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한 숲과 도시를 잇는 철도가 세워진다. 철도를 따라 제재소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마을은 번성하고 숲은 거대한 목재 생산지가 된다. 이것은 사태를 서술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수십년에 걸친 벌채로 숲은 황량해진다. 목재는 고갈되고, 채산성이 낮아진 제재소는 문을 닫으며, 사람들은 떠나고, 마을은 황폐해진다. 남은 것은 폐허가 된 숲 뿐이다. 이 또한 사태를 서술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벌목이 끝난 뒤에 무엇이 남았을까? 두 이야기의 주제는 서로 상반되지만, 둘 모두는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전체를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인간의 개입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폐허(이 단어는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하다) 속에서 버섯이 자라난다.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자란다. 송이버섯과의 공생 덕분이다. 인간이 지나간 곳에, 그리고 여전히 교란하고 있는 그 특수한 환경 속에서 송이버섯은 자라난다. 이는 70년대 일본의 경제 성장과 맞물린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만큼 작은 산업이지만, 송이버섯 채집가들은 송이버섯을 채집하고 일본으로 수출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송이버섯을 채집한다. 백인 월남전 참전용사와 동남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모여든다. 그 의미는 각기 다르지만, 그들은 '자유'를 위해 송이버섯 채집에 뛰어들었다. 또 다른 이유에서 일본계 미국인들도 모여든다. 그러나 이들의 채집은 생계가 아니라 즐거움을 위함이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40년대의 강제 수용을 겪었고, 또 60년대의 사회보장을 겪으면서 미국인들보다도 더욱 미국인스럽게 동화되고자 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주로 그것들이 붕괴된 80년대에 이주했다. 정부는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고, 그들은 그들의 고향처럼 무성한 숲에서 송이버섯을 채집한다.
독특한 점은 이들에게 송이버섯 채집은 '일'이 아니며, 송이버섯은 '상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송이버섯 채집가들은 송이버섯을 경매에 넘기고, 구매자들 사이에서는 경쟁자들을 제치기 위한 음모가 있다. 그런데 음모는 경쟁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함이 아니며, 경매는 시장을 위함이 아니다. 그보다 이는 미국식의 '자유'의 그들 나름대로의 구현이다.
수출된 일본에서도 송이버섯은 상품이 아니다. 일본에서 송이버섯은 곧장 고급의 선물경제 속에서 인간관계를 구현하는 선물로 이용된다. 송이버섯은 결코 '소외', 즉 인간관계로부터 격리되어 순전한 상품가치로만 평가받지 않는다.
그것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바로 그 짧은 순간에만 벌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저자는 이를 '구제축적'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그 형성 초기에, 비자본주의적인 영역으로부터 가치를 끌어와야만 했다고 말한다. 이를 시초축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제축적은 비자본주의(혹은 주변자본주의)로부터 가치를 끌어내면서도, 시초축적과는 달리 완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축적은 항상 어느정도 구제를 필요로 한다.
시초축적이 완결된 적 없으며 도리어 언제나 자본주의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발상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이나 데이비드 하비의 탈취에 의한 축적과 유사한 것일까?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이 종말론적인 어조를 띠고(비자본주의적 영역이 고갈되는 날 자본주의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의 탈취에 의한 축적의 어조가 고발에 가깝다면(폭력적인 탈취는 자본주의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다), 구제축적은 자본주의가 항상 주변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된 가치를 전유하고, 자본주의적 영역과 주변자본주의적 영역을 가로지르며 번역하는 작업 중에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일본이 발명하고 미국이 세계화한 공급사슬 속에서 구체화된다. 일본 자본이 인도네시아 자본을 통해 목재를 조달한다-그리고 노동 착취와 환경 파괴는 이윤으로 번역된다. 멕시코의 피복 공장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바느질을 교육시킬 필요가 없다-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바느질하는 법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 오리건 주의 숲에서, 상품이 아닌 자유의 트로피로서 얻어진 송이버섯은 수출 직전 일용직 노동자들에 의해 (구매자들이 이미 분류해둔 것을) '다시' 분류된다. 그리고 일본에서 다시 선물경제 속으로 들어간다. 번역 작업 속에 자본주의가 존재한다.
송이버섯은 폐허에서 자란다. 그리고 인간과 소나무와 버섯은 서로를 교란하며 생겨난다. 산림청의 특유한 보호 정책이라는 개입, 혹은 농촌의 소농민들의 개입 속에서. 사람들이 숲을 돌아다니고 땔감을 줏으러 다녀서, 부엽토가 얇게 깔린 적당히 척박한 환경에서 송이버섯이 자란다. 사람들이 사라지면 송이버섯도 사라진다. 너무 비옥한 땅에서 송이버섯은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송이버섯이 자란다는 것은, 다른 어떤 종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은 송이버섯에 대한 민족지이다. 민족지는 대개 인간을 다루지만, 이 책은 인간과 버섯과 나무가 서로를 교란하는 삶의 배치를 다룬다. 인간은 그 일부분이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그러한 주제에 크게 동감하기는 어려웠다. 인간과 버섯이 교차하는 지점들에 대한 서술은 매력적이었지만, 주제가 완전히 생태학적으로 넘어가버릴 때, 그리고 생태학의 유비를 인간사에 적용하려 드는 단락들에 대해서는...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민족지라는 특성때문인지는 몰라도, 책의 상당부분이 인터뷰에 의존하고 있는데, 어떤 부분은 개인적으로는 인터뷰보다는 좀더 공식적인(?) 문서를 참조할 수 있고 그쪽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측면들이 있다. 아무래도 인류학을 잘 모르다보니 드는 아쉬움일수도 있겠다..
인류학쪽 책들을 좀 더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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