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놈이 오늘의 주인공
1969년 4월 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에 위치한 유복한 베두윈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후 성장해서 1987년에는 상류층만 간다는 미국 유학을 갔다온뒤 정상적인 과정 이었다면 국영석유기업에 취업할 예정 이었고 그의 앞날에 봄날이 예정 되어있지만

🔼🔼불곰 새끼들이 쳐들어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1987년말 당시 압둘라 아잠이라는자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을 비판하고 지하드 선포를 하는것을 본 그는 감명깊은 나머지 소련군 이교도를 때려잡겠다고 중동 젊은이들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전에 뛰어듭니다.
그는 1987년 말에 아프간으로 건너가서 잘랄라바드의 훈련 기지에서 전투 기술을 전수받습니다. 당시 참전했던 어느 무자헤딘은 그의 훈련소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 훈련소는 분주하게 운영됬으며 교육을 마치고 전장에 가는 사람과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한번은 신병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는 데 16살, 17살 남짓의 어린애가 한명 눈에 띄었다. 긴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 데, 갑자기 강의하는 조교의 앞에 가더니 자기를 지금 당장 전선에 보내달라고 하였다. 조교는 훈련 없이는 불가하다며 거절하였고, 나는 그 친구 앞에 가서 이름을 물어봤다. 그는 '이븐 알 하타브'라고 대답하였다."
17세에 전장에 온 또라이 답게 전쟁에 참여해달라고 조교에게 생떼를 쓰기도 했습니다.
하타브는 훈련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전장에 갔고 그는 잘랄라바드, 코스트와 카불 지역의 전투에 참가하며 소련군이 1989년 철수 할 때까지 싸웠습니다. 17세 미국에서 온 또라이 답게 여러 일화가 많았습니다.
" ... 어느 전투에선가, 우리는 후방의 가옥의 방에 앉아 있었다. 저녁 때였고 전방은 굉장히 치열했다. 몇분 뒤, 하타브가 방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그는 방에 들어와서 아주 천천히 걸어가서 우리 맞은 편에 앉았다. 그가 너무 조용하게 앉아있어서 우리는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디 다쳤어?' 라고 물어봤는 데 아까 전방에서 좀 스쳤다고 대답했다. 우리 중 한명이 가서 상처를 보여달라고 하자, 하타브는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였다. 억지로 복부를 가리고 있던 그의 손을 들어내니 옷은 피로 질퍽한 상태였다. 우리는 즉각 차량을 보내달라고 무전하고 그를 가까운 야전 병원으로 보내기 위해 서둘렀다. 그는 억지로 실려가는 동안에도 계속 자기 부상은 경미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불평하였다."
하타브는 여러번의 부상을 입었고 그 중 한번은 수류탄이 오른손에서 터져서 4개 손가락을 잃었다. 동료들이 그를 페사와르로 보내 치료를 받도록 했지만 그는 거절한 채 손에 붕대를 감고 계속 싸웠다. 그 뒤로 그는 뭉개진 오른손에 장갑을 낀 채 싸웠다.

🔼🔼그의 왼쪽에 손가락이 없는 이유가 그때 난것 입니다.
보면 볼수록 그냥 이슬람 극단주의 심취하지 않고 사우디군에서 후티반군이나 때려잡았으면 유명해졌을텐데 말이죠.
그는 소련군이 물러난 뒤, 아프가니스탄은 1993년 수도 카불에 무자헤딘이 입성하여 나지불라를 고자로 만들때까지 계속 아프가니스탄에 있었습니다. 하타브는 이 전쟁을 마저 수행하면서 우수한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1992년 따끈따끈한 이슬람 극단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아와 이슬람교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분쟁지인 나고르노 - 카라바흐로 가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일생을 종치게 하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하타브의 개노답 프렌즈 샤밀 바사예프
하타브는 이 전장에서 샤밀 바사예프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막장끼리 서로 알아본다고 샤밀 바사예프에게 자신이 얻은 오랜 전투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고, 지하드 이념까지 전달하였다. 물론 샤밀 바사예프는 중간에 곧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떠났지만, 하타브는 이곳에서 한동안 더 머무르고 자신의 이슬람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다음 전장을 향해 떠납니다.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였습니다.
그곳은 러시아와 똑같은 슬라브족이 세르비아 민족들이 이슬람 동포들을 학살하고 있는 전장이었죠.
1993년 말 도착한 그는 현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당 지역 이슬람계를 대상으로 한 군사 캠프를 설치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때려잡은 자신의 전투 노하우를 전수시키고 그의 교육을 받은 보스니아의 무자헤딘은 세르비아 군에게 그들의 잔혹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1994년에 나토군이 개입하면서 잦아들었고, 2월에 잠정 휴전이 되면서 끝나게 되고 그는 자신의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또 다시 길을 떠나게 됩니다.
다음 대상은 중앙아시아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타지키스탄 였습니다.
타자키스탄 내전은 구소련 시절때 집단 농업 정책에서 평야 지형이 있는 지방은 특혜를 받고 산악 지방은 소외를 받았던 점이 발단이 된것이 원인 이었습니다.소련 붕괴 후의 힘의 공백기에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정부와 남부 쿨라브 산악지대의 이슬람 세력의 대립으로 1992년부터 내전이 발발한 상황이었습니다.
내전이 발생하면서 러시아를 필두로 한 독립국가연합은 타자키스탄 정부군에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결의하고, 8,500명의 러시아군이 파견되습니다. 이에 맞서 쿨라브의 이슬람 세력도 각지의 무자헤딘, 특히 이웃의 아프가니스탄의 숙달된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응답한 사람 중 한명이 하타브 였습니다.
타지키스탄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타브는 러시아군 보다 강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때려잡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3개 무자헤딘 부대 중의 하나를 지휘하게 됩니다.
1994년 봄, 7명의 무자헤딘과 현지인 10여명을 포함한 소규모 분대를 이끌고 하타브는 아프간과 타지키스탄 국경지대의 판지 지역 12번 러시아군 검문소를 습격하여 해당 검문소는 순식간에 개 작살나고 생존한 러시아군은 없었습니다.
이 분쟁에서 러시아군이 하타브를 기억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고 이때부터 그 와 러시아 정부와 기나긴 악연이 시작됩니다.
1995년이 되자 내전이 갈수록 격해지자 타지크의 무장 세력은 정부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길을 모색합니다. 외부에서 유입된 무자헤딘은 이제 설자리가 없었고, 하타브는 전쟁이 끝나지 않고 떠나는 것을 반대했지만 결국 대세에 따라 아프간으로 돌아갑니다. 처음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떠난 뒤로,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며, 이미 4차례나 분쟁지를 경험하였습니다. 재미있게도 대부분 러시아와 연관된 국가였죠.
아프간에 돌아온 하타브는 어느날 티비를 통해 러시아 공화국 내에서 분쟁이 발생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전까지 체첸이라면 아제르바이잔에서 만난 샤밀 바사예프를 어렴풋이 알고 있던 하타브는 그 분쟁이 러시아 내부의 민족 다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티비를 계속보던 하타브는

화면에 나온 체첸인들은 머리에 '라 일라하 일랄라'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라고 쓰여진 녹색띠를 두르고 '알라 후 아크바르!'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는 모습을 감명 깊게 본 "그 때 나는 비로소 체첸이라는 곳에서 성전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한번 가보기로 하였다." 중2병 대사를 애기하고 바로 12명의 자신의 따가리 들과 함께 체첸으로 가게됩니다. 사망 플래그에 시작이었습니다.
하타브는 그곳에 자신과 똑같은 중2병 적인 열의가 넘치는 이슬람 극단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을 접하게 되고 감동을 먹어 기존의 분쟁지처럼 잠시 동안 훈련소를 설치하고 전투 경험을 전수해주고 떠날 생각이었던 하타브는 그곳에 오래 있기로 마음먹고 다른 아프간의 무자헤딘에게도 연락하여 추가로 체첸에 들어오도록 합니다.
하타브를 따라 중동 각지에서 몰려온 무자헤딘은 대략 80명 정도로 추정되며, 이들은 하타브를 따라 각지의 분쟁지를 누비고 온 전투의 베테랑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체첸 전쟁때 러시아군에게 악몽과 같은 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그는 과거 아제르바이잔에서 처음 만났던 샤밀 바사예프와 만나 그의 도움을 받아 체첸 현지에 적응하면서 자신이 데리고 온 베테랑 대원들과 함께 체첸인들에게 소련군과 러시아군을 때려잡던 전투 기술을 전수하였습니다. 아마도 샤밀 바사예프가 성장했던 이유중 하나가 이 대원들의 역할이 컸을걸로 추정됩니다.
최초의 공격은 1995년 10월부터 시작되고 그는 괴물과 같은 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베데노 남쪽의 카라초이 마을 근처의 산악도로의 러시아군 행렬을 습격하여 러시아군은 5명의 장교를 포함한 47명이 전사하고 5대의 장갑차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고 하타브측의 부대는 한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를 시작으로 하타브는 적게는 40여명, 많게는 100여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체첸 각지의 매복과 기습 작전을 벌였으며, 그때마다 러시아군의 행렬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기 시작합니다.
이 작전 중에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전투는 1996년 4월16일에 발생한 사토이 전투로 이 전투는 러시아 제245 소총연대(MRR) 2대대가 러시아 민간이 대동한 채로 가던중 하타브의 부대에게 IED 폭팔과 함께 매복공격을 27대의 차량손실과 53명의 군인과 52명의 부상자를 낸 전투이며 하타브의 부대는 이후 항복한 52명의 부상자와 곁에 같이 가고있던 러시아 민간인도 함께 살해했다고 합니다. 12명의 러시아 군인들만 겨우 도망쳐 나왔다고 합니다.
하타브측은 3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 당한것에 그칩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하타브는 '체첸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체첸내에서 입지를 굳히게 되고 샤밀 바사예프는 그를 장군으로 승진시킵니다.
러시아측의 요청으로 하타브는 인터폴에 지명수배 됩니다.
그는 체첸전 종전 이후 체첸에 짱 박혀 산악지형에 아랍 무자헤딘을 창설해 각지에서 성전에 참여하러온 이슬람 극단주의를 훈련시키기 시작합니다.
체첸인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권 국가들도 있었고 매우 다양했습니다.
그는 샤밀 바사예프의 명령에 따라 막장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슬람 국제 평화 유지단 깃발 어디서 많이 본 깃발이다.
그는 이슬람 국제 평화 유지단이라는 단체를 창설한뒤 체천 독립전쟁에 자살골이라고 평가받는 그 단체로 다게스탄 침공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슬람 국제 평화 유지단은 다게스탄에서수백명을 살해합니다.
평화 협정을 무시한 샤밀 바사예프 행동에 제대로 빡친 러시아는 2차 체천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러시아는 전에 이빨 빠진 불곰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추한 양반이지만 즉위 당시에는 존나 무서운 양반이었죠.
지도자도 하필이면 제1차 체첸전때 뒷구석에서 보드카나 쳐 마시던 늙은이가 아니였거든요.
그는 다게스탄 침공후 제대로 미쳤는지 부하들을 사주해 1999년 있었던 러시아 폭탄 테러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FSB의 주장이라 서방에서는 러시아가 체첸을 침공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인것이 아니냐는 애기가 나왔습니다.
그때와 달리 1차때 개털린던 이빨빠진 불곰이 아닌 제대로 된 불곰이 튀어나와 그로즈니를 석기시대로 돌려보냅니다. 그후 러시아군의 강력한 화력에 샤밀 바사예프와 하타브는 산악지대로 빤스런 하게 됩니다.
하타브는 산악지형 이점을 이용해 꾸준히 러시아군을 공격합니다. Zhani-Vedeno 매복전투에서 러시아 내무부 기계화 전투를 습격해 43명을 사살하고 그후 힐776 전투에서 러시아 공수군 84명을 사살했지만 전과 달리 300~400명의 피해를 입는등 그의 전투에 점점 한계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의 트롤짓에 아주 감사했던 러시아는 아주 특별히 오사마 빈라덴처럼 1순위 사살대상으로 친히 정해주고 FSB는 그에게 그동안 감사로 영원히 편히 쉬게 해줄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방법은 바로 편지였습니다.
집에서 호적 파인 빈라덴과 달리 사우디라아라비아에 계시는 부모님하고 편지를 주고 받는다는 점을 노린겁니다. FSB는 Ibragim Alauri라는 자를 고용하여 편지를 전달합니다. FSB는 하타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편지를 전달하는 작업이 약 6 개월의 준비 기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그를 영원히 편히 쉬게 해주기 위한 FSB의 애틋함이 엿보입니다.
하타브는 평소와 같이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편지를 개봉하자 거기에는 FSB에서 소련시절과 러시아 시절 대한 그동안의 노고를 받아 특급으로 만들어준 사린가스를 맡고 이슬람에서 애기한 천국을 가장한 지옥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후 그의 2인 자리는 샤밀 바사예프의 명령에 따라 아부 알 왈 리드가 그의 자리를 2002년 계승받고 러시아는 그후 러시아는 하타브가 매우 쓸쓸할까봐 2004년 아부 왈 리드를 하타브 곁으로 보내주게 됩니다. 후에 더 쓸쓸할까봐 그의 동료인 샤밀 바사예프도 같이 곁으로 보내줍니다.
그후 다게스탄 체천은 사라지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생 유복한 집안 아프가니스탄의 소련 침공이 첫 전장이라는거 둘 다 공격을 건 나라가 강대국들이란점을 보면 오사마 빈 라덴과 매우 유사합니다.
차이점이라면 오사마 빈 라덴은 9.11테러로 경악을 선사했고 하타브는 러시아만 어그로를 끌었다는 점과 앞장서지 않는 뒤에서 조종하는 빈라덴과 달리 직접 전장에 뛰는 점을 다른점을 보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그때 많이 본 분이 없으셔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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