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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형님들 내 글좀 봐죠. 판타지야.

크롱크롱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09 17: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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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돋는지, 개구린지 알려주면 감사. 








으허어. 졸리군.
오늘도 어김없이 '미라주'의 리소스 파일을 훑어보던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극한의 가상현실게임 '미라주'. 내가 만들어놓고 이런 말 하긴 우습지만, 이건 시대를 풍미할 걸작임에 틀림없다. 확신한다. 왜냐고? 두말하면 입만 아프다.

사람은, 누구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기억을 모조리 가상현실로 구현한다면 어떨까? 라는 컨셉으로 시작된 초기기획이었고, 결국엔 만들어내었다.
미라주의 NPC는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지능이 아니다. '실험대상자가 기억하는 하나의 개인'을 토대로 인공지능을 만든 덕에, 무의식까지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는 '진짜 인간 같은' NPC다.
환경이나 사물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이 느낀 촉감을 고스란히 옮긴 탓에 누구도 게임 속의 '프로젝트'를 만지면서 현실의 사물과 구분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그 어떤 영화, 게임, VR 체험보다도 '현실성'이 넘치는 가상세계를 구현해낸 것이다!

단,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마법'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초현실적인 공간인데, 거기서 절대 비현실적인 '마법'이 일어난다는 소리다. 그 결과 미라주의 세계 속 플레이어는 마법을 체험하며 '현실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감각을 맛보게 된다.
이건 진정한 의미의 판타지 게임이다.

정말 완벽하게 멋져.

말로 하니 간단하지만, 이 '작품'을 만드는 데는 실로 어마 무시한 돈이 들어갔고, 어떻게 돈을 구할지 막막하던 내게 자진해서 후원자가 되어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내 친구이자 재벌 아들인 '강태호'였다.
똑똑똑.
그래. 마침 내 사무실에 노크하는 바로 저놈 말이다. 양반은 못 되는 군.

"들어와."

역시, 들어서는 놈은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느끼함을 한껏 이마로 내뿜어대는 강태호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쌔끈한 몸매의 신입 여사원 두 명이 보였다.

"자발적 야근은 인제 안된다고 그렇게나 강조했는데, 오너인 니가 아직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냐."

오너라고는 하지만, 회사 안에서 왕따 취급 당하는 나한테 그나마 말이라도 걸어주는 놈은 저 녀석 뿐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 20분이군.

"이건 일이 아냐. 그냥 노는 거니, 신경 꺼."
"하. 그걸 말이라고. 너 니 자신을 모르냐?"
"응? 나?"
"그래. 미라주의 총책임자! 그게 바로 너야. 진짜 필요할 때만 회사에 있으면 된다고. 잡다한 버그 찾기 같은 건 직원들에게 시키면 되니 쓸데없이 힘빼지 마라니까?"
"그러니까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거라고."

아들과 같은 이 게임이 보다 완벽함을 가지길 원하기에 자처해서 하는 고생이다. 진심으로 신경 꺼주길 바라지만, 저 놈은 진심으로 신경 거슬리는 모양이다. 거 귀찮네.

"아, 아- 봤어? 저렇다니까. 앞뒤 꽉 막혔지? 진짜 내가 미쳐버리겠다니까. 뭐 어쨌든 소개할게. 나와 함께 이 회사를 운영 중인 실무 총 책임자. 미스터 이한!"

뭐냐 또.

"어, 저 안녕하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송하나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신입사원 김송이에요."
"예... 반갑습니다. 이한입니다."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비주얼이 좀 과도하게 좋은 두 신입이시다. 왜 뽑혔는지는 알 것 같다.

"이제, 클로즈베타까지 반년 남았어. 정확히는 5개월하고 15일이지.  그간 고생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한잔 할까 하는데 어때? 같이 가자고."
"거절하지."
"쩝. 야."

이미 몇번이나 가졌던 술자리다. 그 때마다 매번 후회했었다. 내 인생의 역작을 세상에 끄집어내 준 은인같은 놈이지만, 일단 태호와는 궁극적인 목표가  달랐다. 뭐, 놈은 직접 돈을 투자했기에 그러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걸었다고.
뭐 어쨌든 이제는 형식적으로 술자리에 참여해 자리를 지키는 것도 지겨워졌다. 그저 내 작업 공간이 나에겐 안식처라는 걸 알아줬으면 했다. 그만 귀찮게 하고 나가줬으면- 하는 눈빛으로 태호를 압박했다.

"진짜냐. 진짜 이러기야? ... 알았다. 알았어. 두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이해한 모양이다.

"뭐, 계속 있을 거라면 내 부탁 좀 들어줘. D - 469 구역에서 오류가 매번 난다고 해서 찾고 있는데, 거기 좀 한번 봐주겠어?"
"이벤트 시작하는 부분?"
"어."
"알았어. 체크해볼께."
"좋아. 그리고 '그거' 말야. 생각 좀 해봤어?"
"그거?"
"...알잖아. 조금만 유도리를 가지면"

또 유두리 타령이군. 언제나 상업적인 면만을 보는 태호가 늘 하는 말이었다. 내 대답 역시 늘상 같다.

"가챠시스템에 대한 거라면, 타협은 없어. 미안하지만 그것만은 안돼."
"후, 들었어? 단호하시네. 단호박인줄."
"어머?"
"회장님. 그거 좀 지난 유행어에요."
"아, 그래? 요즘은 무슨 말 써?"
"그거 실화임? 막 이러고? 히힛."
"핫핫핫! 그거 좋네. 야. 너 그 똥고집 실화냐? 응? 에라이, 말을 말자. 혀튼 간다. 고생해라. 혹시 생각이 바뀌면 전화하고, 오늘은 꼬냑으로 달릴 거거든."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로 태호놈은 두 여성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내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래. 빨리가라.
녀석이 사라지고 다시 잠잠해진 내 사무실, 태풍이라도 휘몰아친 것 같았다.

"휴..."

업무를 하는 것보다 사람 상대하는 게 더 피곤하네.
고딩 시절에만 해도 이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 후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 제작에만 몰두하다 보니 성격도 상당히 변해버린 모양이다. 룰리웹 젖문가 게이머가 뭐 멀리 있는게 아니지. 됐어. 어쩌겠어.

"저기..."
"으허억!"
"히익?!"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기겁을 하고 돌아본 자리엔, 방금 전 보았던 여성이 당황 섞인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 저- 김송이씨?"
"네. 저, 그, 죄송해요 놀래키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게..."

얼굴을 붉히며 한걸음 물러서는 모습에서 풋풋함이 느껴진다. 이거 놀란 이쪽이 미안해질 지경이군.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아직 용건이 남았나요?"
"네? 아니 그게 저-.  실은 그 예전부터 쭉 팬이었어요. 전에 '이상세계의 인공아이들'을 집필하셨을 때 부터요."

어윽, 이제 내가 당황할 차례다.
'이상세계의 인공아이들'이라는 중2병 네이밍센스 답게도, 난 내가 상상하는 완전한 신인류의 세상을 SF 소설로 써내서 출판한 적이 있었다.  SF 장르의 무덤이라 불리는 한국 시장답게 그리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소수의 매니아층이 생겨났다는 건 들었다.
당시 난 강태호를 설득해 미라주를 제작하기 위해 고공 분투 중이었기에 전혀 관심조차 주지 않았었지만-.
이렇게 내 팬을 자처하는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팬이라고 해야봐야 오덕기질이 다분한 중년 아저씨들만 득실득실 할 줄 알고 팬미팅은 생각도 안 했었다고.
근데 처음 만난 팬이라는 사람이 이런 미인이라니... 나라는 인간은 엄청난 바보였던 건가.  팬미팅할걸. 두 번 할껄!

"설마 내 팬이어서 이 회사에 들어왔다거나 그런건 아니죠? 하하."
"앗, 그, 그러면 안되나요?"

실화냐.

"아니 그럴리가요. 저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군요."
"에헤헷."

몸을 움츠리며 배시시 웃는 얼굴이 귀엽다.
정장을 입고 어깨 뒤로 묶은 단정한 머리스타일을 한 사회인이지만, 여전히 묻어나는 이 소녀스러운 분위기가 싫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 온다.  얼굴자체도 베이비페이스고 말이지.

"저, 그래서 그,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같이 사진 좀 찍어도 될- 까요? 그리고 그 작업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배우고 싶어요! 아, 그 괜찮으시다면요."

아. 그건 무리입니다만.

"일단 사진은 제가 지금 꼴이 영 아니어서요. 보세요. 평소에도 회사에 혼자 남으면 편하게 있으려고 츄리링 차림이거든요. 기왕이면 깔끔한 모습일 때 찍도록 하지요."
"평소 모습도 괜찮은데-.

"그리고 저는"
"네? 네!"

"저는 철저히 혼자 일하는 타입의 인간입니다. 효율이 안 좋고 실수를 깨닫는 게 느린 걸 감수하고도 어쨌든 혼자하는 게 좋은 100% 아웃사이더 기질의 인간이니 이제 슬슬 제 사무실에서 나가주셨으면 합니다만."  -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

근데 못하겠다.
아. 저렇게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기대 어린 시선으로 날 보는 여자애에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는 것이다. 윽. 곤란해. 어쩌지. 작업은 집어치우고 강태호랑 합류해서 술이나 마시자고 할까?
말을 잇지 못하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뭔가 눈치챘다는 듯 박수를 한번 쳤다.

"아! 장비도 가져와야겠지요! 금방 다녀올게요!"

자신의 자리로 호다닥 뛰어가는 그녀가 금세 도착했을 때는, 손에 '가상세계 접속기 MVIR-3'가 들려 있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추진력 있군. 근데 이제 어쩌지?
...그래. 내겐 아직 한 가지 방법이 남았다. 바로 분위기로 압도하는 것이다. 받아라 나의 비장의 공격. 미세하게 일그러진 미간으로 상대에게 불편함을 제공하는 이 거북한 침묵을 받아보아라! 내가 이 공간을 장악한다!

"엣?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뇨."

졌다.
패시브 '바보' 스킬에는, CC 기인 '분위기 압박' 에 대한 면역 속성이 부여되어 있다. 이 녀석 사회생활 처음인 거냐고?! 분위기 좀 읽어라아아!

5분 뒤. 난 '가상세계 접속기 MVIR-3'을 머리에 착용했다.

"오, 오옷! 시작하는 건가요! 어디로 가나요?"

그리고 어쩐지 잔뜩 들뜬 기색이 가득하신 분이 바로 옆에서 기기를 착용한다.
이번 한번 뿐이라는 약속을 받긴 했지만 저 똘망똘망하게 반짝이는 어린아이의 눈망울을 한 그녀가 또 때를 쓰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심란하다. 여러모로 심란해지고 말았습니다.

"네. 오류가 난 지역이, D - 469 라고 했었죠. 히든 이벤트가 있는 곳이군요. 자, 의식을 '미라주' 세계속의 아바타로 옮겨봅시다. 아무래도 직접 경험해보는 편이 오류를 찾기도 편하겠지요."
"네!"

[이 한님. 관리자 권한으로 접속되었습니다. 의식을 아바타로 옮기시겠습니까?
-실행 -취소]

실행 버튼을 누른다. 초최한 눈으로 모니터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실행버튼을 눌러버린 것이다. 이 단순한 행동으로 인해 내 인생에 대격변이 찾아오리라고는...
나로선 눈곱만큼도 예상할 수 없었다.


**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인 후, 다시금 시야가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나는 습관처럼 몸을 바라봤다. 뱃살도 하나 없는 깔끔한, 하지만 풋내나는 어린 육체다. 의식을 옮길 때 주로 쓰는 이 아바타는 나의 17살 때의 모습과 똑같이 생겼다. 패션이라곤 온통 검은 가죽옷으로 도배한 중2병도진 핵찐따 컨셉이다. 착 달라붙는 스키니 진인건 보너스.
거기에 특별히 오른손에는 룬문자가 새겨진 검은 붕대를 감아 두었지. 공허의 드래곤이 봉인되어 있거든.  유치하지만 이게 또 게임의 참맛이 아니겠는가. 현실에서 시도하기엔 에로사항이 꽃피는 여러가지를 할 수 있다.
모험은 역시 소년이 해야 제맛이지- 라고 생각해서 설정한 캐릭터지만, 32살의 아저씨가 17살의 어린애 몸으로 들어가는 게 아무래도 좀 거시기해서 추후 바꿀 예정이다.

"어머. 와-!"

귀여움 반, 놀라움 반이라는 얼굴을 한 김송이씨가 나를 보고 있다. 너 지금 비웃고 싶은거 참고 있지? 이봐, 그쪽도 만만치 않거든?

"...다른 옷은 없습니까?"
"아, 사장님 어렸을 때 모습이죠? 그렇게 입고 있으니 꽤 귀엽네요. 넹 은근 어울려요. 갈아 입으실 필요 없어요. 확실히 예전에는 샤프한 얼굴에 이상을 담은 깊은 눈빛이 너무 매력적이셨어요! 그래서 정말 좋아했어요. 지금보다 훨씬 나아요. 아, 물론 지금도 그리 나쁜건 아니지만요."

그래. 지금의 내 현실은 배 나온 아저씨라 보고있기 괴로운 수준이라는 거지?  팩트로 후려치다니 거 성격 잔인하시네.
근데 이 아가씨가 뭐라는 거냐. 나 말고 너요 너.

"그... 수영복 말고 다른 옷은 없습니까?"
"네? 엣, 이히이이이익?!"

그제야 자신의 차림을 본 송이씨는 황급히 몸을 가렸다.  판타지 풍의 전신 갑옷을 걸친 그녀였다. 뭐, 디자인만 보면 훌륭하다. 화이트, 바이올렛 컬러가 메인인, 성스러운 성직자의 분위기가 그대로 연출되는 수도복이지만, 세밀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은색 금속들이 부착되어 방어구로서의 성능도 갖췄다.
노출도가 상당하여 비키니에 가까운 방어력 높은(?)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나저나 당신... 그렇게 안 보이는데 상당히 글래머러스 하네.
얼굴 앞에 뜬 제어창을 황급히 누르는 그녀. 곧바로 수수한 모험가의 활동복 디자인으로 변경되었다.

"방금 전의 복장은, 직접 제작하신 겁니까?"
"어으, 네. 네. 잊어주세요. 히잉."
"아니 그, 무척 퀄리티가 높군요. 디자인팀이신가요?"
"에, 아뇨. 개발팀이에요. 그건 그냥 한 번 제가 만들어본 옷이에요. 이뻤나요?"
"자세히 보진 못했습니다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한다. 나중에 디자인 초안을 보여달라고 해야겠다. 이 여자, 그냥 바보는 아닌지도 모르겠다. 다방면으로 능력있는 인재였던가. 강태호놈, 얼굴만 보고 뽑은게 아니었군.

"와, 정말요? 옷 만드는게 취미라, 게임 캐릭터 복장 디자인도 해봤는데, 사실 나름 자신작이거든요! 뒷모습도 보실래요?"
"아, 아니 그"

말리기도 전에 다시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돌아선다. 과연 자신 있는 이유가 있었다. 가슴만큼이나 엉덩이도 출중하신 그녀시다.
갑옷 디자인이 정말 남성의 취향(?)에 걸맞은 상업적 요소로 뒤덮여 있다. 전체적으로 심플한데 자연스럽게 엉덩이로 시선이 가게 강조된 스타일... 크게 과하지 않으면서도 성적 매력이 도드라지는 옷이다.
너 지금 배나온 나 앞에서 자랑하는 거지? 그래 운동 열심히 한 거 알았으니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잘 봤습니다. 다시, 다시 그...옷 갈아입으세요."
"앗? 아. 네네."
"자, 그럼 일할까요?"
"네!"

집중하자. 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쪼그만 악마에게 더 휘둘려선 안 된다.
주변은 어두컴컴한 동굴 안. D - 469 라 지정된 지역이다. 히든 이벤트가 있는 곳이며, 고대전설급 아이템인 '지배자의 권능'이 있는 장소다.
이 동굴 안을 밝히는, 유일하게 발광하는 저 단상 위의 책. 인간의 가죽과 힘줄로 만들었다는 설정답게 끔찍한 디자인으로 제작된 책에 다가섰다.

[히든 이벤트 시나리오를 시작합니다.]
시스템 메세지가 내 귓가를 울린다. 언제 들어도 시원시원한 예쁜 목소리는 듣기 좋군. 이 시스템 메시지는 관리자 계정인 내게만 들린다. 옆의 송이양에겐 안 들려야 한다. 슬쩍 곁눈질을 해보니 말똥말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좋아 여기까진 아무 문제 없다.

= 그대. 고통에 이끌려 일곱 죄악의 길을 걷는 자여. 염원하던 '지배자의 권능' 습득을 위하여, 그대에겐 '세 가지 시련'이 주어지리라. 받아들이겠는가? =

"거절한다"

= 거부를 수용할 수 없다. 지배자의 권능을 발견한 이상, 악의 주인이 되던가, 혹은 이 자리에서 객사하던가. 그뿐이다. 알겠는가? 빈약한 각오로 광활을 원한 자여. =

책이 발하는 빛이 더욱 찬란해지며, 주변의 해골, 뼈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게 드러난다. 시련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을 암시하는 공포 분위기 조성. 이벤트 진행 OK. 이팩트 설정 OK.
송이씨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도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 끄덕인다.
아니, 처음 오는 사람이 분위기에 압도된 걸 보니 연출이 잘된 모양이다. 베타테스터가 필요 없을 리액션이군 김송이양.

"김송이씨."
"네넵!"
"너무 몰입하지 말아요.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엣! 아 그, 그렇죠! 그래도 이 장면.. 사장님의 책에서 나왔던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지능, 기억 영역이 온통 벌레 먹은 마냥 침수되어 뒤틀린 주인공이, 최후에 고른 방법이 바로 자신을 악으로 물들이면서까지 정의를 관철하는 것. 그래서 고른 최선- 아니, 최악의 무기 '지배자의 권능'이잖아요!"
"아니 그..."

와씨. 저 오글거리는 설정을 팬에게서 들으니까 진짜 오징어 다리 오그라든다아아아! 하지만 한편으론 그 세세한 설정을 기억해 주는 팬심을 보이는 그녀에게 엄청난 고마움이 일어나는 아이러니. 뭔가, 가슴이 주체하기 힘든 무언가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숨겨왔던 내 안의 중2병, 찐따력 충만했던 나의 사상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진정하자. 나는 30대 아재다. 그리고 한 기업의 총 책임자. 사장이라고. 어린애같은 모습을 보이면 안되지.  후우. 이제 슬슬 좀 진정되라. 이 두근거리는 가슴아.
책의 정 중앙으로 모여진 빛은, 이제 하나의 통로를 향해 쏘아진다. 저쪽으로 가라는 메세지다. 뭐 굳지 알려주지 않아도, 저기 말고는 뚫려있는 통로가 없기에 갈 수밖에 없지만. 저쪽으로 가면, 준비된 몬스터들의 습격이 나를 기다린다. 그리고 모든 시련을 이겨내면 궁극의 아이템 '지배자의 권능'을 습득하게 된다.

"흐음."
"왜 그러시죠?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반대입니다."
"네??"
"우린 여기에 문제를 해결하러 왔잖아요. 근데 전혀 오류도 없고, 아무런 이상 없이 진행되고 있어요. 문제가 없는 게 문제지요. 그렇다고 시련을 받기 위해 장소를 이동하면 D -469 지역을 벗어나게 되니 의미가 없습니다."
"아! 과연...!"
"일단 현실로 돌아갔다가,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진행해 보죠."
"옙!"
"관리자 코드 ADB : 2716-2. 타겟 : 본인과 게스트계정. 의식을 현실세계로 되돌린다."
[요청이 거부되었습니다.]

뭐야. 발음에 문제가 있었나?

"관리자 코드 A.D.B : 2. 7. 1. 6 -2."
[요청이 거부되었습니다.]

"안 되잖아? 어 저, 정지가 안돼!"
풋! 하하핫.
갑작스례 나온 김송이양의 드립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말 시기적절한 드립이셨습니다."
"이히히히히힛. 감사해용."

웃지마 이 덕후 아가씨야. 정들어. 뭐 진작 예측하고 있긴 했지만, 이 여자 상당한 수준이다.
자, 다시 집중하자. 근데 왜 오류가 난거지?

"현실과의 접속 확인요망."
[접속 오류. 현재 '이 한'님, '김송이'님의 육체는 각각 미라주에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어? 잠깐.

"관리자 코드 넘버 02 '이 한' 시스템 오류 확인 요청."
[코드 넘버 02 '이 한'님의 관리자 권한은 삭제되었습니다.]

뭐? 이게 무슨 소리야?
현실의 나와 분리되어 있다는 건, 누가 내 가상세계 접속기 MVIR-3을 벗겨 냈단 소리다. 게다가 관리자 권한이 삭제되었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내 관리자 권한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아마 웃음기는 싹 사라져 있을 것이다. 나를 지켜보는 김송이씨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곧바로 뇌리에 번뜩이는 사실이 있었지만, 난 애써 이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절대로, 그럴리가 없었다. 그래선 안 됐다!
자,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자. 이 일의 원인을 알면, 조치 방안도 떠오를 거니까!
...
..
아니 없다. 없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건 단순한 시스템 오류로 생길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 확고해질 뿐이다.
의식이 미라주 속으로 들어올 때는 관리자 권한이 있었다. 이 안으로 들어온 다음, 나의 관리자 권한이 해제당해서 '복귀'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 외에 달리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딴 짓을 할 수 있는 건... 강태호뿐이다!

플레이어의 의식을 가진 아바타가 죽으면, 본래는 현실의 육체로 의식이 돌아간다. 하지만 그 연결점이 끈어진 지금은, 아바타가 죽는 순간, 나도 죽게 된다. 그럼 현실의 내 육체는 의식을 잃은 '식물인간'이 되겠지.
혼자 야근을 하다가, 식물인간이 돼버린 날 다음 날 아침에 직원들이 발견하고 119를 부르고, 경찰의 조사를 받겠지. 그리고 강태호는, 여직원들과 술을 먹었다는 알리바이까지 완벽하게 준비했으니 아마 의심을 살 일도 없으리라.
그렇게 된 거 였나? 너 정말이야? 진짜 이 살인계획을 준비했다고?

"강태호 너, 나를 죽일 셈이야? 어? 야...야! 너 듣고 있지! 대답해! 야!"

하지만 동굴 안에서 공허하게 내 목소리가 울려댈 뿐, 현실로부터의 응답은 없었다. 대신 내 귀에 들려오는 건 중저음의 탁한 목소리였다.

= 첫번째 시련이 시작되었다. 통로로 나가라. 이곳에서 대기해도 죽음은 들이닥치리라.=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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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지 핵노잼인지 알려주면 고맙겠어요. 형님들 사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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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 일반 세상에 참 젖같은 일이 많습니다. 마하트마(58.29) 03.29 2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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