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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대만은 왜 일본에게 호의적일까?

스카타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5.13 15:4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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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3/0000035969?s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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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총통부. 일본 통치 당시 대만 총독부 청사로 쓰던 건물이다.



리덩후이(李登輝·1923~2020)는 대만의 7·8·9대 총리를 역임한 유명 정치가로 대만 최초의 민선 총통이면서 최초의 본성인(本省人·대만 현지 출신) 총리였다. 일제 지배 시절 그와 그의 아버지 모두 창씨개명을 했다. 그는 일본 방문 때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야스쿠니 신사를 둘러싼 논란은 "중국과 한국이 억지로 만들어 낸 문제"라는 주장도 폈다. 또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분쟁에서도 공개적으로 일본 편을 들기도 했다. 심지어 2015년의 한 인터뷰에서는 "70년 전에는 일본인으로서 조국(일본 제국)을 위해 싸웠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만일 우리나라에 이런 정치인이 있다면 그의 정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답은 들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리덩후이도 친일 행적 때문에 생전에 일부 비판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큰 문제 없이 사후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만 총통부가 일제 총독부 청사


국립대만대와 국립대만사범대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만의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들이다. 각각 1928년에 설립된 대북(臺北)제국대학과 1922년에 설립된 대만총독부 대북(臺北)고교를 모체로 하고 있다. 실제 홈페이지에서도 그때부터를 개교 연도로 잡고 있다. 반면 비슷한 맥락의 국립서울대학교의 경우 일본 식민지 시대의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 공, 사립 전문학교들이 통합되면서 설립되었다고 밝히고는 있지만, 개교 연도는 엄연히 광복 후인 1946년 10월 15일로 되어 있다.


대만과 한국에는 광복 이후에도 식민지 시대의 총독부 청사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한때 중앙청이라고 불렸던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 잔재 청산 과정의 일환으로 28년 전인 1995년에 이미 해체, 철거되었다. 하지만 대만 총독부 청사의 경우 지금까지 대만 총통부 건물로 사용되면서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일본의 쇼와 덴노(1901~1989·재위 1926~1989)는 1923년 황태자 신분으로 당시 식민지였던 대만을 방문하여 열렬한 환영 속에 12일 동안 기차로 대만 전역을 누비면서 시찰하였다. 그러나 당시 같은 식민지였던 조선 땅은 암살 위험성 등으로 끝내 방문하지 못했다.


똑같이 일본의 지배를 받은 한국과 대만인데 도대체 왜 이런 현격한 차이가 생긴 것일까? 필자는 이번에 대만 국립사범대학에 어학연수를 와서 시험 및 면접을 통해 최고급 반 중 하나인 '양안차이면면관(兩岸差異面面觀)'이라는 과정을 수강하게 되었다. 글자 그대로 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의 각종 차이점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는 수업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대만의 역사를 다루는 챕터의 토론 항목 중 '똑같이 일본 통치를 받았는데 한국과 비교해서 대만은 왜 일본을 싫어하지 않는가(同樣被日本統治, 和韓國相較, 爲什麽臺灣人不仇日)?'라는 질문이 들어 있었다. 물론 수업 시간도 충분치 않았고 반 구성 인원의 대부분이 유럽 출신 학생들이라 흥미 유발이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선생님의 간단한 설명으로만 진행되었지만 필자로서는 이 흥미로운 주제를 그냥 넘길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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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중화로 시먼딩 인근 벽면을 장식한 ‘대만 역사 풍모 조회’. 17세기 네덜란드 지배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만 발전의 계기가 된 중요한 장면들을 작품으로 만들어 상설 전시해 놓았는데 내용의 상당 부분이 일제 식민지 시절의 건축 업적들이다.





'반청복명' 정성공의 어머니가 일본인


대만이 일본을 싫어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일본 식민지 지배 이전에도 이미 다양한 외세의 점령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적극적으로 아시아에 진출한 네덜란드 세력이 1624년에서 1662년까지 대만을 점령하면서 식민 지배를 하였다. 그 후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대만을 차지하였던 반청복명(反淸復明) 항쟁가 정성공(鄭成功·1624~1662)도 대만 입장에서 볼 때는 엄연한 외세였다.


길지 않은 대만 역사에서 '정성공'이라는 인물의 등장에서부터 이미 대만과 일본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정성공의 어머니가 일본인이었으며 정성공 자신도 어릴 때 일본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정성공이니만큼 자신의 모국어나 다름없는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대만을 지배할 즈음에도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해나갔다.


같은 시기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어땠을까? 정성공이 활약하던 시절 조선은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던 임진왜란(1592~1598)의 아픈 상처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었고 단절되었던 국교도 조선 통신사의 방일을 계기로 겉으로는 회복되었지만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반감은 여전했다.


명나라에 이어 대륙을 장악한 청나라는 명군 강희제 시절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1683년 마침내 대만의 정씨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시 원주민들과 명에 충성하는 이주 한족들로 구성된 대만인들의 관점에서 청나라는 네덜란드와 스페인, 그리고 정씨 왕조를 이은 또 다른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청은 대만 정복 이듬해인 1684년에 대만부(臺灣府)를 설치하고 행정적으로 푸젠(福建)성에 소속시켰지만 대만을 효과적으로 장악하지는 못했고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반면 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만에 대한 서구 열강의 관심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1854년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 해군의 페리(1794~1858) 제독은 당시 필모어 대통령에게 "대만은 명목상 청나라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인 존재"라고 보고서를 올리면서 미국 보호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후 1895년 일본의 식민 통치 직전의 상황도 대만은 한국과 완전히 달랐다. 무엇보다도 대만은 중국의 한 섬이었을 뿐 독립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이에 반해 한국은 비록 청나라에 조공은 바치고 있었지만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관점에서 대만과는 달리 엄연한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15년 전인 1895년 4월 17일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치시대(日治時代·일제시대를 가리키는 대만식 용어로 '日據時代(일거시대)'라고도 한다)가 시작되었다.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기치 아래 유럽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국력을 키워 가던 중 마침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그 대가로 얻어낸 대만 땅은 일본으로서는 회심의 첫 식민지였다. 당시 일본은 자기들도 서구 열강에 못지않게 식민지 경영을 잘할 수 있다는 모범 사례를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초창기 대만에 온 일본인들의 주력이 기업가와 투자가들이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은 낙후되어 있었던 대만 경제의 활성화를 통해 현지인들의 고용 창출과 생활 여건 향상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만일 우리가 대만 경영에 실패한다면 일장기도 빛을 잃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성공적인 식민 지배에 대한 분발을 촉구하였다.




대만서 모범 식민 사례 만들려고 노력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얻어낸 전쟁 보상금으로 국가 재정에 큰 여유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체결된 조약 제4조에는 '청은 군비 배상금으로 순은 2억냥을 일본 제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뒷날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그 대신 추가 배상금을 요구하면서 순은 2억냥은 총 2억3400만냥으로까지 늘어나게 된다. 


이는 은 1만3000t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로 당시 일본의 7년간 세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런 풍족한 재정을 바탕으로 대만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고용률이 대폭 증가하는 등 대만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철도, 항만, 교육 시설 등 이전에 없었던 사회 인프라 구축도 본격화되었다. 치안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렇게 청의 지배 시절보다 모든 생활 여건이 향상되자 만족하는 대만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세부적인 경제 운용 방침도 뛰어났다. 당시 일본은 대만에서 사탕과 장뇌(樟腦) 산업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당시 대만은 세계 장뇌 생산의 70%를 공급하고 있었다), 식민 지배에서 흔히 보는 착취 형식이 아니라 대만의 엘리트층에게 그들 소유의 사탕·장뇌 생산시설을 스스로 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게다가 당시 대만의 경제 역시 일본에서 수요가 높은 환금작물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 또한 일본 경제와 보완 작용을 해 일본과의 이해가 잘 맞아떨어졌다.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대만에 투자


반면 대만이 식민지가 된 1895년 우리나라 사정은 달랐다. 나날이 국력이 쇠퇴해 가는 상황에서 조선 땅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청일전쟁(1894~1895)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의 대규모 집단 역시 대만과 달리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과정에서 청나라 군인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민간인들도 대량 학살하면서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을 키워 갔다. 게다가 청일전쟁이 끝난 몇 개월 후인 1895년 10월 8일에는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 민비가 비참하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가 한층 더해졌다.


한일병합 전해인 1909년 10월 26일에는 당시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조차한 하얼빈에서 러시아와의 제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회담을 하러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 정부는 한일병합 이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항상 군 출신 인사들을 조선 총독으로 파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 때문에 역대 조선 총독 9명이 모두 육군 또는 해군 대장들이었고 이들은 억압적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반면 대만에는 초기에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군 장성들이 총독으로 파견되었지만 1919년부터는 20년 가까이 경제 활성화와 연관된 민간인 출신 총독들이 파견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변수가 되었던 것은 러일전쟁이었다. 1904년 2월 8일 발발한 이 전쟁은 일본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군사비가 들어가면서 국가 재정이 위태로울 정도로 곤경에 빠졌다.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낸 청일전쟁 때와는 달리 러시아의 완강한 거부로 전쟁 배상금을 한푼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한일병합 이후에도 대만에서처럼 큰 투자를 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전에는 금으로 1170만파운드 가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전쟁 비용으로 무려 4000만파운드를 지불해야 했다. 결국 부족분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빌릴 수밖에 없었고 이런 재정 적자가 한국으로의 신규 투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일본 정부는 조선의 개발에 필요한 비용을 조선에서 착취한 돈으로 충당하려 했다. 철도나 전화, 학교 등 기반시설을 만들 때 대만의 경우 일본 정부의 돈으로 지원했지만 조선에서는 한국인의 땅과 재산 등을 착취하여 이를 일본 사업가들에게 되파는 형식으로 개발에 필요한 투자금을 확보하였다.


더구나 당시 군 출신인 조선 총독들은 대만의 총독들에 비해 경영 능력이 떨어졌다. 당시 일본이 한국에 한 큰 투자 산업 중에 목화와 목축업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쌀농사를 지을 땅도 부족했던 조선에서 이런 계획이 성공할 리가 없었고 결과적으로는 쌀 부족 사태까지 유발되면서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6년의 한 통계를 보면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인들에게 1인당 평균 12~13엔의 세수를 거두었고 대만인들에게서는 1인당 4~5엔을 거둔 반면 조선인들에게서는 겨우 2~3엔밖에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열악한 상태의 조선 경제는 중일전쟁(1937~1945)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가 한반도를 전쟁 거점으로 삼고 수천 명의 조선 출신 노동자들을 군수 공장에 투입하면서 더욱 나락에 빠졌다. 이윽고 태평양전쟁(1939~1945)까지 시작되자 조선에서 생산되는 쌀 상당 부분이 군용으로 약탈당하면서 조선 민중들의 기근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렇지만 대만의 경우에는 전쟁으로 인해 일본과 대만과의 해상 운송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대만으로서는 행운으로 이런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제 징병 대만 21만, 한국은 2만


중일전쟁 당시 약 21만명의 대만인들이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군과 싸웠던 반면 한국은 1938년에서 1943년 사이 징집된 병력이 약 2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숫자는 당시 조선이 대만 인구의 4배 정도임을 감안할 때 놀라운 차이였다. 조선인의 경우 오히려 약 8만명의 병력이 중국 국민당군과 공산당 팔로군 또는 조선 독립군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운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본에 징집된 조선인의 경우 당시 일본군 고위층에서는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항상 경계하고 있을 정도였다. 1942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여 학도병 제도를 시행했던 당시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1880~1950)는 그의 일기에서 "조선 출신 병사들이 전선에서 영국이나 미국과 협조하여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눌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라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일본 청년들만 죽을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들만 늘어나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다"라는 견해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 선언을 하고 그해 10월 대륙의 중화민국 정부가 임명한 행정장관 겸 경비 총사령관이 대만의 타이베이에 도착하여 일본의 대만 총독으로부터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내면서 대만인들의 열렬한 환영과 기대 속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행정장관이었던 천이(陳儀·1883~1950)는 일본 육사 출신이면서 대만통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만에서 업무를 보기 시작한 이후의 상황은 대만인들로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정도를 넘어서 모든 면에서 끔찍한 상황만 계속되었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대만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했고 심지어 정부 일각에서는 대만인들을 일제의 중국 침략에 협조한 잠재적 조력자 정도로 간주할 정도였다. 특히 전쟁이 끝나면서 징병 및 징용으로 해외로 떠났다가 다시 대만으로 귀국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본에 협력한 '매국노(漢奸)'로 몰면서 노골적인 탄압을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대만 행정부의 요직뿐만 아니라 교사와 말단 공무원, 경찰, 군인까지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들이 대부분 차지하였고 주민들에 대한 착취도 심했다. 


당시 유행했던 '개가 가고 나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라는 말이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일본인은 개처럼 대만인들을 들볶기는 했지만 국민당은 돼지처럼 대만인들의 재산을 먹어치우고 있다'라는 뜻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2·28사건은 수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채 대만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모든 정치적·경제적 여건이 일본 지배 시절보다 못해지면서 대만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제 시절에 대한 향수가 깊어져 갔다.


그 후 1949년의 국부천대(國府遷臺)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들어서자 이번에는 일본을 중요한 정치적·경제적 파트너로 생각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이어 나갔다. 일본에 대한 대만 국민들의 호의적인 감정과 함께 양국의 공동 적인 대륙의 공산당 정부에 대한 대응 의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반면 한국은 독립 후 20년이 지난 1965년이 되어서야 겨우 국교가 정상화될 정도로 관계 정상화의 속도가 느렸다. 국교가 정상화될 때도 한국은 식민지 배상금을 끈질기게 요구하여 받아냈지만 대만은 구상권 청구를 스스로 포기하면서 아예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타이베이를 수놓은 일제의 건물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를 서쪽에서 종으로 가르는 중화로(中華路)라는 큰 길이 있다. 어느 날 이 길을 따라 관광 명소로도 유명한 시먼딩(西門町) 근처에 다가가고 있는데 한쪽 인도의 큰 벽면에서 의외의 장면을 보게 되었다. '대만 역사 풍모 조회(臺灣 歷史 風貌 雕繪)'라는 제목하에 17세기 네덜란드 지배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만의 역사에서 발전의 계기가 된 중요한 장면들을 작품으로 만들어 상설 전시해 놓은 곳이었다. 그런데 내용의 상당 부분이 일제 식민지 시절의 건축 업적들이었다. 전시를 통해 당시의 상당수 건축물들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대만의 중요 기관 및 관공서 건물 등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대만의 '7대 클래식 기차역 건축(臺灣七大經典車站建築)'이란 소제목으로 일본인들이 지어 놓은 기차역들을 자랑스럽게 나열해 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대만에는 일본 통치 시대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진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래된 일제 시대의 가옥들도 아직까지 시내 중심부에서 만날 수 있을 정도다.


대만지하가(臺灣地下街)는 타이베이 기차역에서 시작되어 무려 5개의 인근 지하철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지하상가로 매일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곳이다. 그런데 이 지하상가의 출입구 중 하나의 벽면에는 일본풍이 완연한 벽화가 여럿 전시되어 있다. 더구나 바로 옆에는 일본식으로 소원을 비는 에마(繪馬)와 단자쿠(短冊)도 함께 놓여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입장에서는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 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편의점의 양대 산맥인 세븐일레븐과 패밀리마트도 일본 기업이고 백화점도 주종이 일본 계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식 가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대만에서는 그 종류와 숫자에서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대만인 60% '가장 좋아하는 나라 일본'


대만에서의 실질적인 대사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일본 대만교류협회에서는 정기적으로 대만인들의 선호국가와 국가 친밀도 등을 알아보는 여론조사를 현지 전문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하여 시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2022년에 20세 이상 성인 1068명을 대상으로 전화나 온라인 조사로 이루어진 통계에 의하면 좋아하는 국가로 무려 60%의 응답자가 일본을 꼽았고 중국, 미국이 각각 5%와 4%로 멀찌감치 2, 3위를 차지하였다. 가까워져야 할 나라로도 일본이 46%로 1위였고 미국, 중국이 각각 24%와 15%였다. 국가 신뢰도 역시 일본이 60%로 압도적 1위였다. 2008년에 시작하여 7번째인 이 조사에서 일본은 국가 선호도 기록을 역대 최고로 경신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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