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물 부족 vs 시간 부족 무승부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정확한 기준을 정하기가 어려워서 체스 협회나 사이트마다도 기준이 다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체스 협회/사이트가 FIDE, USCF, 체닷, 리체스인데 저 4개가 모두 다른 룰을 적용하고 있으며 굳이 따지자면 FIDE - 리체스랑 USCF - 체닷이 서로 비슷하긴 한데 디테일한 부분은 또 서로 다르다

내가 시간이 다 떨어졌을 때를 기준으로

- FIDE: 상대가 합법적인 수를 통해 체크메이트에 도달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없을 때 무승부

- USCF(미국 체스 연맹): 상대가 (1) 킹만 있을 때 (2) 킹 + 마이너피스 하나만 있고 강제 메이트가 없을 때 (3) 킹 + 나이트 두 개가 있고 내가 폰이 없으며 강제 메이트가 없는 경우 각각 무승부

- 체닷: 상대가 (1) 킹만 있을 때 (2) 킹 + 마이너피스 하나만 있을 때 (3) 킹 + 나이트 두 개가 있고 내가 다른 기물이 없을 때

- 리체스가 제일 복잡한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물을 임의로 배치했을 때 메이트가 가능한 포지션이 나올 수 없으면 무승부(단 비숍 색상은 지켜야하고 프로모션이 가능하다는 전재하에)이지만 몇가지 예외가 있음

그럼 왜 기물 부족 vs 시간 부족이 기준을 정하는게 그렇게 까다로울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인데 하나는 도움 메이트라는 개념의 애매함과 또 하나는 기물 부족이라는 개념의 애매함 때문이다

아까 갤에 올라온 포지션인데 이 상황을 보면 흑은 킹과 비숍이 남아있고 백의 시간이 다 떨어진 상황이다. 그렇기에 직관적으로 본다면 그냥 무승부 처리를 하는게 맞아 보인다. 그런데 이 포지션에서 흑이 메이트를 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이런 포지션이다. 그러나 이런 포지션은 백이 똥멍청이가 아닌 이상 사실상 나오기가 어렵다. 즉, 백이 흑을 도와줘야지 나올 수 있는 도움 메이트의 애매함 때문에 체제마다 룰이 다른 것이다.

체닷과 USCF는 위 포지션을 각각 무승부로, 리체스와 피데는 위 포지션을 각각 흑의 승리로 판단한다. 이렇게만 본다면 체닷과 USCF의 룰이 더 상식적으로 보인다. 그럼 킹 + 마이너피스를 가진 사람을 상대로 시간이 다 떨어질 경우 무조건 무승부로 봐야할까?

이 사진은 또 아까 갤에 올라온 포지션인데 위 사진과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상황이 다른 경우다.

여기서 백의 차례이고 백이 둘 수 있는 유일한 수는 h7이다. 그러나 h7 이후 흑은 Ng6#로 체크메이트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체닷 룰로 따지면 흑이 킹과 마이너피스하나만 있는 경우 백의 시간이 다 떨어졌을 때 포지션과 상관 없이 무조건 무승부 처리된다. 그렇기에 백은 이걸 알고 h7을 둬서 체크메이트 당하는 대신 교묘하게 시간을 다 써서 무승부로 경기를 끝내게 되는, 흑 입장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서 체닷은 무승부, 리체스와 피데는 흑의 승리로 판정한다. 이렇게 보면 위의 경우와는 다르게 리체스와 피데의 룰이 더 상식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에서는 킹 + 마이너피스만 있을 때 무승부로 판정한 USCF는 여기서 흑의 승리로 판정을 내리는데 USCF는 강제메이트 수순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킹 + 마이너피스 하나라도 시간승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움 메이트라는 개념이 왜 애매한 것일까? 그건 도와준다가 너무나 인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 포지션은 무승부이다. 그러나 둘 중 한 명의 시간이 다 떨어진다면 무승부가 아닌 시간패로 판정이 내려진다. 그런데 스톡피쉬라면 100수를 두든 1000수를 두든 이 포지션에서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보면 이 포지션도 테이블 베이스에 따르면 무승부이고 스톡피쉬 두 개가 붙는다면 어느쪽도 절대로 이기거나 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 포지션에서 백이나 흑이 이기기 위해서는 스톡피쉬의 입장으론 상대가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포지션에서 한 쪽 시간이 다 떨어지면 무승부로 봐야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체스는 엔진이 아니라 인간이 두는 게임이기에 이런 포지션에서 한 쪽이 시간패를 하는 경우 무승부로 판정하는 것은 굉장히 비직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시 이 포지션을 본다면 흑의 입장에서 체크메이트를 하는 것은 백이 고의적으로 도와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스톡피쉬 입장에서는 위 포지션이나 이 포지션이나 메이트는 똑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위 두 포지션 중 위의 포지션이 밑의 포지션보다 훨씬 메이트를 피하기 까다로울 것이다. 결국 체스는 엔진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둔다는 이러한 애매함 때문에 협회마다 룰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럼 기물 부족은 정확하게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리체스는 기물이 충분한지의 기준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 킹 + 폰/룩/퀸은 충분하다

(2) 킹 + 서로 다른 마이너피스 2개 이상은 충분하다

(3) 킹 + 2개 이상의 나이트는 충분하다

(4) 킹 + 나이트 vs 킹 + 룩/비숍/나이트/폰은 충분하다

(5) 킹 + 비숍 vs 킹 + 나이트/폰은 충분하다

(6) 킹 + 비숍 vs 킹 + 킹 + 다른 색 비숍은 충분하다

이 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리체스는 기물이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개인적으로는 기본적으로 킹 + 마이너피스 하나만 있을 때는 무승부이지만 강제메이트 수순이 있을 때에만 시간승으로 간주하는 USCF의 룰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