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제목이 저런데, 책 내용부터 짚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모든 사람들이 이제 다 가진 책,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누구도 안 짚는 내용이 있음. 이것을 주로 다뤄볼까 함.
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에는 후쿠야마에 대한 언급이 있음.
여기 보면 있겠지만, 그 마크 피셔가 "후쿠야마가 그 테제를 내세웠던 때만 해도 역사가 '마지막 해변'에 다다랐다는 관념이 단순히 승리감에 가득 찬 도취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라고 하며 후쿠야마를 두둔하는 걸 볼 수 있음.
이게 진짜 뜻밖인 상황으로 보이지만, 이건 진짜 대단한 분석임. 마크 피셔는 후쿠야마, 적어도 후쿠야마를 둘러싼 컨텍스트에 있어 정확하게 잡은 거임.
후쿠야마가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이 인터뷰로 확인할 수 있음.
아마도 역사의 종말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그것이 자유주의의 승리란 기념으로 의미되었다는 것이다. 후쿠야마의 에세이는 1990년대 초반의 흥분된 분위기에서 쓰여진 망상인 오만하거나 꼴사나운 것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후쿠야마는 1980년대 후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에, 소련의 붕괴나 걸프전은 말할 것도 없이 더 이전에 글을 썼다. 그는 얼마나 임박한 사건들이 그의 에세이를 추진하고, 그것을 유명하게 만들고, 헤드라인으로, 밈으로 바꿀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에세이는 승리주의적인 언어를 포함하지 않았고 경고와 자격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후쿠야마는 30년 후 비관주의와 불행하게도 진실의 고리 때문에 거의 충격적이라는 매우 비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는 "역사의 종말은 매우 슬픈 시간이 될 것"이라며 "나는 그것에 대해 가장 양가적인,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그는 "인정을 위한 투쟁, 순수하게 추상적인 목표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 그때까지 세계적인 이념 투쟁으로 대표된 대담함, 용기, 상상력, 이상주의가 전부 정교한 개인의 수요와 공급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인류의 영웅적 시대가 지나가는 것을 한탄했다.
https://www.the-american-interest.com/2019/01/14/fukuyama-was-right-mostly/
ㅇㅇ… 그 후쿠야마 맞음.
후쿠야마의 케이스는, 수많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쓴 글이 자기를 벗어나서 전혀 다른 쪽으로 통념과 오독의 급류가 생긴 쪽임. 후쿠야마는 물론 잘못된 책을 써냈음. 책에서 이런거 저런거 제외하자는 부분만 봐도 완전히 지금 읽기는 힘든 책임. 그렇지만, 정작 이 책의 컨텍스트만큼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없는, 양가감정적 태도였다는 것임.
정작 90년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타고, 어떤 비관도 가지지 않았던 자는 데리다였음.
데리다는 90년대쯤부터 영미권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또 이런 인기가 그렇듯이 데리다의 추종자들은 데리다의 생각과는 다른, 심각할 정도로 정치적인 관점에서 데리다의 텍스트를 읽기 시작했음.
이런 컨텍스트 안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나왔지. 자신의 정치적 관점과 비정치적 이론은 끊을 수 없는 연관관계가 있다고 말하기 위해 햄릿과 마르크스,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후쿠야마와 코제브를 연결짓는 책.
모르겠음. 데리다가 후쿠야마보단 코제브를 더 잘 알았긴 했겠지. 그런데… 후쿠야마의 이론도 그게 아니었고, 코제브의 이론도 데리다가 말한 그게 아니었어. 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마치 지금 이 상황에서 99년도에 나온 매트릭스의 빨간약을 쓴웃음짓고 보는 느낌이라고.
그리고 확신할 수 있는 게 있어.
마크 피셔와 데리다는 확실히 싸우고 있음.
마크 피셔는 데리다를 아예 비판하기 위해 유령론을 쓴 거임.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살펴보자.
이 책이 너무 어렵게 써진 것도 있지만, 결국 내용을 살펴보면 나이브한 해석밖에 없는 것 아닐까. 한두쪽만 살펴볼게.
여기서 그는 코제브의 프랑스어말 doit이라고 하면서 이게 객관적인 필연성인 must인지 아니면 당위성을 가진 should인지에 대해 말장난을 하고 있어.
이제 여기서 해야 할 말은 분명해.
"대체 역사의 '해야 함'의 해체 불가능한 것 자체는 뭡니까, 데리다님?"
데리다는 이 책에서 너무나 큰 낙관성을 가지고 있어.
1990년대 영화평론에서 보던 사이보그적인 낙관, VR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 그 당시 미디어 이론가들의 낙관.
인정 관계를 전혀 벗어난 "유령"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삶을 살 수가 없어.
데리다에게는 미래를 보여주는 전망이었지. 그러나 그 유령은 당장 닥쳐온 것부터 구시대적인 것을 생각할수밖에 없어.
우리에게 미래는 "가타카"가 아니라, "이제 그만 끝낼까 해"야.
대체 유령이 뭔데? 유령이 뭐가 좋은 건데?
또한 에코그라피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이것이 신경쓰임.
이건 데리다의 제자인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인터뷰인데, 여기 11분 50초에 있음.
데리다가 출연한 Ghost Dance에서, 죽은 여배우를 출연시킨 다음 "유령을 믿는가요?"를 주제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고 함.
그리고 그게 다임.
데리다는 지금 이 상황을 생각했을까. 이렇게 정보가 폭발하는 걸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폴 발레리는 "정신의 위기"에서 미래에는 전 세계 시민들이 마치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듯이 자신의 집에서 곧바로 정보를 받을 것이라고 씀.
분명 "정신에 대해서"라던가에서 폴 발레리와 하이데거를 언급하지만, 정작 이것에 있어서 폴 발레리와 하이데거에서 나아가는 점이 없음.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론이라는 것은 블랑쇼에 대한 대리보충일 뿐임.
데리다는 이 책에서 존재로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유령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블랑쇼가 인간 실존에 있어서 죽음을 벗어나서 생각해야만 하는 미래라는 것, 주체와 대상의 연관관계가 완전히 벗어나는 때가 되는 "바깥". 이 바깥이란 개념과 정확히 같은 위치에 있음.
애초에 이 책에서도 블랑쇼를 언급하지. 블랑쇼의 정치평론에서 68혁명의 해석의 미완성을 언급한 부분이 이미 있어.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면, 데리다는 메시아를 벗어난 메시아주의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결국 어떤 초월적 개인을 염두해두는 반면에,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은 인간 실존 전체가 가진 한 경향으로 이미 보고 있다는 것임. 블랑쇼의 바깥은 메시아를 이미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개념도 아니게 될 수 있음.
데리다의 유령보다, 블랑쇼의 바깥이 더 좋은 대안이라는 것임.
후쿠야마주의자의 낙관이 있었음. 역사의 종말로서 세계는 평화를 유지할 것이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찾아오리라는 이념.
그리고 후쿠야마의 비관이 있었음. 코제브주의자로서 이 역사의 종말은 동물과 속물의 세계가 될 것이고, 그 이전에 있던 모든 추상적이고 인륜적인 목표가 개인의 수요와 공급으로 바뀔 것이란 양가감정으로의 후쿠야마.
여기서 데리다의 낙관이 있었음. 그는 코제브를 재해석하려고 했지만, 컨텍스트에 밀려 후쿠야마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유령으로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이버적인 낙관.
그리고 마크 피셔의 비관. 유령론으로 데리다가 아무리 무엇인가 다룬다고 한들, 우리가 이 유령으로 쓸 것은 그저 미래를 보충하기 위한 레트로 감성과 가장 값싼 형태의 인정투쟁, 즉 사랑이리라는 마크 피셔의 유령론.
그리고 이것이 인셀을 예언하지 않았나, 싶음.
VR과 인셀은 동전의 양면임. 둘 다 "역사 아닌 역사"임.
"역사의 종말" 앞에서 어떻게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임.
우리가 원하는 건 가장 레디 플레이어 원과 프루티거 에어로와 같은 가장 상업적인 미래라는 것.
그리고 인정투쟁이 전부 수요와 공급으로 환원된 상황에서 전혀 인정이 주어지지 않은 인륜성이 소멸된 인간들.
미셸 우엘벡이 쓴 소설 제목, "투쟁 영역의 확장"은 많은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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