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xvi 진지

메톰 행진로는 사라졌다. 바다에 흠뻑 젖어 삼켜진 젖은 모래 너머 삼켜진 썩어가는 나무 방파제처럼, 황폐한 대지 너머로 사라졌다. 메톰 행진로의 포좌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델픽 방어선으로 향하려던 그녀의 막연한 계획은 이제 물거품이 된다. 중포들을 내팽개치지 않는 한, 그들은 계속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온 사방이 30킬로미터짜리 잿더미 벽으로 둘러싸인 터라 지평선이 한참 가깝고 빡빡하게 자리 잡은 것 같지만, 지금 그들은 개활지에 있다. 검은 저택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이곳이 좋은 장소라는 판단을 내린다. 진을 칠 곳, 참호를 파낼 곳, 싸울 곳이 필요한 지금, 수 킬로미터에 걸쳐 유일하게 그럴 만한 건물이 바로 이곳이다.

집행관 아가테는 반쯤 부어오른 뺨과 턱에 계속되는 통증을 외면하고 지시를 내린다. 장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러 나선다. 파이크스는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검은 저택, 파이크스는 이 건물을 처음 본 순간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최근의 포격 때문에 거의 폐허로 바뀌다시피 했지만, 유난히 두꺼운 벽 덕분에 거리의 다른 건물들이 무너져 폐기물 더미로 변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존재다. 아가테는 이 건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장소이고, 한때 확실한 랜드마크였던 것 같다. 하지만 랜드마크의 생태계나 다름없은 이곳에서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낮고 정사각형으로 지어진 널찍한 건물이고, 석조를 중심으로 한 골조에 전체적으로 검게 물들어 있다. 아가테는 아마 지난 며칠 동안 화재 속에서 석조 골조가 불에 그을렸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약 3천여를 헤아리는 아가테의 병력은 대부분 밖에서 주요 화력인 야포를 정비하고 있다. 아가테는 포병 장교들에게 교차하는 화력 투사선을 따라 포를 배치해 서쪽을 엄호하는 한편 동쪽의 포격선 구축에 박차를 가할 것을 지시한다. 지난 네 시간 동안 모든 공격이 닥쳐온 방향이 그러하다. 동쪽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잿더미의 둑 너머에서 격렬한 포격이 오가고 있다-아가테는 아마도 기갑전이리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아가테는 그 방향에서 공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전방 관측병이 출발한다. 손에는 수기 신호기와 호루라기, 신호등이 들린 채다. 복스 통신망이 완전히 죽었기에 어쩔 수 없다.

병사들은 발포 준비를 갖춘 중포와 탄약 차량들을 끌고 오느라 기진맥진한 뒤다. 아가테는 최소한 2킬로미터 너머에서는 적의 접근을 감지할 수 있을 테니,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유예가 주어지리라고 여긴다. 하지만 적이 북쪽이나 남쪽 등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녀가 지휘하는 병사들은 포병이고 참호 경계병이며 경보병일 뿐이다. 반역자 아스타르테스들이 기습을 가해 근접한다면 그것은 싸움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동쪽, 서쪽… 아무튼, 방향은 그냥 멋대로 정한 채다.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으니까. 전자기파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는지, 기술적 도구들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태양이 보이지도 않고, 시간을 잴 수도 없다. 그저 직감이 말하는 대로, 포를 방열할 뿐이다. 그녀의 본능 덕분에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이 빌어먹을 본능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녀는 살아야만 했다.

만약 그녀가 틀렸다면, 그녀가 지휘하는 병사들은 포격선 바로 배후에 있는 검은 저택으로 후퇴해 그 두꺼운 벽을 요새처럼 활용할 것이다. 저택은 마치 요새처럼 지어져 있다. 두꺼운 벽에 작은 창까지. 이곳은 애초에 요새였을까? 아가테는 의문에 빠진다. 로피(Laufey)? 아니면 에르미타주 관문? 에르미타주 관문이 맞다면 꼭대기로부터 쟀을 때 서너 층이 무너진 채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이 건물은 이 이상 컸던 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아가테는 파이크스를 뒤로 한채 요새를 살피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파이크스는 점검을 위해 앞에 빌어먹을 개자식들로 구성된 403연대의 참호병들을 보내 혹시나 있을지 모를 기습에 대비했다.

텅 빈 곳이다. 하지만 골조는 튼튼하다. 어느 지점에서는 벽 두께가 거의 10미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입구와 문은 견고하고 방어가 가능해 보인다. 내리닫이식 격자와 방폭문이 설치되었던 흔적이 보인다. 거의 금괴 금고의 문만큼이나 두꺼운 놈들이고, 아가테는 바닥의 잔해 중 일부를 치우면 어쩌면 작동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바닥 위로 사방에 잔해가 널려 있다. 화재가 너무 강렬했기에 가구도, 부속류도, 시체도 남아 있지 않다. 부서진 돌 사이에 뒤틀린 금속 막대가 보인다. 아무리 이곳을 뒤덮은 불길이 뜨거웠어도, 지금은 차갑게 식은 곳이다. 막대가 한기를 토해내는 것 같다. 갈라진 지붕 사이로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텅 빈 공기 속에 메아리가 퍼지는 것 같다.

“뭐지?”

아가테가 묻는다.

“집행관 각하?”

파이크스가 돌아본다.

“뭐라고 했나, 파이크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각하.”

아가테가 눈살을 찌푸린다. 분명 누군가 입을 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