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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페터 한트케

게오르기오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10.14 20:30:43
조회 186 추천 7 댓글 2

‘순수한 언어/형식’이 정말로 문학의 미래일까? 


요 며칠간 한트케의 책을 세 권 읽었다. 작품으로는 네 편. 

  어쩌다 보니 쓰인 시기와 역순으로 읽게 되었는데, 한트케의 작품들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80년대에서 60년대로 갈수록 재미가 덜했다. 재미와는 다른 종류의 흥미, 그리고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는 오기가 발동하여 끝까지 읽기는 하였으나 만일 분량이 이보다 더 많았더라면 흥미와 오기마저도 진즉에 꺾이고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어쨌든 앞선 네 편에 예전에 보았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빔 벤더스, 1987)를 더하면 다섯 편(한트케는 이 영화에 각본가로 참여했다). 20대 초반부터 정력적으로 활동해 온 작가에 대해 논하기에는 부끄러운 이력이지만, 그럼에도 한트케의 후기작과 초기작을 쭈욱 읽다 보니 보이는 재미있는 흐름이 있어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덤으로 예술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오랜 논쟁에 대하여 덧붙일 말도 있고.



1. 『관객 모독』(1966)


한트케의 첫 희곡. 등단 직후에 쓴 작품이며 이 작품으로 신인 작가 한트케는 스타덤에 올랐다. 제목 그대로 관객을 모독하는 게 전부인 작품이다. 배우들에게는 배역이랄 만한 것이 없으며, 작품 자체에도 내용이랄 것이 없다. 

막이 오르기 전에는 짐짓 소란스럽게 무대를 준비하는 체하며 관객들을 속이다가, 막이 오르고 나면 특색 없는 배우들이 아무런 소품도 없는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욕설을 뇌까리고, 이런저런 헛소리를 끊임없이 지껄이다가 끝내 관객들에게 욕설을 잔뜩 퍼붓고 막이 내린다. 이게 끝이다.

한마디로 전통적인 문학에 익숙한 독자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나마 헛소리에도 나름대로 반복되는 패턴이 있어서 눈을 크게 뜨고 읽다 보면 이 작자가 그래서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대강 느낌은 온다만, 그래도 이 작품만 읽고 나서 한트케가 추구하는 글쓰기를 온전히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독일 문단에 충격을 가한 첫 번째 아방가르드 작가였다. 「아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상술하겠지만 그는 독일적이라기보단 외려 프랑스적인 감수성을 지닌 인간이고, 혁명의 주전자가 막 끓기 시작하던 60년대 프랑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다. 그는 귄터 그라스가 아닌 로브그리예를 따라 글을 쓰기 시작했고, 로브그리예와 마찬가지로 바르트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소쉬르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세례를 받았다. 한트케는 현실의 반영을 모토로 전후 세대에 의하여 발전한 신사실주의 문학을 단호히 거부하며 선배 작가들을 “서술 불능자”라고 폄훼하기까지 한다. 그가 전통적 문학에 반기를 들고 반(反)문학을 표방했던 것은 그의 반(反)독일적인 기질 및 성장 배경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트케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때까지의 문학 이론과 당대 유럽의 정신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초기 한트케는 내용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언어로서의 문학을 추구한다. 문학이 다뤄야 할 것은 현실이 아니라 오직 언어뿐이라는 것이 젊은 한트케의 완고한 입장이었다. 『관객 모독』은 희곡이라는 형식을 빌린 하나의 선언문이다. 20세기 초반 미술계에 등장한 일군의 모더니스트들이 그리하였듯 한트케는 용감하게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관객 모독』에는 의미나 교훈 따위는 없다. 배우들은 자신들이 아무것도 연기하고 있지 않으며, 이것이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운다. 무대의 시간과 공간과 행위는 무대 아래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 사이에는 아무런 벽도 없다. 이 ‘연극 아닌 연극’에는 반복적인 말장난과 마치 주문(呪文) 같은 기이한 선율만이 흐른다. 역자 윤용호는 이를 오로지 강한 박자만 남은 ‘비트 음악’이라고 칭한다. 

이처럼 전위적인 언어 실험을 극단적인 형식으로 밀어붙인 한트케의 『관객 모독』은 문학을 이야기로, 연극을 이야기의 재현으로 여겼던 당시 관객들에게는 잊지 못할 경험이었을 것이며 새로운 문학에 대한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2.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1970)


블로흐는 왕년에 이름깨나 날린 골키퍼지만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일용직 노동자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출근하였을 때 그는 그를 올려다보는 십장의 눈빛을 보자마자 자신이 해고당하였음을 직감한다. 그는 곧바로 일터를 떠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한 여자와 눈이 맞아 밤을 보낸다. 그리고 다음날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인다. 그길로 예전 애인이 자리를 잡았다는 국경 근처로 떠난 그는 발이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당최 맥락에 맞지 않는 헛소리를 주워섬긴다. 소설은 어떻게 끝나는지도 모르게 끝나 버린다.

누가 유럽 사람 아니랄까 봐, 한트케도 축구를 꽤나 좋아하나 보다. 제목부터 눈길을 확 잡아끄는 이 소설은 방금 봤듯 줄거리를 손쉽게 요약할 수 있다! 읽는 사람 속 터지는 말장난으로만 일관하던 전작 『관객 모독』에 비하면 훨씬 전통적인 문학에 가까운 작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소설이 읽기 쉬운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한트케는 전통에 고분고분 고개를 숙일 생각은 없어 보인다. 명료하고 직관적인 제목과는 반대로 이 작품의 서술은 정말이지 난해하다. 100페이지 넘게 읽어 나가는 동안 독자는 간신히 전체적인 줄거리와 블로흐의 상태를 파악하게 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지워져 있고 서술은 여전히 흐릿하다 못해 흐리멍덩하기까지 하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으로 비유된 블로흐의 불안과 조응하는 소설의 기묘한 서술 방식은, 매번의 상황과 장면을 모호하게 제시할 따름이다. 문장과 문장들은 그럴듯한 인과관계가 없이 그저 연결되는 듯하며 블로흐와 다른 인물들 간의 상호작용 역시 독자들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다.



3. 「소망 없는 불행」(1972)


  「소망 없는 불행」은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다룬 소설이다. 

한트케의 어머니는 이 작품이 나오기 바로 전해에 사망했다. 사인은 자살. 그녀는 유부남의 애를 뱄고 사랑하지 않는 한트케와 결혼했다. 그리고 한트케가 아닌 한트케를 낳았다. 혼란스러운 시대는 명랑한 한 여성의 생애 또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트케의 어머니는 고개를 드는 자의식과 삶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며 고유성을 잃고 어떠한 유형(type] 안에 유배당한다. 그녀는 전형적인 전후의 어머니-아내가 되어 “소망 없는 불행” 속에서 조용히 죽어가다가 마침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 무언가 써야만 했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화자의 진술은 사실상 한트케 본인의 심경 고백으로 읽힌다. 더욱이 한트케는 글을 쓰는 데 있어 “자기 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더구나 이 소설의 여러 정황들은 작품이 부정할 수 없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임을 확증한다. 사실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에 가까워 보이지만, 이 작품은 그럼에도 소설로 분류된다. 어째서일까? 우리는 이 작품의 서술 방식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화자(한트케)는 감정을 억누른 담담한 필치로 어머니의 죽음을 서술한다. 정말이지 너무도 담담해서 듣는 사람이 괜히 숙연해질 정도다. 물론 어머니를 잃은 한트케의 담담함은 어머니를 잃은 뫼르소의 시니컬함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소망 없는 불행」에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삶을 반추하는 아들의 절절한 마음이 하염없이 묻어 나온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시종 “그녀”라고 부른다. 그 어느 수필보다도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한트케는 섣불리 개인적 감상을 덧붙이지 않는다. 극도로 절제된 서술 방식은 이 글을 그저 한 개인의 경험이 담긴 수필이 아닌, 보편적인 내용을 담은 이야기로 승화시킨다.

한트케는 “일어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위험과 한 인물이 시적 문장들 속으로 고통 없이 용해되어버리는 위험” 사이에서 줄을 타며, 그의 어머니를 ‘문학적으로 기록’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서술은 한트케가 어머니의 일대기를 써 내려가며 얼마나 진지하게 문학과 허구에 대해 숙고하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재구성하여 표현한다는 것은 결국 허구적인 것이 아닐까? 사건의 단순한 보고에 만족한다면 덜 허구적이겠지만, 자세히 표현하고자 하면 할수록 허구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야기 속에 허구를 많이 집어넣으면 넣을수록 다른 사람에게는 그 이야기가 더 흥미로워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게 아닐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문학의 가상성을 부정하고 내용을 깨끗이 비우는 대신 순수한 언어라는 형식을 통해 진실에 이르고자 했던 젊은 한트케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일종의 문학적 전환을 겪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된다. 내용을 없애고자 했던 젊은 작가는 결국 내용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현대에 등을 돌리고 전통으로 회귀하려 한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한창때의 치기가 자연스레 수그러든 것뿐일까? 그게 아니라면 새로운 글/길을 개척하겠다는 창조적 열망이 사그라든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현대에 대한 배반인가?


4. 「아이 이야기」(1981)


내용으로의 귀환은 9년의 텀을 두고 발표된 「아이 이야기」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이 이야기」는 한트케가 자신의 딸을 기르며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서술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도 한트케는 자기 자신을 “그”라는 대명사로, 자식을 “아이”라는 대명사로 지칭하며 객관적인 시점을 유지하려 한다. 문체 역시 전과 다름없이 담담하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감상을 최대한 억누르며, 또 바로 그렇기에 더욱 구슬펐던 「소망 없는 불행」에서와 달리 「아이 이야기」에서 한트케는 본인의 세계관을 훨씬 또렷하게 제시한다. 한트케는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독일에 대한 혐오, 아내와의 사이에서 느꼈던 복잡 미묘한 감정, 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생활의 감동과 지리멸렬함, 그리고 작가로서의 꿈과 아버지로서의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솟아오르는 단상을 가리지 않고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내용 없는 형식’을 부르짖었던 젊은 작가의 초점은 이제 자기 삶의 내용으로 옮겨온 듯하다. 

  작품의 마지막 단락인 8장에 이르러서, 한트케는 아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길러내는 동안 자신의 세계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솔직하게 고백한다. 오늘날 아이를 낳는 것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이다. 이것이야말로 한트케와 작금의 젊은 세대가 공유하는 ‘현대’적인 마인드일 테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아이를 싫어하거나, 싫어하진 않더라도 귀찮은 존재로 여기거나, 설령 아이를 귀여워하더라도 자기가 낳아 기르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로 생각한다. 한트케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트케는 이제 아이를 절대적인 존재로 숭배하는 전통적인 가치를 복권시킨다. 여기엔 별다른 근거는 없다. 당위만 있을 뿐이다. 겪은 자가 아니고서는 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아이들은 모든 인간에게 영혼이다. 이것을 체험하지 못한 자가 누리는 편안함은 온당치 못한 행복이다”라는, 다소 진부하기까지 한 고대 극작가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사로잡았던 “현대”라는 것이 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의문을 품으며, 아이의 두 눈에서 “영원한 정신”을 읽어내려 한다.

  그리고 아버지-한트케와 작가-한트케는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경험은 불가피하게 한트케의 문학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현대라 함은 아무것도 영원할 수 없는 시대이고,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갈등하는 시대이며, ’현대의 문학’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내용 없는 형식’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반문학의 문학’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아이의 존재는 영원을 보증한다. 모호함을 즐기던 전위적인 작가 한트케는, 플라타너스의 열매와 거리의 풍경, 발코니와 번쩍거리는 창문,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등에 멘 책가방의 금속 자물쇠와 이름표”를 기껍게 묘사한다. 그는 “칸틸레네—사랑과 모든 열정적인 행복이 충만하길”이라는 어느 시인의 문장으로 「아이 이야기」를 끝맺는다.

  즉, 80년대에 접어들며 한트케의 문학에서 형식과 내용은 더 이상 불화하지 않는다. 한트케는 더 이상 전통적인 디제시스와 미메시스를 꺼리지 않는다. 「아이 이야기」를 한트케가 주선한 문학적 화해의 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문학에 있어 이제 적대적인 불화는 멎은 듯하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간접적 계기, 그리고 아이라는 직접적 매개를 통하여 한트케는 내용과 형식의 균형을 찾는다. 이것을 문학적 퇴행이라고 봐야 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퇴행이라고 할지라도 필자는 그 퇴행은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예술가들을 괴롭혀온 하나의 문제가 있다. 


“내용인가 형식인가?” 


현대라는 판정관은 형식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관객 모독』의 경우에서 보듯 내용을 살해한 형식은 (조금 심하게 말해서) 조현병 환자의 넋두리로만 나타난다. 거기엔 어떠한 소통의 가능성도 없다. 더욱이 그러한 넋두리가 놓치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넋두리조차 실은 시대, 역사, 작가, 주체라는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한트케가 이 희곡의 배우들에게 비틀즈와 롤링스톤즈의 음악을 듣고, 게리 쿠퍼의 서부극을 보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의 희곡 또한 철저히 동시대의 산물인 까닭이다. ‘순수한 언어극’이라는 것은 결국 꿈속에서만 가능하다. (그가 이 희곡의 헌사에서 존 레넌을 언급하는 것은 아마도 존 레넌 또한 그와 같은 몽상가이기 때문은 아닐까.)

  요컨대 내가 보기에 『관객 모독』 같은 작품은 『관객 모독』 하나로 족하다. 적어도 한 시대에 이러한 작품이 여러 개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실험으로서의 의의를 지니며 기존의 문학에 파장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그다음 단계에 무엇이 있을지, 진보된 문학이라는 것이 과연 정말로 존재하기는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용을 살해한 형식’이라는 표현이 너무 거창하게 들린다면 다르게 말해도 좋다. 서사 없는 문학. 이미지만 남은 영화. 서사도 서정도 없이 말맛만 남은 시. 조화로운 선율을 포기한 음악. 구상도 추상도 포기한 미술.

  이것은 동시대 예술에 대한 진단이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형식미를 추구하지만, 그 끝에는 기괴한 몰골의 형상만 남을 뿐이다. 아니 그것은 남지도 않는다. 다만 휘발될 뿐이다.

  전위적인 실험을 일삼던 한트케는 끝에 가서 ‘아이’라는 조화에 안착했고,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아이 이야기」는 곧 ‘한트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시대의 질곡과 문학의 변천사를 담고 있는 한트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현대 예술의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그가 각본가로 참여한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인간이 되기로 결단한 천사에 관한 영화이다. 흑백의 프레임 안에서 살던 불멸의 존재는, 영화 말미에 이르러 생과 색의 세계로 추락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에 의하여 내쫓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을 내던진 기쁨의 추락이자 삶으로의 약동이었다. 그러니 순수한 언어라는 형식을 추구하다 삶이란 내용으로 복귀한 한 작가에게서 날개가 떨어진 천사를 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테다.


결국 이야기에는 보편성이 있다. 예술이 무언가 지속적인 가치를 남기기를 염원한다면, 설령 극단적으로 쪼그라든 형태일지언정, 섣불리 내용을 살해하고 예술의 바깥으로 몰아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오늘날 예술가들은 더 이상 내용에 몰두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리는 예술의 가치가 그것이 무얼 다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현대가 예술에 선사한 중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지막 내용’을 보존해야 한다. 그 마지막 내용은 아직까지는 공석이다. 비어 있는 내용의 공간에 과연 무엇을 채워야 할까? 무엇을 채울 수 있을까?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당면한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아마 골드바흐의 추측과 같은 수학계의 난제들이 모두 풀릴 때까지도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예술가가 할 일은 다만 예술과 삶에 관한 치열한 고민 속에서, 영영 찾아지지 않을 조화로운 오아시스를 찾아 열심히 헤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기루와 신기루들 속에서. 한트케가 그리하였듯이. 그리고 베를린 땅으로 내려온 천사가 그리하였듯이.


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273660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273675


저자 분의 허락을 받았어!

이제 편집 좀 하고,

앞에다가 페터 한트케 소개하는 글 써서 덧붙이면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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