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퉷!”
뱉은 가래침에는 웅혈이 가득했다.
무(武)로서 온갖 내가중수의 묘리를 담고, 술(術)로서는 온갖 금제를 거는 남제의 장법은 단 일장으로도 자연재해에 준하는 위력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맨몸으로 받아내고도 살아있는 것 자체가 자하령이 얼마나 고절한 경지에 도달해 있는지를 방증하는 일이다.
골절과 피멍이 가득한 패배자의 몸으로 대작이나 하고 앉아 있는 자신의 꼴이 몹시도 우습게 느껴진 자하령은 낄낄대며 헛웃음을 흘렸다.
[어느 정도 응어리가 풀린 모양이로군. 당장이라도 제 목을 그을 듯한 그 음울함이 다소 가셨으니 이쪽도 한결 편하다.]
“나를 기용하고자 왔다면 실로 오산이다. 지금의 나는 일개 폐인일 뿐이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시리고, 미래를 생각할 때면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보여 정신이 아득해질 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의지도 들지를 않지. 그것이 지금의 나다.”
여전히 건재한 기세를 떨치는 남제가 가져온 마유주를 들이켜던 자하령이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칸이라는 자가 대작을 하자고 들고 온 것이 고작 저잣거리의 싸구려 술인가?”
[내 책사 노릇을 해주는 문사가 말해준 고사가 있다. 옛 금나라의 태종 오걸매(吳乞買)는 나라의 국고를 음주에 사사로이 유용하다 신하들의 곤장을 얻어맞은 적이 있다지. 이 난세에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선례다. 너와의 대작은 내 사사로운 행사일 뿐이니, 어찌 국고를 털어 값비싼 술을 사들일 수 있겠는가?]
거문 남제는 더 이상 무공에 있어 북방제일인은 아니었으나 검약(儉約)에 있어서는 북방을 넘어 응당 천하제일인이라 부를 만했다.
“발경을 무력화시키는 절대 권역.. 그런 유형의 공월무는 겪어본 적이 없다. 술법무공의 범주조차 벗어나는 이능이라 함이 옳겠군. 다음 수가 아득해지는 싸움을 한 것도 오랜만이다.”
[의념이 흐트러질 정도로 심마를 겪고 있는 폐인 하나를 제압하고자 공월무를 꺼내야 했다. 네가 온전했다면, 공월무로 맞대응할 수 있었더라면 승부는 장담할 수 없었으리라.]
술을 따라주는 남제의 곧은 자세에서 중원의 어느 명문세가 못지않은 주도(酒道)가 묻어나왔다.
“무인의 승패에 그런 왈가왈부는 변명일 뿐이지. 내가 진정 신검단주의 그릇이었더라면 그런 악재조차 능히 극복해야만 한다. 신검단주의 검에 베어 가르지 못할 것은 없다.. 그것이 적의.."
[신묘한 계책, 아군의 깊은 절망, 심지어 태생적 한계나 하늘이 내린 운명조차도 말이지… 그렇기에..]
“입신(入神)이지…”
놀란 표정으로 자하령이 말을 받았다. 사실 커다란 요족의 외모만 이질적일 뿐, 남제가 구사하는 한어는 북경의 궁정을 방불케 하는 고상함이 묻어나왔다.
[전대 단주 신천화가 왕직(汪直)을 격살한 후 했던 말이었던가?]
“정확히는 초대 단주이신 월풍께서 남긴 말씀이다. 후대의 단주들이 필히 갖춰야 할 자질이라고…우리 중원에 대해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많은 모양이로군?”
단아한 자세로 술잔을 홀짝인 남제가 답했다.
[장차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과 북, 화(華)나 이(夷)와 같은 하찮은 구분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 씨족이 중원의 힘을 온전히 취해 진정한 적을 꺾고자 한다면, 그 귀중한 문(文)과 무(武)를 본래 뜻 그대로 익혀야만 한다. 그렇기에 내 아이신 구룬에서는, 너희의 말은 기본공으로 지정해 가르치고 있다.]
입황성의 일원으로서 이 말을 들었더라면 등골을 내달리는 소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일개 떠돌이로 전락한 자하령은 오히려 호기심이 동했다. 그가 말하는 대업이란 대체 무엇일까.
“네가 말하는 대업이 대체 무엇이지? 중원을 정복하는 것조차 그 대업의 발판에 불과하단 말인가?”
남제는 잠시 고개를 숙여 반 정도 남은 술잔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던 끝에 답했다.
[짐작건대 네가 북방으로 피신한 연유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천하는 죽어가고 있고, 그 원흉은 천하목이다. 명조를 멸하고, 입황성과 명족까지 쓰러뜨려 마침내 발 달린 나무를 베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두가 죽는다.]
진실을 깨달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묘한 안도와 동질감을 느낀 자하령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두 가지를 물어보지. 첫째, 황실과 입황성, 사대호법을 위시한 태후 직속의 명족까지 이 모두를 도모했다고 치지, 헌데 고금제일인인 성주조차 벨 수 없노라 단언한 참목을 무슨 수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이지? 둘째, 천하목을 베고 나면 문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괴력난신들은 무슨 수로 막을 셈이지?” `
자하령에게 이 난국을 해결할 실마리가 있었더라면, 이리 처참한 몰골로 영락하지는 않았으리라. 나무를 베지 못하면 천하만민이 굶어 죽고, 나무를 베면 천하는 괴력난신의 소굴이 된다. 그 해결책을 입황성주로부터 듣지 못했을 때 자하령은 진정으로 절망한 것이다.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흑색의 권한으로는 실마리도 잡을 수 없는 기밀일 터인데, 필시 월권행위를 밥 먹듯 했겠지. 늙은 황태후의 진노를 산 이유를 알겠다.]
“대답이나 해라.”
[문을 억제하는 천하목의 공능은 뿌리에서 나온다. 그것은 내가 개발 중인 진법으로 갈음할 수 있지. 밑동 위에 시체들의 탑을 쌓아놓아 그 사기를 이용할 요량이다. 참목의 경우는…]
순간 남제의 입가가 크게 씰룩였다. 기쁨을 억누르기 어려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최근 하늘의 보살핌으로 참목을 해낼 인재 하나를 포착했다. 천하목을 베고자 한다면 나무가 축적한 막대한 땅 기운에 버금가는 세월을 담아낼 극고의 검격이 필요하다. 그 일을 해낼 적임자와 접선했다고만 말해두지.]
자하령은 상단전 통찰에 집중함과 동시에 남제의 피륙에서 보이는 미세한 떨림까지 살피고 있었다. 모든 언행이 진실이다.
“그…그렇다면 ‘대문지기’의 역할은 누가 대신한단 말이지?! 입황성주 한명에 맞먹는 전력을 대문에 투입하면 잡은 천하도 놓치고 말 거다.”
[한때는 내 제자였으나 이제는 내 스승이 된 전사가 하나 있다. 너도 들어본 인물일 터이지. 투신(鬪神). 그 별호 그대로의 그릇이다. 네 옛 상관을 갈음하기 충분한 자다.]
“그것만큼은 동의할 수 없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구세(求世)의 방책을 얻은 자하령은 말꼬리를 흐렸다.
한 줌의 빛도 없는 나락의 끝에서 갑작스레 구름 위의 하늘로 끌어올려진 격. 머리는 어지럽고 생각은 꼬리를 잡고 이어지지를 못했다.
남제는 자하령을 재촉하지 않고 단지 빈 술잔을 채울 뿐이었다. 자하령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오므릴 때, 선수를 친 것은 남제였다.
[충동적인 결정이라면 사양이다.]
잔에 남은 술을 단번에 들이켠 남제가 말을 이어갔다.
[피폐해진 심신을 온전히 치유한 뒤에 다시 고민해 봐라.. 네가 진정 바라는 것이 천하의 대의인지, 아니면 일신의 명예인지.. 혹시 내 것보다 나은 방책이 없지는 않은지…아니면 그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유로운 야인으로의 삶이 더 낫지는 않을지..]
남제가 그 말을 끝으로 벌떡 일어섰다.
[병문안을 겸해 적어도 2번은 더 찾아올 요량이다. 네 결정은 마지막 방문에 듣도록 하지.]
자하령은 실소했다.
“삼고초려? 소열제(昭烈帝)의 흉내라도 낼 샘인가?”
[내 인덕은 유비의 반에도 이르지 못하니, 인재(人材)를 얻고자 한다면 적어도 그 배는 노력해야겠지. 다음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남제의 신형이 그림자에 삼켜져 사라졌고, 어느새 장내를 채운 싸늘한 기운 역시 사라졌다.
따스한 햇빛을 잠시 말없이 만끽하던 자하령은 곧 초막으로 들어가 정좌했다. 절망이라는 찌꺼기가 가득했던 그녀의 혈도에 대주천(大周天)의 격류가 몰아친다.
흐트러진 정기신(精氣神)의 합일이 돌아오고, 더욱 단단해진다.
자하령이 눈을 떴을 때 고고한 태양은 사그라든 지 오래였고, 검은 하늘에 뜬 것은 외로운 보름달이었다. 잠시 애수(哀愁)어린 눈으로 달을 바라보던 자하령은 몸을 돌려 성곽으로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남쪽 너머 펼쳐진 황량한 초원, 그 너머에는 그녀의 조국, 고향,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망설임을 떨쳐내고자 자하령은 왼손에 쥐고 있던 입황검을 힘껏 내던졌다. 화포를 무색게 하는 기세로 하늘로 쏘아진 입황검은 과도한 공력 주입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폭발했다.
양양의 불꽃놀이를 방불케 하는 그 화려한 폭염 아래, 자하령은 씁쓸히 뇌까렸다.
“대의멸친(大義滅親)”
천하의 대의를 위해 나는 기꺼이 배신자가 되리라.
- -
두 섬광이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두 핏줄기가 흩뿌려진다.
목을 노려 단 일초로 승부를 보고자 했던 일격이 서로의 어깨를 스친 것이다.
‘육원성군과 맞먹는 무위, 그중에서도..’
어째서인지 천하 남제북도(南帝北刀)의 묵직한 신형이 아닌, 선대 신검단주들의 펄럭이는 자색 옷단이 떠오른다. 여섯 별에 속하지 않음에도, 신투와 더불어 그들과 동격의 예우를 받는다는 유이(唯二)한 북왕.
명불허전.
정차 진법의 지원을 받는 남제까지 도모하기 위해서는 공명령과 공월무의 소모조차 아끼고 아껴야만 한다.
위기감을 연료삼아 더욱 맹렬히 심장의 광륜을 회전시킨다. 방금의 충돌이 남긴 경파를 역이용해 펼쳐진 검뢰섬릉식 구벽성하(九碧成河)가 자하령의 안면을 노렸다.
이 섭리를 벗어난 초식을 상대로 정면대결은 하책이라 판단한 것일까. 자하령의 두 발에 자연지기가 모이고 바람이 그녀의 움직임을 북돋운다.
허공을 유영하는 꽃잎 한 송이처럼, 지극한 자연스러움이 담긴 보법이 정연신의 검격 경파를 피해낸다.
콰가가가!!
허공을 밴 검격의 여파로 분진이 자욱한 와중, 정연신은 신법 풍신(風身)의 몸놀림으로 자하령을 즉각 따라잡았다.
상대 또한 풍신의 원류가 되는 명족의 신법을 익힌 것인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온전히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눈에 선명히 담으며, 종극뢰(從極雷)의 거력을 담은 무아의 검초를 내친다.
순간 자하령의 발걸음을 받치던 바람의 기운이 일변해 전신을 감싼다. 일순간 굴절된 빛에 정연신의 시야가 흐릿해진 순간, 자하령은 정연신의 후방을 점하고 있었다.
밤하늘 아래 검성에게서 억지로 받게 된 감각도(感覺途)가 즉각적인 반격을 가능케 했다.
콰앙!
순간 손목이 떨릴 정도로 예상치 못한 거력이 실려있었다. 순수한 자연지기를 부려 검력(劍力)을 북돋는 초절기교. 자연검(自然劍)이었다.
자연지기의 작용이 선명히 드러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입황성주의 것처럼 삼라만상을 담아내 휘두르는 완숙한 경지는 아니다. 아직은 불완전한 검초, 파훼의 여지는 충분하다.
자하령의 검격을 튕겨냄과 동시에 정연신의 신형이 사라졌고, 이내 자하령 역시 사라졌다.
사지를 놀리고 검을 휘두르던 대결은 온데간데없고, 두 섬광이 흑도를 거침없이 질주하며 서로의 후방을 노리며 한없이 교차한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자존심과 목숨을 건 죽음의 속도전이 흑도에 선명한 자국을 새긴다. 정연신의 움직임이 혜성이 남기는 빛줄기와 같다면, 자하령의 움직임은 검은 먹 줄기를 남기는 한 자루의 붓과 같았다.
별자리를 방불케 하는 잔상이 허공과 지상에 새겨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마침내 끝을 모르던 질주가 그치고 두 광선이 정지한다. 서로의 빈틈을 잡을 수 없는 형국에서 이런 경신술의 대결은 무용하다는 무언의 합의가 이뤄진 덕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정연신과 자하령은 재차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광화검류(光華劍流)]
[삭망환류검(朔望環流劍)]
캉! 캉! 캉 카카카캉!!
검은 입신검과 여뢰가 한번, 두 번, 열 번을 부딪쳤고, 이내 그 충돌은 백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검속(劍速)을 겨루는 속도전이었다.
베고, 찌르고, 직선으로, 횡으로, 무겁게, 가볍게, 변(變), 환(幻)에 이르기까지 온갖 검의 묘리가 일거에 펼쳐진다.
두 신검단주가 마주 선 그 자리에서 검광이 끝없이 교차한다. 부서진 검강의 파편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진여휘성천(珍麗輝星天)과 천단광갑이 찢어져 나가고 핏물이 흩날린다.
단 한 번이라도 검력이나 검속에서 뒤처진다면 그대로 반토막이 날 극고의 살검이 난무한다. 두 신검단주의 생사(生死)가 단 한 번의 호흡에 담긴 일념(一念)에 걸려있었다.
초식의 교환이 천에 다다른 순간, 마침내 두 신검단주의 검로가 멈췄다.
승부가 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여뢰와 검은 입신검은 이가 나갔고, 정연신과 자하령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환강(奐江)]
[천식(天蝕)]
급히 호흡과 자세를 수습한 두 사람이 너 나 할 것 없이 신공 장법(掌法)을 적에게 때려 박았다.
무시무시한 장력의 충돌이 뒤따랐다. 서로를 밀어내는 힘 싸움이 일어날 새도 없이 뒤따른 충격파에 정연신과 자하령 모두가 휘청대며 한참을 밀려났다.
울혈을 한 움큼 뱉어낸 정연신이 마찬가지로 입가의 선혈을 닦는 자하령을 노려봤다.
서로 단기결전을 도모했음에도 승부를 내지 못했다.
신검단주의 이름을 참칭한 것이 터무니없는 허세는 아니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 천하 북제의 눈이 침중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공월무를 꺼내서라도 단박에 승부를 보고 싶었지만, 위험부담이 크다. 이토록 팽팽한 국면일수록 공월무의 발동을 차단당하거나 그 반동에 자멸할 공산도 커진다.
손익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망설임이 가중된다.
“후배가 이토록 생사를 도외시하는 연유는 뭡니까? 본 단주와 마찬가지로, 천하의 공의(道義)를 살피고자 하는 것입니까?”
“뻔한 소리를 지껄이는 이유가 뭐냐. 입황성에 몸담은 이 중 그러한 다짐으로 살지 않는 이가 없다. 아, 자하령이란 오명 석자를 제한다면..”호흡을 고르고, 다음 수를 안배하는 대치 상황 속에서 대화가 재개되었다.
“제가 입황성을 배신했다고 여기는 모양이로군요.”
말아 올려진 입가에 싸늘한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형가(荊軻)가 당대의 천자인 시황제(始皇帝) 영정( 政)의 목숨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후대는 그를 천하의 역적이라 부르는 대신 협객의 시조로 예우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천하를 위한 협(俠)과 의(意)는 편협하고 맹목적인 충(忠)보다 한없이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남조의 입황성이 진정 대의를 지킨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천하목이 천하의 지기를 갉아먹고 아무것도 모르는 양민들이 기근에 신음할 때, 남녘의 조정과 입황성은 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에게 문(門)과 지력을 빨아먹는 나무라는 두 재앙을 종식할 방책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식혀온 울분이 실린 목소리였다. 자하령의 추궁에서 시커먼 검강을 휘두를 때를 능가하는 기세가 느껴졌다.
“답하십시오.. 명족과 천하목이 불합리한 이유로 천하의 지기(地氣)를 착취하고 있다면, 그대는 천하만민을 위해 그들에게 검을 겨눌 수 있겠습니까?”
단 일초가 아까운 전장. 이런 논변에 어울리는 짓은 실로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하책일 것이다. 그럼에도 정연신은 저 추상같은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를 따라, 무고한 백성을 지킨다.”
짧지만 길었던 강호행, 수많은 인연을 맺고 잃었으며, 기쁨과 괴로움을 연이어 겪었다. 정연신은 그 모든 변화에도 무뎌지기는커녕, 더욱 단단해진 각오를 진솔하고 당당히 말했다.
“내 목숨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지고한 가치다. 그것이 내 협의(俠意)이며, 타협의 여지 따위는 없다. 무고한 양민을 헤치는 자라면…누구든 벤다.”
그들의 지고한 상단전 통찰은 허튼 말장난과 거짓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단언이었으나, 확고한 진심이었다, 오히려 흔들리는 기색을 보인 것은 오히려 자하령이었다.
“...그렇다면 기근을 끝낼 방책은 있습니까?”
묘한 기대감이 어린 자하령의 질문이었다.
정연신의 뇌리에서 갈수록 악화되는 난세의 풍경이 떠올랐다.
탐욕스러운 관리들과 강호인들이 들끓고, 협객과 청백리는 조용히 죽어 사라지는 남녘의 마경.
모두를 지켜낼 방안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문을 벨 것이다.”
“종남검선과 같은 고절한 검객조차 고작 하나를 베고 귀천하는데 그쳤건만, 천하 곳곳에 문이 산재해있다는 것은 압니까? 검선이 선보인 참문의 묘리를 알아는 냈습니까?’
자하령은 실망스럽다는 듯 힐난했다.
“.....발 달린 나무를 베어 기근을 종식시키고, 문을 억제해 천하를 안정시킬 방책이 본조(本朝)에 있다면? 천하를 지켜낼 방안이 우리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과연 대의는 누구에 있겠습니까?”
거짓이 아니다. 마경의 수뇌부는 아주 오랜 세월을 바쳐 구세의 대책을 수립한 것이다. 장성을 넘어 중원을 정복하는 것조차 그 대계의 일환에 불과했던 것일까.
정연신은 놀라움을 감추며 담담히 말했다.
“너희의 계획이 도의에 맞는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다. 어디 지껄여봐라.”
자하령의 입가에 짙은 조소가 걸린다.
“기껏해야 그런 치기어린 마음으로 천하의 운명을 논했던 것인가…아무 대책도 없이, 고작 일신의 재능 따위를 맹신하고서는…”
검은 입신검에 서늘한 분노가 담기고, 이내 검격이 이어진다.
싸움이 재개되었다. 서로 갈고 닦아온 검초와 권장법, 각법까지 가용한 모든 공격초를 쏟아붓는다.
모든 초식이 절세신공이다. 여파에 스치는 것조차 부상으로 직결된다. 결국 장기전으로 이어지는 듯한 생사결의 형국을 가볍게 분석해 보자면, 승기는 정연신의 편이었다.
정가동공(鄭家動功).
고금을 논할 대종사가 창안한 궁극의 동공(動功)은 육신을 갈고 닦는 경지를 훌쩍 넘어 재생의 공능을 방불케 하는 회복력을 주인에게 선사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부상과 내공소모가 가중되는 장기전이 계속된다면 이 싸움은 필시 자하령의 패배로 끝나고 말리라.
그러나 천하 북제는 이러한 이점을 이용할 입장이 못 되었다.
두 선대 단주가 북왕들의 공세를 힘겹게 받아내고, 성벽 안팎의 흑색 대주들과 청색 고수들이 피를 토해가며 요족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으며, 멀리 동쪽에서 질주해 오는 수만 규모의 군세를 향해 홀로 돌진하는 칠사도의 기운까지…
그 모든 위기를 고절한 감각도로 낱낱이 느끼며 전투에 임하고 있는 정연신은 도저히 소모전의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
바로 그 난처함을 자하령이 놓칠 리 없었다.
“저기 동쪽에서 달려오는 군세…아무래도 팔기(八旗)라 불리는 제 휘하의 여덟 무력대인 모양이로군요. 그들을 단신으로 감당하려 나선 저 여인의 용기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도발만으로 북제의 평정심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찰나와 영원의 경계가 흐트러지는 전투 속에 근심의 빗방울은 쉼 없이 신검단주의 마음을 적셨다.
방심, 실책이라 말하기에는 합당치 않을 극히 흐릿한 무의식적인 초식연계의 치우침.
자하령은 찰나 동안 드러난 그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툭.
자하령의 우장(右掌)이 뒤늦게 전개된 환강(奐江)을 스쳐 지나가 정연신의 가슴에 얹어졌다.
[천식(天蝕)]
우지직.
자신의 갈비뼈와 근육이 으스러지고 뭉개지는 소리가 등뼈를 타고 와 머리에 울려온다.
피를 뿜으며 날아가는 와중에도 정연신의 의식은 전황을 놓치지 않았다.
핏발어린 눈이 꿈틀대며 자하령의 다음 동작을 포착한다.
정가동공의 회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기 앞서, 허공답보로 몸을 팽그르르 돌린다.
진로의 모든 것을 지워버릴 기세로 쏘아진 강기의 구슬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지평선까지 뻗어나간다.
검환(劍丸). 지금은 공월무에 밀려 사장되었으나 원대(元代)에는 강호 검객들의 구명절초로 통했다는 기예.
착지함과 동시에 북방의 신검단주가 따라붙었다. 물러나며 방어초에 집중하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저울이 기울어진 것이다..
마침내 승기를 다잡은 자하령이 돌진하며 살기어린 공세를 퍼붓는다. 역전의 여지를 결코 내주지 않겠다는 각오가 뚜렷했다.
다시 한번 자하령의 칼끝에 검환이 형성된다. 정연신은 발사 직전의 미세한 틈을 타 간신히 그 죽음의 궤적을 피해냈지만 그조차도 자하령이 상정한 바였다.
이전과는 다른 곡선 궤적으로 쏘아진 검환이 계속 돌아오며 정연신의 퇴로를 차단한다.
선룡이화결의 이기어검에 비길 정도의 극도의 정밀함은 없으나, 공월무 발동에 필요한 간격과 여유를 차단하기에는 충분한 일수(一手)였다.
아직 정연신에게 패는 남았다. 공명령의 입도광예(入道曠藝)로 축기량을 과부하시키면 단 일검으로 승부를 역전시키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흑도 전역의 진법에서 힘을 얻고 있는 마경의 황제를 도모할 최적의 손패를 잃는 것을 의미하는 바.
진퇴양난의 형국에서 정연신의 상단전이 미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북방 신검단주의 무공을 재차 분석하기 시작했다.
명족 특유의 바람을 타는 신법, 자연검, 원말명초의 고인들이나 쓸 법한 검환, 여유가 있을 때면 무의식적으로 어깨의 황금빛 황(荒)를 훑는 시선…
모든 것이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
“성주께 사사한 바가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고금제일인을 모범으로 삼고자 했을 뿐.”
짤막한 대답에서 미묘한 단어 선택이 두드러진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입황성주를 고금제일인이라 칭한다. 본성의 어떤 고수들도 과하다 여길 단언.
파고들 역전의 활로가 보인다.
천하목을 목표로 스승과 단둘이 걸었던 길고도 짧았던 여로. 정연신은 떠오른 당시의 사담을 그대로 읊으려 했다.
“스승님께서는….”
그 서두를 들은 자하령의 입가가 사이한 광기로 벌어졌다.
그래! 어디 말해보라! 스승님께서는 쓸모없는 네년을 버리고 대신 나를 간택했으며 너무도 어여삐 여긴다고! 어디 도발로 내 빈틈을 도모해보거라! 버려진 지 20년이 넘었거늘 이제 와서 내 자연검로가 흐트러질 성싶으냐?! 내 마음을 불태워 널 죽일 검력을 복돋아보거라!
"..네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그때를 후회한다고 말씀하셨다.”
거짓말이 아니다?! 놈이 말장난을 치는 것은….나를 더 이용하지 못해 후회막심이라는 것이 아닐까? 혹시…어쩌면…
절세고수들의 사고는 빠르다. 상념이 스쳐 가는 속도 역시 마찬가지다. 백전으로 연마된 전투본능에 의거한 자하령의 검로가 ‘멈칫’하거나 휘어지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의념의 흔들림은 자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미한 진기조정의 오류로 직결되었고, 정연신의 초월적인 감각은 그 실낱같은 구명을 여지없이 뚫고 지나갔다.
환익육보(奐翼六步)가 검환의 궤도를 넘어선다.
간합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낭패함을 느낄 틈조차 허용할 수 없는 단 일초의 승부였다.
동시에 발출된 막대한 기운이 공간을 짓누르고, 장중히 울려오는 두 의념이 부딪힌다.
[월천극야(越天極夜)]
[묵요광검경(默曜炚劍庚)]
서로의 일생과 인연을 풀어낸 구명절초가 그 전조를 드러낸다.
자하령의 공력 파동과 상단전 신(神)이 어우러져 광막한 밤의 어둠으로 공간을 물들이고, 두 사람 사이는 섭리를 벗어난 이들이나 알아차릴 수 있을 희미한 공간의 이지러짐으로 채워진다.
심상 속에 품어온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을 구현해 공간의 비틀림으로 적의 모든 공격초를 무위로 돌림과 동시에, 그 어둠 너머 달에 닿고자 하는 염원을 녹여낸 검격을 내쳐 비틀린 공간과 함께 적을 가른다.
북방에 정착해 심마를 이겨낸 후 얻은 새로운 구명절초. 전사한 명류대주조차 알아내지 못한 북방의 기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정보의 우위 따위는 없었다. 공허한 어둠을 수놓는 저 별자리 역시 자하령을 비롯한 북왕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기에.
놀랄 것도 없다. 공월무란 곧 삶의 반영, 내가 그랬듯이 상대의 공월무도 변화할 수 있음을 필히 상정해야만 한다.
만전의 그녀였다면 군더더기 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을 사고의 흐름. 그러나 정연신의 단 한마디가 그녀의 심중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고, 이는, 그녀로 하여금 남제가 미리 전해준 입도공월의 궤적을 겨냥한 검로를 펼치도록 만들었다.
미세한 실책을 알아차리기도 전, 세 개의 별을 담아낸 무형검 별밤이 짖쳐들어왔다.
콰콰콰콰콰쾅!!
밤은 끝났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지반 가운데 한 인영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하령이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의 오른팔이 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극히 패도적인 검격이 지나간 듯 거친 단면만이 있었다. 허리를 훑은 수십 개의 검격은 어쩐지 얄밉도록 다채로운 색채를 남겼고, 돌아본 뒤편에는 잘려 나간 허공의 자락이 나풀댔다. 모두가 익숙한 검로였다.
자신의 삶 대신 인연을 담아낸 기예라. 이것을 공월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억지로 일어섬과 동시에 주인 잃은 오른손에 잡혀있는 검은 입신검을 허공섭물로 회수하려는 순간, 서늘한 검기가 자하령의 목가에 닿아있었다. 완패였다.
“졌군요…”
피가 낭자한 몰골로 늘어진 오른팔 대신 좌수검으로 자하령을 완전히 제압한 정연신이 질문했다.
“설마 했지만, 그 정도로 흔들릴 것이라 예상하지는 못했다. 네게 대체 성주님은 어떤 존재인 것이지?”
-내가 그분을 연모(戀慕)했다.
“그저 지나간 옛 상관일 뿐입니다.”
너무도 노골적인 거짓말에는 오히려 진심이 묻어나는 법이다. 짧지만 강렬히 서로의 무(武)를 교환한 직후, 지금 이 순간 정연신에게는 그 어떤 지우보다도 자하량의 감정이 짙게 느껴지고 있었다.
‘...설마..’
정연신의 뇌리에서 문득 심무련의 공녀 군유린(君硫燐)이 떠오른다. 여자로서 여자를 좋아하는 천형.
‘억측이겠지.’
내심 스승을 그런 감정의 대상으로 삼기를 거부한 정연신은 즉각 자신의 추측을 폐기했다.
자하령이 그만 끝을 내라는 듯 목을 굽혀 내밀었다.
싸울 여력 따위는 남아있지 않겠지만, 남제가 부리는 신묘한 술법의 공능을 감안하면 회복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검단주는 검을 거뒀다.
“나를 동정하는 모양이로군요.”
자하령이 허망한 웃음을 지었다.
“사사로이 널 가엾게 여기고 있음은 인정하겠다.”
납도 후 정연신은 오른팔의 혈도를 두드리며 흑도의 중심부를 흘낏 돌아봤다.
“미련이 없어 죽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미련을 떨쳐내지 못해 죽으려는 듯한 꼴이로군. 네 마음은 이미 꺾였다. 네 사사로운 감정까지 일일히 헤아려줄 여유 따위는 없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나는 너같은 죄인의 검조차 이용한다는 수치를 감수할 요량이다.”
“당신은 이미 공월무를 소모했고, 몸도 온전치 못합니다. 남제를 도모할 비책을 궁리해도 모자랄 판에 저를 부려 먹는 미래까지 보고 있군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현실적으로 그건…”
정연신에게서 느껴지는 절대적인 확신과 각오가 자하령의 말을 그치게 했다.
“천하의 모든 문을 베고, 기근을 종식시킨다. 여기에 식언 따위는 없다. 불가능한 일이라면 가능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능법(凌法)이지.”
역천(逆天)을 단언하는 광오한 각오. 그것은 아마 수십 년 전 자하령이 누군가에게 바라온 구원자의 자태가 뒤늦게 현현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설마 당신이 말한 그 적기(適期)가…’
경악한 자하령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 정연신은 상대의 투지가 완전히 꺼져버렸음을 확신했다.
“멋대로 죽지 마라. 네 여력을 대의를 위해 남김없이 소모할 그때까지, 너는 본성의 죄수로서 죽을 수 없다. 네 최종적인 처분은 성주께 여쭐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신검단주는 흑도의 중심부로 달려 나갔다.
자하령은 그저 한없이 침잠하며 풀어낼 수 없으리만큼 꼬여버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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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거대한 격전이 펼쳐졌음에도 하늘의 보살핌이 있던 것인지 흑도 고궁의 서고는 다행히도 온전했다. 명목상 황실의 서고이지만, 그 실상은 문곡 개인의 서고라 함이 옳을 것이다. 만리장성을 넘나드는 암상들에게 터무니없는 웃돈을 쥐어주거나 신투에게 머리를 조아려가며 애걸해 겨우 수집해온 소중한 서책들은 다행히 훼손되지 않았다.
문곡은 박살이 난 선반을 치우고 서책을 다시 분류하고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극고의 외공으로 단련된 그의 우악스러운 손이 가장 소중한 수집품을 쓰다듬었다.
전습록(傳習錄)
그가 흠모해마지 않는 왕수인(王守仁) 선생의 유명한 저서로, 신투의 손을 빌려 양주의 서고에서 훔쳐온 몹시 희귀한 초판본이기도 했다.
낙제 이후 겪은 심마를 극복하게 해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신선한 가르침은 문곡에게 있어 여전히 유효한 화두였다. 잠시 그 서문을 읽어보려 책장을 넘기려던 순간 입구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오셨군요?”
악의가 전무함에도 위협적으로 들려오는 깊고 굵다란 목소리였다.
“당신이 있을 곳이 여기말고 또 어디 있을까요? 어르더니(額爾德尼)”
자연스럽게 문곡의 이름을 입에 담는 자하령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생환한 벗을 만난 문곡의 시선에 이채가 어린다.
“머리를 자르셨군요. 신수가 훤해졌습니다. 어쩐지 소생의 마음마저 맑게 개는 느낌입니다.”
“그게 외팔이가 된 사람을 보자마자 하는 말인가요?”
“자 공께서도 애꾸가 된 사람에게 너무 살갑게 구시지 않았습니까?”
무인으로서 치명적인 신체의 결손을 주제로 서슴없이 농을 주고받는다. 자하령과 문곡의 교분이 꽤 깊음을 입증하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의 성향과 기호를 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갈 상황이었다. 문곡이 무심코 송풍(宋風)의 시조를 읊을 때, 거기서 이안거사(易安居士)의 흔적을 알아낼 인물이 북방에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와 이탁오(李卓吾)의 이단적인 저서 분서(焚書)를 주제로 핏대를 올려가며 격론을 벌일 자가 있기나 하겠는가?
난세의 군주로서 실리만을 추구하는 남제에게는 그런 논담을 즐길 취향도, 여유도 없었다. 그저 서책만을 벗 삼아 온 문곡에게 먼저 서고의 책을 빌려달라 말을 걸어온 자하령의 등장은 가히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온다(有朋遠來)는 논어(論語)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격이었다.
자하령이 평소 독서를 즐긴 까닭은 직속상관과 대조적인 고아한 기품과 교양을 쌓기 위함으로 과거 급제를 논할 경지는 아니었지만, 문곡은 참된 유자(儒者)로서 무릇 사람의 식견이란 팔고문(八股文)을 달달 외우는 재주와는 별개임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는 장차 마경의 강호에서도 흥미롭기로 손꼽히는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심지어는 남제가 직접 문곡에게 자하령과의 재혼을 제의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괴소문까지 돌 지경이었다.
가볍게 서로의 안부를 물어본 문곡과 자하령은 곧바로 서고 정리에 들어갔다.
허공섭물이 난무하고, 간혹 서지(書誌)에 부합하지 않다는 문곡의 점잖은 타박도 있었다. 마침내 정리가 끝나고 온전히 남아있던 두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이 본론을 꺼낼 때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 마경을 통틀어 가장 고강한 두 북왕(北王)의 독대. 비록 흑환이 속히 다이칭 구룬의 황위를 계승했다 하나 진정한 실력자들의 의중을 크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대화에서 일국(一國)의 대전략과 목표가 재설정될 공산이 크다. 천하정세가 이 대화의 결론에 걸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저는 북제(北帝)를 따라갈 요량입니다.”
“결단이 빠르군요. 남제와 쌓은 교분이 클 터인데, 과거의 은원은 제쳐두기로 결심한 것입니까?”
“명분으로나, 실력으로나, 이제 남제의 뜻을 실현할 유일한 가능성은 오직 그에게 있습니다. 자 공께서도 익히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제 다음 발걸음도 익히 짐작하겠군요.”
“물론입니다. 귀공께서 마경에 애정이나 미련 따위를 둔 적이 없음은 북왕 모두가 익히 알고 있었습니까요. 남제를 따른 것 역시 그저 뜻하신 대의를 실현할 유일한 방도가 그에게 있노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온전히 드러난 자하령의 표정에는 가감 없는 회한이 가득했다.
하나 남은 눈을 돌리게 만드는 저 비애 어린 표정은 단지 수십 년을 등진 조직에 다시 굽히고 들어가야 만 할 자신의 모순적인 인생을 한탄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문곡은 더 이상 추측하지 않았다. 벗의 비틀릴 대로 비틀린 인생의 궤적을 함부로 재단하고 싶지 않았기에.
끼이익!
문곡이 일으킨 그 거구를 힘겹게 지탱해 온 의자가 내지른 비명이었다.
“서로 마음을 정했다면 구태여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속히 북제의 진영에 찾아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난세에 시간만큼 아까운 자원도 없는데, 그들이 헛되이 경공으로 중원까지 달려가는 꼴을 봐줄 수는 없잖겠습니까.”
남제의 이형공허 진법. 명나라의 수뇌부를 일거에 제거할 비장의 수를 고작 이런 식으로 소모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론이로군요..”
자하령 역시 일어났다.
보다 가벼워진 몸으로 문곡과 함께 질풍 같은 기세로 초원을 질주하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일국을 도모할 기세의 저 오백여 명의 무인 중 그녀를 알아볼 인물들이 얼마나 있을까. 자하령은 한때 대의멸친의 각오로 기꺼이 죽고 죽이리라 다짐한 자들과의 어색한 해후를 내심 걱정하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자신이 신검죄수의 수치를 감수하면서까지 저들을 따라 중원으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단지 대의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그녀의 심혼을 집어삼키는 아름다운 눈과 온전히 마주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동정할까. 경멸할까. 아니면 그저 무심할까.
나는 어떨까. 더욱 후회하며 괴로워할까. 원망하고 미워하게 될까. 후련히 모든 것을 털어내고 자유로워질까.
짐작할 수 없는 미래를 접어두고 내친 그녀의 일검이 전방의 익숙한 빛무리를 갈라버린다.
그 틈으로 몸을 던진 거인의 금나수가 거짓말처럼 불혹의 낚시꾼을 제압하고 자하령의 신형이 작달막한 소년 장수의 후방을 점한다.
“저희가 먼저입니다. 불청객은 물러나시지요.”
신검단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누리며, 자하령이 문곡의 말을 받았다.
“신검단주께 회담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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