도 시스템은 헛소리만 내뱉을 뿐이다. 기계교단 병력들 역시 정확한 경로를 처리하지 못한다. 그 덕분에 사전 코딩된 전투 계획도 실현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있다. 아스타르테스 병력들은 전열을 정비하려 시도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센서를 믿을 수 없기에 불안 속에서 금 간 다리와 너덜너덜해진 도로 위를 미끄러진다. 자신들의 지도와 기억에 담긴 황궁의 형상과 대조할 수 있는 기록을 찾고자 애쓰는 중이다. 많은 병력들이 투구를 벗어 던진 채, 바이저보다 맨눈을 믿고 있다.


양군의 다수는 홍수처럼 퍼붓는 폭우 속에서 저 멀리에 있는 거대한 건물들의 희미한 모습을 본다. 아직 버티고 선 도시의 탑과 마천루들, 요새 장벽이 남긴 검은 절벽까지. 하지만 그들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느 것과 대조해도 스카이라인이 들어맞지 않는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건물은 있지만 본래 있어야 할 곳이 아니거나 혹은 근처에 원래 없던 다른 건축물 옆에 서 있다. 더 나쁜 것은, 전투에 나선 병력들이 이미 무너진 것을 알고 있는 건물과 기념물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다. 조준경도, 거리 측정기도 믿을 수 없다. 신경이 너덜너덜해진 장교들은 대기의 신기루를,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를, 정찰병과 관측병의 망가진 이성을, 원본 데이터의 신뢰성을 탓한다. 많은 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있다고 생각한 위치에 있기는 한 것인지까지 의심한다.


부대들이 선회한다. 위치를 변경한다. 목표 없이 뱅뱅 돌 뿐이다. 적진에 진격한 순간 배후에서 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일부는 안전한 진지를 포기하고 바로 살육 구역으로 몸을 던지기도 한다. 몇은 더 나은 엄폐물을 찾기 위해 이동하다 기이하게 익숙한 참호선에 발을 들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실수를 저질렀다며 처형이 이어진다. 사람들 사이로 절망이 내린다. 진작에 전우들이 목숨을 던진 전투로 무너진 벽과 요새들의 모습에 사람들이 미쳐간다. 마치 조롱하는 유령처럼 저 멀리 희미한 증기 너머로 보이는 그 모습에.


타르거스 지탱점(Targus Point)의 잔해 너머, 제55 범극지연대(55th Pan-Polar) 소속 병력들이 포격 아래로 전진한다. 야포의 위치를 변경하고, 마글렉스 소총병연대(Maglex Rifle)의 측면부가 필요로 하는 엄호 사격을 제공하려는 자살에 가까운 돌격이다. 많은 값을 치러야 하는 힘든 작업이었음에도, 제55연대의 지휘관은 마침내 폭풍우가 몰아치는 급경사에 제 연대를 배치하고 포격을 퍼붓기 시작한다. 200문에 달하는 중포가 10여분 동안 맹렬히 토염하며 3킬로미터 떨어진 야지를 환하게 밝힌다. 지휘관은 그 순간 깨닫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제55연대는 다른 방향으로 향했고, 포화 속을 뚫고 중포 대부분을 이끌고 왔음에도, 지금 그가 포격을 퍼부은 것은 마글렉스 소총병연대가 구성한 전선의 다른 측면이었다.


범극지연대의 지휘관은 말문이 막힌 전령이 가져온 너덜너덜한 종이를 읽고 포격 중지를 지시한다. 지휘관은 장교용 군도를 가까이에 있는 부관에게 건넨 뒤 철조망을 향해 걸어간다. 다시 그의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다.


이레닉 바로 서쪽의 VTC-26 포대에서, 제414 루도빅연대(414th Ludovic)가 마침내 돌격하여 그들의 공세를 한 시간 이상 막아내고 있던 토치카 일대를 점령한다. 제국의 군기를 들고 돌격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구겨진 제9 구스타프연대(Ninth Gustav) 병력들의 시신, 그리고 불타고 있는 황제가 그려진 군기다.






충성파들의 전선만큼이나 혼란 속에서 반역파들의 대군이 전진한다. 지도도, 방위도, 심지어는 눈조차 필요없다. 네 신의 만신전이 그들에게 길을 보이고 있으며, 모든 길은 결국 같은 곳으로 통한다는 진실을 알렸기에 그러하다. 그들의 목적지는 필연적이다.





각주 1 : 역사소설 등에 나오는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미래를 점치는 점복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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