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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스크립트) 드래곤 도시아킨과 탁아 마법사

다두(180.226) 2021.04.04 11:27:48
조회 5739 추천 87 댓글 13
														



- 되게 옛날에 썼던 건데 카페에서 약관위반으로 만화 하나 터진거 보고
혹시 몰라서 갤에 안 올렸던 스크립트들 백업 올리려고 씀

도배하기 싫어서 하루 한편씩만 옮김

다 옮기면 검색해서 다시 읽기 편하게 링크모음집 만들 것


- 돌이켜 읽어보려니 문장이 어이가 없어서 조금씩만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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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있었다. 온 세상에서 모인 왕립 마법교단의 인재들 중에서도 단연 찬란히 빛나던 형이.
평민들의 자존심, 부모님의 자랑이며, 친구들의 자부심인 사람.
규칙 몇 가지도 지키지 못해 교단을 박차고 나간, 이단마법사가 된 못난 동생마저도 위험을 무릅쓰고 형제의 연을 이어가며 포용하던 형이.


이제는 없다. 용의 발에 밟혀 죽었다.


말년에 못다한 영광을 찾던 멍청이 대공은 성전을 선포했고, 광활한 검은죽음 산맥을 지배하는 날개 달린 짐승은 자비를 몰랐다.
바보 같이 성실한 형은 대공의 순장 행렬에 순순히 따라갔다.
평민 출신 궁중 마법사가 왕가에 반항했다는 흉한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제기랄. 난 그런 짓 못한다. 죽어라 노력해 궁중 마법사가 된들 다 무슨 소용이던가.


시체 없는 장례식이라, 평민 출신이라, 힘없는 볼모 신세라 미안하다며 울부짖던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다.
먼발치에서. 그리고 장례식마저 훔쳐볼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했다.
잃을 게 많은 형은 순순히 따랐지만, 난 잃을 게 없다. 부모님도 내가 죽은 줄 아니까.


그 뱀대가리 새끼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잃을 게 없는 인간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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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자여, 그게 네 가상한 용기의 원천인가?”

입에 담긴 사악한 검은 불을 일렁이며, 용이 말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시커멓게 내려앉은 눈으로 용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비웃음이 울렸다. 구강 구조가 인간과 다른 생물이다.
내 두려움을 보고 즐기기 위해 마나로 만든 소음에 불과하다.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실장석만도 못한 비열한 자식.

“이곳은 내 영토다. 침입자에게 온당한 대우는 죽음이지.
네 형제는 그에 맞는 대가를 준비하지 못했다. 네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기에 찾아왔느냐?”

“제 형과 일행은 당신께 어울리는 예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바치는 공물입니다.”

나는 내 뒤의 둔덕을 가리킨다. 평지 위에 아무렇게나 솟은 흑수정과 기암괴석들은 마룡의 취향대로 빚어진 인공적 조형물이다.
그 구더기만도 못한 미적감각을 고취시킨다는 점 외엔, 침입자들의 행군을 불편하게 한다는 실용적 목적도 있으리라.

용이 잠든 사이, 나는 그 수십 톤에 이를 바위와 산봉우리들 수십 개 주위에 일일히 마법진을 그려놓았다.
모든 일을 끝내고 내가 주저앉자마자 용이 눈을 뜨며 일어났으니, 교활한 녀석이 정말 잠들었을리는 없다.
녀석은 아마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해 자는 척 했으리라.

그게 네놈의 파멸로 이어질것이다. 버러지같은 도마뱀아.


“설명해라. 미물아. 나는 조잡한 너희 마법을 살펴보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
“마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린 소환 마법진은 무역왕의 금고와 이어져 있습니다.“

황금 군주라 불리는 발타이 무역국의 왕. 수천년 동안 누구도 도적질하지 못한, 전 대륙이 선망하는 보물창고인 황금 군주의 일곱 금고. 녀석의 덩치만큼 거대한 정적이 흐른다. 녀석이 침묵으로서 동요하는 것이 보인다. 황금에 미친 타락한 용들은 수천년의 성숙함으로도 그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다.

“간단한 교차 마법입니다. 인간들이 쓰는 차원문과 같은 원리죠. 마나를 불어넣으면, 같은 무게의 금속과 치환될 겁니다.

바위 산의 일부를 대가로 같은 무게의 보물을 얻게 되시는 겁니다.”

“흥미롭군.”

“그러나 미력한 저는 마법진 전부를 작동시킬 힘이 없습니다. 다만 목숨을 걸고 그 금고에 침입하여 마법진을 그리는 데 성공했을 뿐입니다. 부디 제 수고를 공물로서 여겨주시고, 황금 군주의 일곱 금고의 온당한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심드렁히 바라보던 용은, 마치 밟아죽이려는 듯 앞발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내 나이만큼이나 오랫동안 지켜져 왔던 일곱 금고에, 네가 침입했다는 헛소리를 믿으라고?”

가식덩어리 자식. 죽이지 않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흥미가 동했다는 의미다.

“당신만이 들어주실 수 있는 청이 있어 왔나이다, 고귀한 용이시여.
영겁의 생애 중 조금의 여유만 베풀어 주시면 됩니다. 직접 확인해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제 말이 거짓이거든, 개처럼 고통스럽게 죽여주십시오.”


녀석은 발을 슬그머니 뺀다. 그리고 거대한 머리를 내려 바로 위에서 내려다본다.
거대한 숨결이 느껴진다. 무시무시한 위압감도.

“네가 바라는 대가는?”

“부디 간청드립니다. 제 형의 시체를 돌려주십시오. 제대로 된 장사를 치르지 못했나이다.”


녀석은 혐오스럽게 웃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법진들이 음험하게 빛난다. 영롱한 빛이 온 협곡에 번졌다.
손해볼 것 없다고 판단한 녀석이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도착한 것은 금이 아니다.

금속 비슷한 것마저도 아니다. 나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용은 당황한 표정이다. 거대한 눈동자는 수축되고 입은 헤벌어진다.
전 대륙에서 벙찐 용을 본 사람은 나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린다.
용의 본능적 위압감도 마력의 공포도 내 기쁨을 억누르진 못한다.

“이건… 뭐지?”



“아! 아! 들리십니까? 안들리세요?

처음 보신다면야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동방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배를 타고 물을 건너온 녀석들이니까!
이것들은 실장석이라고 하는 생물이다!
이 아가리에서 실장변 냄새나는 뱀 대가리야-!”

“테에?” “테치?” “지벳”
“데스?" "데픗, 데퍄퍄!”
“데샤아아아아아아!”


내 설명을 한 마디도 못 들었을 수도 있다. 실로 엄청난 소음이 해일처럼 몰려들었으니까.
주위 풍경이 바뀌어 놀라는 소리, 용을 보고 실금하는 소리, 셀 수 없이 많은 동족의 무게에 짓눌려 죽는 소리.
왜인지 눈물이 흐른다. 눈앞의 풍경은 광기와 유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수십만 마리의 낯선 생물이 진녹색과 돼지기름 색의 바다가 되어 협곡을 뒤덮은 광경을 보고 용은 얼어붙었다.

나는 생각했다.
일평생 만든 말썽 중 단연 최고야.



용은 멍하니 되묻는다. “뭐라고?”
나는 또 크게 웃었다. 녀석이 마침내 분노한 표정으로 돌아볼 때까지 웃는다.
상쾌하다. 더 이상 없는 형을 대신해 용을 마주 바라보며 눈물을 뿌려 웃는다.

그 사이에, 어느 눈치 없는 실장이 ‘거대노예’를 획득했다며 거수의 발톱에 똥을 바르고 있다.
저 가만히만 있어주면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 생물을, 놈이 과연 몇마리나 참아낼 수 있을까?

“그래, 복수다. 망할 자식, 아까 침입자에게 온당한 대우는 죽음이라고 했느냐?
그래. 나도 네게 걸맞는 대우를 해주겠다. 이 실장석 똥구멍만도 못한 도마뱀 새끼야!
네놈의 업보가 조금이나마 돌아온 줄 알아라. 이게 바로 십만양병 탁아다!
어디 똥무더기에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웃으며 구경해주마!“

격분한 용이 나를 향해 검은 파멸을 뿜었다. 그러나 난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환영마법에 속았음을 알게 된 용은 분노로 길길이 날뛰었을테지만,
도발하는 환영만 남겨둔 채 도망친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십 년이 흘렀다. 자유 마법사 연맹이 생겼다.
왕명에 얽매이길 거부한 이단 마법사들은 단결되고 통제된 세력의 보호 아래에서 자유로운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창설 멤버로서 어엿한 간부가 된 나는 어느 개척도시의 도서관에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유적의 기록을 먼저 해독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바로 그놈, 검은죽음 산맥의 타락한 흑색용 도시아킨이 남긴 기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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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3160년 2일,


정신병에 걸린게 분명한 마법사가 복수라며 괴이한 생물 무리를 협곡에 방류하고 도주했다.
내 수석 조각품들을 인간의 술책에 잃었다는 것보다, 미물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아, 눈을 멀게 하는 일곱 금고의 찬란함이여. 그동안 얼마나 갈망했던가.

그러나 인간 군대도, 용도, 세상의 어떤 힘도 몇 년만 있으면 날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산맥의 마나를 흡수한 힘으로 무역왕의 나라를 불태우고, 일곱 금고의 황금을 갈취한 뒤,
날 모욕한 놈을 찾아내 사지를 찢으면 될 일이다.

그 날 도망칠 수는 있었겠지만 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는 없을 것이다.


리치 부관들을 호출했다. 산맥을 덮은 생물들의 정체를 알아낼 것을 지시했다.
인간의 머리통만한, 한번도 본 적 없는 녹색 생물체가 묘하게 내 관심을 끈다.
용의 예지적 본능이 관심을 가질 것을 지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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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4일,

봄이 시작되나 날씨가 아직 차갑다.
부관 중 한명인 정원사 마그란이 명령대로 생물체 수십마리를 나의 대전에 대령했다.
표정 없는 해골이 녹색 물질에 뒤덮여 있었다. 마그란의 정신적 피로가 느껴졌다.

생물체 중 한 놈은 날 보자마자 죽었다. 마그란은 놈만은 사념을 느낄 만큼 영리했다고 했다.
나머지는 그렇지 않단 말인가? 그랬다. 놈들은 제놈들끼리 떠들고 싸우고 있었다.

신비하게도 마나의 흐름으로 그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놈들은 언어를 불문하고 모든 종족에게 그 짜증스러운 의중을 전달할 수 있는 듯 했다.


몇몇은 ‘죽는다’고, 몇몇은 ‘사육된다’고, 또 다른 놈들은 ‘노예를 구했다’ 고 말하고 있었다.
어느 놈이 내게 뛰어와 ‘의무를 다하라’ 며 녹색 물질을 던지고 소리를 지른다.
놈을 비꼬며 할 수 있는 건 해보겠다고 말하자, 녀석은 기쁨의 울음과 함께 내 앞발에 작은 놈을 던졌다.
작은 놈은 발톱에 부딪혀 터졌다.

어처구니 없어 쳐다보자 놈이 발톱을 두드리며 말한다. 노예의 냄새가 나는 것이 제 새끼를 죽였노라고.
얼마나 미력한 지성인가.


비웃으며 녀석을 마나로 눌러죽이려 했는데, 들짐승에게도 미약하게 느껴질 만한 무게에도 녀석은 당황스럽게도 터져 죽었다.

남은 것들 중 반수는 공포에 질려 이리저리 흩어지고, 반수는 죽은 놈을 비웃고 있었다.
어느 놈들은 내게 가랑이 사이에서 녹색 물질을 꺼내 던진다. 정황상 놈들의 분변이 분명했다.

미약한 저항을 비웃으며 놈들에게 주제를 알라고 경고했다. 한 놈이 질문했다.


‘말도 안되는 레치. 그럼 세레브한 와타시는 오마에 병신 거대 똥노예보다 못한 레치?’

왜 안그렇겠느냐고 비꼬자 놈은 저절로 죽었다. 나보다 아래인 현실을 감당하길 거부하듯.
태어난 이래 처음 느끼는 분노가 온 몸을 휘감았다.

보물로 가득한 내 쉼터를 모두 불태우고, 불살라져 녹은 황금 더미에 저주를 퍼부은 다음,
나는 리치 부관들에게 이 생물체들을 박멸할 것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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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13일,


‘실장석’이라는 생물엔 연구의 가치도 없었다.


왜 모두 죽이지 못했느냐 묻자 부관들이 주저했다.
평소처럼 충직하게 즉시 시행하는 대신 놈들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놈들의 번식력과 근성, 지저분함이 문제라면서.

항명과 변명은 용납치 않는다. 놈들의 정신을 고통스럽게 주물렀다. 부관들은 다시 복종을 맹세하며 일을 수행하러 떠났다.


자비도 포기도 모르는 리치들이 한낱 짐승의 처리에 곤란을 겪는다니 심히 의문스러웠지만, 영토의 관리는 내 일이 아니다.
무역왕의 영토에 눌러앉은 붉은 용을 상대할 전략을 짜는데만 해도 바빴다.
반드시 거만한 늙은 용의 목을 물어뜯고 말리라.

다시 한 번 박멸을 지시했으니 그걸로 끝이다. 연초의 비가 오크 전사들의 혈기를 식힌다.
그리고 협곡을 메운 불쾌한 냄새도 조금 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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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52일,

봄꽃이 만개했다. 검은 바위 틈의 무채색 풀과 꽃들은 심오한 빛을 내뿜는다.
그랬어야 했다.


대신 벌판은 악취와 더러운 진녹색으로 물들었다.
아름다웠던 정원은 태고의 고통을 표현한 나의 작품들 대신 실장석이란 생물의 분변으로 덮였다.

뛰어난 행정가이자 전쟁 전문가인 부관들이 한 달이 넘게 해수 박멸 따위에 고전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리치들은 해골 병사들이 모두 놈들의 독성에 망가졌다고 보고했다.

고블린 노예들과 사충(沙蟲, 샌드웜)들을 풀어 녀석들을 사냥하게 했다.
협곡에 실장석들이 지르는 고통의 비명이 울린다. 오늘은 미물들의 단말마 속에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으리라.

정원사 마그란의 정신을 본보기로 고문했다. 영토의 미관 관리는 놈의 업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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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55일,

내 분노가 산맥을 가득 메웠지만,

내 존재의 압박이 느껴지지도 않는 듯 놈들은 의욕적으로 울부짖는다.


며칠 사이 그 저주받을 생물들이 내가 심은 회색 마나꽃을 닥치는 대로 뽑아놓았다.
연신 꽥꽥대는 거대한 소음 속에 온 산의 꽃이 씨가 말랐다.
마나식물들의 생장이 늦춰짐에 따라 협곡의 마나를 모아 힘을 비축하려는 내 계획이 어그러졌다.

임무를 방기한 고블린 노예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다.
마그란은 노예들의 굴이 똥과 실장 새끼로 가득차서 사실상 점령당했노라고 보고했다.
영역싸움에서 이 따위 생물과 겨뤄 패배하다니, 쓸모없는 것들.

고블린들을 더 변호하려는 마그란을 다시 고문했다.

고막이 떨어질 것 같다.
방음마법도 잘 통하지 않는 수백만 실장석들의 추한 소음을 마그란은 일종의 ‘기쁨의 소리’라고 했다.
놈들은 내 사유재산을 뜯어 번식에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치고 피로한 고블린들을 협곡에서 모두 철수시켰다. 그리고 검은죽음 성채에 잠든 모든 가고일과 전쟁기계들을 깨웠다.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또다른 작품들을 이런데 쓰는 것이 아깝지만,
돌로 된 기계들은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 실장석을 모두 때려 죽일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이의를 제기하는 리치 부관 중 하나의 정신을 쪼개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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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65일,

단 10일만에 모든 전쟁기계들의 작동이 멈췄다. 가고일들도 사지가 남아나지 않아 현장에서 모두 철수했다.
가죽에는 통하지 않지만 쇠와 돌에 지대한 부식성을 보이는 놈들의 분변,


마그란의 표현에 따르면 ‘육실할놈의 똥벌레들의 똥독’ 때문이었다. 해골 병사들에게 일어난 일이 이것이었나?
‘육실할놈의 똥벌레’라는 표현을 되새겨본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어쩐지 상쾌했다. 입으로 상스러운 말을 뱉어 본 것은 실로 수백년 만이 아니던가?
그러나 말초적인 상쾌함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어지는 마그란의 보고는 나를 경악시켰다.

나는 다급하게 불과 용암의 정령들을 깨워 ‘똥벌레’들을 불태울 것을 지시했다.
가까스로 구한 동방의 문헌을 조사한 결과, 마그란은 무언가를 알아냈다.
놈들의 소음이 ‘데스’에서 ‘뎃데로게’ 로 바뀐 것은 번식이 임박한 징조라고 했다.

고블린 굴을 가득 메웠다는 실장 새끼들은 선발대에 불과했다. 놈들은 본격적으로 수를 불리려 하고 있다.

이 생물들은 죽어도 문제였다. 이 망할 생물들의 시체는 똥보다 더한 악취를 풍긴다.
나는 더 이상의 냄새를 감당할 수 없다.
구워서 고블린들에게 먹거나 거름으로 만들어서라도 시체를 치우라고 지시했다.

고블린들은 먹지도, 식물을 키울 거름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대신 내게 차라리 죽여달라며 용서를 빌기 위해 전령을 보냈다.

마그란을 다시 고문했다.
마그란이 이유를 묻자, 나는 ‘분노는 녀석들을 박멸하는 좋은 동기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마그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고도 말했다.

개인적인 화풀이라고 고백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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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80일,

초여름 날씨인데도 몇 안되는 불의 정령들이 모두 얼어죽었다.
남방 엘프들의 숲을 파괴할 비밀 병기였는데, 겨우 이런 일에 모두 소멸되다니.
범인은 다름아닌 리치 부관 중 하나, 빙결마법의 선구자인 '냉혹자 에오파르'였다.

생전에 한 왕국을 잔혹하게 얼려버리고 리치의 힘을 얻어 냉혹자라는 별칭을 얻은 자다.
이유는 동정심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차마 분노하지도 못했다.

에오파르는 모종의 사연으로 다른 부관들 몰래 이 생물들에 대한 애정을 키워온 모양이다.
녀석은 어미를 잃은 개체들 수백을 거두어, 내 군단에 걸맞도록 교육시키고자 노력했다고 진술했다.
녀석은 천애고아인 ‘아기’들이 불쌍하지도 않느냐며 내 면전에 본인이 ‘교화했다는’ 작은 실장석을 들어올렸다.

놈은 ‘똥노예가 눈앞에 한가득’이라며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리치 에오파르는 고개를 떨구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를 둥지에 쳐박은 나 대신,
격분한 마그란이 에오파르를 낳은 어미를 욕하며 혈마법으로 에오프의 대갈통을 부숴버렸다.

터져죽은 똥벌레는 내 둥지에 지독한 냄새만을 남겼다.
혈압 문제가 없는 언데드임에도 불구하고 마그란은 분노로 이성을 잃고 기절했다.

나는 더 이상 마그란을 고문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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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125일,

비가 오지 않는 여름이 지속된다.
한껏 새끼를 깐 녀석들도 물이 부족하자 점점 메말라간다. 녀석들의 활동이 다소 줄어든다.


박멸을 위해 모든 하천을 막아버렸지만, 그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댐을 건설해 실장석들의 수분 공급을 막고, 군단은 댐 위 상수원에서 물을 길어 쓴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군단이 쓸 상수원들의 물은 언제 침입했는지 모를 실장석 무리에 의해 빠르게 오염되었다.
오크, 트롤 할 것 없이 군단 전체가 실의에 빠졌고, 마그란은 내 지성을 예의 바르게 욕했다.
나는 마그란 대신 귀중한 수원에 똥묻은 몸을 담갔던 실장석 무리들을 고문하기로 했다.

절망에 빠진 나는 놈들의 비명이라도 들어야만 했다.

‘이건 행복이 아닌데스. 세레브한 정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데스우-’

웃기지 마라. 내 정원이다. 너희는 못 돌아가는 데스...
안돼. 내 정신마저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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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130일,


물을 오염시켰다가 내 손에 죽어간 실장석들이 남긴 말에,
그동안 나는 여태껏 생각지 못한 평화로운 결론을 내렸다.

‘행복하게 살고싶었을 뿐인 데스’, ‘세레브님의 영역인줄 알았으니 다시는 안 그럴것인데스’
그리고, ‘어째서인데스, 와타시들도 생명인데스.’

내 영역에서 숨죽여 사는 생물들을 여태껏 내버려두었다.
인간과 같이 어설픈 지성으로 나와 생태적 지위를 겨루는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손을 댈 이유가 없으니까.

냄새가 좀 날 뿐, 놈들이 위협이 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렇다면, 다른 들짐승처럼 공생의 기회를 줄 순 없을까? 놈들도 같은 생의지를 지닌 생명이 아니던가?

더해서, 곤충이나 새, 야생동물들은 놀랍게도 이 생물체들을 먹고 번성중이었다.
변을 생산하는 기관은 포식자들도 기피하지만, 최소한 생태적으로 정해진 기능이 있는 것이다.
몰살할 필요는 없음에 나는 기쁨을 느꼈다.

아마 갈수록 몰살이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져서였겠지만, 오늘 내내 나는 애써 자신을 속였다. 수치스럽다.


1차 협상 시도는 실패했다.
녀석들의 ‘우두머리’격인 개체들은 놀랍게도 나름의 지성이 있어,
내가 놈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텔레파시를 보냈음에도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는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마그란의 의견에 따라 군단 주둔지로부터 먼 하천 일대를 조사하자,
놀랍게도 수 만 마리가 물을 두고 패를 갈라 영역다툼을 하고 있었다.

일대의 땅을 파헤치자 우두머리들이 사는 굴만 수백개가 나왔고,
결국 바글바글한 대장놈들을 끌어내 내 앞에 모이게 했다.





여태껏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죽은 에오파르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실장석은 이해력과 인지능력에 한계가 있어,
웬만한 짐승보다 큰 형체라면 그 크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공포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어쨌든 나보단 약할 것’이라며 현실도피를 하게 되며,

그렇기에 살쾡이 크기의 짐승도 두려워하는 놈들이 거대한 존재에게 투분을 하는 일이 발생한다고 했다.

때문에 고양이나 오크, 엘프 등 하위종족들의 아이는 두려워해도,
성체 하위종족에겐 비웃으며 똥을 던지는 경우가 넘친다고도 했다.


그리고 놈들이 ‘노예’를 만들 땐 몸에서 특정 호르몬을 분비해 똥에 묻히고,
그 똥을 노예가 될 대상에게 던져 묻힘으로서 상하관계 서열을 만든다고 했다.


놈들이 수만배의 덩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날 노예로 불렀던 이유를 비로소 이해했다.





무례가 의도가 아닌 어리석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면 나는 용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냄새를 없애버린 뒤, 폴리모프하여 어린 인간의 형상으로 놈들과 대화했다.

그중 가장 큰 놈이 ‘인간님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신지’ 물을 땐 희망이 보였다.


‘개체 수를 조절하고 똥은 땅 밑에 묻어라.

통제력을 지닌 개체들이 하위 개체들을 통솔해 규칙을 지켜라.

그럼 이 산에서 사는 것을 허락하겠다’.


일방적인 통지였고, 어려운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졌다.


녀석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번식과 노상방분은 일생의 행복이고,
똥을 묻어버리면 ‘구더기’ 개체들이 먹을 게 없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 또한 당황했다. 그따위로 똥을 계속 뿌린다면 숲이 망가져 먹을것은 씨가 마를 것인데다가,
내가 바란 건 통보였지 긴 교섭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멍청한 지성에 내 조건을 이해시키는 일에,
나도 모르게 악을 쓰고 덤벼들고 말았다.


피로감이 격심했다. 놈들이 흥미를 잃고 자러 돌아갈 때까지도 놈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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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131일,


나는 다시 찾아가 놈들에게 ‘공생의 필수 조건’을 가르치려 했다.

중요한 일이다. 맘 같아선 전부 죽이고 싶지만, 내 집인 협곡의 자연환경을 전부 들어 엎지 않는 바에야 널리 번식해버린 놈들을 박멸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온 사방에서 풍기는 분변의 악취를 견디며 살 수는 없다.

에오파르처럼 교화를 시도해야만 했다. 적어도 분변이라도 덮어 없애도록.


그런데, 찾아가자마자 우두머리 중 한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똥을 던졌다.

그리고는 ‘이제 노예 냄새가 나게 된 인간 똥노예는 노예의 신분이므로 더러운 입을 다물고 위대한 자신에게 물이나 제공한다, 자신의 아이들과 부하들이 목말라 하기 때문이다’ 라며 조잡한 무기로 내 다리를 찌르다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 놈이, 미친 똥벌레놈이, ‘노예 주제에 이 산의 진정한 보스인 와타시에게 반항이 거칠다, 지금이라도 받들어 모신다면 사지를 잘라 똥굴에 던지는 정도로 용서해주고 아니면 죽일것이다’ 라며 다시 내 다리를 찌르다 또 다시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랬다고.


연구고 이해고 생의지고 다 필요없다.

나는 다시 마음 속 본연의 논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두머리 놈들은 전부 불타죽었다.


내게 덤벼든 놈은 특별히 데려와 오래도록 고문했다.
이번엔 마그란의 대신이 아니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놈들에게는 보다 즐거운 방식의 용도도 있었다.

의욕 저하로 자취를 감췄던 내면의 사악함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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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208일, 초가을임에도 열기가 넘친다.

장마도 다 씻어내지 못한 분변은 흙에 섞여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열까지 방출한다.
나무열매들은 시름시름 앓다 시들어 떨어진다.

짐승도 곤충도 거부하는 그것을 땅에 있는 똥벌레들은 좋다고 달려들어 주워먹는다.


산맥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산맥은 죽지 않는다. 저런 생물이 백사장의 모래알만큼 있어도 지형을 바꿀 수는 없다.
나무도 굳건하다. 풀은 씨를 옮겨 다시 태어나며 동물들은 견디다 못해 이주할 따름이다.

아마도 죽어가는 것은 포기 못할 부동산을 끌어안고 바스라져가는 내 이성 뿐이리라.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 산맥의 주인이 나였던가.
내가 주인이라면, 이제 이런 땅을 가져서 무슨 의미가 있지.

본보기가 되길 바라며 우두머리 실장석들을 족족 죽였더니, 실장석들의 행패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한다.
오히려 우두머리들이 돌발 행동을 억제해왔는지, 이젠 제 새끼와 욕설, 똥 따위를 아무렇게나 던지길 멈추지 않는다.

상대의 종족이 오크든 서큐버스든 식인식물이든 탁아도 폭행도 거리낌없다.
굳이 자신이 지옥으로 굴러들어간 다음 남의 탓을 한다.
그리고 그런 놈이 이제 억의 단위다. 미칠 노릇이다.

오크와 하피 등 전사들은 실장석이 보이는 족족 밟아죽인다.
다크엘프 연금술사들이 대규모 ‘구제’ 작업에 쓰일 독을 개발해 사방에 뿌린다. 실장석들은 아작나서 죽고 독약에 장을 비워내며 죽는다.

아군의 피해는 전무한 실로 쉬운 전투다.
그런 전투임에도, 아군이 사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비애를 느꼈다.

그간 산맥의 자원을 갉아먹는 실장석을 쓸모있게 이용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본격적으로 저장형 군량으로 만들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야생에서 자란 실장석은 녹색 변의 냄새가 깊게 배었을뿐더러 온갖 기생충이 가득했다. 건포, 훈제, 가공육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가축이나 야생동물들도 실장석을 먹길 거부했다.

마그란이 수억마리 실장석들을 하나씩 죽인 다음, 언데드 군단을 만들어 영토를 확장 및 이주하자는 실로 무서운 계획을 주창했다. 그러나 놈들은 언데드로 살아나지 못했다.
머리가 잘려도 영양이 충분하면 살지만, ‘위석’ 이라는 마력담긴 돌이 깨지면 시체조차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마치 골렘이나 다름없는 작동 방식이었다.

아무리 죽여도 다시 증식하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는 다시 실장석들을 고문했다.
어떤 오크가 실장석의 위석을 빼내 과일술에 담그면 짓이겨도 살아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 오크에게 인간에게서 약탈한 포도주 열 통을 하사했다.

그리고 백년은 따지 않을 것만 같았던 보물 중 하나인 159년산 우스타브르 적포도주에,
나를 찔러대던 그 똥벌레의 위석을 담갔다.

마침내 지옥불꽃을 쓸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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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토나와서 못해먹겠네.

131일부터 275일까지 거의 다 학대 이야기밖에 없어…

별 쓸모도 없는 이야기를 밑줄쳐서 자랑스럽게 적어놨네.

신이 빚은 고귀한 첫번째 종족은 무슨, 냄새나는 도마뱀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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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275일.

초겨울, 슬슬 물이 차가워지기 시작하자 실장석 놈들이 이상행동을 보였다.
가까운 군단병들의 주거지에 찾아가, 집의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제 새끼를 물주머니 따위에 숨겨넣기 시작한 것이다.

보고를 총합한 결과, 마그란은 기쁜 듯 보고했다. 이 똥벌레들의 대부분은 겨울을 견딜 수 없어 본능적으로 다른 지적 개체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수집과 약탈만 알 뿐 자생력따윈 없던 똥벌레들의 개체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은 기뻤지만,
마력으로 일대를 조사한 결과 수 억에서 수천만으로 줄어든 정도다.

삶이 너무 힘들다.


유일한 낙은 실장석 고문이었다. 백여일 동안, 놈들중 몇의 비명을 오래도록 들을때마다 마치 모든 일이 해결되고 있는 듯 한 감상에 빠져있었다. 말도 안되는 현실도피였고 책임 방기였다.

그간 산하 군단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 지시가 부재하는 사이, 똥벌레들이 필사적으로 따뜻한 곳에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식량은 못 쓰게 되고 병장기는 죄다 삭아들어 피해가 컸다.

그리고 그 불만이 오늘 기어이 폭발했다.
검은칼날 오크 부족 최고의 전사 보툴이 반기를 들었다.
반항 정도가 아니라, 도끼 한 자루 차고 둥지 앞까지 찾아와 내게 결투를 신청했다.

녀석은 내가 내 둥지에서 생각없고 지질한 '실장석 학대'라는 취미를 즐기고 있다고 온 산맥에 소문이 자자하다고 도발했다.
자신의 도끼는 똥무더기를 치우는 용도가 아니라고도 외쳤다. 둘 다 사실이었다.

나는 현실을 회피하듯 둥지에 웅크려 몸을 말았다. 실장석 구더기같이.
검은칼날의 족장이 나타나 놈을 만류했고, 놈은 결국 부족과 함께 이 산맥을 떠났다.

주제를 잊은 것들의 행동에 실장석들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순간 욱해서 날아가 모두 태워죽이려 했으나,
검은칼날 오크들은 쓸모있는 전사들이니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설득하겠다는 부관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날아간들 내게 불을 분사할 수나 있었을까.


겨울이 시작되었는데 아이와 산모들을 데리고 내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은, 길고 고된 행군이 될 것이다.
실장석 때문에, 즉 그들이 아닌 나의 오판으로 인해 강제된 이주행위.
그래. 나 같아도 떠나겠다. 제 자식 먹일 일이 더 급할 테니.

검은칼날은 그 근본이 유목 부족이었다. 그들은 가축을 길러 먹고 살았다.

가축들 먹일 풀이 전부 똥투성이인데, 군주가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충의를 지킬 필요가 있는가?

나는 영문모를 심상의 격류를,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감정을 느꼈다.
책임감? 아니면 죄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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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330일,

정신적 스트레스로 앓아누웠던 이후로 처음 쓰는 기록이다.


어느새 한겨울이다. 눈이 호우처럼 내린다.


모두 포기했다.
오늘 아침, 요새 지붕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약간의 적색과 높은 비율의 녹색이 섞인 질척하고 징그러운 질감의 눈밭이었다. 내가 만든 나의 이상적 영토는 이제 없다.

마나를 추출할 마력식물들도, 정복을 보조할 군단도 없다.
이미 군단을 구성하던 지적생명체들에겐 보물과 식량 한 보따리씩 들려서 피난을 보낸지 오래다. 녀석들은 감동한 눈치였다.

쓸모없어졌다고 죽임을 당하면 당했지, 학살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인 마룡한테서 이런 대우를 받을줄은 몰랐겠지.
부당하다고 느낄 때 가장 크고 짜증나는 소리를 지르는 이 똥벌레들은, 추위와 기아로 굶어죽어가는 지금, 이 산맥의 역사에 있어 본 적 없는 가장 거대한 소음공해를 내뿜고 있다.

어지럽던 내 마음은 이제서야 평화로우나, 본래 평화로워야 할 겨울은 현재 전쟁터보다 시끄럽다.


이제 리치 부관들도 없다.
누군가는 더 이상 섬겨도 득이 없다고 도망갔다.

누군가는 장렬하게 실장석의 물결과 싸우다 자신의 군단과 함께 똥독에 부스러져 사라졌다.
그리고, 불과 한달 간 정성껏 날 곁에서 간호하던 충직한 마그란은, 자신의 사무실 창문으로 100번째로 탁아를 당하자 결국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그는 높은 첨탑에서 뛰어내려 리치의 생을 마감했다.

나는 고집스레 1층의 위치를 고수한 마그란의 사무실에서,
‘노예의 임무 방기는 똥마마의 죄와 같아 백번 죽고 운치를 먹어 사죄해야하는 레치’ 라고 지껄이는 놈 하나,
떨어진 마그란의 파편과 부딪혀 ‘탁아를 성공했는데 어째서 아직 바깥신세인 데스, 들어가기만 하면 엄지 먼저 솎아 죽이는 데스’ 라고 지껄이는 놈 하나를 집어,
둘 모두 두뇌를 뭉갠 뒤 마그란의 뼛가루를 뿌린 강에 던졌다. 내 가신의 한이 조금이나마 덜어지길 바라며.

(그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실장 소음의 괴로움 때문에 딱 100번째로 탁아당하는 날 정녕 자살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사무실을 다른 층으로 옮기지 않은 듯 하다. - 역주)

수천의 마법사와 마귀들을, 그리고 녹색용을 결투로 꺾은 위대한 마도사여, 가는 길이 평안했기를.

(이 대목 덕분에, 검은용 도시아킨의 수하였던 악명높은 리치 마그란의 정체가 황제력 130년에 실종된 대마도사 ‘후타바르 마그란’임이 밝혀졌다. 엘프의 삼림에서 숲의 용을 살해한 그마저도 산맥을 뒤덮은 수억의 실장석을 박멸하지 못했고, 마력폭주를 견디는 대마법사의 지성도 실장석의 스트레스를 버티지 못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전국적 동원으로 실장석의 정기구제를 행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기에 이보다 좋은 예는 없을 것이다. - 역주)

나는 이 산맥에 대한 내 소유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내일, 모든 게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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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331일.

태생이 자생할 수 없는 걸식자인 실장석들은, 다음 해가 되기 전에 이미 불과 수 천도 남지 않을 것이다.
수억에서 수천으로. 자연의 힘은 나의 어떤 계책보다도 더 훌륭한 구제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산맥에선 자연도 더 이상 자생할 수 없다. 일개 국가의 면적에 달하는 산맥이 전부 삭아들어가고 있다.

실장석 때문에.


산어귀를 뒤덮은 실장석의 분변, 운치더미가 식물의 부활을 막고 있다.

쥐에게도 물려죽는 미물에 패배한 내게 이 땅의 소유권은 없다.
아니, 더 이상 내 소유는 없다. 내 것일 수 없다.

길어야 수십년을 사는 존재들은 목숨을 걸고 다투어 하루 먹을것을 벌고 발 뻗을 땅을 얻는다.
그리고 나는 날갯짓 한번에 그 투쟁을 무용히 만든다.
폐허와 불바다로 만들고, 아무 의미 없는 약탈을 즐기며.
만물을 비웃으며 아무도 못 쓰도록 똥으로 물들이는 저 실장석들처럼.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할때마다 나는 뭐라고 했던가. 너희는 땅을 지킬 힘이 없으니 권리도 없다고 했었지.
조막만한 생물들의 손에 의해 거대한 자승자박이 된 것은 차라리 희극이리라.

나는 마침내 업보의 순환을 깨달았다. 나는 죽음 뒤에 숨는 필멸자처럼 간단히 악업을 회피할 수 없다. 해가 수억번 뜨고 져도 살아있을 존재들에겐 언젠가 저지른 일의 반동이 돌아온다.
나는 마침내 내 엽행의 무게를 직면했다.

나는 어떤 광인의 형을 죽였다. 아니, 그 전에 수많은 군대를 짓밟고 집을 불태웠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미로 죽였다.
그리고 그 수천 년의 대가로는 모자라지만, 광인은 내게 업보로서 똥무더기를 주었다.

그리고 수천년 생애에도 얻지 못한 가르침을 나는 똥무더기에서 얻었다.
나는 내 스승이 되어준 광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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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332일,



웬만해선 죽을 수도 없어 수 만년을 사는 존재가, 필멸자들에게 무언가를 빼앗아 성취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차라리 죄악이 아닌가.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희락에 빠져있었다.
나는 더 큰 힘과 보물을 위해 동족을 죽이고 필멸자들을 해하는 거대하고 추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이 한낱 ‘똥벌레’들에게 수포로 돌아가고서야 그 무의미를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내 생애를 바꿀 전쟁을.


나는 하늘 높이 날아, 산맥을 향해 지옥불길을 뿜었다.
즉시 데기야아 하고 산맥을 쩌렁히 울리는 비명이 들렸다.
수백 마리가 이유모를 뜨거움에 괴성의 메아리를 만들며 죽어갔다.
나는 모든 구릉과 험로를 세심하게 지졌다.
아첨하며 그만 뜨거워달라고 울부짖는 놈들의 소리를 기억했다.

따뜻해졌다며 기뻐하다 불이 붙어 하늘을 저주하며 죽는 놈들의 소리를 현인의 가르침처럼 새겨들었다.
이것은 나의 업이다. 산맥에 악을 흩뿌린 것은 결국 나의 업이므로, 나는 다시 회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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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없음.



불을 끊임없이 뿜었다.
고대의 사념체가 내게 선물한 증오의 용광로는,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가 있기에 단시간의 파괴에 적합하다. 수 시간을 뿜으면 과부하가 일어나 온몸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몸을 죄고 부수고 삼키는 고통.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불을 뿜는것을 멈추지 않았다. 분노를 토해내고 동시에 사과를 토해내듯.

마지막 실장석이 불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로. 내가 삼킨 업보가 모두 빠져나올때까지 견디겠다는 듯이.
그 와중에 나의 영혼은 비명을 질렀다. 수십 번 정신을 잃었다.
초목의 시체들이 녹색 똥더미와, 실장석들의 눈물과 함께 불길 속에 사그라졌다.

수천, 수만, 수십만마리 실장석의 비명이 들렸다.
내 영혼 속의 무언가가 같이 비명을 지르는 듯 했다.
그리고 수십만 개체의 비명은 수만, 수천, 수백의 것으로 줄어들었다.

이윽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통이 줄어들었다. 나는 마침내 자살로서 안식을 얻었노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육신은 아직도 산에 불을 내뿜고 있었다.
검은 불길이 아닌, 눈부시게 하얀 불길을.

그리고 결코 흘려본 적 없던 눈물이 흘렀다.
내려다 본 산맥, 불길이 닿는 곳마다 새 생명의 가능성이 움텄다.

죽었던 나무가 싹으로 회귀해 봄을 기다리려 한다. 독이 올라 죽었던 겨울꽃과 겨우살이가 폭발적으로 피어난다.
빛을 신호로 삼듯 겨울 철새들이 우두머리를 따라 날아오른다.
어미의 시체를 햝던 어린 사슴은, 살아난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 어미에게 달려들어 몸을 부빈다.

눈물과 기쁨으로 나는 마지막까지 불길을 뿜었다.
나를 유혹해 타락시킨 고대의 영혼들은 완전히 소멸했다. 나는 마침내 악의 손으로부터 놓여났다. 정화되었다.





용의 예감은 미래를 볼 수 있다. 나는 운명이 그대를 나의 기록으로 인도할 것을 안다.
마법의 길을 걷는 자여, 모든 용의 영혼에 빌어, 그대와 그대의 가족에게 사과한다.

백 번을 다시 불타도 내가 그 고통을 알 순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과거를 읽는 그대여. 그대가 나의 미래를 인도했다.
그대의 유머감각을 위해서 첨언하자면, 그대가 벌레로 나를 구원했다.
아마 당황스럽겠지.
당황해라. 운명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법이다.

나는 이제 빛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른다.
그대의 앞길에 불의 광채가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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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인생 살 때 지들끼리만 신화를 연출하는 좆같은 도마뱀새끼들 같으니.
용이 아니었으면 방구석 학대파 백수로 끝났을 텐데 개새끼가 따로 없었다.


해독을 마친 나는 용이 왜 실종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도 놈이 되살린 숲을 목격했을 때가 생생했다.

마침내 용을 죽일 수단을 마련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갔더니,
사악한 용은 간데 없고 유례없는 규모의 정화의 불길로 오염이 청소된 마나의 흔적과,
찬란한 오색 생명이 자라나는 산맥만이 나를 마주하던 경이의 순간.

나는 산맥이 보여준 생의 가치를 목도하고 복수를 포기했다.


놈이 되살린 줄 진작 알았더라면 이렇게 열이 받지는 않았을텐데.


그 이후 세상을 떠돌다, 국경지대의 전쟁으로 발생한 실향민들을 이곳으로 이끌어 개척도시를 만들었다.
트롤, 오크, 엘프, 드워프, 고블린, 인간 등등이 뒤섞인,
갈 곳 없는 이들이 서로 기대어 살아남아서 문화와 종족의 갈등을 뛰어넘은,
다사다난하지만 시끌벅적한 수천명어치의 작은 이상향을.

그리고 형은 살아 돌아왔다.
같이 떠났던 대공 각하와, 원정 병력인 성기사단과 함께.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주민들의 제보로 산에서 멧돼지를 구워먹는 정체불명의 세력을 정탐하러 갔다가,
정찰을 다니던 마물로 오인당해 성기사들이나 쓸 법한 망치에 맞아 죽을 뻔한 일.
그리고 동생 머리를 직접 깨부술뻔한 형이, 동생을 알아보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품에 안긴 일.

형은 용의 눈을 피해 너른 분지를 마법적 은폐 지대로 만들어,
어설픈 농사와 사냥으로 자급자족을 하며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실장석 독으로 토양이 오염되어 굶어죽길 기다리고 있을 때,
정화의 빛이 내리쬐더니 땅이 생명을 되찾았다면서.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형이 정말 용을 상대로 수년 간 성기사 수천명을 숨기는 대단한 기도비닉을 해낸것인지,
정화의 불길로 부활한 형이 그렇게 믿고있는 것인지는, 이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옛이야기가 사실대로라면, 일의 앞뒤는 중요치 않다.
영원한 불의 용이 된 도시아킨은 생명의 인과를 뒤틀 수 있을 테니까.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용은 겹치는 일 없이 한마리가 오롯이 하나의 이름만을 가지는데,
왜 검은산맥의 탐욕스러운 마룡이 하필이면 ‘도시아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빛이 바래 옛이야기처럼 취급되는 유명한 예언 속에서, 멸망에 맞서 인간의 편에서 싸우리라고 일컬어지는 빛의 용 도시아킨.

아마도 그 타고난 싸가지 때문이겠지만, 실장석에 엮이면 불행해진다는 속설이 있다.
나는 내심 용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랬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결과가 나쁘다곤 생각하지 못하겠다.
내가 저질렀다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부담스러운 서사가 담긴 작업물을 내려놓고, 나는 잠시 따가운 눈을 비볐다.

“이름에는 힘이 있어. 난 그렇게 믿어.
안그러냐, 미도리?"

“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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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실장이 불타죽은 것은 아니었다.
겨울을 헤치고 다가오는 불길을 느끼며 장녀는 생각했다.
분명 불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죽음도 있노라고.

마마가 있었다. 마마는 한때 보스로서 무리를 이끌었다.
마마는 오크씨들의 축사 청소일을 도우며 실장생의 또다른 가능성을 꿈꿨다.
그러나 분충 무리들의 협공으로 실각당하고, 의도치 않게 낳은 자들을 안고 도망쳐야만 했다.

없는 살림일지언정, 자들에게 일가나 동족의 살을 입에 대게 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매일 분투하던 상냥한 마마.
마마는 며칠 전 맛있게 뜯어먹혔다. 바로 집 앞에서, 맹렬히 동족식 무리와 싸우다 제압당해서.

“살려주는데스, 살려주는데스! 뭐든 하는데스! 아직 자도 못 낳아본 데스!”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어미의, 새끼들이라도 살려보려는 필사적인 연기.
존재를 부정당한 차녀가 당황하는 사이, 장녀는 차녀를 밀어 운치굴로 굴려버렸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나무껍질로 그 입구를 막았다. 차녀가 꺼내달라며 비명을 질렀지만, 이제 바깥에 들릴 염려는 없다.
빈 속으로 지르는 소리인 만큼 나무껍질 사이로 자그마한 소음이 새어나올 뿐이다.

바싹 마른 입으로 자신의 피눈물을 마시며, 장녀는 속으로 아무 대상에나 기도하며 운치굴 입구를 몸으로 눌러 막았다.

“데퍄퍄퍄, 그런데스. 몸뚱아리가 피둥피둥한걸 보니 자들을 뱃속에서 다 소화시킨 분충이 틀림없는데스.
오마에는 정의로운 와타시가 머리부터 먹어치워 응징해주는 데수!”

“뎃데로게, 뎃데로게, 와타시는 자들을 낳는 데스♪ 하지만 추워추워에 일가실각은 싫어싫어데스♪
초세레브한 와타시의 미래설계를 위해 고기 비축식으로서 희생하는 데스!”

“데프프, 천천히 씹어서 비명을 음미하는데스!
억울하면 와타치의 총구라도 햝아보는 데샤!”

우득, 우드득. 그리고 비명.

같은 운치색이지만 손발 긴긴 오크씨 고블린씨들의 구제보다도 견디기 힘든,
매일같이 휘몰아치는 동족의 습격과 패악질.
수천마리가 있으면 수천마리가 전부 똑같다. 장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면 죽는 것은 자신뿐이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려다 장녀의 손에 운치굴로 내던져져, 운치굴 속에서 어미를 부르다 기절한 엄지 차녀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구더기도 있었다.

다음 날, 완벽히 위장된 토굴 아래에서 새끼들이 기어나왔다.
장녀는 구더기의 눈을 가렸다. 차녀는 눈을 감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마마와 싸우다 죽은 분충들의 시체마저 깔끔히 쓸어간 놈들은,
마마도 눈물 맺힌 붉은 눈 하나만을 두고 전부 가져가버렸다.

엄지 차녀는 한이 담긴 눈을 공처럼 안았다. 한평생을 시리게 산 그 오른 눈을 자신의 온기로 덥혀주려는 듯이.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부동(不動)이 영원한 것임을 장녀가 깨달은 것은 이미 구더기가 통곡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장녀는 세상을 저주하며 차가운 동생을 안고 토굴 아래로 사라졌다.

실장석으로 태어나게 해 미안하다고 했던 어미, 가족을 세상 무엇보다 사랑한다던 울보 동생.
일가의 몫까지, 구더기와 함께 반드시 살아남아주겠다고 맹세하며.

장녀는 자신을 비웃으며 생각했다. 주제에 너무 큰 것을 바랬다.
어쩌면 그때 동생을 따라가는게 나았을 지도 모른다.

저 멀리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기둥이 다가오고 있다.
운치 독에 말라 죽은 산사나무와 단풍나무를 부수고, 얼어붙은 호수와 땅을 가르며,
그 주위의 실장들을 모두 튀겨죽이는 무서운 불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사방에서 도망과 아첨, 위협과 행복회로에 빠지는 소리가 교차한다.
장녀의 심상마저 울분으로 뒤틀리는 가운데 오직 집안만이 평화롭다.

"레… 추운 레후? 집 밖인 레후? 안인 레후?"




장녀는 행복한 상상에 젖으면 집으로 곧장 다가오는 불길이 사라질까 생각해본다.


"레후? 프니프니 시간인 레후?"

장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플까? 아마도 아플것이다. 아프지 않으면 동족들이 비명을 지를리 없겠지.
그렇다면, 자기 손으로 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장녀는 삼녀 구더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낙원에 있는 마마에게 힘을 달라고 빈다.
하늘에게도 기도한다. 제발, 아무것도 모르는 우지챠만은, 프니프니밖에 모르는 동생의 마지막만은.
부디 내 손으로.

장녀는 손을 뻗어 구더기의 목 아래를 쥐려 했다.
굴 속에서 지져져 죽는게 그들의 운명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나은 죽음도 있다.



“오네챠, 프니프니는 필요없는 레후.“
장녀의 산산히 부서지는 자신의 각오에 아첨을 하면 다시 붙을까 생각해본다.
“오네챠가 울면 싫어인 레후. 그냥 그만 울어줬으면 하는 레흐… 레에엥…”

장녀는 위석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더 편했을것이다.
다른 일가의 여느 구더기처럼, 프니프니나 하라고 하면 편했겠지.
똥노예가 불성실하다고 말했다면

참으로 못된 동생이다.
하지만 자신이 바라는대로 바보처럼 군다면, 내 동생이 아니다. 장녀는 울며 웃었다.


마마가 말했다.
삶은 마치 독이 섞인 콘페이토와 같아 편한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장녀는 도피하는 대신 현실을 받아들였다. 똑똑한 내 동생.
장녀는 구더기를 안았다. 그리고 달래듯 흔들기 시작했다.
“텟테로게, 텟테로게. 착한 우지챠는 잠을 자는 테치.”


“레에?”

“자장가 대신 잠 오는 이야기 해주는 테치. 마음속에 프니프니 해주는 테치.
눈을 감고, 아침이 되면 마마가 오는 테치. 차녀도 돌아오는 테치.
눈이 녹고 봄씨가 오면 장난기 많은 따뜻한 바람이 불어 우지챠의 눈썹을 간지럽힐것인 테치…”

“레에, 마음속에 프니프니후? 왠지 따뜻해져 잠이 오는 레후…”

그래. 따뜻할 수 밖에. 육친의 품에선 안전하리라.
비록 육체가 아닌 그 순진한 마음만이라도.
장녀는 생각한다. 최소한 그들 일가는 살아있는 동안엔 포기하지 않았노라고.

불길이 다가온다. 죽음이 옆구리를 간질인다.
장녀는 자장가를 멈추지 않았다. 구더기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열화 속에서 장녀는 눈을 감았다.















장녀인데스?
심장이 무너진다. 제발 이젠 괴로움에서 날 놓아주길.
왜 위석이 부숴지지 않는거지? 이미 죽어서?
죽어서마저 이래야만 하는건가?

마마? 마… 마마가 살아있는 레치? 와타시가 살아있는 레치?
죽음이 안식일 줄 알았다.
눈을 뜬다. 더 괴롭히지 말라고 외치기 위해.
그리고 벌리던 입을 다문다. 완전히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온다.

그리고 쬐죄죄한 두 실장석이 장녀를 돌아본다.
어째서. 장녀는 무아지경 속에 굴 밖으로 걸어나간다.


다시는 행복한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밟지마는 레후! 우지챠 계단이 아닌 레에에!!”
“테?”




영문도 모르고 꼬리를 밟혀 통곡하는 구더기를 안아들고,
일가는 한참을 침묵 속에 서로 안고 있었다.

살아나고 살아남은 원리를 이해할 지성은 없었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적록색으로 멍들고 응어리진 한은, 불길에 녹아내린듯 하염없이 적록색 눈물이 되어 흘렀다.

“테.. 테에….테에엥....”
“레에에엥…”

“....울지마는 데스. 울지- 데갸앗!”


“여이 마법사님 보시요! 아이 경치 좋은데도 똥블레세기덜 한마리도 없다더마 구신같이 있네.”
“우리 마법사님 거짓말쟁이 만들면 안되지. 당장 뚝배기를…”
“데? 데? 데갸아아아! 살려주는데스으으!”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그것들은 지적존재로 인정되지 못하는 족속이다.
따라서 법적으로도 왕령에 의해서도 시민권을 받을 순 없다.

그러나 그들은 부던히 잡일과 보조에 덤벼들었다, 당초 목표대로 뾰족한 쓸모를 입증하진 못했지만,
수많은 촌극을 연출한 끝에 결국 객식구 노릇을 해도 불편치 않은 구성원이 되는데는 성공했다.

개척도시의 명물인 이 시민권 없는 시민들은 오늘도 내일을 살기 위해 분투중이다.
세모꼴 입을 앙다물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아침마다 서로를 응원하며.

“아, 미도리! 간밤에 동생 팔 삐끗한건 다 나았니?”
“덕분에 다 나은데스, 손님상! 주문은 뭘로 하시는데스?”

모든 실장이 불타죽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사연을 모른다. 아무도 그것들만 살아남은 이유를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모종의 자격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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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마법사가 번역한 고대어 번역본이 세간에 전부 공개되지는 않았다.
용들과 고명한 마법사들이 생명의 용에 대한 진실을 기밀로 두자고 결론지은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더 재미있는 이유도 있다. 세간의 기준에서 악룡일지언정 그가 용을 내쫓는데 사용한 수단이 너무도 악독하여,
출판본이 발행되기도 전에 전 세계의 용들에게서 항의의 목소리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문을 숨기기 힘들 때도 있다. 그것이 말이 안되거나 자극적일수록 더욱 그렇다.


세상을 전란에 빠트릴 음모의 방아쇠를 터트리기 직전, 허무를 깨닫고 개심한 용의 풍문은 바드의 가락을 타고 소소한 소문처럼 나돌았다.
모든 분충과 운치 독을 불태우고 한 일가만 남긴 빛의 기둥 이야기는 상상력 풍부한 어느 실장석의 공상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아득바득 전 세계에서 수천만 마리의 실장석을 긁어모아 용의 영토에 던져버린 ‘투분 마법사’, ‘탁아 마법사’, 또는 ‘실장법사’의 전설은,
바로 그 장대하고 어처구니없는 구석 때문에 마치 기정사실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본인 또한 맹목의 굴레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찾았지만, 이단마법사는 도시아킨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실장석에게 패배했다고 놀림을 받을지언정 용은 적어도 이 차원을 떠나고 없었으니까.
이단마법사는 매일 아침 집에 나서기 전 우울한 표정으로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고 자신의 별명도 저주했다.

마법사는 때문에 자신이 만든 개척도시에만 머무르고 싶어했다.
수백 수천명이 사는 외진 도시에서도 이 지경이라면, 바깥 세상의 수백만명은 자신을 어떻게 부를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그 용이 말한대로였다. 운명은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
하필이면 꼬일대로 꼬였다고 생각할 때, 한번 더 매듭을 묶어주면서.

이름에는 힘이 있다.
‘실장마법사’라는 오명아닌 오명을 가진 이단 마법사 뉴턴.
그의 모험담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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