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마엘은 에이해브 때문에 피쿼드호의 동료들을 잃었다고 생각함.
그리고 자기 혼자만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낌.
고래에 대한 이스마엘의 복수심은
어디까지나 에이해브의 세뇌 영향인 듯하고,
진짜 복수심은 에이해브에게 집중되어 있음.
하지만 에이해브는 본인이 선원들을 구원해줬다고 생각하는 입장임.
왜냐하면 피쿼드호에 탑승한 선원들은
아마도 과거의 이스마엘처럼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인물들이었을 거임.
아니, 어쩌면 이스마엘보다도 더 심하게 헤맸을 듯?
마치 목적 없는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도시 사람들이
검지의 해괴한 지령이라도 붙들고 싶어하는 심정처럼 말이지.
고로 피쿼드호의 선원들 입장에서
에이해브의 말은 곧 지령이자 고래의 기름이었을 테고,
끝내 에이해브라는 고래의 인어가 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에이해브 입장에서 이스마엘의 주장은 우스울 따름임.
이스마엘은 "당신은 기회를 줄 수도 있었어! 선원들에게! 적어도 스스로가 어디 와있는지는 알 수 있도록."라고 주장을 부정하지만
에이해브는 이미 자신이 최선을 다해 선원들을 이끌어줬다고 생각함.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선원들의 목적을
자신의 목적에 공명시킴으로써 말이지
"그렇게 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으니까. 한없이 약하니까! 불확실한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확실함을 가지고 있는 내가 길을 잡아주는 거니까!"
"내 증오를 자신의 증오로 여기고, 내 원수를 자신의 원수로 여기며 그 무엇도 거역할 수 없는 나의 작살!"
피쿼드호 선원들이 에이해브의 인어로서
에고 가스하푼에 완전히 공명된 상황 속에서도
에이해브는 선원들이 자신에 의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임.
여기서 이스마엘이 핍에게 "스텁이 죽은 게 너를 이렇게 만든 거야?" 라고 말하니 에이해브 입장에서 또 어이가 없는 거지
아니, 내가 지금 핍을 구원해준 상황인데 자꾸 빨간약 먹이려 드네?
"어린애를 괴롭히지 마라, 이스마엘!"
"부러진 마음으로 도망 온 녀석을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 죄악감을 지워주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뭘 했지?
에이해브가 선원들을 이끄는 동안 이스마엘이 한 건 사실 없다시피 함.
왜냐하면 이스마엘은 피쿼드호 시절 당시엔 약한 존재였기에
창백한 고래와 싸울 때도 퀴케그의 관짝으로 겨우 목숨만 부지했을 정도니까
고로 에이해브의 입장은 아래에 가까울지도 모름.
난 최선을 다해 선원들을 이끌어왔다.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
난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잘못됐다고? 게다가 내 탓을 하겠다고?
그렇지만, 난 최선을 다했는데?
네가 날 탓하려 든다면, 난 이렇게 되묻을 수밖에 없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동안 이스마엘 넌 뭘 했지?
핍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차라리 네가 핍 대신 노를 젓지 그랬나?"
"너의 탓이군, 이스마엘!"
스타벅
"네가 이 녀석이 옳게 바라보려는 걸 알고 있었다면, 그때 부러지지 않게 도왔어야지!"
"네 탓이군, 이스마엘!"
퀴케그
"다 너로 인해서다, 이스마엘!"
"네가 이것의 깊게 파묻힌 마음을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번에도 네 탓이로군, 이스마엘!"
"똑바로 봐, 인어가 되지 않기 위해 기껏 버티고 만들던 믿음이 무너져서 하얗게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여기서 깊게 파묻힌 마음 ▶ 퀴게그 曰 "내가 너무. 늦은 거야. 뭐가 옳은지 그른지를. 스스로 생각하는 거."
그래서 퀴케그가 친구와 다시 재회하고 싶다는 삶의 목적(노을=이스마엘 머리색)을 떠올리며, 이스마엘의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줘..."
마침내 퀴케그는 에이해브라는 고래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기에
백화 현상이 심해지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도 창백한 고래의 인어가 되지 않고 그냥 녹아내렸는데
앞서 죽은 고래의 기름에 들어가면 자기의 존재는 옅어지고 천천히 녹아 흩어진다는 설정이 있었던 걸 보면
그 시점에서 창백한 고래는 이미 죽은 고래나 다름없어진 걸지도 모름.
그래서 쪽빛노인이 심장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
황금가지 때문인지 수감자들을 삼켰기 때문인지
창백한 고래의 뇌가 맛이 가기 시작했다는 언급으로 보아, 그런 추측이 듦.
그럼 에이해브는 왜 막판에 이스마엘에게 죽기를 바랬던 걸까?
그건 바로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음.
"내 증오를 자신의 증오로 여기고, 내 원수를 자신의 원수로 여기며 그 무엇도 거역할 수 없는 나의 작살!"
광기에 사로잡힌 이스마엘은 곧 에이해브의 분신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스마엘 입장에서 에이해브는 곧 창백한 고래인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것 또한 결국 창백한 고래를 죽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사실상 세상의 악이나 다름없어진 에이해브 자신을 죽여줬으면 하는 바람인 걸지도?
그리고 죽음을 통해 완전해지는 거지.
창백한 고래를 죽여 버리면 삶의 목적을 이룬 동시에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에이해브가 남게 되지만
이대로 이스마엘에게 죽어 버리면
자신(=의 분신 이스마엘)이 창백한 고래(=에이해브)를 죽여 삶의 목적을 이룬 동시에
창백한 고래를 죽이기 위한 목적을 품으며 악착 같이 살아온 에이해브만이
이 세상에 남게 될 테니까 (소원을 이룸과 동시에 창백한 고래에 대한 집념은 계속 간직한 상태가 됨.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 완성되었으므로)
"에이해브는 영원히 에이해브(=창백한 고래)다...!"
그런데 단테의 도움으로
이스마엘이 자신의 나침반을 찾아 창백한 고래의 심장을 꿰뚫었을 때 (에이해브의 분신이 아닌 채로 죽인 것)
퀴케그의 환영이 나타나 도와준 것도
이스마엘이 마침내 스스로의 의지로 옳고 그름을 생각해냈기에
바라고 있어.
내가 가고 싶은 방향.
창백한 고래가 죽어 버리고 (동시에 에이해브 본인도 더 이상 창백한 고래가 아니게 되어 버림 ▶ 이 세상에 창백한 고래가 더 이상 없음)
자신의 인어들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창백한 고래를 죽이려면 선원들의 도움이 필요한데 아무리 불러도 없음)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에이해브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거임.
그리고 선원들처럼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존재로 전략해버림.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