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타구치 렌야 장군은 서방에서 흔히 생각하는 일본 장교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각진 얼굴, 짙고 시커먼 눈썹, 두꺼운 콧수염과 축 처진 턱의 소유자인 장군은 공격적이었고, 고집 셌으며, 자신의 계획에서 희생되는 인명에 눈썹 하나 치켜들지 않는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평균보다 더 대놓고 개인적인 야심을 내비쳤다. 그는 자신을 중일전쟁을 시작하게 한 주역이라고 스스로 고평가했고, 오년 후에는 그 허영심에 찌들어 대참사로 끝날 작전을 입안하게 되었다.”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는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이 전쟁을 시작하게 된 기점인 노구교 사건의 주모자 중 하나였다. 1941년 12월의 그는 본래라면 말라야 침공을 담당한 야마시타 군의 일부인 일본 육군 제18사단을 지휘하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1941년 12월 8일, 사단 병력이 코타바루에 상륙할 때에 사단장은 광저우에 틀어박혀 있었고, 나중에는 깜라인 만에 정박한 수송선에 임시 본부를 차리고 있었다. 무타구치가 사단 지휘소에 도착한 건 1942년 1월 27일, 일본군 공세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을 때에서였다.
제18사단은 말라야 반도의 동쪽을 따라 진격했고, 싱가포르에서는 야마시타의 명령에 따라 섬의 서쪽 방면을 맡아 중앙 담당인 제5사단의 옆에서 싸웠다. 사단의 주 목표는 부킷티마 고지였다. 야마시타는 고지의 점령으로 영국군의 항복을 강제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진무천황의 탄생일인 2월 11일까지 고지를 점거할 것을 주문했다. 호주 병력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두 사단은 11일 저녁 고지를 점령했다. 무타구치의 제18사단은 그 이후로 섬의 서쪽 해안을 따라가며 시내로 진격해 갔고, 영국군 제1말라야 여단 병력의 치열한 저항에 직면했다. 다음날, 2월 12일. 일본군 제18사단 소속으로 추정되는 장병들이 알렉산드라 야전병원에 도달했다. 인도인 병력이 병원 지붕에서 일본군에게 발포했다는 확실치 않은 보고가 들어왔다.
야전병원에 도착한 일본군은 항복하려는 영국군 의료 인력의 시도를 묵살하고 병원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총검으로 의사와 환자들을 마구 찌르고 나머지 환자들을 근처의 작은 건물에 한데 모아두었다. 다음날 영국군 환자의 대부분이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그리고 1946년 9월, 전쟁이 끝난 뒤. 한 명의 영국군 대령이 싱가포르에서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말라야, 싱가포르 전쟁범죄 수사관을 맡은 시릴 H. 와일드 대령이었다. 대령은 이미 마닐라에서 무타구치의 상관이었던 야마시타 장군과 대화했고, 야마시타는 해당 건을 모르고 있었다고 증언하며 해당 작전에서 알렉산드라 병원이 있는 구역은 제18사단 소관이었다는 걸 밝혔다. 이제 알렉산드라 학살을 수사하는 와일드 대령의 시선은 당시 제18사단장에게 돌려졌다. 법무팀의 동료 켄트 대령은 지휘관에게 책임 소재를 묻기 어려울 수 있다고 조언했지만, 와일드는 끝끝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된 무타구치의 면회에 나섰다.
1946년 9월 9일, 수사관은 도쿄에 도착해 형무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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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월 12일, 제18사단 장병들이 병원에 들어가 보이는 모두를 닥치는 대로 총질하고 찔러 죽였다. 수술실에서 수술받고 있는 환자를 사살하고 집도의까지 죽였다. 의료 인력과 부상병을 죽인 일본군은 200여명의 포로를 모아 반 마일 거리의 작은 건물에 가뒀고, 다음날에 끌어내어 다섯 명을 제외한 전원을 기관총과 총검으로 사살했다. 그 다섯 명은 전쟁포로가 되었다. 병원에서 학살된 인원은 20명 이상의 군의관, 60명 이상의 의무병, 200명 이상의 부상병이다.
A. 제18사단이 확실한가.
Q. 확실하다.
A. 정말인가. 금시초문이다.
Q. 지난 10월 마닐라에서 야마시타 장군에게 같은 얘기를 해 주었다. 장군은 이 학살을 “끔찍하고 이유 없는 짓”이라 부르며 필시 제18사단이 저질렀을 거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커다란 규모로 자행된 범죄면 사단장 역시 알고 있었을 거라고도 말해 주었다.
A. 들은 적 없다. 놀라운 일이다.
Q. 학살의 생존자인 크레이븐 의무대령이 다음날 병원을 방문한 일본군 장성한테 사과의 말을 들었다는데. 적장은 일종의 사과를 한 후, 그는 천황의 대표이기에 크레이븐 대령은 그가 자신을 이렇게 만나 준 걸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었나?
A. 처음 듣는 소리다. 일본군 병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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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릴 와일드 대령 역시 싱가포르 전투의 참전자였지만, 그는 당시 영국군 사령부가 있는 포트 캐닝에 복무했는지라 학살 현장의 직접적인 증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학살의 며칠 이후 알렉산드라 병원의 군의관이었던 제임스 불 소령, 그리고 포로수용소에 있던 마취과 의사 등 다양한 인원에게 들은 증언을 바탕으로 도쿄재판에서 학살의 증언자가 되었다.
하지만 1946년 9월 25일, 포로 시절 직접 경험한 다른 건에 대해 26일 재판에서 증언하러 싱가포르로 가던 와일드 대령은 비행기 사고로 홍콩 카이탁 비행장에서 사망했다.
9월 27일, 와일드가 죽은 지 이틀 후, 스가모는 와일드의 생전 건의대로 무타구치를 싱가포르 창이 교도소로 이송했다. 그는 1946년 9월 29일 오후 7시 스가모 형무소를 떠났다.
1946년 11월 6일, 창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무타구치는 증언의 일부분을 자의적으로 수정, 해당 사건의 담당자인 왓슨 대령에게 다음과 같이 수정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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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 날짜는 확실치 않지만 알렉산드라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아마 1942년 2월 16일이었을 거다. 선의의 방문이었고, 참모장 및 의무참모진을 동반했다.
병원 방문 시엔 모든 게 정돈되어 있었고 문제가 있다는 흔적은 없었다. 귀측에서 언급한 학살 건에 대한 지식은 일말도 없었고, 영국군 환자들에게 사과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경험했을 불편에 대해 예의 바른 일본식 방법으로 유감을 표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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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참 갑론을박이 일다가 1947년 6월 5일, 무타구치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하란 명령이 전달되었다. 기소 측이 연락을 시도한 증인들은 이미 전부 죽었거나 영국 본국에 있었고, 일 년 이상 지난 무타구치의 빛바랜 사진과 1942년의 기억을 제대로 대조할 수 없었다.
석방의 주요 원인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제기된 빌헬름 폰 레프 등의 재판에서 나온 판례와 같은 논지로, “지난번 전쟁과 같은 현대전은 상당 부분 독립적으로 전개되기에 고급장교는 부하들의 군사작전을 항상 알고 있을 수 없으며, 행정업무 또한 마찬가지다. 범죄 책임은 단순히 위계조직에 속한다고 해서 전체에게 전가되어선 안 되며, 개인의 직접 관여 혹은 관리 미비 행위가 확실히 증명된 경우에만 범죄가 인정된다.”는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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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읽어 보니까 정황상 명령은 안 했고 알고는 있었고, 나중에 쫄려서 구라친 거 같은데……. 운은 더럽게 좋아요 근데.
그리고 꺼라위키 무타구치 재판정 나왔을 때 하하호호했다는 썰은 도대체 출처가 어디임? 싱가폴 재판 끝나고 개별적으로 또 동경재판 선 거기라도 한 건가?
출처.
Robin Rowland, Sugamo and the River Kwai
Meiron and Suzie Harries, Soldiers of the Sun: The Rise and Fall of the Japanese Imperial Army
Public Record Office United Kingdom, "Alexandra Hospital Massacre," W0 325/88, Interrogation of
Mutaguchi Renya, Lt Gen (retd) 9 September 1946
Stanley Falk, Seventy Days to Singapore
Cyril Wild, “Report on Interrogation of General Tomoyuki Yamashita… at Manila, 28 October 1945
United Kingdom PRO, "Alexandra Hospital Massacre," Kerin to Wild, 17 April 1946, Alexandra Mil
Hospital Case.
The Tokyo War Crimes Trial, Vol 3
United Kingdom PRO, "Alexandra Hospital Massacre," Sworn statement by Lt. Gen. Mutaguchi Renya.
United Kingdom PRO, "Alexandra Hospital Massacre," Memo: War Crimes: Alexandra Hospital 3
December 1946.
William H Parks, "Command Responsibility for War Crimes," Military Law Review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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