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군에 관점에서 본 캉딩급 문제
사람들이 라파예트 크라이시스에만 몰두한 나머지 대만 해군의 전체적인 건함 사업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문제를 공정하고 공평하게 보기 위해선 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먼저, 광화 2호 계획의 원래 목표는 1500톤급 중형 사이즈 중형 순찰선을 뽑는 거였다. '하이 로우' 계획 중 로우에 해당되었다. 허나 계획은 완전히 뒤바뀌어 1500톤에서 3600톤 라파예트급으로 바뀌었다. 당시의 이러한 급작스러운 구매 결정은 공식적인 절차에 따른게 아니라 소수의 고위 관계자들에 의해 내려졌다. 당연히 이런 결정 과정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허나 광화 1/2호 계획의 '하이 로우' 전략이 바뀌어 광화 1호의 올리버 해저드급 라이센스는 성공했고 어찌되었든 라파예트급은 잘 산 건 맞았다. 어디까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할진 세부 사항을 알아봐야 한다.
1. '큰 해군' 전략에 반대하는 학백춘 해군 참모총장
80년대 초, 해군은 2세대 군함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91년 12월, 학백춘이 해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학백춘은 해군의 미사일, 잠수함, 소형함을 기반으로 한 해안 방어 전략을 짠 인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당시 대만 해군의 모토였던 '3천톤급의 군함 24척을 유지한다' 는 대형 군함 전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점점 강해지는 중공 해군 앞에서 큰 배따윈 움직이는 과녁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형함 전략은 너무 많은 군적 자원을 소모했다. 대만 해군 최초의 건함 계획이었던 '충호 계획'이 83년 6월 25일에 취소되었고 2세대 군함 획득이 목표였던 '광화 계획'이 27일에 등장했다. 광화 계획은 해외에서 이미 만들어진 군함 설계를 들여와 적절히 대만식으로 리디자인해 비용과 리스크를 줄이는 게 골자였다. 그리고 학백춘은 광화 계획을 하이급 3천톤 호위함과 로우급 1500톤 패트롤 보트로 하이 로우 방식으로 이원화시켰다.
2. '하이 로우'
84년 10월 4일, 학백춘이 쓴 일기장에서 따르면 2세대 군함의 '하이 로우' 개념이 처음 언급된다. 85년 1월 25일, 학백춘은 일기장에다 2세대 군함 계획의 청사진을 설명한다. 수중에는 최소 6척에서 10척의 잠수함을 갖추고 수면에는 3천톤급과 2천톤급 이하의 배들이 함대를 이룬다. 4월 11월 일기에선 더 구체화되어 6척의 호위함과 12척의 1500톤 미사일 보트, 잠수함 3-4척이 언급된다. 그 때 배치된 구형 구축함 12척을 다 퇴역시킨다. 그리고 상황을 봐가면서 새 군함을 뽑아 오래된 군함을 교체한다.
87년 7월에 대만 국방부가 공개한 해군 건설안에 따르면 대만 해군 주력은 광호 1호의 호위함 8-12척과 2호의 순찰함 12-16척이 될 것이며 구형 군함을 1대1 비율로 대체한다. 학백촌 참모총장은 해외에서 이미 말들어진 배들을 사거나 라이센스해서 3천톤급 9척, 2천톤급 16척을 만들면 된다고 다른 장성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충호 계획에 따르면 대만 해군은 '3천톤급 군함 24척을 구형 군함을 1대1로 대체하여 총톤수를 유지한다' 가 원래 목적이었다. 24척 뽑은 뒤에는 12척의 1천톤급 소형 배를 더 뽑아 총 36척을 유지한다.
하지만 학백춘 해군 참모총장을 위시로 한 군참모들은 해군 규모를 축소시키길 원했다. 당연히 '큰 해군'을 원하는 세력도 있었다. 87년에 해군이 국방부에 올린 안에서는 대형 해군 계획이 멀쩡히 살아있었다.
3. 24척 전략의 출처
대만이 어째서 24척 유지에 집착하는 이유는 1967년에 어드바이저로 대만에서 근무하던 미군 분데스 대령의 연구서에 있다. 그가 보고서에 써놓기를 중국 해군이 대만을 조지려고 한다면 잠수함으로 대만을 해상 봉쇄할 것이라고 했다. 대만군은 해상 봉쇄에 맞서 3-6개월 정도만 전쟁 수행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 중국 잠수함을 조지려면 대만 해군에게 24척에서 40척의 구축함과 최소 30대 이상의 대잠헬기 내지 초계기가 요구되었다.
이 연구서를 감명깊게 본 대만군은 '구축함 24척'을 대만 해군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근간으로 삼았다. 광화 1/2호의 하이 로우 안은 24척 안과 전혀 달랐다. 하지만 대만 해군에게는 돈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무기값과 배 유지비가 올랐다. 그리고 공군의 중요성이 상승하던 시기였고 해군의 입김은 상대적으로 줄었다. 대만 해군은 소형 해군안과 타협하며 대형 해군안을 축소시켰다.
물론 해군의 축소는 쓰디썼다. 3천톤급 배의 규모는 원래는 2분의 1만 줄었어야했지만 3분의 2가 날아갔다. 해군이 유지하던 전투/임무 수행 능력에 큰 타격이 갔으며 12-16개의 함장 직위가 사라지니 인사 적채가 매우 심해졌다.
4. 울산급에서 라파예트급까지
학백춘 참모총장은 광화 1호를 미국제 3천톤급으로 8척을 뽑으려했다. 그리고 광화 2호 1500톤급은 한국의 울산급을 염두해두고 있었다. 울산급을 16척 뽑아서 대만 해군이 개발한 H-930 MCS 모듈 전투 시스템을 달아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해군 부사령관이던 예창통은 울산급 구입에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예창통은 녹스급 대잠함 구매 계획을 총괄하던 남자였다. 그는 울산급이 개인적으로 싫었다. 예창통은 울산급을 '2,3류급 군함'아라고 평했다. 해군 부사령관이 반대하면서 울산급 구매가 늦춰졌다. 그 사이 대만 해군이 울산급을 쓰려한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대만인들에게 전해졌고, 대만 지식인들과 일반인들이 강한 반대 의사를 드러냈다. 대만의 국가 건함 정책에 위배되는 쪽팔린 결정이라는 거였다.
어쨌거나 캉딩급이 갑자기 튀어나오면서 라파예트급 6척, 녹스급 8척, 광화 1호에서 생산된 올리버 해저드 패리급까지 합쳐지니 결과적으로 대만 해군이 그토록 울부짖던 '24척 구축함' 계획안대로 대만 해군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광화 1/2호의 3천톤 8척 1500톤 16척하고는 전혀 달랐다.
갑작스러운 울산급 반대와 라파예트급의 등장, 그리고 재빠른 구매에 이르는 과정이 너무 신속하고 부드러웠다. 의심스러울만큼.
5. 작은 배에서 큰 배까지
해군의 대형함 독트린을 반대하며 울산급 구매를 지지하던 학백춘은 어느 순간부터 울산급 구입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대형 해군 성애자가 되었다. 왜 마음을 바꿧는지는 일기에 써있지 않았다. 다만 프랑스와의 계약 과정은 써있었다.
대만 해군 참모장의 기록에 따르면, 82년 3월 3일, 학백춘과 대만 대표부가 프랑스 원자력 시설 구매 관련해서 불란서인들과 미팅을 가졌다. 거기서 프랑스의 고성능 전투기와 엔진, 신형 무기 얘기가 나왔다. 11월 2일, 프랑스 퇴역 공군 소장이 대만을 방문해 방산 기술 이전과 부품 판매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88년 5월 17일, 165차 군사 회의에서 총통 리덩후이는 울산급 구입을 승인했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의 무기 딜러들이 몰래 접근해와서 라파예트급은 울산급과 차원이 다르다며 츄라이를 시전했다. 결국 한국 조선소에 거의 넘어갈뻔한 계약이 파토났다.
88년 11월 학백춘이 뜬금없이 울산급을 욕하면서 12척의 광화 1호와 12척의 라파예트급이 좋을 것 같다고 씨부렸다. 89년 1월에 학백춘이 울산급은 불안하다고 하더니 89년에는 울산급 사지 말자고 공식으로 제안했다.
학백춘이 왜 마음을 울산급에서 라파예트급으로 바꿨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천수이벤 정부 가서 행해진 라파예트급 구매 조사에서 학백춘은 구린내나는 의사 변경때문에 개쌍욕을 쳐먹게된다. 이러한 변경은 대만군이 극소수의 고위 장교들의 즉흥적 선택에 의존해서 굴러갔다는 비판을 받게 만든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국방 정책, 특히 군함 정책에서 체계적인 장기 계획같은 건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예창통은 학백춘과 달리 꾸준히 울산급을 디스하고 라파예트급을 빨았다. 의문인 점은 그가 과격하리만큼 서둘러서 울산급을 걷어차고 라파예트급을 구입하는 과정에 개입했다는 부분이다. 라파예트급의 성능은 매력적이었지만 저 성급한 결정도 의문으로 남았다.
6. 달라진 계획
2세대 건함 계획은 초기안과 많이 달라졌다. 허나 중국의 점점 더 강해지는 해군력을 커버치기 위해서 과거의 대수상 화력에만 의존한 배는 부적절했다. 대만 해협과 동, 남, 서중국해까지 커버치며 싸울 군함이 필요했다. 울산함같이 작고 한정된 전투력만 발휘하는 건 좋지 않았다. 보다 크고, 오래 버티면서 특히 대잠능력이 강한 배가 요구되었다. 견인 소나와 대잠헬기 덱까지 있는 캉딩급이 적절한 대안이었다.
캉딩급까지 포함하여 대만 해군은 8척의 녹스급, 6척 캉딩급, 8척 올리버 해저드급이란 수상 화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원래의 광화 계획안보다 더 나았다.
대만 바다는 기상이 나쁘고 불결이 거칠다. 오래되고 톤수 낮은 군함들은 버티질 못했다. 만약 해군이 소형 해군으로 바뀌었다면 대만의 거친 겨울 바다 환경에서 제대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업었을 것이다. 작은 배는 바다에서 수일간의 작전을 못한다. 장비/인력 손실을 따져도 그렇다. 만약 1500톤급 배를 선택했다면 톤수적 의미에서 전투력 손실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3천톤급 이상이 되어야 덩치에서 나오는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대만이 라파예트급을 산 이유를 성능뿐만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배를 구입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맞말이다. 대만 해군에게 라파예트급은 매력적이었다. 한국 울산급이 국산차라면 라파예트급은 BMW였다. 예창통뿐만 아니라 당시 양식있는 모든 사람들이 라파예트급 구매를 기꺼이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해군 장교는 프랑스가 라파예트급을 제안한 게 생각치 못한 행운이라고도 말했다. 그 장교는 '부패하든 말든, 비싸든 안 비싸든 살 가치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측에서도 대만과 열심히 접촉하며 기름칠을 했다. 라파예트급은 우월한 디자인과 컴퓨터를 갖춘 고급진 배라고 혓바닥을 놀렸다. 프랑스 조선소는 300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있는 조선소이며 막 신생한 한국 조산소와 비교하면 레벨이 다르다는 건 '커먼 센스'라는 병신같은 멘트도 해줬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라파예트급은 프랑스 군이 정식으로 쓰고 있는 검증된 장비였다. 대만군은 그 장비들을 그대로 복붙해서 쓰면 부품 수급이나 개량이나 그런 문제는 해결된거나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물론 대만의 예측은 빗나갔다. 캉딩급은 10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개량을 못 받은 채 빌빌댈 운명이었다.
7. 결론
국민당이 대만으로 쫒겨온 후, 대만군 전략은 '본토를 탈환한다'에서 '끈질기게 버틴다'로 수정되었다. 대만군에게 장기적으로 분명한 계획을 짤 안목은 없었다. 대만이 강력한 해공군을 만들 방법은 오직 미국에 달려있었다. 3군은 전력을 확충하기 위해 아둥바둥댔고 가끔씩 과도하게 선을 넘어 군 전략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미 해군과 공군도 서로 내가 더 많은 예산을 갖겠다며 싸움질한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과 공군을 유지할 능력이 있고 상호간 싸움질도 대처 가능한 범위 안에 있었다. 아쉽게도 대만은 아니었지만.
대만 해군에게 '대양 해군' 과 '연안 해군'은 딜레마였다. 두 컨셉이 요구하는 임무와 장비는 판이하게 달랐다. 광화 2호는 분명히 소형함으로 시작된 계획이다. 그런데 무순 이유에서인지 대형함 계획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해군 내의 대형함 파벌이 광화 2호 계획을 변경하고 울산함을 제거하고 라파예트급으로 빈자리를 채우게 했을수도 있다. 국가적 레벨의 전략을 발전시키기 위해 프랑스와의 심도깊은 관계를 맺을 기회가 오자 그걸 낚아챈것일수도 있다. 아니면 많은 사람들의 의심대로, 고위 군관료들이 뇌물을 받고 울산함에서 라파예트급으로 바꿨을수도 있다.
대만군 육성이라는 관점
광화 2호는 대만군의 장기적 계획, 무기 획득 사업의 문제점을 보여준 사례였다. 여기서 드러난 문제점들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다.
1. 미국과의 관계가 박살난 후, 자립하게 된 대만군
1979년 대만-미국 관계가 끊어지기 전까지, 대만군 무기 대부분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얻은 거였다. 미국은 오랫동안 무기를 지원해주며 군대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그런데 대만-미국 외교관계가 끊어지고 나서 역설적이게도 대만군이 미국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심해졌다. 대만이 군사력을 발전시킬 길은 미국밖에 없었다.
경국 전투기도 미국으로부터 기술적 지원뿐만 아니라 전투기의 전략적 운용 개념까지 배워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만의 방위 전략, 무기 체계의 개발과 발전은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느냐에 죄우되었다. 레이건 행정부가 대만 무기 개발에 기술적 도움을 많이 주긴 했지만 대규모로 군사 체계를 만드는 것은 항상 힘들었다. 전문 연구 부족과 힘을 통합하지 못하였고 결국 심화된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2. 무기 개발
1980년대, 해군과 공군은 대대적으로 2세대 군함/전투기 개발 사업에 뛰어든다. 대만의 항공 개발 센터(AIDC)가 '대만군 역사상 최대의 무기 개발 계획'을 전두지휘하며 고성능 전투기 개발에 몰두했다. 해군은 총후 계획에서 광화 계획으로 이어지는 국산 군함 건조 계획을 짰다. 88년 군함 건조 부서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여러 프로젝트들을 관리하며 기술력/인력을 통합하고 개발했다.
92년, 대만 공군이 개발 부서를 크게 확장해서 대만 공군의 모든 무기 개발 계획을 총괄하는 데로 만들자 해군도 자기네 부서를 확장했다. 이 시점에서 대만 국방부가 국가적 레벨로 필요한 무기를 파악하고 이를 획득하려는 매커니즘이 세워졌다.
3. 아래에서 위로
대만군이 미국이 주는 무기를 받고 '키워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천천히 스스로의 힘으로 국방력을 강화하는 능력을 기르고 있었다. 무기 획득 과정은 '상향식'으로 이뤄졌다. 여러 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영구적인 형태의 무기 개발 조직들이 군에서 만들어졌다. 허나 이 조직들에겐 한계가 있었다. 무기 획득은 국가적 이벤트다. 뭘 만들든 고도로 복잡화된 계산을 거쳐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군의 힘만으로 다룰수 없었다. 국방부 뿐만 아니라 다른 부처와의 협력이 이뤄져야 했는데 그게 부족했다.
그리고 대만의 상향식 무기 획득 체계는 군 내의 여러 무기 개발 조직들이 한정된 자원과 시간을 가지고 싸워대는 결과를 낳았다. 장기적, 내 부서가 미는 무기가 낫다는 식의 제한된 개발 방법으로는 전략적 레벨, 육해공 다 아우르고 대만 경제/사회/정치까지 커버할 그런 무기가 나오기 힘들었다. 단기적 시각에서 무기 획득 사업이 진행되었다.
광화 2호에서 이 문제가 제대로 드러났다. 울산급과 라파예트급 경쟁에서 군은 자기네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생각 안하고 질러댔다. 그 선택이 좋든 나빴든 큰 그림을 그리는 시늉이라도 햇어야했는데 그게 없었다. 체계적인 무기 도입 절차가 없었기에 불법적, 방산비리적 손길이 도입 과정에 뻗쳤다. 광화 2호 계획이 어째서 울산급에서 라파예트급으로 변했는지 그 원인과 라파예트급 도입 과정에서 뭔 일이 잇었는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4. 무기 개발 통합부서의 창설
03년 초, 대만 국방부가 군의 모든 무기 획득 사업을 총괄하는 부서를 만들었다. 위에서 언급된 해/공군 무기 개발국도 여기로 통합되었다. 부서들이 자기네 이기심만으로 큰 그림을 안 그리고 무작정 질러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그러나 총괄 부서가 만들어졌음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따로 놀던 부서들이 갑자기 통합되다보니 어쨌거나 부서간 갈등은 이어졌고 총괄 부서에서 뭘 해야할지 감을 못 잡다보니 실질적 업무는 개별 부서들이 알아서 했으며 큰 사업이 아니라 작은 사업들은 소외되었다.
5. 해군 건함 능력의 성장과 몰락
88년 해군 군함 건조 부서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후 거기서 건함 계획을 총괄했다. 해군 본부를 능가할만큼의 자율성이 주어졌다. 거기서 광화 1,2호 계획, S-70 대잠헬기 구입, 대만 조선사와의 협력, 미국으로부터의 해군 지원 등을 다 맡아서했다. 라파예트급도 여기서 처리했다. 93년 4월에 부서가 공군의 사례를 따라 격상되어 건함 뿐만 아니라 해군 무기 체계를 총괄하는 위치가 되었다.
허나 같은 해 12월, 라파예트급 뇌물 사건을 수사하던 인친펑 해군 대령이 의문사당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망해버렸다. 소해함, 해양연구선, 라파예트급을 맡았던 딜러들이 사업에서 손을 떼버리면서 사업이 멈춘 채 붕 떠버린다. 대만 국민들은 방산비리를 외쳐댔다. 방산비리와 관련되지 않은 무고한 해군 장교들까지 줄줄이 조사를 받고 투옥되었다. 이 치명적인 공격들을 받은 군은 더 이상 무기 획득을 시도할 엄두를 못냈다.
대만 해군이 충호 계획때부터 쌓아온 다양한 군함 건조 계획들이 정지되었고 건함 관련 기술진들도 사라져버렸다. 이건 정말 치명적이었디.
6. 결론
98년부터 대만 국방부는 이리 저리 난립해있던 무기 획득 부서들을 정리하고 통폐합하기 시작해서 03년에 총괄 부서 1개로 묶어놨다. 그 과정에서 군의 전문가들이 하나둘씩 군복을 벗었고 대만군은 군사적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할 능력을 많이 손실했다. 허술한 구멍들과 혼란만 늘어났다. 95년 준이지스함 건설 계획 ACS 사업이 취소되고 빈자리를 금강급/광화 6호 초계함같은 조막만한 배가 채우자 대만 조선사들이 불만을 쏟아냈다.
라파예트급 도입의 긍정적 면
1. 프랑스 무기 획득 통로를 얻다
라파예트급 도입의 원인은 미국이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해서다. 미국 무기를 구입할 길이 점점 좁아지자 대만은 다른 길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미국과 비교하면 많이 달랐다. 프랑스 업바들은 거리낌없이 무기를 판매하려 들었다. 프랑스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무기를 어떻게든 팔아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는데 운 좋게 대만이 등장한거다. 또한 무기를 구할 길은 더 있다는 걸 미국에게 보여줘서 미국이 무기 판매를 전향적으로 하게 걍요했다. 물론 프랑스는 값을 비싸게 불렀다. 이익을 얻으려는 것도 있었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무기 생산량 차이때문에라도 값이 더 나갈수밖에 없었다.
허나 90년 이후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대만이 유렵에다 만들어놓은 무기 획득 파이프라인은 하나 둘 씩 박살나기 시작했고 끝내는 프랑스까지 끊어졌다. 결국 대만군의 미래는 다시 미국한테 돌아갔다.
2. 울산급과 라파예트급
울산급은 한국배다. 광화 2호 사업 후보로 거론되던 미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서독 등의 배와 비교했을때 막 시작된 한국 건함 사업에서 나온 배가 얼마만큼 신뢰성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76미리 설치 위치가 괴상한 것부터 시작해서 대만의 거친 바다를 뚫고 항해할 수 있느냐 등. 프랑스가 제안한 라파예트급은 완전 최첨단을 걷는 배였다. 미국으로부터 AN / SQR-18 소나 수입이 좌절된 뒤로 대잠함에 목말라하던 대만 해군한테 최첨단 예인 소나가 달린, 대잠함의 포텐이 넘치는 배는 꼴릿하게 느껴졌다.
만약 울산급을 샀더라면, 무르익지 않은 한국 건함능력탓에 배에서 문제가 터졌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었다. 물론 멀쩡히 굴러갔을수도 있지만. 당시 울산급 1척 구입에 2920억이 예상되었다. 오리지널 울산급 가격이다. 거기서 대만 해군이 자기네 환경에 맞게 개조를 했을텐데 값이 더 뛰었을게 자명하다. 라파예트급이 더 비싸지만 이놈이든 저놈이든 다 비싼 판국에 확실히 더 좋은 배를 사는게 옳은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울산급에서 라파예트급으로 바꾼건 실수라는 말은 하지마라.
3. 라파예트급 구매는 무기 구입 통로를 다변화해줬다.
중국의 노골적 방해와 감히 자기를 무시하고 프랑스한테 찝쩍대는 게 싫었던 미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대만은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했다. 대만이 라파예트급을 비싸게 주고 삼으로써 미라지 2000 전투기도 사고 미카 공대공 미사일도 샀다. 그걸 본 미국이 대만한테 프십육, E-2T OH-1, AH-1W 공격 헬기, 하푼, 녹스급 대잠함 등등을 판매 허가해줬다.
군사적 부분을 제외하고서도 정치적 부분에서 대만이 프랑스와 끈을 마련해두면서 대만이 프랑스에게 차지하는 비중은 프랑스 퀘벡과 동등해졌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GATT에도 가입할 수 있었다. 프랑스 기업과 대만 전철 계약을 맺었고 프랑스 EVA 항공사가 타이페이-파리 직항을 개설해줬다. 잘하면 디젤 잠수함도 살 수 있었으나 결국 못 샀다.
라파예트급이 대만군한테 빅엿을 날린 건 맞다. 허나 라파예트급을 사면서 대만이 얻은 것은 매우 많다.
4. 크라이시스 이후, 폐쇄주의에서 개방으로
8-90년대 대만 무기 도입 과정이 더러웠다는 건 앞서 설명했다. 당시 대만은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은 채 국민당의 통치하에 있었다. 개방적이고 투명한 절차는 기대할 수 없었다. 공사불문하고 비리가 끼어드는 건 당연했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점진적으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 사회로 바뀌면서 부정부패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라파예트급, 미라지, 미카 미사일 같은 해외 무기 도입때마다 항상 있었던 막대한 커미션은 대만한테 큰 부담이었다. 90년대부터 대만 국방 예산 부족 현상이 심화된다. ACS 사업도 재정 부족때문에 터진거다. 라파예트급 사태와 인칭펑 의문사 사건을 목도한 민주진보당은 이를 '국민당의 타락한 권위주의의 결과'로 규정했다. 결국 00년대 민주진보당이 집권하면서 라파예트급 크라이시스 조사가 시행되었다. '정의'와 '진실'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5와 6은 정치적 내용이라 제외함. 재미있는 부분은 민주진보당이 무기 사업 부패를 파헤치는 것까진 좋았는데 이를 국민당을 공격하는 식으로,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조사 과정에서 억지에 가까운 무리수가 보였으며 진실과 정의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그냥 정치적 떡밥용으로 전락해버렸다는 비판이 써짐. 이게 뭐가 정의냐는 대만인의 평론을 보면 쓴웃음이 나옴. 그리고 부패와 상관없는 무기 사업들까지 '너 방산비리지 빼애애애액' 하는 식으로 피를 봤다고 한다. 민주진보당이 국방 예산을 마구잡이로 토막내서 무기 사업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함.
최종 결론 : 가장 큰 피해자는 대만 해군이다
정리하자면, 광호 2호 사태는 대만과 프랑스가 합작해낸 총체적 개판이었다. 대만 해군은 정치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규 군함을 구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문제의 본질은 대만의 특별한 정치 환경 하에서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얼만큼의 돈을 써야하느냐다. 어디까지가 '필요 비용'인가. 도입 절차를 얼마나 감시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확인된 유일한 사실은 대만 해군이 박살났다는거다.
라파예트급 스캔들에 직격탄을 맞은 1990년대 대만 해군의 대형 군사 계획은 올스톱당했다. R & D 통합 및 프로젝트 관리를 수행할 동력이 소멸되어버렸다. 가장 치명적인 건 충호 계획때부터 육성하기 시작한 프로셔널 장교들이 줄줄이 군생활을 포기한거다. 인력의 손실은 또 다른 손실을 낳았다. 2세대 군함 계획을 짰을때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도전 정신과 큰 그림을 보는 시야를 대만 해군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대만 해군은 결코 병력을 육성할 대형 프로젝트를 80년대처럼 만들지 못했다. 미국으로부터 잠수함을 구입 내지 기술 지원이라도 받으려던 것만 봐도 프로답게 구체적 제안을 하며 밀당을 벌여야하는데 그걸 맡아서 할 간부들이 없다.
정부와 국방부는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직도입 내지 공여받으려고 낑낑대기만 한다. 과거 '황금시대' 때 천문학적 돈을 들여서라도 국산 군함을 건조하겠다며 나선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광화 2호 계획은 '철저한 계획과 감시의 부재가 낳은 참사'라는 비판을 받는다. 허나 광화 2호 계획을 추진할때는 적어도 주도적으로 해보려는 능력이 있었다.
대만 해군은 라파예트급을 얻었다. 허나 앞으로 전진할 용기를, 능력을, 지지해줄 내/외부 환경을 잃었다. 대만은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 그 수업료는 매우 심각하며 어쩌면 영구적인 피해로 남을수도 있다.





이게 걸작이지. 사업 하나 잘못해서 해군이 20년 간 좆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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