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국 전쟁
WAR OF THE FOUR NATIONS
병사들이여! 너희가 칼을 갈고, 포를 닦고, 제국의 영광을 위해 준비할 때, 가울의 아들이자 그대들의 황제인 내가 큰 슬픔과 분노의 소식을 전한다.
얼마 전, 라이타니엔의 위치킹은 마침내 위선적인 지혜의 가면을 벗고 야만성과 잔혹함의 진면목을 사람들에게 드러냈다. 그는 가울의 의로운 아들딸들을 살해하고 사악한 주술로 그들의 고귀한 영혼을 모독했고, 그러한 잔인함으로 황제를 위협하고 제국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위치킹은 한때 그의 장엄했던 탑이 이제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광대는 가울의 준비된 전사들을 조롱하고 우리를 겁쟁이로 여기며, 제국이 이미 오랜 번영 속에서 지나치게 너그러워져 빅토리아와 우르수스에 의해 손발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제 저녁, 내가 막사를 지나갈 때 제군들 중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 이것이 사실입니까? 위대한 갈리아는 이제 분노를 삼켜야만 하며, 그녀의 전사들은 복종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펴야만 하는 겁니까? "
망상에서 벗어날 시간이다!
가울의 아들딸들이여, 즉시 진군할 것을 명령한다! 우리는 더 나은 때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며, 복수에 대한 열정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대군단은 이제 오만한 폭도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라이타니엔의 땅으로 행진할 것이다. 무자비한 제국의 군대가 탑을 둘러싸고 있을 때, 광대의 발 밑에는 교수대로 향하는 계단이 있을 뿐이며 그 무엇도 제국의 정의로운 분노로부터 그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적들은 갈리아의 존엄성을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두 위대한 국가가 지속적인 우정을 쌓고 함께 다음 번영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기회조차 짓밟았다. 병사들이여, 갈리아는 선뜻 올리브 가지를 뻗었지만, 비열한 마법사는 피묻은 더러운 손으로 그것을 땅에 떨어뜨렸다. 자칭 '위치킹'을 자처하는 광대는 일어나서는 안 될 전쟁에 백성들을 연루시켰고, 라이타니엔의 땅에 흘린 피 한 방울까지 모두 그의 죄악이 될 것이다.
——1029년 8월 코르시카 왕의 전쟁 전 연설
역사적 배경
도시국가 테라의 역사에 대한 의심할 여지 없는 상식으로 볼 때, 이번 세기는 1001년에 시작되었고, 1100년에 끝날 것이다. 그러나 런디니움 학술 살롱에서는 1029년부터 1031년까지 벌어진 가울-라이타니엔-빅토리아-우르수스 전쟁, 일명 '사국 전쟁'이야말로 11세기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작이라는 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 전쟁은 핵심권의 지정학적 형태를 완전히 다시 써내렸다. 한 제국은 정치 지도 속에서 사라졌고, 다른 제국은 새로운 지정학적 지배력을 얻었다. 전쟁 후 거의 70년 동안의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 대부분의 단서는 이 전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견해는 전후 빅토리아에서 많은 유행을 얻었고, 1072년 의회가 사자왕을 교수형에 처할 때까지 그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어쨌든 1029년으로 돌아와보면, 실제로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불길한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가장 평온한 사람들조차도 과거와는 다른 전쟁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기였다. 나는 전쟁이 발발했던 해에 가족들로부터 학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라이타니엔을 떠나 이베리아로 피난하라고 조언받았던 편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컬럼비아의 독립 이후, 빅토리아와 가울의 관계는 급격하게 악화되었으며, 고속 전함들이 서로 충돌하고 이동 도시에 대한 도발적인 포격이 일상화되었다. 코르시카 1세는 표면적으로는 우르수스 황제 이반 예브게니예비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가울은 우르수스가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측 간의 상호 탐색과 마찰은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라이타니엔에 대해 말하자면, 가울의 동쪽에 위치한 이 제국은 이미 폭정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위치킹은 이전보다 강력해졌지만, 귀족과 시민의 눈에는 더 이상 현명하고 결단력 있는 위치킹이 아닌 눈짓만으로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미치광이였다. 그는 한때 사자를 보내 여러 나라의 왕관을 요구하는 명령을 보내고, 그가 국경을 넘기 전에 그 목을 자르도록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위치킹의 비정상적으로 긴 통치와 그가 라이타니엔에서 시행한 개혁은 이미 선제후들을 화나게 했고, 그의 잔인한 통치 방식 또한 라이타니엔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눈들이 탑의 꼭대기를 주시하였고, 그들은 라이타니엔이 항로를 벗어나 먼저 전쟁의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불길한 징조와 함께 역사는 1029년 여름으로 나아갔다. 가울은 라이타니엔을 자신의 영향력 안으로 끌어들이기를 희망하며 왕실 사절을 통해 라이타니엔에 반복적으로 외교적 호소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번에 왕실 사자는 이미 내전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라이타니엔에 손으로 쓴 편지를 보냈다: ‘코르시카 1세는 위치킹 본인을 그 자신의 동맹국이자 인척으로 초청하고, 라이타니엔을 제국의 "동맹국"으로 정식으로 제안하며, 한 가울 보호자 (즉 황제 본인) 의 비호 아래 최소 100년의 안정과 번영을 누릴 것이다.’ 이런 무리한 요구는 가장 온화한 통치자조차 격노시키기에 충분했지만, 상대는 광기에 가까운 위치킹이었다. 고탑의 왕은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고, 그는 라이타니엔 경내의 모든 가울에서 온 사자를 -그들이 가울 황실을 위해 일하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처형했다. 그리고 그들을 높이가 20미터에 가까운 조각상으로 "재창조"하여 가울의 황제에게 "답장"하였다.
위치킹의 행동은 내부 전체를 경악시켰고, 오랫동안 비밀리에 전쟁을 준비해온 가울에서 전쟁에 대한 뜨거운 요구를 불러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황제가 원했던 일이었다. 제국군은 라이타니엔의 국경을 향해 재빨리 집결했고, 코르시카 1세가 직접 최전선에 나와 총사령관을 맡았다. 원정에 앞서, '제국 역사상 최연소 군사 천재'로 알려진 황제는 정의로운 복수가 실현될 것이며, 위치킹과 그의 고탑은 제국의 정의의 분노속에서 전복될 것이라고황실 근위대와 수비대원들에게 약속하였다.
1029년 8월, 가울은 군사 준비를 마치고 공식적으로 라이타니엔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전략적 판단
가울의 군사 장성들, 특히 코르시카 1세 주변의 제국의 원수들은 가울의 지리적 적수들이 내부 세력 전체에 퍼져 있고, 라이타니엔이 제국에 가장 긴급한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두 나라는 역사상 우호의 전통이 없었지만, 라이타니엔과의 동맹은 코르시카 1세의 지정학적 전략에서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양측의 협력은 우르수스가 남쪽의 핵심권으로 계속 진출하는 것을 막고 빅토리아의 확장 초점을 남쪽으로 돌려 육로 봉쇄를 깨기 위해 노력하는 이베리아와 맞설 수 있었다.
코르시카 1세가 1029년에 전쟁을 통해 전략을 추진하기로 한 것은 주로 세 가지 판단에 근거했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첫째, 선제후와 위치킹 사이의 상호 불신, 즉 불화가 폭발할 정도로 쌓여 있었다. 위치킹이 광기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선제후의 권력을 크게 줄이고 시라쿠사에게 완전한 자치권을 허용하는 것(제국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허용하는 등 일련의 충격적인 조치는 장기적인 혼란을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라이타니엔의 귀족들은 그들의 탑과 도시를 위해 싸우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지만, 위치킹을 방어할 의지는 없을 수도 있었다. 또한 실제 상황과는 상관없이, 볼리바르에서 라이타니엔이 그랬던 것처럼, 황제는 상당수의 고탑 귀족들이 미친 왕을 배신해 전령과 협상했을 것이라 믿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 가울의 다른 전략적 적수, 특히 여전히 제국과 군사적 마찰 상태의 이들은 나름의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개척 지역이 독립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의 여파는 여전히 빅토리아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과 의회는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또 다른 군사 개입을 성급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북쪽에서는 우르수스의 군대가 큰 팡파르를 울리며 서쪽으로 집결하여 카시미어를 향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훈련된 출정 기사들은 그들의 주력을 카시미어의 땅에 주둔시킬 것이다. 따라서 황제와 원수들은 빅토리아나 우르수스 모두 가울의 군사 작전에 의미있는 개입을 할 수 없다고 믿었다.
셋째,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핵심권의 세력 균형이 바뀌었다. 가울의 자존심 때문에 코르시카 1세는 어떤 공개 토론회에서도 이를 인정할 수 없었지만, 젊은 황제는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울의 황금기가 지났다고 걱정스럽고 직설적이게 표현했다. 링고네스를 중심으로 한 종속성 국가 체계는 고통스러운 함정으로 변하고 있으며, 비대하고 부패해진 관료제는 제국의 생명을 갉아먹었다. 가울은 필연적으로 핵심 세력으로서의 지배력을 잃고 있었으며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동맹이 필요했지만, 이것이 기회를 노출시키는 약점의 신호로 여겨져서는 안되었다. 황제는 라이타니엔을 선택했지만, 그의 생각에는 라이타니엔이 위치킹과 같은 강력한 군주의 통치를 계속 유지할 수 없으며, 가울이 동맹의 고삐를 확고히 쥐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따라서 코르시카 황제는 전쟁을 통해 위치킹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가울에 적합한 동맹국으로 만들 계획이었을 것이다.
가울의 마지막 황제와 그의 원수들이 이 전쟁에 대해 극도로 심각한 오판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오판을 인간의 오만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빅토리아와 우르수스가 전쟁에 마지막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코르시카 1세의 전략적 비전이 단순한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가울은 이 전쟁을 이용해 패권을 되찾을 기회를 얻었더라도, 코르시카 1세의 야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최종적인 답은 역사가 제시해 주었다. 전쟁은 누구나 통제할 수 있는 온순한 버든비스트가 아니다. 코르시카와 같은 군사적 천재라도 혼자서는 그 방향을 좌우할 수 없다.
전쟁 경과
전쟁이 시작될 때 대군단은 황제의 개인 지휘하에 동쪽으로 진격하여 소위 "견고한" 고탑 귀족들의 서부 방어선을 신속하게 와해시켰다. 이때 코르시카 1세의 군사적 재능이 충분히 발휘되었는데, 그는 주력을 다른 공격 방향으로 분산시키지 않고 대신에 이 거대한 군대를 통합하여 가장 신뢰하는 제국 원수들에게 좌측과 우측을 맡겼다. 라이타니엔의 정찰병들이 가울의 주 공격 방향을 계속 확인하는 동안, 대군은 이미 도시를 파괴하는 창처럼 라이타니엔의 중심부를 향해 달려나갔다.
오랫동안 위치킹을 경계하던 코르시카 1세는 갈리아 최고의 캐스터들을 최전선에 동원했고, 심지어 카즈델 출신의 살카즈 궁정 마술사까지 고용해 독보적인 라이타니엔의 오리지늄 아츠에 맞서 싸웠다. 전쟁이 1029년 12월까지 진행되었을 때. 라이타니엔은 단 4개월 만에 여러 중요 이동 도시와 4개의 선제후 구역을 잃었고, 심지어 가울에 의해 가장 정교한 아츠 고탑을 탈취당하였다. 그때까지 탑에 몸을 가두고 나타나기를 거부하며 4개월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위치킹은 마침내 가울의 군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위치킹은 직접 최전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여러 개의 탑과 공명하는 오리지늄 아츠는 재앙처럼 군단의 선봉대를 찢었다. 동시에 레오폴드 대공이 이끄는 여전히 라이타니엔에 충성하는 선제후들이 동시에 반격을 시작했고, 막을 수 없었던 갈리아군은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울과 살카즈의 정예 마법사들은 군단의 손실을 완화했지만 막강한 위치킹 앞에서는 무력했다. 코르시카 황제는 자신의 전략을 재검토해야 했고, 편지에서 자신이 이 땅에서 가장 강력한 캐스터를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했다.
전쟁은 1030년에 교착상태에 이르렀고, 가울의 전황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제국의 경쟁자들이 관망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 3세와 이반 황제는 거의 같은 시기에 군대를 동원했고, 그들은 이 순간이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을 깨달았을 만큼 현명했다. 빅토리아와 우르수스는 사자를 통해 코르시카 1세에게 최후의 휴전 통첩을 보냈고, 두 나라 군대의 일부는 라이타니엔의 전투에 참여했으며, 다른 일부는 가울의 중요한 국경 마을을 포위했다. 1030년 겨울부터 1031년 여름까지 반년 동안 삼국 연합군은 여러 전장에서 교대로 압박을 가해 갈리아군이 라이타니엔의 주요 도시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적 태세로 전환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전쟁은 라이타니엔에서 핵심권 전체로 확산되었고, 광활한 전장에서 양측은 거듭 충돌을 겪었다.
전쟁이 가울에 불리한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코르시카 1세는 그것을 그만두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의 군사적 재능에 대한 자신감으로 군대를 이끌고 연합군에 대한 더욱 맹렬한 공격과 끊임없는 기동 작전을 시작했다. 가울의 황제는 연합군의 효과적인 힘을 꺾어우르수스와 빅토리아를 전쟁에서 몰아내기를 원했다. 이 전투 방식은 고속 전함이 그다지 "고속"이 아니었던 시대에 획기적인 것이었고, 대군단이 연합군 앞에서 훈련, 장비 및 지휘 측면에서 우위를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전략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전쟁에서 제국의 손실을 심화시켰고, 코르시카 1세는 여전히 이 전쟁에서 이길 기회가 있다고 믿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
가울에 있어 손실을 만회할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참전국들의 지리적인 이견으로 인해 단 한 번의 휴전 시도도 유효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마지막 휴전 협상 시도가 실패한 지 일주일 후, 갈리아 하부의 중앙 계곡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사황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황 전투는 사국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로 1031년 10월에 일어났다. 이 전투는 가울의 황제, 라이타니엔의 위치킹, 빅토리아의 사자왕, 우르수스의 황제가 참전했기 때문에 '사황회전(四皇会战)'이라고도 불렸다. 코르시카 1세가 이끄는 수적으로 열세인 가울의 대군단은 라이타니엔, 빅토리아, 우르수스 3국 연합과 결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배했다. 코르시카 1세의 기함은 파괴되었고, 고참 근위대는 최후의 1인까지 싸웠으며, 황제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전투 초반 갈리아군은 연합군의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운 점을 이용해 효과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했지만 이후 증원군이 빅토리아 함대에 가로막혀 패배했고, 그 여파로 연합군의 엄청난 군사력과 화력 우위에 가울의 주력군은 패하고 말았다. 이 결정적인 요격을 지휘한 사람은 철의 공작이었으며, 그는 나중에 빅토리아 전역에서 "제국 죽음의 종소리"로 칭송받았다.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연합군은 항복을 거부한 제국의 수도 링고네스를 점령해 완전히 함락시켰고, 지정학적 지도에서 가울 제국은 사라지며 전쟁은 막을 내렸다.
사황회전 전역태세도, 1031년 10월 17~21일.
코르시카 1세는 확실히 보기 어려운 군사적 천재였지만, 그는 아마도 전략에 실현하기 어려운 야심을 너무 많이 쏟았을 것이다. 뮬란 원수의 방어선은 황제 이반이 직접 거느린 주력 부대를 주요 전장 밖으로 차단하지 못했고, 드 리볼리 원수의 부대는 웰링턴 공작의 저지로 항로를 크게 벗어났다. 코르시카 1세가 설계한 주머니는 결국 자신의 무덤이 되었다. 그의 앞에는 위치킹의 이동식 아츠 고탑과 프레데릭 3세가 직접 인솔한 빅토리아 주력 함대가 있었고, 그의 뒤에는 재앙이 준비되고 있었다.
전쟁의 여파
가울 제국은 패하고, '세계의 수도'로 알려진 링고네스는 연합군의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황무지의 위험한 환경과 수용소의 열악한 위생 속에서 수백만 명의 전쟁 피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스스로를 "복국자"라고 부르는 가울 혁명주의자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며, 그들은 복국에 대한 광적인 열망을 "가울인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담론 체계로 엮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담론이 후세의 정치 사조와 운동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전쟁이 끝난 후 참가국들은 가울의 이동 도시와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했고, 하부 갈리아의 비옥한 계곡을 합병한 빅토리아는 제국 멸망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다. 갈리아의 자원과 기술은 빅토리아가 새로운 시대에 대륙의 패권국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지만, 이 승리에도 대공들 사이의 상호 제약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영토의 분배와 정치적 투쟁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다. 1019년이 역사를 1031년으로 이끌었고, 1031년이 1072년으로 이어져 결국 빅토리아를 1098년 여름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사국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던 라이타니엔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고탑의 왕국 주민들의 생계는 비참함에 휩싸였다. 한편으로는 레오폴드 대공의 지휘 아래 선제후들은 비밀리에 가울의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고전 오리지늄 아츠에서 단서를 찾아, 위치킹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위치킹의 광기는 전쟁이 끝날수록 더욱 심해졌고, 오리지늄 아츠에 대한 연구에 더 심취하였으며 동시에 더욱 잔학해졌는데 -들어본 바에 따르면- 위치킹은 당시 자신의 결말을 엿보았다고 한다.
우르수스는 이 전쟁에서 많은 이익을 얻었고, 가울의 오리지늄 기술을 배워 산업 생산 시스템을 더욱 개혁할 수 있는 자본을 갖게 되었다. 가울의 예를 따라 그들은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더 중요한 것은 병약하고 과묵한 왕자 블라디미르가 직접 이 전쟁에 참여한 후 완전히 변했다는 것이다. 다음 40년 동안, 우르수스 제국은 황제의 손길을 따라 뻗어나가게 되었다.
이번 전쟁에 일어난 수많은 오리지늄 군수품의 투입, 많은 인원의 참전으로 인한 파급력은 작지 않았기 때문에 곳곳에서 전쟁 피난민과 부상병들이 광석병에 시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쟁 후 감염자 문제의 심화는 심각한 사회 위기를 촉발시켰고, 때문에 각국은 급증하는 감염자를 관리·통제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으며, 전직 군인들이 주도한 감염 저항 운동이 처음으로 대중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 전쟁의 잔재가 진정된 지 거의 70년이 지난 후 감염자 문제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해 보자면, 사국 전쟁은 의심할 바 없이 이 문제가 '현대적 위기'로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울 - 갈리아 혼용이 조금 섞여 있음
설정집 관련 번역본들 모아서 시리즈를 만들어보고 싶은데
관심있는 독타는 한 파트씩이라도 상관없으니 올려주면 상시로 참고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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