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의 끝자락에서 나비가 되는 꿈을 꿨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를 꿈. 그 곳에서 나는 춤추고 노래하고 하늘을 훨훨 나는 하나의 나비였다.
날개가 생긴 게 기뻐, 하루 종일 더 이상 원치 않을 때까지 허공 위를 떠다녔다. 그러다 피로감에 무거워진 날개를 쉬고 싶어, 어떠한 꽃 위에 몸을 뉘였다. 살아있는 모든 걸 태워버릴 것처럼 불타고 있던 꽃에 날개를 내려 쉬었었다. 그게 몹시도 포근히 느껴졌다.
탐스러운 꽃은 열흘을 못 간다지만, 흐드러지게 핀 꽃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X X X
비가 자욱한 거리에선 지우지 못한 봄 냄새가 났다. 여름이 찾아오기 전 마지막 봄비일까, 미타케 란은 우산을 접고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잠시 바라만 봤다.
이 시기의 봄은 어딘가 불안전한 면이 있다. 따뜻하면서도 몇 발자국만 걸어 나가면 덥다고 느껴지게 되며, 그러나 그러한 모순을 긍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름이 다가오기 직전의 봄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마다 깨어진 생각들은 여전히 이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봄이었다. 만발한 꽃들과 포근한 햇살과 거리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이 봄이 지닌 조각들이었다.
그러나 느지막한 봄비 때문인지, 오늘은 그러한 생각들이 많이 들진 않았다. 마지막 봄비란 생각보단 다가올 여름의 장맛비가 더욱 생각이 났다. 그건 이미 스쳐 지나간 것보다, 다가올 것들이 더욱 생각나는 요즈음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얀 비닐우산에 맺힌 빗물들을 털고 란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정해진 시간은 지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이른 시각에 나와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복도에 울리는 구두 소리가, 그녀는 더욱 낯설게 들려왔다. 교습 때마다 신는 펌프스가 란은 영 익숙지 않았다. 제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 한들, 여전히 굽 높은 구두보단 밑창 닳은 운동화가 더 편한 그녀였다.
내리는 빗물이 복도의 창을 때렸을 때, 란 또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문을 열었다. 드르륵, 하고 열리는 문의 소리. 자신을 바라보아 몰리는 수십 개의 눈동자 사이 빛나던 진한 눈동자 한 쌍. 란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이내 색이 바란 교탁에 서 교습생들을 바라보았다.
“한 주간 모두, 평안하셨지요?”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는 인사말을 입에 담아, 모두에게 선한 눈빛을 건넸다. 란의 그러한 모습은 창가 한 구석에 앉아있는 미나토 유키나에겐 꽤나 신선한 모습이었다. 미묘하게 건방진, 그러나 그게 밉지 않은 목소리만 들어왔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장소였고, 자신과 란만이 존재하는 공간도 아니었다. 그래서 미나토 유키나는 교탁에 선 미타케 란의 모습에 자그마한 색다름을 느꼈다.
미타케 씨, 저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X X X
새로운 곡의 심상을 얻고 싶다.
한껏 따뜻해진 날씨에, 두꺼운 코트를 입은 걸 후회하던 찰나였다. 여울져가는 태양빛에 문 하드 아이스크림이 반짝하고 빛날 때, 미나토 유키나가 미타케 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꺼낸 말이었다.
“예?”
란은 평소와 달리 조금 멍청한 목소리에 답을 주었다. 다소 뜬금없는 이야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애프터글로우를 비정기 밴드로 만든 저에게 상담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곡을 만드는 걸 그만둔 게 벌써 몇 년째였더라. 헷갈리면 안 될 게, 헷갈리는 시절이었다.
“꽃이 필요해.”
유키나의 말은 단순하지만 직관적이었다. 그제야 란은 그녀가 저 못지않게 직설적인 성격이란 걸 깨달았다. 하드를 살짝 깨물고, 차가운 걸 그대로 넘긴 란이 유키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이를 먹어도 그녀의 얼굴은 하네오카 고등부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조금 가져다 드릴까요?”
아직 정숙이란 단어를 모르는 천방지축 어린 아이들과 돈 많고 시간 많은 젊은 주부들. 그리고 하릴없는 노인네들을 위해 화도교습소를 차린 게 또 벌써 몇 년이었다. 둘러싼 모든 것들은 변해가고, 머리가 작았을 시절은 어느덧 추억이 된다.
“아니.”
그러나 미나토 유키나는 변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얼굴을 한 주제에 누구보다 뜨겁고, 독선적이며 오만하다. 그러나 그랬기에 항상 자신감이 차있었고, 프런트맨의 긍지조차 서클의 그 누구보다 강했던 사람. 미나토 유키나란 사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미타케 씨가 하고 있는 교습소, 가보고 싶은데.”
하네오카 고등부 2-A 미타케 란이란 소녀가 동경했던, 그때 그대로.
X X X
꽃은 신기하다. 다루는 법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신기하다고 란은 생각했다. 부드럽게 꽃잎을 어를 때마다, 여전히 무궁무진한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러한 감각들을 알리고 싶어서, 또 나날이 죽어가는 사회에 생명의 순풍을 불어넣고 싶어 자그마한 화도교습소를 차린 걸지도 모르겠다.
란의 아버지도 란이 화도교습소를 차리는 걸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사실 그의 입장으로선 미타케 家를 이끌어가야 할 란의 손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게, 그의 마음에도 쏙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미타케 가문의 가주 자리를 인수해주는 게, 란 아버지의 작은 소망이었다.
처음엔 이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오픈 인사 겸 란의 지인들이 조금 찾아왔을 뿐이다. 그것도 잠시 이내 사람들이 오지 않아 적적했고, 참지 못할 쓸쓸함에 먹혀들어갈 즈음 디저트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히마리가 의견을 주었다.
광고도 능력이다.
내는 디저트마다 성공가도를 달리고, 넷상을 뜨겁게 달구는 우에하라 히마리 팀장이 직접 해준 말이었다. 화도라는 무게감을 가진 물건에 대해, 그녀는 좀 더 가벼이 다가가라고 말했다. 중후한 멋을 찾는 노부부들에게도, 여유가 없이 날뛰는 아이들에게도 쉬이 다가갈 수 있도록 히마리가 참 많이도 도와주었다.
그게 참 고마워 소정의 수고비라도 챙겨주려 했건만, 히마리는 란이 나름대로 생각한 자그마한 성의를 한사코 사양했다. 그 대신이라면 뭣하지만, 토모에와 함께할 비밀결혼식 때 세상에서 가장 작은 화환을 부탁한다며 히마리는 웃어보였다. 보조개가 깊게 파인, 그 특유의 웃음을 아주 진하게 말이다.
나이가 먹어도 리더는 여전히 리더였다.
X X X
미타케 씨 얼굴은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라고, 언젠가 미나토 유키나는 미타케 란에게 말했다. 처음엔 시비라도 거는 줄 알고, “뜬금없이 뭐예요. 자기도 만만찮게 생겨 먹었으면서.” 라고 답을 주려 했었다. 그러나 유키나는 꽤나 진지하게 한 말이어서, 란도 이내 유키나의 말을 잠자코 들었었다.
그러한 오해엔 조금 억울한 면이 있었다. 세상에 불만이 많다기보다는, 그냥 가끔 욱하고 급발진 하는 성격이 문제인데. 그리고 생긴 게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라고. 게다가 음악에 대해선 미나토 씨도 사돈 남 말 할 때가 아닐 텐데.
미나토 씨를 알아가면서 느낀 게 있다 그렇게 안 생겼으면서 의외로 고집이 센 점. 자신이 한번 정한 것에 그녀는 굽힘이 없었다. 란 본인도 한 고집한다고 생각했지만, 유키나에 비해선 새 발의 피이자, 늘 한 수 아래였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화도교습소에 오는 걸 허락해준 걸지도 모르겠다. 진짜 거절할 수 있었다면, 진작 거절했겠지. 더군다나 작곡이나 작사같은 심상이 크게 필요한 작업을 내세웠기에, 란은 마땅히 더 할 말이 없었다.
“꽃은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기 좋지만, 가끔 과감히 잘라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그래도 이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는 건, 조금 부끄럽다. 그렇게 생각한 란이었다. 유키나는 특유의 멀뚱한 시선으로 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의 앞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지도 않고, 교탁에 선 란만 계속.
“선생님, 선생님! 저는 울트라 대따 크게 자란 게 좋은데요!”
한 손엔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한 손엔 원예용 전지가위를 든 꼬마 남자 아이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란은 아이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분명 가위를 들고 있었는데, 어째 아이의 접시엔 생화용 접착제로 덕지덕지 풀들의 파편을 이어붙인 꽃이 있었다.
아이가 가위를 든 이유는 제 나름대로 그걸 수습 해보려했던 게 아닐까. 그게 퍽 귀여워, 란은 웃음을 띤 채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찰칵, 찰칵, 아이의 작품을 살며시 잘라내 주었다.
“로봇처럼 크게 자란 것도 좋지만, 이렇게 무거운 걸 더덕더덕 달면 꽃도 무거워할 거야. 우리가 머리가 길면 간지럽듯이, 꽃도 한 번씩 머리를 잘라줘야 해.”
조곤조곤과 바락바락. 오늘의 미타케 씨는 조곤조곤. 평소에 느꼈던 미타케 씨는 바락바락. 유키나는 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동안의 미타케 씨를 떠올렸다.
역시나 달랐다. 어루만지는 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꽃의 모습처럼, 미타케 씨도 상황과 장소에 맞게 변해가는 걸까. 그게 조금 신기해서, 유키나는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미타케 씨.”
“예?”
아이의 손과 함께 움직이던 란이 유키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입을 벌린 유키나는 이내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틀어진 눈썹과 토라지려는 입가를 간신히 참고.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데,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답하면서.
X X X
사각사각, 찰칵찰칵. 쓰는 가위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소리와 끄응, 하고 고심하는 소리를 내는 어르신들과 비교적 이것저것 해내는 어린 아이들. 수다 소리와 가위 소리가 이어 달리기를 하듯 웃음소리가 넘실거리는 주부들.
란은 그 사람들을 지나, 아직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유키나의 옆에 섰다. 체험용으로 지급된 작은 화분을 유키나는 여전히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미타케 씨?”
유키나는 앉은 채로 란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키 높이가 조금 이질감이 들었다. 그러나 란은 늘 그렇듯 건방진 눈빛으로 유키나를 바라보았다.
또 양아치 같은 눈빛. 세상에 불만이 있는 듯하지만, 미묘하게 자신만만한 얼굴.
“아직 시작도 못 하셨네요.”
예전엔 이 얼굴에 울컥했지만, 정작 란은 악의가 크게 없다는 걸 깨닫고 이젠 감정의 동요도 그리 크게 일지 않았다. 오히려 몇 년이 지난 이젠 조금 귀여워지기 시작했다.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귀여운 후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
너는 언제 이렇게 부쩍 커버린 걸까.
“뭐든 시작이 반이에요. 일단 피어난 꽃을 바라보고, 어떤 모습으로 꾸밀지 부터 생각해요.”
란은 유키나의 뒤에 서서, 그녀의 하얗고 작은 손에 살며시 저의 손을 덮어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겠지만, 스위치가 켜진 그녀의 눈동자엔 이미 화분만이 존재했다.
유키나는 저의 손에 놓인 란의 손을 바라보았다. 잘 몰랐는데, 의외로 손이 꽤 컸다. 기타를 쳐서 그런지, 그리고 꽃을 항상 만져서 그런지, 살아온 흔적이 느껴져 란의 손은 그리 부드럽진 않았다. 그러나 그게 마음에 와 닿았다. 항상 불꽃을 품은 것처럼, 모든 것에 전력을 다하는 그녀였으니까. 손에서도 그게 느껴지는 것 같아, 좋았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 미타케 씨는 더욱 어른스러워 지는 구나.
심장 소리가 두근, 두근하고 들려왔다. 이른 아침의 피아노 소리처럼, 그리고 창을 때리는 빗줄기의 소리처럼, 듣기에 기분 좋은 소리였다. 유키나는 눈을 감고 란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저를 맡겨버렸다.
리사가 보여줬던 영화나 드라마에선, 이런 상황에 지금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잘 모른다고 독백하곤 했다. 그러나 유키나는 그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들려야 할 심장 소리는 뒤에서 들려오지 않았고, 저의 가슴 한 가운데를 열어달라며 두들기고 있었다.
심장 소리의 주인이 본인이라는 사실을, 미나토 유키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었다.
X X X
비가 그쳤다. 그 덕에 교습을 끝마친 사람들은 비와 멀어져 태양같은 웃음을 입에 매달고 돌아갈 수 있었다. 내리는 비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웃음을 보니 저 또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어때요, 좀 도움이 됐어요?”
란이 바라본 유키나의 손엔 검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오늘 체험교습을 끝마치고 간단히 선물 받은 화분이었다. 시간을 주고 더욱 만져야 할 작품이었지만, 그것은 미나토 씨에게 맡기기로 했다.
“응, 도움이 됐어.”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에요.”
로젤리아의 음악을 여전히 란은 좋아하고 있었다. 유키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아무 것도 두려울 게 없었던 그때로.
“다음에 나올 신곡 기대할게요.”
“응.”
서로에게 은은한 웃음을 교환하고, 란은 뒷마무리를 하러 교습소로 유키나는 다시 본인의 집으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바람에 흔들리던 먹구름이, 자그마한 빗줄기를 한 방울 떨어트렸다.
“미타케 씨.”
또각, 또각 하고 울리던 펌프스 소리를 유키나의 목소리가 덮어씌웠다. 란은 고개만 돌려 유키나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새삼 유키나의 키가 작다고 느껴버린 그녀였다. 프런트맨의 위압감 때문일까, 예전엔 저보다 크게 보였었는데.
“나,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
애달픈 마음으로 항상 동경했던 그 사람은, 분위기에 취했는지 영문 모를 소리를 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그대로 툭, 하고 놓아버렸다.
“예?”
스마트폰이 복도와 맞닿는 소리와 란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겹쳤다. 추적추적,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먹구름은 이내 하얗고 하얀 이슬비를 내리게 했다. 유키나는 란을 바라보다가, 프릴이 달린 검은 우산을 피고 뒤돌아 서버렸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뒷모습엔 말이 없다지만, 오늘의 미나토 씨는 뭔가 그렇게 말하려 하는 것 같았다. 이리 무미건조한 고백이라니. 그게 미나토 씨다워서, 그리고 그게 우리같아서, 란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하하하, 하고 아주 크게 란은 웃었다.
마지막 봄비일 줄 알았는데, 봄은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봄비마저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여름이 다가오기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구나. 그렇구나.
역시 난 미나토 씨를 늘 좋아했었다고, 그렇게 느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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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을 짝사랑하는 유키나는 어떨까 하고 쓴 글.
마지막 엔딩은 바다가 들린다에서 따왔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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